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신 보 성
세례요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그의 머리는
포악한 독재자의 은쟁반 위에서
슬픈 피리소리가 되고 말았다
진리의 소리는 언제나 모욕의 대상이 되고
권력의 파수꾼들이 불어대는 듣기 좋은
나팔 소리 요란하다
날이 갈수록 아내들의 잔소리 늘어나고
소통의 기능을 상실한 소리들이 소음이 되어
우리들이 귀를 막고 살아야 하는
이 세상 한켠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
새파란 봄의 새순들
대지의 지각 뚫고 올라오는 소리
지구를 들어올리며
태양을 춤추게 하는 소리
다시 돌아온 세례요한이 바람 타고 내려와
광야에서 외친다
소리! 소리! 진리의 소리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숯불갈비집
신 보 성
그 숯불갈비집은 언제나 만원이다
인간은 원래 육식동물이었을까
고기 먹는 표정들
점잖고 진지하며 흐뭇하고 밝고 명랑하다
석쇠 올라앉은 고기들
몸 뒤틀어 타들어가며 올리는 소신공양은
거룩한 다비의 의식
내뿜는 냄새는 인간신의 코를 즐겁게 하기 위한
축제의 향불
아내의 토라진 마음 풀어야할 일 생길 때
여기 와서 숯불에 손 쬐이다 맥주잔 부딪치며
한 점 두 점 고기와 친해지다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식당 집 나올 땐 다 풀어지더라
그 집에서 고기 먹으면
목사님은 먹사가 되고
스님은 파계를 궁리하며
신부님은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고 선전하면
갈비집 주인님
돼지갈비 몇 대는
서비스로 줄만도 하지 않습니까
중간 문 하나쯤 보여 주소서
신 보 성
남 따라 살지 않고 내 나름의 인생
독특하게 大義 좇아 살고 싶었는데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편한 길 걷다보니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大勢 따라 살아오지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언제나 따돌림 당하는 의인의 길을
비겁한 자들은 따를 수 없다
봄이면 씨 뿌려 가을에 거두는 농부들처럼
개나리 진달래 피니 목련이 덩달아 피듯
남들 하는 대로
태어나서 돌잔치 생일잔치 회갑 칠순 잔치하고
학교 졸업 취직하고 돈 벌어 장가들고
아들 딸 낳아 기르다가
시집장가 보낸 후 늙어버렸다
가진 자의 떡시루 만지작거리며
떨어지는 떡고물에 비굴한 아첨으로
양심을 팔지 않았는지
약자 앞에 군림하여 교활한 혓바닥으로
의인을 핍박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오늘도
대세와 대의의 갈림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는 약한 갈대들에게
주여!
좁은 문도 넓은 문도 아닌
어중간한 자들이 걸어갈 만한
중간 문 하나쯤 열어보여 주옵소서
봄의 전시장
신 보 성
봄에 홀린 땅속이 주체하기 어려운 열기를 모아
아궁이 열어 군불 지피니
영아의 손톱 같은 하얀 새 쑥들
거북의 등짝 같은 지각을 뚫고
비상의 나래를 펼치는도다
나무 속 화공들 일손 바쁘다
새봄의 전시회가 멀지 않았다
개나리 그림은
노란 물감 칠하여 담장 위에 걸어놓고
진달래 화폭은
자주색 칠하여 산비탈에 전시하고
목련꽃 그림은 하얀 색 칠하여
화단 위에 놓으리라
봄에 홀린 내가 쑥국 몇 그릇으로 보양을 하고
꽃 피고 새 우는 봄의 전시장에서
늙은이 목청으로 한 가락 뽑으면
귀에 익은 내 목소리 알아듣고
정든 님 날 찾아 머나먼 길 떠나서
오실 수 있으려나
이제는 국민이 신이다
신 보 성
주민자치센터에서 인감증명 한 통 발급받았다
30초도 안 걸려서
신기하다
호적등본 한 통 떼는데 3일을 기다려야 했던
시절이 있었지
급행료 기름 치면 급행으로 나오고
그래서 면서기 부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지
면서기 집 잔칫날에는 기름진 음식이 많았으니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이제는 국민이 신이다
그런즉
이 나라의 공직자들이여
신이 그들에게 통치권의 일부를 위임하였으니
그대들은 국민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 지어다
국민의 공복이 국민 앞에 군림하려하면
주권자인 국민이 그대들을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특히 입법 사법 행정의
높은 자리를 점하고 있는 자들이여
그대들도 인감증명 한 통을 30초 안에 발급해주는
주민자치센터의 여직원처럼 일 하시라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국민들의 진노함으로 그대들이 길에서
