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서울대 부속병원의 특수감방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여 9월 6일, “다시 교도소로 보내달라”는 요구를 법무장관에게 속달로 부치고 그날부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진주교도소의 단식에 이어 두 번째의 단식투쟁이었다.
단식투쟁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3.1 사건의 서명자와 그 관계자 등 30여 명이 "김대중 선생을 즉각 석방하라. 아니면 우리를 대신 구속하라" 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3.1민주구국선언사건 피고 일동’명의로 김대중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내고 동조단식과 항의 농성을 벌였다. 박 정권은 이를 빌미로 문익환, 윤반웅 목사를 재수감하는 등 강압책으로 일관했다.
장내출혈로 고생하고 피로가 쌓이는 하루하루였지만, 병원에서 나오는 식사를 비롯해서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원측은 링거주사를 맞히려 하다가 중지했다. 바로 혈압이 떨어지고 맥박이 비정상으로 뛰자, 급히 주사 몇 대를 놨다.
일주일 후인 22일, 변호사와 가족들로부터 어느 정도 효과도 거뒀고, 더 이상은 무리라는 말을 듣고 단식을 중단했다. 그러나 교도소로 보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창문도 없는 특별감방 생활이 계속되었다.
교도소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1978년 12월 12일 실시되었다. 유신체제 출범 이래 두 번째 맞은 총선거였다.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은 이미 대통령의 지명케이스인 까닭에 3분의 2석인 154석을 놓고 벌인 ‘총선’이었다.
이보다 앞서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선거를 맞아 박정희는 이른바 ‘체육관선거’에 단독 입후보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78명 중, 찬성 2,577명, 무효 1표라는, 또 한차례 코미디 같은 선거를 치러 당선되었다. 박정희는 5선 대통령이 된 것이다.
“독재자는 범을 타고 이리저리 다닌다. 그는 결코 범 위에서 내리려 하지 않는다. 범은 점점 배가 고파가는 법이다”. 처칠의 말이다.
국회의원 총선은 공화당 68명, 신민당 61명, 통일당 3명, 무소속 22명이 당선되었다.
53개 지역에서 공화ㆍ신민후보가 동반 당선되었다. 투표율에서는 신민당이 32.8%를 차지하여 공화당의 31.7%보다 1.1%를 앞섬으로써 의정사상 최초로 야당이 여당을 앞지르는 ‘이변’이 나타났다. 국민이 유신체제를 거부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잔혹성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쉽지 않지만 감옥의 양심수들에게 펜을 빼앗아 버린 처사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문명사에서 명저로 알려진 책 중에는 감옥에서 쓰인 책이 적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어느 정도 옥중 집필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박 정권은 김대중의 옥중 집필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진주교도소보다 더 철저하게 집필과 외부 서신을 차단시켰다. 그러나 김대중과 이희호는 이 봉쇄와 차단의 벽을 뚫었다.
하루 두 차례의 면회라고는 하지만 밖의 소식은 전혀 전달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나는 휴지에 몇 자 적어서 침대 위 포장지 밑에 놓았다. 휴지에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아 뾰족한 못처럼 심긴 철필을 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준비해 간 내 메모를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 가운데 구멍 속에 끼워 넣었다. 비밀 접선에 성공한 것이다. 남편은 먹을 것을 싸 간 포장지에 꾹꾹 눌러쓰고 이를 둘둘 말아 역시 두루마리 휴지에 넣어 내게 전했다. 하얀 글씨였다. 나는 주머니 속이나 양말 속에 이를 숨겨서 가지고 나왔다.
‘하얀편지’는 처음 옮기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제대하고 돌아온 홍업이가 곧 해독 전문가가 되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우린 점차 과감해져갔다. 국내외 신문에서 오린 중요 기사와 볼펜의 심을 남편에게 전하는 데 성공했다. 비로소 바깥세상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하얀편지는 보존되어 현재 김대중 도서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주석 16)
김대중에게도 기쁜 소식이 있었다.
1978년이 기울어가던 12월 27일 서울대학 부속병원 병실의 감금에서 형집행정지조처로 풀려났다.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였다. 박정희는 라이벌 김대중을 납치해 온 뒤 유신을 통한 간접선거로 두 번째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야 김대중을 풀어주었다.
1977년 12월 19일 서울대병원으로 ‘이감’된 지 1년여 만에 석방되었다.
51세에 구속되어 52세, 53세의 생일을 창살없는 감방에서 3년 여를 보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어느덧 50대의 장년이 되었다. 한참 활동할 나이에 여러해 동안 옥살이와 연금으로 시간을 축내었다. 뒷날 그는 자기 나이에서 옥살이 하는 기간을 빼달라고 농담을 하곤 하였다.
주석
16) 이희호, 앞의책, 175~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