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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잭슨, 조너선 스탬프의 피라미드, 상상 그 너머의 세계를 읽고(2011.11.9)
피라미드, 상상 그 너머의 세계라는 책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기대를 갖고 읽는다면 다소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과학적 시각과 신비적 시각으로 나눠질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적 시각에 의해 그동안 피라미드를 연구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영의 세계 등 신비로움을 찾으려는 다른 책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피라미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지침서로 마땅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일독을 권한다.
서론 경이로운 것들
기나긴 이집트 역사에서 피라미드 건축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덧없이 사라졌다. 신비에 휩싸인 거대한 피라미드는 스네프루, 쿠푸, 카프레로 이어지는 오직 세 왕의 통치기에 건설되었을 분이다. 나머지 85개의 피라미드를 모아 봤자 이 시기에 지어진 피라미드 부피의 41퍼센트밖에 안 된다.
1. 최후의 불가사의
-바빌론의 공중 정원
-에페수스에 있는 아르테미스 사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영국인에게 엘긴마블이라고 알려진 아테네 조각가 피디아스의 작품)
-알렉산드리아 등대(기원전 279년 그리스인 소트트라투스가 만든 122미터 높이)
-태양신 헬리오스의 거상(로도스 섬 입구에 만들어진 30미터짜리)
-마우솔로스 영묘(카리아의 통치자의 흰 무덤)
-케옵스의 대피라미드(기자에 있는 일명 쿠푸 왕의 피라미드)
기원전 130년 그리스의 시인 안티파토르는 위의 일곱 가지를 문명의 7대 불가사의로 정의
기원전 224년 로도스의 거상이 지진으로 쓰러졌다.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여섯은 사라졌다. 기자의 피라미드, 쿠푸의 피라미드라고도 불리며 일반적으로 대피라미드라고 일컬어지는 일곱 번째 불가사의만 남았다. 지은지 4천50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이를 본 여행자들에게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피라미드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엄청난 인력과 기술, 창의력과 재화를 쏟아 부어야 했던 동기는 무엇인가? 또, 이런 불가사의를 지은 자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만들었단 말인가?
12세기에서 19세기 말까지 신비주의자, 접신가, 심령술사, 사기꾼, 장사꾼 들이 피라미드의 비밀을 캐서 글을 남겼다.
피라미드에 대한 유명한 주장으로 피라미드가 이집트 제의에서 시작해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거친 밀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복잡한 체계가 나치의 준동이나 프랑스 혁명, 창세에서 아마겟돈까지의 가정을 암호화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 달러화가 피라미드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는 음모설도 있다.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일군의 사람들은, 피라미드는 인간이 독자적으로 건설할 만한 규모가 아니므로 특히 시리우스성처럼 쿠푸의 피라미드와 관련된 성운에서 온 외계인들이 도와준 것이라고 믿었다.
이 책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엄격한 사실의 영역과 잘 정리된 논리만을 기술할 것이다. 결국 진실이 선정적인 외전들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다. 과학적 진실의 첫 단계로 쿠푸가 창조한 피라미드의 거대한 크기를 알아보자.
불멸의 기록
피라미드는 높이 146.6미터이며 지금은 사라진 관석은 9.45미터이다. 초기의 조사에 따르면, 피라미드 토대의 길이는 230.42미터였다. 피라미드는 평균 2.5톤 무게의 돌 230만개로 구성되어 있다.
나폴레옹은 1789년 이집트를 쳐들어가면서 과학자와 학자들을 데리고 감으로써 현대 이집트학을 탄생시켰다. 나폴레옹은 종이와 펜을 사용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흘렀다.
쿠푸
쿠푸는 기원전 2551년 거의 반세기나 이집트를 통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아버지 스네프루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정확한 시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고대 이집트에는 30~31개의 왕조가 있었으며 기원전 3100년에서 기원전 332년까지 이어졌다. 스네프루는 기원전 2575년에서 2465년까지 존속한 고대 이집트 제4왕조의 첫 번째 왕이었고, 쿠푸는 두 번째였다.
피라미드의 황금기였던 이집트 고왕조는 피라미드기라 불리기도 한다. 제3왕조 조세르 왕(기원전 2630~2611)때 계단식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초기 형태의 피라미드가 지어졌다. 스네프루 이전에는 진정한 의미의 피라미드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말은 쿠푸 왕 때의 건축가들이 아주 새로운 형식의 건축물을 창조했다는 뜻과 같다. 조세르 피라미드의 완공과 쿠푸의 피라미드 착공은 60년 정도 차이가 나므로, 조세르의 통치기에 태어나 운 좋게 오래 산 사람은 쿠푸의 피라미드가 첫 삽 뜨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1 피라미드와 그 위치
정치적, 사회적 이유에서 피라미드는 수도 멤피스와 가까울 필요가 있었다. 지질학, 건축학적 관점에서 피라미드는 균열이 없고 기초 공사를 하기에 알맞은 단단한 암반에 터를 잡아야 했다.