망하리로다
이 세상 소풍 길에
신 보 성
봄이 온다고 꽃이 핀다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지
봄이 왔다가 그냥 간다더냐
꽃이 그냥 피었다 지기만 한다더냐
우리들 몸에 금줄 몇 개 그어놓고
마음 밭에 지워지기 어려운 생채기 몇 개
남기고야 떠나지 않더냐
세월의 수레바퀴가 그냥 돌기만 한다더냐
우리를 늙음의 뒤안길로
한 발 두 발 밀어넣고 돌아가지 않더냐
우리는 노상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이야기 하면서도
흥진비래(興盡悲來)를 알지 못한다
이 세상 소풍 길에 봄이 오고 꽃이 피어도
뻐꾸기는 서러워 산에서 울고
님 그리운 잡풀은 들에서 운다
강남이여 안녕
신 보 성
네온이 번뜩이는 빌딩의 숲
강남역 거리에서 길을 잃었다
버스 기사에게 물었다
오산 가는 5300번을 어디서 타지요
중앙통으로 가세요
중앙통이 어디지요
…………
신사에게 물었다
몰라요
잉어빵 구워 파는 아줌마에게 물었다
7번 출구로 나가세요
찾았다 반갑다 보답을 해야지
되돌아가 잉어빵 만원어치 사들고
버스에 올라 씹었다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씨가 뱃속을 거쳐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서울에 한 뼘의 땅 한 칸의 방도 없어서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
그 무소유가 이토록 자유로울 줄이야
잉어빵 아줌마의 마음이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
고층빌딩이 토해내는 메스꺼운 자본의 찌꺼기
따위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서울의 강남이여, 안녕!
네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너를 버린다
누가 주인인가
신 보 성
신이 된 국민이 공직자들에게 통치권을 위임한 것은
신이 된 백성들을 잘 섬기고 잘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다
다스린다함은 군림하여 복종케 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고 살게 하라는 것
서울 중심가 고층빌딩 앞 도로상의 떡볶이 집을 보았는가
늘어나는 자살자들
저하되는 출산율
퐁요 속 빈곤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
거리를 방황하는 청년실업자들
노숙인들
예수 팔고 부처 팔아 장사하여 치부하는 사이비 성직자들
왜 나의 눈에는 이토록 부정적인 것들만 보이는가
내 마음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일까
국민소득 2만 불 시대 조국의 자화상에
가슴이 찢어진다
누구를 위한 조국이며 누구를 위한 통치인가
헌법은 국민을 모든 권력의 원천인 신으로 격상시켰지만
마침내 국민은 노예로 전락되어
다스리는 자들이 신이 되어가고 있다
가난한 자살자들의 시체를 밟고 일어서는
신의 직장이 늘어나고 있다
입학식장에서
신 보 성
손자의 대학입학식
학부모 석 앉아 박수만 쳤다
손자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살았으니 많이 살았다
박사 가운 입은 단상의 교수님들
내가 저런 자리 앉을 땐 감흥도 없었는데
참 좋아보이네
학생이나 학부모들 표정 별로 밝지 않음은
벌써부터 취직 걱정 결혼 걱정 때문일까
고시반 토익시험반 각종 자격증반
현수막으로 배수의 진을 친 전쟁터
옆자리의 학우도
살아남기 전투의 적으로 보이기 때문일까
손자여,
두려워마라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신이 너에게 준
너의 재능을 찾아라
신은 누구에게나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재능 한 가지는 주었느니라
그 재능 찾아내어 부지런히 갈고 닦아
너도 잘 살고 남도 잘 살도록 도와 주어라
이를 위해 경쟁하는 법이 아니라
협력하는 법부터 배우고
너의 마음밭을 공생의 옥토로 가꾸어라
너의 대학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고양이
신 보 성
아침 산책길
검은 고양이 한 마리 안녕! 인사를 한다
그래 너도 늙어가니 새벽잠이 오지 않았나보다
형형한 눈빛 호랑이를 닮았지만
네가 호랑이 못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네가 산중제왕인 호랑이였다면
누가 밥 먹여주고 잠 재워주며
귀여워 해 주겠느냐
그리고 너의 아침 인사를 겁 없이 반가워하겠느냐
맞아 맞아
그러고 보니 나도 한 마리 고양이
인간 호랑이 못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