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며
솔직해져 봅시다.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는 말씀은 현대 교회에서 가장 '은근슬쩍' 넘어가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효자, 효녀들에게는 난감한 구절이고, '영적 아버지'라 불리며 존경받는 목회자들에게는 더더욱 껄끄러운 뇌관이죠.
지난번 포스팅이 겉핥기였다면, 오늘은 메스를 들고 환부 깊숙이 들어가 보려 합니다. 단순히 "누구를 어떻게 부를까?"의 호칭 예절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교묘하게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가, 즉 신하가 왕의 옥좌에 앉아 왕 노릇 하는 '영광의 탈취(Usurpation)'에 관한 아주 예리하고도 위험한 고발입니다.
이 구절은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라는 거대한 권위의 탑을 향해 던져진 예수의 돌직구였습니다. W.D. 데이비스(Davies)와 데일 앨리슨(Allison), 그리고 독일의 석학 울리히 루츠(Ulrich Luz) 같은 학자들의 렌즈를 빌려, 그 돌직구의 궤적을 추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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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세기 유대교의 풍경: 칭호는 곧 권력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체면과 명예가 생명보다 중요한 '명예 문화(Honor Culture)'였습니다. 여기서 칭호는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라 계급장이자 권력의 인증서였습니다.
랍비(רַבִּי), 나의 위대한 자여
'랍비'라는 단어, 우리는 흔히 '선생님' 정도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원어의 뉘앙스는 훨씬 묵직합니다. 히브리어 '라브(רַב)'에 '나의(-i)'가 붙은 이 말(רַבִּי)은 직역하면 "나의 위대한 분", 혹은 "나의 주인님"입니다.
데이비스와 앨리슨의 지적처럼, 1세기에 랍비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랍비와 함께 먹고 자며 그의 숨소리까지 모방했습니다. 랍비의 해석은 곧 하나님의 법이었고, 제자는 스승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에게 실질적인 '신'의 대리자였던 셈입니다.
아빠(אַבָּא), 친밀해서 더 위험한 권위
한때 "아빠(אַבָּא)는 어린아이가 부르는 'Daddy' 같은 유아어"라는 낭만적인 해석이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 바(James Barr) 등의 연구로 이 가설은 수정되었습니다. '아빠'는 어린아이뿐 아니라 성인 자녀도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에 친근감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신뢰와 친밀함이 담긴 존경어'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를 'אַבָּא'라 부른 것은, 그를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생명과 지혜를 공급하는 영적 가장'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언어는 비판을 무력화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토를 다는 것은 '불효'가 되니까요. 이처럼 사적인 친밀감이 공적인 검증을 가로막는 방패로 쓰일 때, 그 권위는 폭력이 되고 하나님을 가리는 짙은 구름이 됩니다.
3. 마 23:8-12의 해부: 셋을 금지하고 하나를 세우다
예수님의 논리는 치밀합니다. 단순히 "교만하지 말라"고 훈계하시는 게 아닙니다. 구조를 봅시다.
랍비(רַבִּי) 금지: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8)
아비(אַבָּא) 금지: "너희 아버지는 한 분,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마 23:9)
지도자(καθηγητής) 금지: "너희 지도자는 한 분, 곧 그리스도시니라." (마 23:10)
이 구조는 [칭호 금지 - 신적 권위 확인 - 형제됨의 회복]이라는 패턴을 따릅니다. 인간에게서 화려한 타이틀을 뺏어다가 원래 주인인 하나님과 예수님께 돌려드리는 작업입니다.
울리히 루츠(Ulrich Luz)는 여기서 '하나님의 질투'를 읽어냅니다. 인간 지도자를 아버지라 부를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에게 신적인 의존성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신 6:4)라는 쉐마의 고백을 공동체 윤리에 급진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종말의 때에 모든 인간적 위계는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왕으로 서십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인간끼리 도토리 키 재기 하며 칭호를 나누는 것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역입니다.
4. 핵심 논쟁: 영광의 탈취(Usurpation)와 톨게이트 비용
바리새인들이 비판받은 진짜 이유는 긴 옷을 입고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해서가 아닙니다(마 23:5). 그건 촌스러운 허영심일 뿐이죠. 진짜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 가는 길'을 독점했기 때문입니다.
중재자의 독점
당시 랍비들은 율법 해석권을 쥐고 천국 문지기 노릇을 했습니다(마 23:13).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만들었죠. 이때 '아버지'라는 칭호는 그 독점권을 강화하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중간 상인들을 폐업시키고, 하나님과 신자가 직접 만나는 '직거래 장터'를 여신 겁니다.
이레니우스의 오해와 진실
"하나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인간이다(Gloria Dei vivens homo)"(Adversus Haereses, IV, 20, 7)라는 이레니우스의 명언, 들어보셨을 겁니다. 흔히 인본주의적 찬사로 쓰이지만, 문맥을 보면 뜻이 다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때, 즉 하나님을 반영할 때만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스스로 영광스러운 칭호를 뒤집어쓰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반영하는 맑은 거울이 아니라 빛을 가로막는 불투명한 벽이 됩니다. 인간의 영광은 스스로 빛을 낼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온전히 반사할 때 드러나는 법입니다. 이를 망각하고 스스로 빛이 되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광의 탈취'입니다.
현대의 '영적 아비'들은 안전한가?
가톨릭의 '신부님(Father)'이나 개신교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영적 아비'라 칭하는 관행은 어떨까요? 물론 사도 바울도 자신을 "복음으로 낳은 아비"(고전 4:15)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표현은 '산고의 고통'과 '양육의 책임'을 강조한 은유였지, 성도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가 스스로를 '영적 아비'라 칭하거나 그렇게 불리기를 즐길 때, 그것은 극히 위험한 징후입니다. 이는 성도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특별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를 하나님처럼 의존하게 만들고, 목회자의 말에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이 호칭이 오용될 때, 그것은 명백한 '영광의 탈취'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성도의 '영구적 유아화(Infantilization)'입니다. 땅에 영원한 '아버지'가 존재한다면, 성도는 영원히 '미성년자'로 남게 됩니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는 것을 구조적으로 방해합니다.
울리히 루츠의 경고는 서늘합니다. 바울의 용례를 방패 삼아 마태복음이 선포하는 '형제 공동체'의 급진성을 물 타기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너희를 가르치는 윗사람이 아니라, 먼저 배운 형제일 뿐이다." 이 고백이 사라진 곳에서 '영적 아비'라는 칭호는 가장 매혹적인 우상이 됩니다.
5. 결론: 칭호를 버리고 형제가 되는 길
예수님의 이 명령은 "예의범절을 무시하라"는 아나키즘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위의 출처를 명확히 하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인간이 '아버지'라 불리며 영광을 누릴 때,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집니다. 교회 내의 어떤 직분도 계급이 될 수 없습니다. 목사, 장로, 교사, 랍비... 이 모든 것은 기능일 뿐, 본질은 '형제'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하고, 누군가에게 '영적인 아버지'라는 짐을 지우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내가 책임을 덜 지고 편하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짐을 사람에게 지우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하나뿐이다."
이 시대, 이름 앞에 붙은 화려한 수식어들이 오히려 내 영혼을, 그리고 공동체를 병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거울 앞에 서서 조용히 넥타이를 풀고 물어볼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남에게 불리고 싶은 그 달콤한 호칭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