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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일컫는 덕혜옹주(1912~1989)
이 책은 소설이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당시 시대상과 제도, 덕혜옹주의 삶에 대한 묘사는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소설적 개연성을 위해서 재구성 작업이 있었지만 모두 허구로 치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서막은 일제 강제 합방(병합)을 앞둔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통해서 당시 시대상을 이야기 한다. 대한제국을 만든 고종은 일본에게 이미 폐위당하고 아들 순종이 즉위한 상태. 하지만 대한제국의 미래는 없다. 일본의 식민지배로 민중의 삶은 이미 피폐해가고 암약중인 독립군과 일본 앞잡이(극중 갑수역)가 활개 치는 세상에 이미 고종조차도 뒷방 할아버지 신세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런 고종에게 말년에 얻은 막내 딸 덕혜옹주(이하 덕혜)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낙이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고종은 1919년 어린 딸을 두고 승하(독살설 제기가 있지만 확실치 않다)하고. 이러면서 유년 시절 아비의 사랑을 받고 자란 덕혜는 이때부터 아비를 잃은 슬픔과 함께 일본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망국의 운명 앞에 그녀를 포함한 이왕가의 황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시련을 맞이한다. 그러면서 10대 시절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간 덕혜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바로 일본 대마도주 번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와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뜻하지 않은 결혼과 일본에서 생활은 자신의 고국 조선을 그리워하며 이미 작고한 어머니 양귀인과 아비 고종을 그리워하는데. 물론 그 중심에는 조선으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점점 피폐해가며 우울증과 함께 정신질환을 않는데.. 혹자는 그녀의 남편 소 다케유키의 폭압에 그렇다고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도리어 남편은 그녀를 보듬어 주는 따뜻한 남자로 나오며 자신의 부인의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때로는 자상한 남편의 모습이다.
하지만, 덕혜는 딸 정혜(마사에)를 낳고부터 조선인과 일본인의 피를 반반씩 갖은 자신의 딸을 보며 심한 자괴감에 빠지며 자신의 가둬둔 늪에 한없이 빠지고 만다. 그러면서 당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 패전이 짙던 일본은 항복하며 국내외 상황이 악화되자. 이 둘 부부도 위기에 처하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딸 정혜는 엄마 덕혜옹주를 가멸차게 몰아붙인다. 그러면 그럴수록 덕혜는 심한 정신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덕혜는 해방 전후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만다. 그러면서 남편 다케유키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딸 정혜의 행방불명까지. 그녀는 인생의 나락으로 이미 떨어진 상태다. 과연 그녀는 거기서 살아 돌아왔을까. 물론, 역사적 기록대로 그녀는 김을한 기자의 구명운동으로 환국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신병원 탈출 장면에 대한 묘사를 넣으며 소설적 재구성으로 비극적 삶에 대한 발호로 투영시켰다.
이렇게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태어났지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감내해야 했던 30여년 그녀의 비참한 삶을 이야기한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바로 옹주의 정혼자였던 박무영(김장한, 고종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이자 양아들로 김을한의 동생)과 그녀를 지근에서 끝까지 지키려했던 '복순'이라는 나인이다. 여기서 박무영은 명성황후를 지키려 했던 호위무사 '무명'처럼 그는 덕혜를 일본에서 어떻게든 구출하려는 구국청년단의 수장이다. 그리고 복순은 바로 덕혜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 그녀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나인이다.
특히 여기서 복순의 캐릭터는 소설 중반이후에 도리어 덕혜옹주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 느낌이다. 작가는 아마도 복순 그녀를 통해서 일본 식민지 시대의 그들의 광기를 그녀를 통해서 투영시킨 느낌이다. 바로 식민지배로 인한 민중의 피폐와 위안부 문제, 그리고 패전이후의 삶까지. 복순은 어찌 보면 덕혜에게 차마 메스를 못 가했던 부분을 가한 그런 처참한 피해자로 그린 것으로 본다.
