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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수
 
 
 
카페 게시글
국내 .관광 . 여행. 등산, 스크랩 충주 월악산 미륵사지
한국남자 추천 0 조회 66 10.09.08 12: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충주 월악산 미륵사지

 

 

# 중원미륵사지 中原彌勒寺址 : 사적 제317호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남한강 줄기를 끼고 있는 충주 지역을 중원中原이라고 하는데

안내판에도 <중원 미륵사지>라고 표기되어 있다.

중원이란 국토의 가운데라는 뜻인데, 이 일대가 삼국의 중요한 전략적 기지였음을 말하고, 근처에 많은 유물들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 절터는 동쪽으로 하늘재, 서쪽의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는,

삼국시대이래 조선시대 이전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불교 사찰의 역할 뿐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97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미륵당彌勒堂], [미륵당초彌勒堂草], [원주院主],

[명창3년 대원사 주지 승 원명 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이라 적힌 기와들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절이름은 미륵대원으로,

미륵대원터는 본존불, 석동,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인 배치로서, 삼층석탑, 사각석등, 당간지주, 미완성석불, 건물지, 돌거북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다른 절과는 달리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절터가 전개되고 있는 것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추정된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석굴사원을 조성하고 불상을 세워,

동생인 덕주공주가 송계계곡으로 남향한 암벽에 새긴 마애불(덕주사마애불)과 마주보게 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미륵사지에는 석불과 석탑, 석등, 귀부 등이 남아 천 년 전 옛 영화를 전한다.


미륵사지는 백두대간의 하늘재와 이어져 있다.

문경과 충주를 잇던 고갯길로 우리 역사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삼국사기>는 신라 8대왕 아달라왕이 156년에 북진을 위해 뚫었다고 적고 있다.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하던 초기 신라 사람들이 영토 확장을 위해 개척한 옛길 <계립령>이 바로 하늘재다.


이름으로 보면 아주 높아 하늘과 맞닿을 듯 하나, 실제로는 해발 고도 525m로 그리 높지 않다.

하늘재는 지리적 요충지. 이곳을 통해 신라는 중원을 꿈꿨고 고구려와 백제는 남녘 바다를 도모했다.

세력 다툼의 접점인 탓에 싸움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재는 고려시대에 <대원령大院嶺>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교통로로 더욱 발전한다.

주변에 미륵사, 관음사 등 대형 사찰이 세워지고 큰 역원驛院과 함께 산성들도 축성되었다.


문경시 문경읍에서 하늘재가 만나는 마을은 관음사가 있던 관음리다.

고개 너머 충주 땅은 미륵사지가 있는 미륵리다.

하늘재는 이렇게 현세의 고통을 정화하는 관음 세상과, 내세의 소망을 모으는 미륵 세상을 잇고 있다.


# 중원미륵사지석불입상 中原彌勒寺址石佛立像 : 보물 제96호

 

미륵사지에 있는 키가 10.6m나 되는 거대한 불상(미륵불 입상)이 있다.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主尊佛이다.

1개의 돌로 조각한 것이 아니고 화강암 덩어리 6개를 탑처럼 쌓아 올려 조성한 석불이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편이다.

부드러운 미소의 석불은 정감있고 친근하다.

얼굴 및 머리 부분에는 이끼가 끼지 않고 풍화작용의 흔적이 없고,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흰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며,

불상의 거대한 원통형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들을 볼 때 신체의 표현은 많이 생략되어 단순한 느낌이다.

불상의 머리는 보개로 장식하고, 원통형의 신체에 소박하게 표현된 옷주름 등이 고려시대에 충청지역에서 만들어진 공통된 특징이다. 

 

 

석불이 들어앉은 돌집이 이색적이다. 석불은 ㄷ자 모양으로 앞이 터진 돌집 한복판에 길쭉하게 솟아 있다.

석굴 안에 석불을 들어앉힌 모습이다.

경주의 석굴암처럼 석굴식石窟式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

6m 높이로 석축을 쌓아 석불을 에워싸고 목조로 둥그런 지붕을 만들어 얹었던 [지상의 석굴암]이다.

목조 전각은 화재로 소실된 듯 석벽의 곳곳에는 그을음이 남아있고, 지금은 석불과 석축만 남아 있다.

