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공부와 서재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책을 읽는 독서인들이 다스렸던 조선에서 왕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왕들에게 요구된 것은 학문을 통해 인격을 도야한 성군의 자질이었다. 임금이 학문을 게을리 하면 당장 신하들로부터 질책을 받는 나라였다.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최고의 학자관리들로부터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했다. 왕이 되어서도 끝임없은 공부할 것을 요구받았고, 왕은 신하들과 경연이라는 어전 교육제도를 통해 유교의 경서와 역사책 등을 읽으며 공부해야 했다.
경연은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중국 한나라에서 시작되어 송나라 때 완비된 제도다. 12세기 초 고려 예종은 송나라의 경연제도를 도입해 시행하였으나, 불교가 성한 고려에서 경연은 성행하지 못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인 태조시기에 경연청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활발히 시행되어 고종 때까지 존속했다.
경연은 상참, 윤대, 경연, 야대 등 하루에도 여러 번 시행되기도 했다. 상참은 매일 아침 신하들이 왕을 배알하는 의식인데, 이때 학문 토론이 이루어졌다. 윤대는 신하들이 돌아가면서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는 일을 뜻하는데, 이때는 주로 직무에 관한 일들이 다뤄졌다. 야대는 밤에 신하들을 불러 경서를 강독하는 일을 말한다. 경연은 단순히 왕의 공부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전과 역사책을 읽으면서 현실문제와 연관해 관리들과 의견을 나누었기 때문에 국가의 중대사를 경연장에서 결정되기도 했다.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했던 태종은 학문적 재주가 뛰어났지만, 호탕한 성격답게 경연은 재위 18년 동안 겨우 15회 정도만 열었다. 세조와 연산군은 아예 경연을 폐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은 33년의 재위기간 동안 약 1,900회의 경연을 실시했다. 성종은 매일같이 3차례 경연을 시행하였고, 밤에는 야대를 또 실시하기도 하여 25년의 재위기간 동안 8천회의 경연을 열었다. 영조 또한 52년간 3천회가 넘는 경연을 열었다. 이처럼 조선의 왕들의 대다수는 경연을 열심히 열어 많은 공부를 했다.
왕들이 경연에서 공부한 책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해 『좌전』, 『예기』, 『주례』등의 유교경전과, 제왕학을 다룬 송나라 진덕수(1178~1235)가 쓴 『대학연의』와 중국 제왕학의 교재인 『정관정요』 등을 읽었다. 그리고 『자치통감』, 『십팔사략』, 『사기』등의 중국 역사서를 읽었다. 물론 『동국통감』과 고려사를 기술한 『여사제강』 등 한국사도 종종 경연에서 읽었지만, 그 비중은 중국사에 비해 낮았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임금의 수양과 관련해 진덕수가 쓴 『심학』, 이율곡의 『성학집요』를 많이 읽었고, 『주자서절요』, 『주자어류』, 『주자봉사』 등 성리학의 완성자인 주자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경연이 왕의 공부에 전부는 아니었다. 세종은 경연 외에도 하루에 5시간 이상 따로 공부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새벽 3시경에 일어나서 책을 읽었다. 세종은 편안히 앉아 글을 일었는데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책을 떼지 않다가 밤중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세종은 하나의 경서를 백번 넘게 읽었고, 역사서는 30번 넘게 읽어 완전히 깨우칠 때까지 공부했다. 세종은 성리학의 학문을 정밀하게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문학, 언어학, 불교 등 다방면에 걸쳐 모르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세종은 집현전에 나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문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정조 역시 엄청난 공부를 한 임금이었다. 대개 경연장에서 학식 높은 신하가 군주에게 경전을 강독하는 형식이었지만, 정조는 반대로 신하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했다. 정조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심을 가진 임금이었다. 이에 걸맞게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진했다. 1777년 음력 7월 28일 경희궁에 왕을 시해하려는 자객이 들었다. 이때 존현각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정조는 자객이 오는 것을 알아채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한 조선의 임금들이었던 만큼, 책을 모으고 수집하는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궁중에는 책들이 워낙 많았다. 책은 국정을 운영하는 참고서이기도 했다.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 및 책과 문서를 관리하면서 왕의 자문에 응하는 기관이다. 홍문관은 왕의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에서부터 발전한 것이었다.
경복궁 근정전 좌우에 위치한 융문루와 융무루는 본래 서적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이 외에도 궁궐 내에는 책을 보관하는 서고들이 여러 곳이 있었다.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은 1776년 정조가 만든 왕실의 도서관이었다. 후원에 위치한 규장각 2층은 주합루로, 책을 읽는 열람실이었다.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학문과 예술의 전당으로 삼았다. 정조는 청나라에서 만든 『고금도서집성』을 거금을 주고 수입해왔다. 이 책을 비롯한 중국에서 가져온 2만권의 책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는 후원에 열고관과 개유와라는 서고를 짓기도 했다.
낙선재는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이 지은 건물로, 서재 겸 사랑채였다. 헌종은 정조를 본받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낙선재 승화루에 3,742권 책과 665점의 서화를 보관하고, 공부에 매진한 임금이었다. 현재 낙선재 뒤쪽에는 6각형 정자인 상량정이 있다. 상량정 뒤에는 서고가 자리하고 있는데, 상량정은 왕이 독서와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조선의 임금들은 자신이 자주 머무는 곳 주변에 서고를 두고 언제든지 책을 꺼내서, 규합루나 상량정 같이 시원한 곳에서 책을 읽곤 했다.
왕뿐만 아니라 세자들도 어려서부터 서연제도를 통해 세자시강원에 속한 스승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 세자들도 자신의 거처 주변에 서재를 두었다. 동궐도에 그려진 동궁인 중희당 곁에는 소주합루라는 건물이 있었다. 주합루가 왕의 독서실인 것처럼 소주합루는 세자를 위한 공부 공간이었다. 지금은 텅 빈 창경궁 남쪽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 있던 진수당은 세자를 위한 서재였고, 바로 옆에 위치한 장경각은 왕세자를 위한 각종 경전을 보관하던 곳이다.
고종도 책을 모으고 공부에 열정을 기울인 임금이었다. 경복궁 북쪽 지역에 그가 만든 건청궁 안에는 1988년 궐 안 최초의 양식 건물인 관문각이 들어섰다. 관문각은 고종의 서재였다. 고종은 다시 건청궁 서쪽에 청나라 양식으로 집옥재를 지어 이곳에 서적을 옮기고 여기서 책을 읽거나 외국 사신을 만나기도 했었다.
조선의 임금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사랑했기 때문에, 조선은 학문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궁을 답사하다 집현전, 주합루 등을 만나면 이곳에서 공부했던 세종과 정조를 떠올려 보았으면 한다. 나라를 바로 다스리는 길이 책 안에 있다고 여기고 열심히 공부했던 그들의 열정 덕분에 조선이 조선다워졌으니 말이다.
사진 :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과 주합루 - 정조가 이곳을 조선의 예술과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었다.
동궐도에 그려진 동궁권역 - 세자의 서재인 진수당과 서고인 장경각을 비롯해 도서관, 장서각 등 책을 보관하는 공간이 여러 곳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경복궁 집옥재 -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
심경 - 진덕수가 쓴 심경은 조선 중기 이후 경연의 주교재가 되어, 왕이 수양을 위해 필히 배워야 하는 책이 되었다. 심경은 신하들이 왕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