1) 공사 이전
조세르, 임포테프, 계단식 피라미드
임포테프의 초기 다자인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쿠푸를 포함한 모든 피라미드 양식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스네프루와 진정한 피라미드의 탄생
스네프루 피라미드의 가장 중요한 혁명은 내부 설계에 있다. 인부들은 바닥에서 16.5미터 높이 지점에서 아래로 내려와 역시 바닥에서 내려가는 짧은 수평 통로와 수직 통로를 만나는, 거의 사막 표면 높이에 있는 길이 5.8미터에 폭 2.7미터의 내실로 통하는 하향식 통로를 만들었다. 이러한 실내 구조는 여러차례 변경되면서 피라미드 내부의 표준적인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굽은 피라미드가 원래 60도 각도로 훨씬 좁게 설계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상단부에서 각도가 더 완만해진 것은 돌을 쌓는 공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피라미드를 쌓는 데 사용된 공법은 벽돌을 안으로 경사지게 쌓는 방법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 공법은 건물의 부담을 가중시켜 안정성을 해쳤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제일 고층부는 수평으로 되어 있다.
일생을 바쳐 피라미드를 건설한 스네프루는 죽은 다음 거대한 묘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했을 뿐이다. 스네프루의 세 번째 아들인 쿠푸 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피라미드를 만든 선왕의 업적을 물려받은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더 뛰어난 피라미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쿠푸의 조사: 위치, 위치, 또 위치
피라미드의 위치를 낙점받기 위해 적어도 다섯 가지 필수 사항이 충족되어야 했다.
가장 먼저 종교적 원인으로, 피라미드는 일몰지역인 나일 강 서쪽에 위치를 잡아야 했다.
다음으로 건축물의 안전을 위해 나일 강의 범람원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하고,
건축자재를 강으로 운반해서 실어 나르기 편리하도록 나일 강과 가까워야 했다.
정치적,사회적 이유로에서 피라미드는 수도 멤피스와 가까울 필요가 있었다.
지질학,건축학적 관점에서 피라미드는 균열이 없고 기초공사를 하기에 알맞은 단단한 암반에 터를 잡아야 했다.
2)수평과 정렬의 문제
기공식
이집트인의 비범한 수학적 재능이 즉흥적으로 발휘된 의식이라기 보다 이미 과학적인 계산이 끝난 내용을 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하려는 시간이었다. 쿠푸는 직접 천문학적 재능를 발휘하지 않고 흡족하게 고른 땅 위의 왕조의 권능을 부여했다. 미리 결정한 별을 힐끗 보고 결정하지 않고 수많은 석학의 신중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설계도가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설계에 사용된 주요한 도구 중에 메르케트가 있다. 메르케트는 글자 그대로는 지식의 도구란 뜻으로서, 보다 넓은 의미로 지침이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바닥의 수평 작업
피라미드 바닥이 거의 완벽한 수평을 이루는 데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도구는 물이다. 물 이론에 따르면, 피라미드를 건축할 전체 지면에 나일 강에서 채취한 진흙으로 벽을 쌓고 물을 부어 얕은 저수지를 만든 다음 수평을 맞추었다. 그리고 얕은 저수지 아래에 일련의 도랑을 만들었는데 각 도랑의 바닥과 수면의 거리는 정확하게 같았다. 그 후 물을 빼고 도랑 사이의 공간에 돌을 골라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론적으로 지극히 단순하며 고고학적 사료에 의해 부분적으로 증명되기도 했다.
물 이론의 다소 변형된 가설이 있는데, 수로를 판 다음 물을 수평으로 맞추고 그 지점에 표시한 뒤 물을 버리고 표시한 부분에 맞춰 작업한다는 가정도 있다.
진북의 확인
이집트 천문학자들은 밤하늘에서 특정한 별을 정한 다음, 벽 꼭대기에 뜨는 지점과 지는 지점을 표시하고, 수직선을 이용해 그 표시를 벽의 바닥으로 내린 후 두 선을 원의 중심으로 모았다. 교차점의 두 각을 양분하면, 바로 진북이다!
2 건설 일꾼들의 생활
피라미드 건설은 파라오의 영원불멸을 도울 뿐만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자신의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개척하는 계기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체로 부역자들이 공사장에서 일한 시간은 길지 않아 우기 한 절기에만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사 인력의 생활 모습
일반적으로 피라미드는 노예 노동력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사가이며 역사의 아버지 헤로토토스가 진술했으나 틀렸다.
