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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날 성지순례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체와 성혈의 기적이 일어났던 란치아노 성당과 빠드레 비오 성인의 삶의 자취가 온전히 남아있는 산 조반니 로톤도를 순례하게 된다. 오전 8시 30분에 란치아노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미사가 예약되어 있어 다른 날보다 아침 일찍 서둘러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갔다. 미사성제 때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예수님이 현존하심을 믿어왔지만, 눈으로 직접 변화된 실체를 확인한다고 하니 가슴이 조금은 두근거렸다.
성체의 기적이 일어난 란치아노 성당은 동방교회에 소속된 성 바실리오 수도회 수사들이 1176년까지 봉사했고, 그 후에는 베네딕토회 소속의 수사들이 봉사했으며, 현재는 1252년부터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가 그 책임을 맡고 있다. 1258년 란치아노 성당은 고딕양식으로 증축 재건되어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란치아노 성당
란치아노 성당에서의 ‘성체의 기적’은 8세기경 ‘성 바실리오회’ 소속의 수사 신부가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성체성사를 하던 중 성체가 실제로 예수님의 몸으로 현존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가 빵과 포도주의 성변화를 위한 축성을 끝낸 바로 그 순간에 빵이 갑자기 살아있는 살로 변하고, 포도주가 살아있는 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너무 놀라운 변화에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었던 수사는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이를 보여주게 되었다. 신자들은 곧 뛰쳐나가서 이 소식을 란치아노 시민들과 인근 지방의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 놀라운 성체의 기적은 성체성사 중에 실제로 예수님이 현존할 수 있는지를 의심했던 수사 신부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며, 성체가 실제로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확증을 하느님이 란치아노에서 우리 인류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1200여 년이 지난 현재 살 모양으로 변한 성체는 불그스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대제병과 같은 크기이다. 오래된 수정 성작 안에 담겨있는 성혈은 5개의 불규칙한 형태의 핏덩어리로 응고되어 있다. 기적의 성체와 성혈은 프란치스코 성당 기념제대 위에 보존하고 있다.
란치아노의 기적의 성체
란치아노의 기적의 성혈
기념 제대 위에 모셔진 기적의 성체와 성혈
성체성혈의 기적은 1574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서 조사를 받아 관할 주교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가장 최근에는 1970년에 해부학, 병리 조직학, 화학 및 임상 현미경학 교수이며 아레쪼(Arezzo) 병원의 수석 의사였던 오도아르도 리놀리(Odoardo Linoli) 박사가 성프란치스코 성당의 책임을 맡고 있던 수사 신부들의 요청으로 1970년부터 1971년까지 2년 동안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해서 세계 최초로 과학적인 조사를 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에나 대학교 인체해부학의 저명한 교수였던 로저 베르텔리 교수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71년 3월 4일 성체의 기적이 일어났던 란치아노 성당에 모여든 수많은 학자들 앞에서 리놀리 교수는 다양한 사진과 문서를 제시하면서 분석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성체 기적의 성혈은 참으로 피이며, 성체는 참된 살이다. 그 살은 심장의 근육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살과 피는 인간의 살과 피이며, 피와 살의 혈액형은 AB형으로 동일하다. 이 안에는 정상적인 혈액과 같은 정상적인 비율의 단백질들이 발견되었다.”
리놀리 교수는 이어서 “이 살이 인간의 심장으로부터 해부적으로 잘라 온 것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 살과 피를 보존하기 위하여 화학적인 방부 조처를 취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그 살과 피 안의 단백질과 무기물들이 대기와 미생물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절대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다.”라고 발표했다.
