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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의 위대함에 대하여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장 위대한 일이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역사에 자신을 남기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며
온유하고..
고요하게..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않고
물 흐르듯 살다 간다.
-오쇼의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승과의 위대한 만남] 중에서-
위대한 사람과 하찮은 사람은 없다.
다만 위대한 일과 하찮은 일이있을 뿐이다.
위대한 사람은 하찮은 일까지도
위대한 일로 만든다.
그가 하는 모든 하찮은 행동,
모든 하찮은 몸짓에서
그의 위대함이 흘러나온다.
- 오쇼의 [장자, 도(道)를 말하다] 중에서-
2. 삶의 자유에 대하여
느긋한 마음으로 혼돈을 즐겨라.
삶은 불안정하다.
이것은 삶이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삶이 안정적이라 함은,
곧 그대가 그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거기에 자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 오쇼 라즈니쉬의 [틈] 중에서-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하지만
자유를 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 오쇼의 [짜라투스트라 3] 중에서-
3. 삶의 가치에 대하여
자신의 가치를 시험하지 말라.
자신을 상품화 하지 말라.
가장 지고한 삶의 체험은
그대의 행위를 통해서 오는 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명상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그들의 쓸모에 따라 판단한다.
그렇다고 쓸모 있는 일을 전혀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쓸모 있는 일을 하라.
그러나 참되고 지고한 삶의 체험은,
그 황홀경은 쓸모 없음의 행위,
무위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알자.
그것은 시적인 것을 통해서,
회화적인 것을 통해서,
사랑과 명상을 통해서 온다.
삶의 크나큰 기쁨은
전혀 상품화 될 수 없는
무엇을 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샘솟고 넘쳐 흐르는 것이다.
- 오쇼의 삶의 60가지 기조 중에서-
4. 삶의 주체성에 대하여
사람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이어야 한다.
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이어야 한다.
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의 삶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삶의 길을,
독창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이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고,
신과 친해질 수 있다.
신은 창조적인 사람을 사랑한다.
익명의 집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고,
사회에,
역사에,
종족에,
종교에,
교회에,
함몰되어 버린 사람들은 신과 친해질 수 없다.
- 오쇼의 [배꼽] 중에서-
5. 삶의 실천에 대하여
좋은 느낌을 갖게 된 일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아무 생각도 하지말고 내일로 미루지 말라.
내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일을 내일 하겠다고 남겨놓은 사람은
그 일을 영원히 끝낼 수 없다,
"좋은 일은 급하게 하고
나쁜 일은 뒤로 미루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두라.
- 오쇼의 [명상의 길] 중에서-
6. 삶의 우연성에 대하여
주위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우연임을 볼 수 있다.
그대의 전 생애는 우연적이다.
그대는 단지 위안을 얻고 싶어서
거기에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의미도 없다.
오직 깨달은 자만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무의식적인 한 우연의 일치로만 살 뿐이다.
그의 삶은 단지 우연의 일치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무의식적인 사람의 삶은 우연적인 삶이다.
- 오쇼의 [The Book] 중에서-
7.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삶이란 본래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감이며
죽음이란 근원으로의 회귀이다.
죽음은 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
그러나 죽음은 오직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삶을 짓누르거나 억압하지 않고
산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삶을 아름답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분히 용감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사랑하고, 춤추고,
축복하는 삶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의 삶이 축복이었다면
죽음은 축복의 절정이 될 것이다.
- 오쇼의 [근원] 중에서
【 명상을 대하는 자세 】 -오쇼-
<세가지 요소! >
명상에는 몇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어떤 방편을 택하든지 간에 그 본질적인 요소는 필수적이다.
첫째는 릴랙스된 상태이다.
마음과 싸우지도 않고 마음을 다스리지도 않으며
집중도 없는 상태가 그것이다.
두번째는 릴랙스된 각성의 상태에서 주시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섭하지 말고 그냥 주시하라.
아무런 판단도 없이, 개선하려는 노력도 없이 고요하게 주시하라.
릴랙스, 주시, 판단없음, 이 세가지가 핵심이다.
그러면 서서히 거대한 침묵이 그대를 감싸기 시작한다.
그대 내면의 모든 활동이 중지 된다.
그대는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이 없다.
그저 순수한 공간이 있을 뿐이다.
명상에는 120가지의 방편이 있으며 나는 그 모두에 대해 말했다.
모든 방편은 구조가 제각각 다르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똑같다.
릴랙스, 주시, 판단없는 태도가 그것이다.
<즐겁게 행하라! >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놓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명상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매우 심각하고 침울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교회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요소가 들어있는 것 같다.
명상은 시체처럼 굳어 있거나 거의 죽어 있는 사람들,
우울하고 심각한 사람들,
유쾌함과 명랑함을 모르는 근엄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명상의 특성은 그와 정반대이다.