피라미드 건설 노동력은 도시와 농촌지역에서 징집되어 온 젊고 튼튼한 일시적인 노동자들로서 그들이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 온 것은 군역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징집은 전례 없는 악습이 아니라 보편적인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ꡒ폐하께서는 어떤 사람도 강제가 아닌 자기만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라고 계신다.ꡓ
피라미드의 건설은 파라오의 영원불멸을 도울 뿐만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자신의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개척하는 계기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농촌 지역의 생활
이집트인은 계절을 셋으로 나누었다.
페레트는 출현기를 뜻하며 이 시기는 오늘날 겨울에 해당하는데 11월에서 이듬해 3월 중순까지였다. 이 시기에는 비가 많이 내리므로 강물이 범람해 농부들이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
셰무는 건기를 뜻하며 3월 중순에서 7월 중순까지였다. 이때는 나일강이 바닥을 드러내고 땅은 말라붙어 먼지가 날렸으므로 농부들은 그전까지 추수를 끝내야했다.
아크헤트는 범람기를 의미하는데 7월중순에서 11월중순까지였다. 이 시기는 1년중 가장 더운 시기로 나일 강 상류 고지대에 비가 쏟아져 나일강이 범람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므로 농부들은 집에서 괭이나 쟁기, 낫 등의 농기구를 손질했다.
이집트인의 근무일은 9일이었고 10일재는 쉬었는데 이를 데칸이라 한다. 그리고 1년은 36데칸, 즉 360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5일은 이시스, 오시리스, 호루스, 네프티스, 세트라는 신들에게 각각 헌정되었다. 2월29일처럼 윤일이 없었으므로 이집트력은 1세기가 지나면 한 달가량 뒤쳐졌다. 계절에 따라 가변적이긴 했지만 하루는 24시간으로 나뉘었으며 10진법을 사용했다.
기원전 500년경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자들은 서서 오줌을 누고 남자들은 앉아서 눈다. 이집트인들은 실내에서 배변을 하는 반면 실외에서 음식을 먹는다. 경건한 행동은 밖에서, 불결한 행동은 집 안에서 한다.
프라호테프는 경건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쾌락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필요한 일을 할 때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운명이 정해지면 욕구를 좇으라
비관하면 운명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
징집에서 기자까지
남쪽지방에서 차출된 젊은이들에게 기자까지의 여행은 또 다른 차원의 행사였다. 8백킬로미터라는 거리 탓에 나일 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순탄하게 흘러 배의 속도가 빨라진 여름에도 일주일은 족히 걸렸다. 까마귀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고향에서 살던 시골 부락민이 아니었다. 신 호루스의 살아 있는 화신인 쿠푸를 위해 헌신하는 자랑스러운 이집트인이 된 것이다.
3 대피라미드 건축
피라미드 공사가 시작되면 생선뿐 아니라 곡물, 빵, 소, 돼지, 거위, 벌, 술 등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들어왔다. 온 나라를 통해 공사 인력이 들어왔듯이 물자도 쏟아져 들어왔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결국 이집트에 대한 신의 위대한 은총인 나일 강 때문이다.
쿠푸의 채석장
역사상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질의 석재가 풍부한 지역과 가까워야 했다. 확실히 이 점에서 기자는 이상적인 지역이었다.
노동인력
과연 피라미드 축조에 동원된 인력은 몇 명이나 되었나?
대피라미드는 230만 개의 벽돌로 구성되어 있다. 각 벽돌은 평균적으로 10제곱미터의 크기에 무게는 2.5톤이다. 작업은 낮 10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피라미드의 축조는 석재의 절단, 건축 지역으로의 이동, 적확한 자리에 석재를 설치하는 등의 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석재의 절단
인부들은 매일 3백세제곱미터가 조금 넘는 돌을 잘랐을 것이다. 필요한 인력은 1212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석재의 이동
이집트인들이 돌을 끌때 철로 방식을 썼음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340킬로그램을 옮긴다고 가정하면 8명이면 2.5톤의 돌을 옮길 수 있다.
1360명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석재를 앉히다
1360명의 절단 인력에 1212명의 이동 인력, 680명의 돌 앉히는 인력을 더해보면 20여년간 피라미드 건축을 완료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은 3252명이다.
제국의 경제
공사현장에 4천명, 지원 인력 2만명이라는 사실에 어느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건축술
미적으로 완벽한 설계를 위해 필요한 지질학적, 천문학적, 건축학적 기술들을 검토했다. 그러나 작업 인부들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고, 최고 146미터에 이르는 고도에 작용하는 중력을 어떻게 뿌리쳤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도구
이집트의 기본적인 측량도구는 추와 바늘, 삼각자 등이었다. 돌은 줄과 나무 레버로 운반되었다는 점도 확인한 바이다. 여기에 해머와 정, 칼, 톱과 같은 기술 장비까지 건축을 위한 각종 편의 시설은 완벽했다.