이렇듯 작가는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소개 글로 말문을 연 <덕혜옹주>. 기존 일본의 번역서에 그치며 지금까지 우리네 손으로 그려지지 않은 그녀의 삶이 오롯이 이렇게 한권의 책으로 태어난 것이다. 책의 큰 얼개인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고귀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잊혀져간 덕혜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이야기는. 나라 잃은 자의 설움과 함께 매 순간마다 조국을 그리워했던 어찌 보면 그냥 한 여자의 비극적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황녀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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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5월 25일- 1989년4월 21일)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 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즉조당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 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 무렵에 덕혜라는 호를 내려 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 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 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 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1961년11월,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이방자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 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양덕혜라는 이름의 호적을 받았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출처] 덕혜옹주|작성자 열정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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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도 고종의 회갑 해인 1912년 5월 25일이다. 속담에 ‘회갑 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어버이를 똑같이 닮는다.’는 말이 그대로 적중하여, 덕혜옹주는 아바마마 고종의 축소판같이 닮았다. 바로 그 전 해에 엄비를 잃고 울적하던 차에 덕혜옹주의 탄생이 노왕 고종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안겨 주었는가는 실록에 나타난 바로도 짐작할 수 있다. 아기를 낳자마자 즉시 그 산모 양씨에게 ‘복녕당’이란 당호가 내려지고, 그 다음날 왕이 산실에 아기를 보러 갔고, 3일째 되는 날에는 흥친왕을 비롯한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서 문안을 드리고, 다시 생후 일주일 되는 날에는 종척(宗戚:임금의 친족과 외척)들의 알현이 있었다. 그 다음날 6월 1일에는 순종 내외가 덕수궁에 부왕을 뵈러 와서 함께 산실인 복녕당으로 아기를 보러 갔다. 삼칠일 되는 날에는 종척 이하 칙임관 이상 직급에게도 왕이 축하의 내연을 베풀었고, 생후 약 2개월 후인 7월 12일에는 아예 아기를 유모를 딸려 침전인 함녕전으로 옮겼다. 실록에 나타난 바로는 왕녀가 태어나서 이토록 환영받은 전례가 없다. <문화원형백과사전>
◇◆고종의 가계도 : 고종(1852 - 1919) - (2005년도 자료임)
고종 ----
명성황후 민씨 ---- 순종
귀비 엄씨 ---- 영친왕[이은]
귀인 이씨 ---- 완왕(병사함)
귀인 장씨 ---- 의친왕[이강]
소의 이씨
귀인 정씨 ---- 우
귀인 양씨 ---- 덕혜옹주
= 고종은 완왕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잃은 자식이 많으며, 황태자인 순종,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 늙은 나이에 얻은 덕혜옹주가 있었습니다.
1.고종 [광무황제]
2.명성황후 민씨 [명성태황후]
3.귀비 엄씨 [엄황귀비]
영친왕 이은의 생모로 똑똑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고종의 상궁으로 명성황후 시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영친왕을 생산했으며, 거의 왕비로써의 역할 을 수행하였으나 출신상의 문제로 왕실에서 천대받았다.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숙명, 진명, 양정학교를 세우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들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자 애를 태우다가 결국 1911년 장티푸스로 별세하였다.
4.덕혜옹주
고종과 상궁 양씨에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 1912년 출생. 13세때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뒤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에 걸림. 19세때 일본인 소다케시 백작과 강제 결혼. 그러나 결혼의 충격으로 병이 악화돼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가 1952년 38년 만에 귀국. 귀국후에도 백치로 낙선재에서 생활하다 1989년 3월 별세했다.
◇◆ 순종의 가계도 : 순종(1874 - 1926)
순종 -----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은 자식이 없었고, 첫째 왕비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어린나이에 돌아가셨고,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했다.