진정으로 명상적인 사람은 언제나 유쾌하다.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흥겨운 놀이와 같다.
삶은 하나의 놀이이며 유희(leela)이다.
명상적인 사람은 삶을 철저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으며 릴랙스 되어 있다.
<인내하라! >
서두르지 말라.
서두르기 때문에 지체되는 일이 많다.
목이 마른 만큼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라.
기다림이 깊을수록 해갈의 때도 빨리온다.
그대는 씨앗을 심었다. 그러니 이제 나무 그늘 아래
편안하게 앉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곧 씨앗의 껍질이 갈라지고 싹이 틀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앞당길 수는 없다.
만사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진인사대천명이라,
해야 할 일을 하되 그 결과는 신에게 맡겨라.
삶에서는 아무것도 헛되이 낭비 되지 않는다.
특히 진리를 향해 가는 과정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때로는 조바심이 일것이다.
갈증과 더불어 조바심이 인다. 그러나 이 조바심이 장애물이다.
갈증은 그대로 유지하되 조바심을 버려라.
갈증과 조바심을 혼동하지 말라. 갈증은 열망이지 조바심이 아니다.
그러나 조바심이 있으면 갈증이 있을뿐 열망이 없다.
열망이 있으면 기다림이 있는 것이지 바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바심을 내면 요구가 있을 뿐 기다림이 없다.
갈증이 있는 곳에 침묵의 눈물이 있다.
그러나 조바심이 있는 곳에는 쉴틈없는 갈등이 있을 뿐이다.
진리는 기습공격을 가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투쟁이 아니라 굴복을 통해 얻어진다.
그것은 전적인 굴복의 결과로 얻어진다.
<결과를 염두에 두지 말라! >
에고는 결과를 염두에 둔다. 마음은 언제나 결과에 미련을 갖는다.
마음은 결코 행위 그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결과를 중요하게 여길 뿐이다.
마음은 언제나 "내가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하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런 행위도 거치지 않고 결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마음은 항상 지름길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매우 교활해진 이유이다.
그들은 지름길을 찾을수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밀수나 도박등의 방법으로 돈을 벌수 있다면
정치 지도자, 수상, 대통령이 됨으로써 돈을 벌수 있다면
그대는 온갖 편법을 동원해 지름길을 찾을 것이다.
교육받은 사람은 교활해 진다.
그는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영민해질 뿐이다.
그는 너무 교활해진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명상은 오로지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에게만 일어난다.
명상은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다.
<깨어있지 못함을 편하게 받아들여라.>
깨어있는 동안에는 깨어있음을 즐기고 깨어있지 못할 때에는 깨어있지 못함을 즐겨라.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깨어있지 못함은 휴식과 같다.
그런 휴식이 없다면 자각은 긴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만일 하루 이십사 시간 내내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다면 그대가 며칠이나 살 수 있겠는가?
음식을 먹지 않아도 석 달은 살 수 있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으면 3주일도 못가 그대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대는 자살해 버릴 것이다. 그대는 낮에는 깨어있고 밤에는 휴식을 취한다.
그 휴식은 그대로 하여금 낮에 더 또렷하게 깨어 있도록 돕는다.
그대는 다시 신선하게 깨어난다.
에너지는 휴식기를 통과하고 아침이 되면서 더 활발하게 되살아난다.
명상에 있어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얼마동안 그대는 완벽하게 깨어서 정상에 서 있다.
그 다음 순간에는 계곡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한다.
그대는 주시하는 것을 잊고 깨어있는 의식이 사라진다.
거기에 무슨 잘못된 점이 있는가?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무각성을 통해 다시 각성이 솟아오를 것이다.
신선하고 새로운 각성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만일 깨어있는 각성의 상태와 깨어있지 못한 무각성의 상태 둘다를 즐길 수 있다면
그대는 제 삼의 어떤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 지점을 이해해야 한다.
두가지 상태 를 모두 즐길 수 있다면, 그대가 각성도 아니고
무각성도 아닐 때 저 너머의 어떤 것이 그대를 찾아온다.
이것이 진정한 주시이다. 행복할 때에는 행복을 즐겨라.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행복이 가고 슬픔이 찾아온다해도 그 슬픔이 잘못괸 것인가?
그 슬픔을 즐겨라. 슬픔을 즐길줄 알게 되면 그대는 이도 저도 아니다.
슬픔을 즐긴다면 그 슬픔에는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행복은 다소 얕은 감이 있다. 그러나 슬픔은 매우 깊다.
슬픔에는 깊이가 있다. 슬픔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깊이를 가질 수 없다.
그는 표피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슬픔은 어둡고 깊은 밤과 같다.