경사로
대다수 전문가들은 벽돌을 쌓아 올리기 위해 경사로를 사용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직선형 경사로
나선형 경사로
지그재그형 경사로
봉투형 경사로
복합형 경사로
내부 경사로
피라미드를 올리다
4 피라미드의 내부와 외부
외부의 마지막 화강암 블록은, 지금은 막혀 있지만 예전에 서 있던 입구에 놓였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흰 돌을 피라미드의 어느 부분과도 구별할 수 없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비밀은 영원히 잊혔다. 아니,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피라미드의 내부: 세 개의 방
위대한 근대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집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정의한 것은 유명하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대피라미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계, 더 정확히 말하면, 부활을 위한 기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외부: 쿠푸의 피라미드 복합체
5 죽음, 사후 세계, 왕의 장례식
왕이 죽으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위험에 빠지는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신과 인간이 함께 있도록 유지하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만약 마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왕이 편안하게 천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며 그의 아들이 땅에서 호루스로 육화되지 못하면, 혼란이 일어나 어둠이 세상을 덮고 만다.
기원전 2528년 쿠푸는 죽는다.
피라미드란 무엇인가?-왕과 왕비를 위한 무덤이다.
쿠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누린 영광과 권능을 보여 줄 거대한 기념물을 갈망했다. 결국 그는 파라오였다. 당연히 그는 죽음을 기다리며 삶을 소진해야 했다. 결국 왕은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이었던 것이다.
이집트인의 내세관
부활과 희망의 신인 오시리스에 대한 제사를 예로 들어보자.
중왕조기에는 오시리스에 대한 제의가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 수많은 순례자들이 아비도스로 향했다. 그러나 고왕조에서 오시리스는 보잘것없는 신에 불과했다.
이집트 신앙의 형이상학적인 면모는 삶과 죽음, 영혼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도록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이승의 삶을 심판하다
다음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현세의 행동에 좌우되었다. 특히 개인적인 도덕, 사회적 법률, 세계의 물적 성질과 논리적 체계의 하모니라 불리는 마트라는 개념이 여기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시신의 보존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지키는 거대한 보호소를 둠으로써 다른 지역의 문화보다 사자의 육신 자체를 존중했다.
사체를 보존하려는 미라화는 단단하게 만든 대형 무덤이 있어야만 가능했기에 초기에는 극소수의 계층만 이용할 수 있었으나, 점차 일반화되기 시작해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르면 흔한 매장법이 되었다. 미라는 시체를 모래에 묻으면 건조가 빨라져 부패 과정을 겪지 않고 인체의 장기가 오그라들면서 원형을 보존한다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쿠푸가 죽은지 족히 1천년은 지난 신왕조기 비씨 1550~1070년에 이르러서야 이집트인들은 현재 주목받는 미라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사후 세계를 향한 필수적인 절차들
이집트 장례 관습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매장 이후에 나타난다. 망자를 기리는 관습은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 남아 있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의 의식은 주기를 두고 간헐적으로 행하는 장례 의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쿠푸의 장례식
피라미드 텍스트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 교리집에서 인용된 것으로, 주제는 왕의 영원불멸이다. 성서에 같은 구절이 많듯 각 무덤에는 교리나 기도문을 비슷하게 반복한 내용이 적혀 있다. 7백 권이 넘는 기본적인 피라미드 텍스트가 발견되어 번역되었으며, 여기에는 장례용 도구부터 자세히 소개된 제례의식이나 왕의 무덤에 관련된 기록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이집트의 장례의식은 죽은 자를 위한 애도뿐 아니라 사회 통합의 기능도 수행했다. 또한 죽은 자가 내세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물질적인 요건을 갖추어 주었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한 자연의 이치를 반영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장례절차는 적게는 4단계에서 많게는 16단계로 나뉘었다. 왕이었던 쿠푸의 장례식은 분명 더할 나위 없이 복잡했겠지만, 귀족의 무덤에서 나온 장례식에 대한 절차를 통해 쿠푸의 장례식이 가진 복잡한 면모를 모두 알 수는 없다.
시신의 보존
후대 왕조에 이르면 죽음에서 장례까지 70일이 걸렸으나 고왕조 시기에는 이보다 더 오래 걸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4왕조의 메레산크 3세의 경우 총 272일이 걸렸다.
