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리는 명동, 신동, 사구, 여그(기) 본 마을 합해서 명주리라 그라제. 여그가 명주리, 명주란 것은 옛날 귀신을 말하는 것인디, 명주각시라고 안 그라드라고, 요 앞을 명주봉이라고도 그랬제.” 명주리 김00(69세) 씨의 이야기이다.
“골투재는 저기 관산 넘어가는 재인디, 한자로 골짜기곡 던질투(谷投)라고 과거 이 골짜기에서 지나가던 행인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아그배’ 나무에 돌을 던졌다고 해서 부른 지명이다. 그라고 ‘명금바우’라고 저수지가 들어서기 전 옛날에는 명금바우 위로 다녔는데, 지금은 요리 다 뚫어 버렸어(길을 내느라고). 거가 금이 나왔다던가...바위가 역까지(여기까지, 명주리 위 민가까지) 쭉 뻗었는지, 길을 뚜러 부러서...” 명주저수지 아래에서 소 먹이를 주시면서 하는 이야기이다. 명금바위는 과거 마을 동쪽 저수지 바로 옆에 있는 바위산으로 이 곳 바위를 돈을 주고 많이 채석해 갔다고 하여 부른 지명이다. 일설에는 이 바위에 금이 많이 들어 있어 부른 지명이라고도 한다. 또 망건처럼 생겼다 하여 망건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또 매새기 골이라고 말하자면, 옛날에는 미세기골이라 했는디, 장흥 관산하고 한계 길인디, 예전에는 거그를 서로 느그 관할이니, 내 관할이니, 세금 매길 때 서로 니땅 내땅 했다고 해서, 미뤘다 해서 미세기(세금을 물리지 않은)골이라 하제. ‘초분 골’이라고는 마을 바로 앞에 있었는데, 사람 죽으면 일차로 초분 해갔고 나가고 했다고 해. 그 전에는 한 삼년이면 해물(해골)이 되어서, 땅속에 묻었제. 좀 있는 사람들이 많이 했제.” 초분이란 시체를 땅에 묻기 전 야지에 시체를 놓고서 (짚)마람 등을 덮어 자연스럽게 화장이 되도록 한 장례를 말하며, 어촌이나 산간에서 적당한 묘지가 부족하거나 없을 때 행한 상당히 깨끗한 장례절차이다.
명주저수지 뒤에 위치한 사구(沙邱) 마을은 토양이 모래가 많아 외지에서 보면 언덕을 이루고 있어 사구라 하였고, 또 뱀의 형국이어서 사구(巳邱, 口)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우리 사구마을은 한 이십호(가구) 사는데 ‘사구시’라고 숯을 많이 구웠다고 해. 해방 후 6.25 때, 그러니까 한 30여년 전까지도 숯을 구워 산(지낸) 동네여. 참나무, 밤나무, 숯의 원료가 된 나무가 인근 산에 많이 있었제.” 사구마을 김00(56세) 씨의 이야기이다.
나. 양갓봉과 기우제
마을 남쪽으로 하천 건너 산봉우리의 모양이 미국 사람의 모자를 닮았다고 하여 양갓봉이라 한다. 이 양갓봉 또는 ‘깃대봉’은 “지금은 헬기장도 있고 그런디, 옛날에 일본 놈들이 명산이라고 쇠말을 박았다고 해. 우리가 보기엔 명산도 아닌디, 그 쇠말을 뺏는지는 모르겠어.”
이 양갓봉은 칠량면의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들면 이 곳에 칠량면장을 비롯한 면민 1천여명 이상이 참여해, 기우제를 지내는데 그 행렬이 어찌나 긴지 끝이 보이지 않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가지도 지낸 이 기우제의 절차로는 돼지 닭 등 산짐승을 잡아 생피를 바위에 뿌리고 생 억새풀과 나무를 주위에서 베어 불을 피우면서 비가 오기를 기원했다.
다. 아그배나무와 팽나무 점치기
“아그배나무는 그전, 지금 도로나기 전에, 관산가는 길에 골창으로 인도가 있었는디, 그란디 배나무라고, 아그배나무가 있었는디, 돌 하나씩 던지며 소원을 빌곤 했제. 넘어가면서 (돌을) 땡기고(던지고), 넘어오면서 땡기고, 돌을 땡겨서 많이 던졌다고 해. 돌을 한번 땡기며 소원을 빌었던가 봐. ‘아그(아기) 배’라고, 배가 작아서 아주 손톱만큼 해서 아그배라고, 작은 배나무가 있던 자리여.” 그 아그배나무는 언제부터인지 없어졌다고 한다.
“또 팽나무 점치기란 무슨 뜻인가요?”