어둠에는 침묵이 있다.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행복은 거품처럼 들끓는다. 거기엔 소리가 있다.
그것은 산중을 흐르는 계곡물과 같다. 물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계곡물은 결코 깊어지지 못한다. 게곡물은 항상 얕다.
그 물이 평원에 도달해 강이 되어서야 비로소 깊어진다.
하지만 그 때에는 소리가 사라진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인다.
이렇듯 슬픔에는 깊이가 있다.
왜 문제를 만드는가? 행복할 때는 행복하라.
그것을 즐기되 동일시되지 말라.
행복해지라고 말할 때 내 말은 그 행복을 즐기라는 뜻이다.
날씨가 바뀌게 그냥 내버려 두라.
아침은 낮이 되고 낮은 저녁이 되며 그 다음에는 밤이 온다.
그대를 둘러싼 분위기가 행복으로 가득차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분위기를 즐겨라. 그 다음에 슬픔이 몰려오면 그것 또한 즐겨라.
나는 즐거움을 가르친다. 어떤 경우가 오든 무조건 즐겨라.
조용하게 앉아 슬픔을 즐겨라.
그러면 돌연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그 슬픔은 오교한 평화의 순간이 된다. 거기엔 아름다움이 있다.
아무 것도 잘못된 점이 없다.
이러할 때 궁극적인 연금술의 단계가 온다.
그대는 불현듯 자신이 행복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라는 것을 개닫는다.
그대는 다만 지켜보는 자이다.
그대는 정상을 지켜보고 계곡을 지켜본다.
<각성! >
각성의 첫 단계는 그대의 육체에 대해 예민하게 깨어 있는 것이다.
그대는 서서히 몸짓 하나, 동작 하나마다 예민하게 깨어 있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깨어있게 되면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에 하곤 했던 많은 일들이 단순이 사라져버린다. 그대의 육체는 더 이완되고 조화로워진다.
육체안에도 깊은 평화가 자리잡기 시작하고 미묘한 음악이 육체안에 고동치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그대의 사념들을 자각하기 시작하라.
사념에 대해서도 똑같은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념은 육체보다 더 미묘하며 물론 더 위험하기도 하다.
그리고 사념을 자각하게 될때 그대는 그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놀라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언제라도 사념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적어본다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대는 이것이 그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다.
10분 후에 그것을 읽어 보라, 그대는 내면의 미친 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모든 광기는 지하수처럼 내면을 흐르고 있다.
그것은 그대가 무엇을 하든 영향을 미친다.
그대가 무엇을 하지않든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모든 광기의 총합이 그대의 삶이된다!
따라서 이 미치광이가 변해야 한다.
그리고 깨어있음의 기적은, 단지 깨어있음 외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광기를 주시하는 것 자체가 광기를 변화시킨다.
서서히 미치광이가 사라진다.
서서히 사념들이 일정한 질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혼란이 사라지고 더 조화로워진다. 그리고는 더 깊은 평화가 자리 잡는다.
그대의 몸과 마음이 평화로워질 때, 그대의 몸과 마음 사이에도 조율이 이루어져 있음을,
하나의 다리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 가지 않는다.
난생 처음으로 조화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이 조화는 각성의 세 번째 단계에 엄청난 도움을 준다.
세 번째 단계란 그대의 느낌, 감정, 기분을 주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미묘한 층이며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그대가 사념들을 주시할수 있다면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조금만 더 주의 깊은 각성이 필요할 뿐이며 이제 그대는 그대의 기분, 그대의 감정, 그대의 느낌을 비춰보기 시작한다.
일단 그대가 이 세 가지 모두를 자각하게 되면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현상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될때 완벽하게 함께 작용하며 함께 노래할 때,
그 세 가지가 함께 만들어내는 음악을 들을 수 있을때, 그것이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되었을때
그때 네 번째 단계가 일어난다.
그것은 그대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것은 전체로부터의 선물이다.
그 세 단계를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네 번째 단계는 그대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최고의 각성상태이다.
자신의 각성에 대해 각성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네 번째 단계이다.
그것이 붓다를, 깨달은 자를 만든다.
그리고 이 깨어남 속에서만 그대는 지복이 무엇인지 알게된다.
몸은 쾌락을 알고, 마음은 행복을 알며, 가슴은 기쁨을 안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는 지복을 안다.
지복은 산야스의, 구도자가 됨의 목적이다.
그리고 각성은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길이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주시하는 것, 주시를 잊지 않고 있는 것,
주시하고, 주시하고, 또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주시자가 점점 더 견고해지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어질 때 변형이 일어난다.
그대가 주시하고 있던 대상이 사라진다.
처음으로 주시자 자체가 주시되고, 관찰자 자체가 관찰된다.
그대는 집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정상도 아니고 계곡도 아니다.
일단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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