집에서 강으로
관은 시신을 운반하는 관대를 통해 운반되었다. 희고 긴 상복을 입은 전문적인 여자 대곡꾼들이 울부짖었고, 그 주변으로 남자와 여자들이 옷을 발기발기 찢으며 통곡을 했다. 고왕조시기에는 이 과정을 상류층의 미망인이나 직업적인 대곡꾼 출신인 키테가 주도했다.
또 다른 중요 인물은 미라 집행자인 웨트로, 시체를 미라로 염하는 과정을 맡았다. 웨트는 물건을 싸는 사람이라는 사전적인 뜻을 갖고 있으며 신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도강(渡江)
길고 좁은 두 척의 배가 관을 운반했으며, 기자에 도착하면 조심스럽게 이를 해체했던 것 같다. 첫 번째 배에는 관이, 다른 한 척에는 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일 강을 건너는 동안 제사장은 두루마리를 꺼내 피라미드 텍스트에 쓰인 것과 같은 글을 읽었을 것이다.
강에서 무덤으로
이부와 와베트를 거치며 시신은 장기 적출과 건조라는 두 과정을 거쳤다. 이부에서 뇌를 비롯한 인체의 장기를 들어내고, 와베트에서 남은 시신을 건조하는 데 대략 70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꺼낸 내장들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씻은 뒤 각각 보호하는 신이 존재하는 케노푸스의 단지에 포장했다. 심장은 지성과 감성의 상징으로 여겨 인체 내부에 남았다. 쿠푸의 뇌는 사골을 부순 다음 콧구멍을 통해 빼냈다. 이 역시 깨끗하게 건조되어 화려한 용기에 보관되었다.
내장기관이 빠지고 건조를 마친 시신은 소가 끄는 썰매를 타고 서쪽으로 길을 재촉해 묘지로 갔다. 키테와 사제가 시신 곁을 따르며 사제로서의 의무를 다했고, 일꾼들은 사후 세계에 긴히 쓰일 엄청난 양의 식량과 기름, 옷과 무기, 도구 등을 날랐다. 시신을 운반한 소는 마지막에 제물이 되어 영원의 식량 창고에 엄청난 양의 단백질을 제공했다.
이 과정이 끝난 시신은 장례식이 열리는 사원을 거쳐 마지막으로 피라미드로 들어갔다.
매장
왕의 시신은 붉은 화강암 안에 천천히 안치되었다. 이때 적어도 두 종류의 의식이 치러졌다.
첫 번째는 혼령을 부르는 주문, 혹은 소리에 강림하는 것으로 왕의 영혼이 초청되어 무덤에 이미 들어온 부장품과 들어올 모든 제물을 감상하는 의식이었다.
두 번째 의식은 사자의 입을 여는 과정으로, 시신의 입을 열어 저승에서 숨쉬고, 먹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가져오는 과정으로 내실을 청결하게 한 다음 술을 뿌렸다.
이집트의 삼위일체
피라미드 내부에서 카와 바가 공식적으로 결합해야만 이런 우주 여행이 가능했다. 아크는 속세를 바라보며 인간사에 끼어들 수도 있는 실체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왕은 카, 바, 아크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존재했다. 이는 흥미롭게도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비슷한 개념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대피라미드는 추푸의 아크헤트(지평선)였다. 아크와 아크헤트의 발음이 비슷한 것처럼, 현재까지 내려오는 피라미드 명칭의 대부분은 그곳이 유해가 영원불멸의 존재로 변화하는 곳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피라미드는 유해를 안장하는 곳 외에 더 큰 무언가가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즉, 피라미드는 별이 되기 위한 출발지였던 것이다.
피라미드가 태양을 상징한다는 다른 이론도 논란이 많은데, 여기서는 피라미드가 창세의 과정을 모방하고 있다고 본다. 태양은 세 가지 신의 얼굴을 지녔다. 아침에는 케프리, 오후에는 레, 저녁은 아툼이었다. 아툼은 가장 오래된 신이었다. 아툼이 자위 행위로 대기의 신인 슈와 물의 신인 테프누트를 만들었다. 이로써 자연의 기본질서가 탄생한 것이다. 태초의 순간, 하늘에서 일어나는 우주적 변화가 대지에서는 형상이 없는 물에서 일어났다. 피라미드는 혼돈에서 탄생한 창세기 시대의 대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정확한 진실이 무엇이든 피라미드 텍스트를 분석한 결과로 미루어 피라미드가 하늘로 올라가는 왕의 승천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무덤의 내실에서 나온 좁은 길이 한편으로는 오리온자리로, 다른 한편으로는 북극성을 향해 나간다. 이 두 별이 별 가운데에서 쿠푸가 영원불멸의 길에 이르도록 길을 여는 것이다.