리놀리 교수
리놀리 교수가 조사한 사진과 문서들
우리는 기적의 성체와 성혈이 모셔진 성당과 붙어있는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김승호 신부님 강론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빵과 포도주를 보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약속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나로 인해서 힘을 얻으라는 의미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모였을 때 그 의식을 하셨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빼어버리면 되는데 예수님은 유다까지도 포함된 그 방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상의 사건 안에서 당신을 기억할 수 있도록 내어 주는 성사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서 늘 예수님을 만났고 늘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계명대로 사랑하지 못한 모습을 지닐 때가 더 많았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예수님께 용서를 청한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혈의 기적이라는 곳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다. 내가 만나는 마음의 상태, 그 마음이 우리 안의 성체가 되고 성혈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더 무한한 사랑과 감사는 오늘 복음에서 말했듯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내 안의 예수님을 모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 아닌 다른 이웃 안에서 만나는 것이 더 큰 축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기쁨의 삶은 이웃에게 다가가는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이웃이 없다면 성체성사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성체성사에 초대받은 우리는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겠다. 성체성사를 통해 나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 나를 이 세상의 친구로 불러주시어 이 세상에서 이웃이 되게 해주시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자.
미사 후 성체와 성혈의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인 성 레곤지아 경당으로 갔다. 기적이 일어난 당시 이 경당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로마군단의 백인대장 성 론지노에게 봉헌된 초라한 작은 시골 성당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정말 초라한 돌 제단에 20~30여 명 정도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성당이었다.
레곤지아 경당
미사성제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성체의 모습으로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기적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일상적이다 보니 놀라움이 무뎌져 있는 우리를 이곳으로 초대하신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매일매일 성체를 모시는 감실이 되고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는 성전이 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곳 란치아노를 통해서 사무치게 느끼고 가게 되는 것 같다.
란치아노 순례에 이어서 미사성제와 성체성사에 의탁해서 온전히 살아가셨던 위대한 성인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서 산 조반니 로톤도로 향했다.
성 비오 신부님은 1887년에 이탈리아 삐에뜨렐치나에서 태어나,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한 뒤 191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비오 신부님은 1968년 9월 23일 81세로, 이탈리아 남부지역 동부에 위치한 산조반니 로톤도(S.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에서 돌아가셨다. 비오 신부님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간직하며 사셨다. 손바닥에 난 작은 동전 크기의 구멍에서 그리고 발과 가슴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6월 16일에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비오 신부님은 오상 때문이 아니라 가장 모범적인 그리스도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에 성인이 되신 것이다. 50년 동안 오상을 몸에 지니고 계셨는데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그 성흔이 없어졌다. 성흔을 가지고 계신다고 사람들이 따랐는데, 돌아가신 시신에 오상이 없어 희대의 사기극이 될 뻔했던 수많은 오해가 있었다. 우리는 성인의 삶을 보고 그분을 닮기 위해서 순례를 가는 것이다.
성 비오 신부님이 50년 동안 사셨던 카푸친 수도회가 있는 산 조반니 로톤도는 해발 600m의 산간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비오 성인이 수도원에 들어가셨을 때만 하더라도 정말 가난한 산골이었다. 지금은 비오 성인 덕택에 폴리아주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규모가 큰 도시로 급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카푸친 수도회 바로 아래 경사가 만만치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방은 소박하지만 굉장히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순례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비오 신부님이 선종하시고 난 이후에 비오 성인을 모토로 만들어진 새로운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숙소로 로비에 사복을 입은 수도자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고 숙소 이름이 ‘빠드레 비오 영성센터’이다.
숙소인 ‘빠드레 비오 영성센터’
비오 성인에 의해 수도원 오른편에 만들어진 병원에 오는 환자 가족들이나 관계자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호텔이다. 식당도 영성센터에서 운영하지 않고 외주를 주어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 호텔 안에 기도할 수 있는 부활성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당이 있다. 우리는 숙소에서 점심을 먹고 비오 신부님이 계셨던 카푸친 수도원으로 올라갔다.
숙소 ‘빠드레 비오 영성센터’ 안의 부활성당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생전에 미사를 봉헌하고 고해성사를 집행했던 수도원에 있는 작은 성당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입구에는 "하느님의 이 집은 은총의 마리아님께 봉헌되고 1629년에 개수되었음"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오래된 작은 성당 바로 옆에 붙여서 대리석으로 빛나는 성모 마리아 성당이 새로 지어졌다.