“인자 팽나무 점치기는 삼, 사백 년 된 팽나무가 전에 태풍 때, 바람에 넘어져 부렀는디, 팽나무 잎이 앗싸리(전부) 피면 풍년이 들고, 한쪽만 부분적으로 피면 시절이 안 좋고 했다고 해.”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2개의 팽나무가 있었다. 저수지 바로 밑에 있던 팽나무는 사장나무라고 수령이 한 5백년 되었다고 하는데, 1996년 저수지 준설공사로 없어져 버렸다. 또 신동 앞에 수령이 3백년 이상된 팽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 역시 1980년 애그니스 태풍 때 심하게 훼손되어 고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두 팽나무의 잎이 피는 것을 보아 그 해의 풍년과 훙년을 점치게 되었는데 거의 정확했다는 것이다.
잎이 일제히 피면 전국적으로 풍년이 들고, 동쪽나무의 잎이 먼저 피면 남부 지방에 풍년이 들고, 서쪽나무의 잎이 먼저 피면 북부지방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이 부근 농민들은 신고 다니던 짚신이 낡아 떨어지면 짚신에 오줌을 누어 나무 밑에 묻었는데, 그 이유는 짚신이 썩어 거름이 됨으로써 나무의 잎이 고르게 피어 전국에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라. 초군놀이
“이 지방은 초군놀이가 유명했다고 하던데요?”
“초군놀이는 거시기, 인자 품앗이라고, ‘몰이풀’이라고도 한디, 풀을 비다가(베다가) 작도(두)로 썰어, 거름(비료)을 맨(만)들어갔고 그란디, 보리 갈고, 농사짓는데 써... 초군놀이로 말하면, 좀 복잡한디, 북새가 있고, 영(令)이라고 (군사들이 쓰는 깃발을) 깃대로 만들어 (풀짐에) 꽂아 나오제. (일정한 시간 안에) 반짐하면 반짐북을 치고 나오고, 온짐하면 온짐북을 치고 나오고,..” 예전에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땅의 지력을 높이기 위해 퇴비를 많이 생산하던 때의 건전한 민속놀이의 일종이다.
1970년대까지 이어져왔던 초군놀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군놀이(두레)>
옛날 논밭의 거름(비료)는 퇴비 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름 농한기가 되면 여럿이(10~15명) ‘풀 두레’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풀베기를 했다. 풀을 베러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람들을 가르켜 ‘초군’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로는 좌상(座上, 상쇠) 또는 수(首 ) 머슴이 있어 모든 일을 처리했는데 보통 최연장자가 맡았고, 최연하자가 맡는 진쇠(2~3명)는 자신에게 부여된 풀을 베는 일뿐만 아니라 물심부름과 술심부름 등 잔일을 하였다. 명주리 초군들이 주로 가는 곳은 큰 골, 골투 등이었다.
초군이 떼를 지어 다닌 것은 좋은 풀터를 찾아 능률적으로 일을 하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풀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미도 있으며 사나운 짐승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군들은 정해진 시간에 마을 앞에서 울리는 징소리에 따라 지정된 장소에 모여 인원파악과 불참사유를 확인 후에 초군들은 영(令) 기를 앞세우고 3~4명이 소고와 지게목발을 치며 행진한다. 소고장단에 맞춰 걷다보면 피로도 잊고 지정된 장소에 이르러 작업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풍악을 울린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면 집합하여 좌상의 점검을 받는데, 이 때 게을러서 풀의 양이 지나치게 적을 때에는 좌상이 그에게 태장형(笞杖刑, 매)을 가하거나, 경우에 따라 하산시에 각 초군들의 풀을 조금씩 거두어 무거운 지게를 지도록 하기도 하고, 풀베기 공동작업이 완료되면 작업 성적에 따라 약간의 시상을 하였다.
<초군 노래>
풀타령 첫소린 영을 텃네
부삿골로 모두 올라가세
망옷 망옷 우는 소리 진과부 쌍(상)판보소
죽어서 썩을 삭신 심(힘)날 때 부려 먹소
머슴살이 왠말인가 상놈인께 그러제
동짓날 세경 받아 내 갈 곳은 어딘가
목 갈갈하다 보리쌀 뜬물 생각난다
장개(가) 못가 타는 가심(슴) 어느 놈이 알아줄껴(까)
(후렴) 아~아~하 뒤어~어 뒤어~어
마.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
명주리 신기 마을은 한말의 대학자요 시인인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 1865∼1934)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금릉 8경’이라는 시로 유명한 경회는 강진에서 태어났으나 그 정확한 출생 처는 알 수 없다. 오남 김한섭과 중암 김평묵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일찍이 과거시험의 폐단을 알아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유학에만 전념했던 처사(處士)의 전형이었다.
그는 ‘경회집’ 등 수많은 저서와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성격이 다분한 시 500여 편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명분과 의리와 지조를 끝까지 지켰으되 의병으로 투신하지는 못한 소극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시는 독한 저항성이 있지만 울분과 비탄의 경계를 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여러 산천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엔 완도 백운산에서 지내다가 다시 대구면 천태산으로 옮겼으며, 1898년에는 학산으로 이주했다. 한일합방 이후인 1915년에는 잠시 북간도로 망명을 떠났다가 돌아와 칠량면 신흥리(현 삼흥리)에 학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인생 말년에는 명주리 신기마을에 오래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온다. 그러나 현재 이 마을에는 그가 머물렀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