혼란을 궁지로 몰다
피라미드는 무엇인가? 피라미드는 왕을 신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이집트인들이 대피라미드를 짓느라 그렇게 고생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인류의 종말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6 여행자의 이야기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대피라미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초보적이긴 하지만 과학으로서의 이집트학은 점차 발전했다. 1740년, 한 파리 사람은 이렇게 썼다. 테베와 멤피스, 리비아 사막과 테바이드의 동굴은 고대의 도시 문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입에 오르내린다. 나일 강은 센 강만큼이나 친숙하다. 아이들조차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 속에 빠져 든다.
고전시대
초기 이집트 순례자들
비록 당시 사람들은 쿠푸와 카프레의 업적에 대해 몰랐지만, 기원전 664년에서 525년에 이르는 제26왕조기에는 피라미드가 최고의 성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스인의 방문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해 제사장으로 임명된 마네토가 기원전 250년경 완성했다고 전해지는 30권 분량의 이집트사야말로 사라진 것 가운데 가장 아쉬운 자료이다. 다행히 1세기 말의 요세푸스와 3세기 아프리카누스, 4세기 에우세비우스 등에 의해 잿더미가 된 책의 부분이나마 전해 내려오고 있다.
헤로도토스
케옵스의 희망대로 나일 강에서 운하를 파 물을 끌어들인 다음 수로 복판에 섬처럼 지하실을 만들었다.
스트라보
기원전 24년경 나일 강을 여행했다. 이때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어 있었다. 그의 저서는 명료하고 과학적으로 쓰여 있다. 특히 《지리》라는 책은 아주 정확해, 19세기에 프랑스인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사라카 지방을 탐사할 때 유용한 안내서 역할을 했다.
플루타르코스와 플리니우스
피라미드 이야기에 변화를 이끈 역사가로 세익스피어의 로마극에 영향을 준《영웅전》의 작가인 1세기 플루타르코스를 꼽을 수 있다.
기독교 문화 혁명
서기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하고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를 택하면서 이집트는 대략 3세기가량 기독교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수많은 문명의 신비를 간직한 고대 이집트 문명은 거대한 비밀의 미로 속으로 빠져 들어 버렸다. 단적으로 당시까지 이집트의 지식인들은 고대 상형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중세의 어둠에서 계몽의 빛으로
알마문의 발굴
서기642년, 아랍에서 온 또 다른 침입자들이 이집트를 정복하고는 자신들만의 연구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첫 번째 문예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군대를 지휘하고 항해할 목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 때문에 그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갈레노스의 저서를 번역하며 천문과 지리, 수학을 공부해 나갔다.
칼리프 알마문은 문예 부흥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는 《아라비안나이트》로 잘 알려진 하룬 알라시드의 아들로, 《로마 제국의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그를 가리켜 학술 회의와 토론을 기꺼이 지원해 준, 보기 드문 지성파 왕자로 묘사하고 있다. 813년 왕위에 오른 그는 대학을 설립하고 학자와 번역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했으며, 지도와 천체도를 작성하도록 명했다.
알마문의 발굴은 심오한 역사적 가치보다는 흥미진진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 이런 유의 전설 중에 아부 아브드 알라 모하메드 벤 아부라킨 알카이시라는 역사학자의 이름에서 따온 더 심하게 윤색된 이야기도 있다.
전설과 약탈자들
아라비아 신화 속에서 피라미드는 어둡고 불길한 무언가로 묘사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오나 해 질 무렵이면 독사 입을 한 벌거벗은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고는 미쳐 버리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숨은 진주와 값비싼 신비에 대한 책: 보물이 숨은 곳을 확인하고 안내함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랍어 책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피라미드에 들어서면 양옆으로 방들이 줄 서 있고, 이집트 초기 왕의 시신을 보관한 큰 내실이 당신의 눈앞에 펼쳐진다. 왕은 다른 왕과 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은 황금 실과 다른 보석으로 장식한 가운을 입고 있다. 그 곁에 은과 루비, 진주, 금 그리고 은으로 된 성상과 조상이 쌓여 있다. 많은 것이 쌓인 이곳에서 당신은 나무로 새긴 벽감과 그 뒤로 난 작은 동굴을 보게 될 것이다. 동굴에는 거대한 표식이 있어 당신이 한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속에는 이교도들이 모은 엄청난 양의 은이 있다. 갖고 싶은 만큼 가지라. 신은 가장 지혜로우시다.