수도원의 작은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좌), 새로 지은 성모 마리아 성당(우)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 내부
성 비오 신부님은 1918년 9월 20일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 2층 성가대석 가대에 앉아서 기도 중에 오상을 받으셨다. 그 후 성가대석에 세워놓은 십자고상의 예수님 얼굴은 고통과 슬픔에 가득차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우리 인간이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방황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울컥했다.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 2층 성가대(오상 받으신 곳)
2층 성가대석 십자고상
성당 지하에는 비오 신부님의 유해를 처음 모셨던 장소를 볼 수 있었고, 성당 2층에는 신부님이 생전에 사용하시던 제의 등 유품들과 신부님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성 비오 신부님의 유해를 처음 모셨던 자리
신부님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 박물관
비오 신부님 마지막 미사 모습
성 비오 신부님이 생전에 입었던 제의와 미사 도구들
비오 신부님이 전 세계 수많은 신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 모두 답장을 주셨다고 한다.
비오 신부님의 침실
응접실
비오 신부님이 사용하던 시계. 시계가 신부님 돌아가신 시간에 멈춰있다.
비오 신부님이 사용하던 붕대, 약병, 수건, 샌달 등
성인이 남기신 커다란 업적이 하나 있다. 이곳 이탈리아 남부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역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거나 상처로 많은 환자들이 발생을 했다. 가장 시급했던 것이 병원 시설이었다. 비오 성인은 성금을 모아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병원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해서 1956년도에 완공이 되었다. 그 병원이 카푸친 수도원 오른편에 지어져 있다. 병원 규모가 그 당시로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의료 시스템이 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선진 의료 시스템을 구성해서 만든 병원이다.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라는 ‘고통을 더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병원을 개장했는데, 지금도 새로 확장되고 있어 병원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그 병원이 생기면서 산 조반니 로톤도가 계속해서 커지고 발전되고 있다고 한다.
고통을 더는 집(병원)
수도원의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나와 성 비오 신부님을 기념하여 새로 지은 ‘성 빠드레 비오 대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현대적인 디자인과 전통적인 요소를 조화롭게 표현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했으며 규모도 상당했다.
성 빠드레 비오 대성당
이 성당 지하에 비오 신부님의 유해가 유리관 안에 모셔져 있다. 선종하신지 56년이 지났는데도 신부님은 살아생전의 모습으로 주무시고 계시듯 눈을 감고 계셨다. 존경하고 보고 싶었던 신부님을 코 앞에서 직접 만나 뵈니 감개무량했다. 신부님을 흔들어 깨우면 곧 눈을 뜨고 바라보실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순례하면서 관을 보고 만지며 기도할 수 있게 배려된 곳이라 나는 신부님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유리관을 더듬으며 이런저런 마음속의 기도를 드렸다.
비오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진 성 빠드레 비오 대성당 지하 성당을 향하여
1층으로 올라가 대성당을 한참 동안 둘러본 후 떠나기 전에 비오 신부님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다시 지하 성당으로 내려갔다. 마침 신부님 앞에 아무도 없었다. 주님께서는 50년 동안 비오 신부님 인격 안에서 함께하시고 고난받으시며 당신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비오 신부님을 통해 많은 영혼들을 당신께로 인도하셨다. 비오 신부님이 사랑하고 증거하고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려고 했던 그 주님께서 성체 안에 계시고 모든 성당 안에 계신다. 나 또한 늘 주님을 흠모하며 잘 살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내 주시며 내가 사는 영통이 또 하나의 작은 로톤도가 될 수 있음을 생각했다. 깨달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신부님 앞에 한참을 머물다 작별 인사를 하고 성 비오 광장으로 나왔다.
성 빠드레 비오 대성당 1층 내부
마귀를 혼내키는 비오 신부님
광장 아래로 탁 트인 마을 전망을 바라보며 비오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뒤에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비오 신부님이 그 약속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시리라 믿는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심으로 이 땅의 더 많은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실 것이다.
성 빠드레 비오 성당 십자가와 종
성 비오 광장에서 만난 일행들과 사진도 찍고 추억도 만들고 일곱째 날 순례를 마쳤다.
첫댓글 자세한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