화재의 이유는, 몽고군이 침입을 했을 때 이 지역에서 우리의 정예군에 의해서 몽고군이 많이 죽었는데,

그 분풀이로 이 사찰에 불을 질렀다고 전해진다.

 

 

@ 석굴 벽면의 일부모습...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불상이 남쪽을 향해 놓이는 것과 달리, 이 석불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백두산과 만주의 옛 고구려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애틋한 이야기도 깃들어 있다.

이 석불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가 세웠다고 전한다.

석불은 마의태자 자화상이고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덕주공주의 상인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라고 한다.

 

중원미륵사지석조보살의상 中原彌勒寺址石造菩薩倚像 : 도문화재자료 제47호

 

@ 석굴 앞에는 판석에 새긴 여래좌상이 있다.

석굴 뒤 바위위에 있던 것이 1936년 홍수에 쓸려 내려왔다고 한다.

장방형의 높이 95cm, 두께 50cm, 폭 68cm의 괴석塊石 표면에 사각형의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의 존상尊像을 부조로 새겼다.

왼발은 수직으로 내리고 있으며 오른발은 왼쪽다리 뒤쪽으로 구부렸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쓴 것처럼 보이며 관장식은 양귀를 싸고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인 듯하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밖으로 벌려 손목을 몸으로 향하여 손바닥을 복부에 대고 있다.

왼손은 팔꿈치를 밖으로 벌리면서 위로 쳐들어 목 아래에서 법의자락을 살짝 잡은 듯이 보인다.

이 존상은 본래 석굴내부 감실龕室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미륵리오층석탑 彌勒里五層石塔 : 보물 제9호

석불입상, 석등石燈, 오층석탑이 북쪽을 향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6m의 석탑으로 그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1층기단을 만든 후 몸돌을 올려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지붕돌의 너비가 몸돌에 비해 아주 좁으며 각 부분의 조성기법이 형식적이고,

각 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감을 주고 있다.

 

 

   

# 미륵리석등 彌勒里石燈 : 충북유형문화재 제19호

석불입상과 오층석탑 사이에 있는 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받침돌은 4각형으로 윗부분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다.

위로는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과 상륜부 받침을 두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 석등 (2)

오층석탑의 앞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석등으로, 그 모양이 다른 석등과는 아주 다르다.

석탑은 전반적으로 사각형이다.

화사석은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이 아니고, 잘 다듬은 4개의 원모양 기둥돌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씌웠다.

화사석의 받침은 앙련,  석등의 받침은 복련의 연꽃모양을 조각하였다.

간주석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을 새겨넣었다.

 

 

 

 # 미륵리 사지 귀부 彌勒里 寺址 龜趺 : 충북유형문화재 제269호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北向하고 있는

길이 605cm, 높이 180cm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이다.

귀부의 배면背面은 거북등의 껍데기 모양을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陽刻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의 등에는 비좌碑座가 있으나 비신을 꽂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 실제 비가 존재했는지는 의문이며

수차례 발굴조사 결과 비신을 찾지못했음을 볼때 원래 석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 온돌장군 공깃돌

작은 내를 건너면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이라는 동그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적인 바위에 약간의 인공人工이 가미되었으며,

바위의 생긴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거북바위라 부리워지고 있다.

바위위에 올려져 있는 직경 1m 가량의 둥근돌(공기돌)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때의 온달장군溫達將軍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하여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 공기돌로 힘자랑을 하였다고 하여

온달장군 공기돌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미륵대원터 彌勒大阮址

                             고려시대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고려 때 길손이 묵던 커다란 역원의 흔적인 미륵대원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사찰과 원터의 기능이 같이 이루어진 고려초기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 미륵대원터에서 발굴된 문화재들

 

 @ 미륵사지발굴터에서 나온 석물들...

 

 

 @ 이 옆으로 해서 오르면 하늘재다.

 

 

# 미륵리삼층석탑 彌勒里三層石塔 :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

신라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반형 석탑으로,

장중한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몸돌 부분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노반을 얹어 놓고 잇다.

매우 안정감을 주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 정형화된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미륵대원지의 동쪽 200m지점의 밭둑에 있는데, 탑을 세운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비보사탑설(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이론)에 의해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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