유럽인의 귀환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치르며 유럽인의 대피라미드에 대한 관심은 크게 고조되었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지구의 형태를 상징화했다든가 도량형의 표준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카르다노는 당시 이집트에 관해 알려진 신비주의적 지식이 아닌 수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피라미드를 분석했다.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첫 번째 이집트학 학자
예수회 대수사인 아타나시우스 키르허(1601~1680), 독일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이며 예수교수도승)
키르허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1666), 《신비의 스핑크스》라는 두 종류의 책을 더 펴냈는데 후자의 경우 당시 유럽으로 운반되어 온 대피라미드의 외벽을 보고 영감을 얻은 저서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마지막 저서 《투리스 베벨》(1679)에는 피라미드 자체를 황당하게 그려 놓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존 그리브스
1638년 영국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존 그리브스(1602~1652)는 이집트에 대해 중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피라미드 연구사에서 그리브스의 가장 탁월한 업적은 전례 없이 정확한 측량이다. 그 외에도 그리브스는 피라미드 동편의 현무암 통로를 근거로 피라미드가 사자를 위한 사원과 같은 역할을 했음을 간파할 만큼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18세기 다른 이집트 학자들
프리메이슨과 피라미드
7 현대 이집트학의 기원
19세기 전까지 7백여 년간 기자의 피라미드로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게 늘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도굴꾼, 학자, 군인 혹은 예언자들로 휴양지에서 빈둥거리며 편히 쉬려고 오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후세인들에게 다행스럽게도 헤로도토스 이후 이집트로 온 백수 여행자는 위대한 작가 귀tm타브 플로베르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1798년5월19일 피라미드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로, 이날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부의 항구 툴롱에서 이집트로 출발했다. 나이 29세에 불과한 젊은 장군은 328척의 배와 3만5천여명에 이르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카이로는 별다른 저항 없이 투항했으며, 나폴레옹은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자 영국이 곧바로 반격할 준비를 시작했다. 8월에 넬슨이 이끄는 왕립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퇴해 프랑스 군을 고립시켰다. 1801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할 대까지 3년 동안 프랑스 군은 자신의 정복지에서 갇힌 죄수 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3년동안 이집트학에서는 혁명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나폴레옹 학자들의 연구 업적
나폴레옹은 군인 외에 학문적으로 뛰어난 175명의 학자들을 데리고 갔다.
하워즈 바이즈 대령
바이즈는 기자의 상징인 쿠푸의 피라미드를 건드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피라미드 남에서 북가지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가며 북쪽 출입구와 같은 선상의 문을 찾았다. 바이즈의 만행에 가까운 발굴이 가져온 성과는 피라미드 내부에서 일어났다.
8 피라미드의 시대가 온다
피트리가 연구를 시작했을 때, 이집트의 과거로 안내해 줄 사람은 헤로도토스밖에 없었다. 피트리가 연구를 끝내자 모든 이집트의 선사와 역사는 정리되고 제자리를 찾았다. 과장일지 모르지만 상당히 근거 있는 과장이다.
피트리는 1백권이 넘는 저서와 1천권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이집트와 시나이,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영국 국내까지 50개 이상의 지역을 탐사했다.
피트리는 이집트 보물 속에서 고고학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과학으로 만들었다.
스코틀랜드의 천문학자 피아지 스미스의 《대피라미드에 있는 우리의 유산》
피트리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독학했으며, 스피네토의 《상형문자 강론》이란 책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베끼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였다.
피트리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라미드의 각은 대체로 6밀리를 넘지 않았고, 어떤 경우엔 2.5밀리를 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피라미드의 정교함에 탄복한 나머지 기술의 승리다. 길이와 각도에서 오차는 엄지손가락 사이즈를 넘지 않는다 라고 소리쳤다.
그는 왕의 안치실이 기하학의 승리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돌을 놓는 것만으로로 매우 정밀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다 정확하게 회반죽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가장 정확한 측량사가 토지를 측량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겠다라고 피트리는 적고 있다.
피트리의 작업을 끝으로 피라미드로 향했던 순수한 의미의 순례자들의 이야기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략 끝이 난다.
1963년부터 1975년까지 두 명의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은 고왕조와 중왕조 시대 모든 피라미드를 탐사해 여덟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1992년 루돌프 간텐브링크라는 독일 로봇 과학자는 왕과 왕비의 내실에 있는 기둥으로 원격으로 제어하는 작은 로봇 카메라를 보냈다. 이때 발견된 석회암 마개는 비주류파들이 쓴 문헌에 자주 언급되는 구리 핀으로 된 문으로, 피라미드 추종자들에겐 뜻밖의 행운이었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일군의 역사가들은 이집트 문명이 유럽과 미국의 시각에서 벗어나 이집트가 속한 아프리카 대륙의 후손이 가진 정통적 시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흑인이 많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나온 주장이다.