◇◆ 영친왕의 가계도 : 영친왕(1897 - 1970)
영친왕 ----
영친왕비 방자(마사코) ---- 진(유아때 사망)과 구
원래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영친왕은 일본의 조선왕족 결혼법 제정에 의해 강제로 일본왕족과 결혼하였다. 일본이 제정한 조선왕족결혼법은 다음과 같은데 "조선왕족은 선일융화를 위해 무조건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영친왕 이은 [의민황태자 영친왕]
2.이방자 여사 [영친왕비]
3.민갑완 [영친왕의 약혼자]
4.진왕자 (유아시기 사망)
영친왕과 영친왕비 방자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유아시기에 사망했다. 조선방문시 사망하였으며, 검은 물체를 계속 토해낸 것으로 보아 독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5.故구왕자 [황세손 구]
현존하는 유일한 영친왕의 자식이자 현재 조선왕실의 최고 직계 황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구는 영친왕이 이왕직(조선국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세자로 일컬어졌다. 사춘기에 불행한 부모의 운명과 혼혈왕자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겠다고 17세에 미국으로 떠나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다가 미국 여인 줄리아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
1963년 32세때 부모를 따라 조국에 왔고 한때 서울대 공대 및 연세대 공대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계 황손으로써 의무를 강요하는 종친회와의 갈등과 '신한공항'등의 사업실패의 좌절, 단지 왕손이라는 이유로 이용하려는 주변의 시각들에 의해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1982년에는 종친회의 강요 및 이구씨의 개인사정에 의해 줄리아랑 이혼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여인 아리다랑 동거하면서, 도쿄에서 살면서 사업활동을 하였다. 84년 사기혐의로 고소, 89년 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사망등의 파란을 겪기도 했다.
이방자여사가 타계한 뒤 수차례에 걸친 종친회의 귀국 종용을 거부하던 이씨는 환갑을 넘기면서 심경 변화를 보여, 귀국을 결심했고, 결국 96년 귀국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종친회장자리를 이구씨에게 기증하였고, 부영주택 이중근 회장이 마련해준 장충동 호텔 영빈관에서 생활하며, 왕실제사인 종묘대제등의 초헌관 참여, 종친회 사무를 보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6.줄리아
이구의 전 아내. 미국에서 고생하는 동안 외로운 동양 청년 이구와 사랑으로 결혼. 실내장식가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으나 외국인에다가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하라는 종친회와 큰 갈등을 가졌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실내장식품을 만들어 시어머니였던 방자여사의 사업을 돕고 왕실의 일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시어머니였던 이방자여사는 줄리아에 대해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최고의 왕실며느리 감이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친회의 갈등 및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구씨와의 관계악화에 의해 1982년 이혼했다.
줄리아숍을 운영하다 결국 생활고에 의해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가 2000년 남편의 사진 450점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한국에 방문하였는데,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한채, 줄리아가 왕세자비시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시아버지 영친왕의 묘소를 방문한후 왕실의 30여년간 삶을 회고하는 편지를 남겼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 되면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특집방송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 의친왕의 가계도 : 의친왕(1877 - 1955)
의친왕의 가족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약 20?여명이 넘는 자녀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의친왕 이강
2.이건
의친왕의 장남으로 궁인 정씨의 소생이다. 1918년생.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일본왕족 딸과 강제 결혼하였다. 해방 후 이혼하고 일본인으로 귀화. 현재 재혼한 일본 부인과 일본에 살다가 현재는 별세했다.
3.이우
의친왕의 차남으로 궁인 김씨의 소생이다. 1911년생. 12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군인으로 복무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진다. 똑똑하고 인물이 좋아 의친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조선 말기 왕족중 거의 유일하게 오랜기간 일본의 강압결혼에 저항하여 결국 한국여성인 박찬주씨와 결혼하였고 청과 종이라는 자식을 두었다. 이종씨는 현재 사망했고 이청씨는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4. 이수길
이우의 동생. 1918년생. 민주당 장면 내각때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내며, 영친왕을 귀국 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칠궁에서 살다가 전두환 대통령 당시 청와대 경호실의 강제 축출 강요에 충격 받고 1982년 65세로 별세. 부인 김신덕 여사는 칠궁에서 쫓겨나 서울 개포동의 19평 시영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딸인 이순씨는 인천 아들인 이한주씨는 일본에 살고 있다.