마틴 버낼 1987년 《블랙 아테나》
9 유사 피라미드학 - 유사 이론, 이교도, 신비주의자, 괴짜 이론가들
피라미드의 진실에 대해 말하려 해봤자 부질없다. 왜냐하면 진실을 발견한들 피라미드라는 환영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거나, 이론이 사실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피라미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한국인에게 피라미드는 아직 과학이나 역사학의 영역이 아닌 신비와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양이 오리엔트 문명의 신비주의를 조장함으로써 오히려 그 지역이 가진 역사 발전의 다양성이나 과학적인 사회 환경 시스템을 무시했다고 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장처럼 한국에서도 신비와 환상은 그다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와 같은 찬사 이면에는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 지역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어둡게 도사리고 있으며 이로 인해 피라미드식 판매 방법, 터키탕 등의 속된 표현에서처럼 피라미드와 오리엔트 지역에 대한 부정적인 냉소 또한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랍 문명은 놀라운 기적을 만들었고 서구 문화와 세계 문명에 큰 기여를 했지만 이는 과거의 이야기일뿐 아직도 중동 지역, 특히 석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국가들에 대한 인식은 열려라 참깨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봐도 과언은 아닌 듯합니다.
이집트 나일강 주변 기자 지역에 산재한 피라미드는 장대한 크기와 치밀하고 과학적인 건축법으로 후세의 역사가들과 정치가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이 책은 피라미드가 가진 과학 기술적인 치밀함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울러 건축과정에 동원되었을 인력의 연인원까지 정확하게 산출해냅니다. 그 과정에서 피라미드가 덧씌워진 비과학적인 억측들은 자연스럽게 극복되고 피라미드가 당시 세계 최초로 중앙 집권 1인 독재 국가를 만든 이집트라는 국가 공동체의 사회적, 경제적 생산성의 결과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게 됩니다. 쿠푸 왕의 장례식을 정밀하게 언급하며 피라미드가 지닌 본원적인 기능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며 이집트인의 세계관과 사회 구성원의 생활상을 통해 고대 이집트는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물론 컴퓨터 그래픽과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다양한 형태의 시각 자료들이 문자가 재구성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한눈에 보여줍니다.
피라미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도 이 책이 지닌 이채로운 점입니다. 서양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가 쿠푸를 악랄한 독재자로 묘사하면서 시작된 피라미드에 대한 왜곡의 악습과 그 속에서 피라미드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학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시대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이집트학의 신기원을 이룬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플린더스 피트리의 과학적인 탐사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면을 할애해 자세히 서술함으로써 피라미드가 과학의 세계로 다가서는 모습을 차분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유사 피라미드학이라고 불리는 피라미드에 대한 재미있는 괴짜 이론가들의 주장을 통해 피라미드가 가진 정신세계적 관점에서의 특성을 살펴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이 지닌 매력입니다.
아직 피라미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출간된 서적 또한 고고학적 성과나 신화에 관계된 특정 부분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인 현실에서 피라미드에 대한 엄격한 수학적 인식에서 발칙하고 재미있는 상상의 영역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을 통해 피라미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고증과 계산을 통해 다시 태어난 피라미드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역자만의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2006년2월 정주현
지은이
케빈 잭슨(Kevin Jackson)은 프리랜서 저술가이자 방송 필름 제작자로 《보이지 않는 형태들》(2000),《영화의 언어》(1998), 《옥스퍼드 북-돈》(1995) 등의 책을 발간했다. 그는 앤서니 버지스, 조지 엘리엇, 윌리엄 모리스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라디오 방송국에서 제작한 윌리엄 블레이크와 존 러스킨의 다큐멘터리에도 참여했다. 인티펜던트지의 삽화 편집자를 역임하며 《선데이타임스》,《빛과 소리》,《뉴요커》 등의 잡지에도 관여했다.
조너선 스탬프 Jonathan Stamp는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피라미드의제작과 연출을 담당했다. 에미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의 삶에서 프랑스 디자이너 샤넬 코코의 일대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최근 영국과 미국의 감옥을 파헤친 창살 뒤편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비평가들에게 격찬을 받았으며, 하워드 리그에서 주는 특별상을 수상했다. 현재 BBC 역사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옮긴이
정주현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역서로는 정보의 숭배(공역)가 있으며 논문 번역으로 비평가로서의 예술가-스탁 영 론 외 다수가 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피라미드 , 상상 그 너의 세계
2006년3월20일 초판 1쇄 인쇄
2006년4월10일 초판 1쇄 발행
지은이 케빈 잭슨, 조너선 스탬프
옮긴이 정주현
펴낸이 김성구
출판사업부장 권향미
책임편집 고영완
북디자인 윤선호
제작 신태섭
마케팅 이택수
관리 노신영
펴낸곳 (주)샘터사
등록 2001년10월15일 제1-2923호
주소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15(110-809)
전화 763-8961~5(출판사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