5. 이석
본명은 이해석으로 홍씨 소생. 1941년 생으로 관훈동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잠시간의 행복한 생활이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왕실은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고로 환수당한 뒤 가족들은 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특히 1959년 아버지 의친왕이 사망하자 그는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위해 종로 2가 음악다방에서 DJ일을 시작했고, 1962년부터는 미8군에서 한달에 3만원을 받으며 노래도 불렀다. 그러나 왕실어른들과 문중 어른들에게 노여움을 샀고 그는 경제력 무능력한 왕족의 신분에 대해 눈물로 왕실어른들께 호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64년 사회각층의 인사와 만나는 TV프로그램"굿이브닝쇼"의 사회를 보게되자 결국 윤대비는 화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가수 이석은 '비둘기집''두 마음''외로운 조약돌'등의 노래를 부르며, 한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64년 여러 주변상황에 의해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제대후 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 홍씨를 잃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한인회장인 김병묵박사의 도움으로 79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의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고,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등 고생을 하다가 87년 드디어 미국의 영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89년 이방자여사의 장례 직후 다시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결의가 생겼고, 결국 귀국한후 잠시간 가수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흩어진 왕실을 다시 모우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그가 만난 세 명의 부인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이석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음반을 준비하면서,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로써, 황실 문화 복원 작업 등의 활동을 하고 추진중이다.
6. 이해경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의친왕과 김금덕여사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1950년대 몰락하는 왕가가 싫어 미국으로 도미했다.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의친왕 이강의 독립운동사실을 알아냈고, 의친왕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 복권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때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강연을 주체한 적도 있으며, 왕실의 유품등을 기증하였다.
◇◆ 덕혜옹주 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년 2월 16일 – 1985년 4월 22일)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남편으로, 일본의 옛 화족이다. 대마도 번주 집안인 소 가문의 37대 당주로,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자 부장인 소 요시토시의 직계 후손이며 작위는 백작이었다. 영어학자이자 시인이며 화가로서 말년에는 레이타쿠 대학(麗澤大学)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흔히 '宗武志'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종무지'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제 다케유키는 나이 50줄에 아무것도 안 남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을 거의 다 헛되이 보낸 것이지요. 그나마 그는 그 나이에 재혼을 해서 2남 1녀를 봤고 30년을 더 살았으니, 1972년에 내한 덕혜공주 만나려 했으나 실패.
1955년 이혼한 데 이어 1962년 1월26일에는 하네다공항에서 특별기편으로 고국으로 돌아간 옛 아내 덕혜를 그리는 다음과 같은 시가 나왔다.
“그리는 아내여, 해궁(海宮)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많은 새가 무리지어 날개치는가?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 놓고는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 그리운 아내여, 이젠 오갈 길조차 끊어져 / 사랑하는 아이를 나는 그저 안고 내내 서 있을 뿐이라오.”
◇◆ 관련사진
(덕혜옹주 부부 사진. 한때 행복했다?)
(대마도에 있는 덕혜옹주 봉축결혼기념비. 당시에 대마도에 있는 한국인들이 건립했다가
두 분이 이혼하자 파기했는데, 한국관광객이 넘쳐나자 2000년에 다시 재건했다.)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 모습)
첫댓글 이 글 읽고 오세용. 히히.
하책을읽으며 궁금했던 부분들을 모조리 해결해 주시네요....감사감사 깊이감사요^^ 역시 사단 동맹독서
오~! 감사합니다. 덕혜옹주 참 이쁘네요^*^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두류 도서관에 책을 열람하니 8월말까지 예약이 되어 있네요.갑자기 덕혜옹주가 부각 되는 이유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영친왕과 덕혜옹주등 조선마지막 왕족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부각되고 있답니다^^ 역사는 돌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늘 과거와 역사를 잊지않아야 함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다행한 일 입니다^^
한많은 덕혜옹주 ...나라잃은 설움이 이런거라는것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죠. 대마도갔을때 기념비앞에 한참 서있었는데...
제4회독서토론회 자료준비 및 발표자(김지욱단우님)가족(4명)모두 참석해서 정확하게 60분 발표
정말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덕혜옹주 에대한 소설적 이지만,역사적 환경,모든것을 너무많이 자료와 생각을준비발표에 감사드립니다.
참석자 토론 60분 후
뒷풀이준비해주신 개인사비로[이용재 수련분과 팀장님] 김밥,막걸리,돼지고기,김치 ,생수,기타 정말고맙습니다,
비록 참석자리는 못하지만
[시간,일정이겹치는바람에함께하지못한_문상팀]에께도 늦은시간까지 자리를 함께해주어서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책한권 잘읽었습니다. ㅎㅎ 허리아프기전에
소설 한 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