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중독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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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생들을 대상으로 언터넷에 올려진 ‘스마트폰 중독 자가진단’을 실시해봤다. 그랬더니 15%가 정상이고, 65%는 중독 초기, 20%는 심한중독으로 나타났다. 85%가 이미 중독 상태라는 말이다. 수업시간 외에 스마트폰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쉬는 시간이나 저녁 시간에 책은 아예 보지 않고 스마트폰만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스마트폰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정상의 경우는 15%에 지나지 않았다. 염려했던 대로였다. 총 10문항 중 절반 이상인 6개 이상을 선택한 학생을 과의존 위험에 있는 친구들이라고 본다면 37%에 해당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21년 과기부에서 발표한 ‘2020년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 청소년의 35%가 과의존 위험군에 해당하였고, 이 것은 2019년 30%에 비해 5%가 늘어난 수치였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이 늘면서 5%라는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더불어 전 국민 과의존 위험군이 23.3%로 이미 1/4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2020년에 이어 2021년 코로나19가 지속되면서 이 수치는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 정도면 스마트폰 과의존에 해당하는 국민이 우리학교처럼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미 국가적으로 터닝포인트를 지났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진단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내가 아이들의 스마트폰 중독 때문에 문해력과 문장력은 물론 생각하는 능력도 떨어지고 있다고 말하니, 젊은 교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도 매일 스마트폰을 5시간 이상 사용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당연히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당황스러웠다. 중독을 더 이상 중독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이다. 어느 면에서 인간의 어떤 능력이 퇴화하고 마비가 시작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2021년에는 교육청에서는 학교에서 수업시간 외에는 스마트폰을 돌려주도록 하라는 지침을 담은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처음 그 공문을 보았을 때는 이거 미친 거 아니야? 욕설이 나올 정도였다. 스마트폰을 하나의 인권의 차원에서 권리로까지 보고 있었다. 이게 민주주의인가? 도대체 스마트폰이 유아 및 청소년기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무조건 못하게 막는 것도 문제지만 교육적 검토 없이 원칙을 정하는 것은 매체의 영향력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료 장학사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살까? 무감각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아니면, 교육청이 삼성의 하부기관이 된 것인지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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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스마트폰의 긍정적인 면은 가급적 다루지 않겠다. 그것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이미 누리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특히 성장기 청소년들에게 스마트폰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 중 스마트폰 중독을 다루려고 한다.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소위 Z세대의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을 쥐고 살아온 디지털원주민이라 불린다. 이들 중 책의 아예 한권도 읽지 않고 성장하는 친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책을 통한 지식보다 스마트폰을 통한 정보에 익숙하다. 게임의 감각적 자극반응에 길들고 감각화된 전자정보들에 반응하며 이성에 호소하는 지식보다 감각과 감성에 호소하는 정보에 익숙해졌다. 스마트폰의 진화와 함께 점차 스마트폰에 적응한 성인의 경우는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던 활자문명의 지식과 전자정보의 공존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유아기부터 스마트폰을 쥐고 성장한 세대는 활자문명에서 습득되고 이성중심의 사고와 담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가 어쩌고 민주주의가 저쩌고 하며 사회를 분석하고 다양한 담론으로 논의하는 것이 영 피곤한 일이 되어버렸다. 누가 재미나게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감각적인 정보로 마사지를 해주면 좋겠다. 멕루한의 말처럼 메시지 대신 미디어의 마사지를 받는 삶이 되어가고 있다.
K는 마음이 따뜻하다. 먹을 것을 잘 나눠주고 친구들에게 너그럽고 잘 웃는다. K가 좋아하는 것은 스마트폰으로 웹툰 보는 것이고 게임하는 것이다. 교실에 만화책을 가져다 놓으니 한 동안 만화책을 열심히 보기도 했다. 하지만 줄글로 된 책은 전혀 보지 않았다. 한편 K는 숙제를 거의 내지 않는다. K의 연습장에는 초등학생들의 졸라맨 수준의 사람들이 전쟁터가 묘사되기도 했다. K는 서너줄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아직 한 페이지를 넘기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회의 때 의견을 물어보면 당황하고 대답을 못한다. 내가 K에게 받은 인상은 K는 마음이 착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제 청년이 되는 K에 대해 나는 스마트폰 중독이라도 진단한다. 솔직히 걱정된다. K의 시야는 스마트폰 안에 고정되어 있고, K의 세계는 스마트폰에 의해서 매개되며, 스마트폰으로 매개되지 않은 세계는 K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감각자극의 강도 면에서 관심 면에서 그렇다. K가 사는 세계는 내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르다. K가 보여주는 생각 없음 현상은 사회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한편 K의 경우는 항상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며 눈에 띄는 비만이다. 요즘 같은 소비+전자 자본주의시대에는 무엇이든 쉽게 주문할 수 있고 부모님의 카드와 용돈이 허락하는 한 아이들은 무제한적 소비에 쉽게 노출된다. 아이들의 소비중독이 심해지는 것을 눈치 채는 부모는 많지 않다. 대부분 한국의 부모들은 자보주의 체제 아래 소비자유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독은 중독대상에 대한 과의존을 낳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능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예로 S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으면 불안해진다. 처음 기숙사에 왔을 때는 스마트폰을 불안해서 사감실 문을 강제로 열다가 손잡이를 망가뜨리는 일도 있었다. 스마트폰을 달라고 매달리고 울며 어려움을 호소하곤 했다. S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고 농구 등의 운동과 같은 활동적인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책은 아예 읽지 않는다. 처음엔 초등학생보다 못한 글씨로 저학년 수준의 글을 써 많이 놀랐다. 동심의 순수함이 느껴졌지만 고등학생으로서의 어휘력과 문장력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과 말하는 것을 무척 좋아해 대화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글과 대화의 문맥을 파악하고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스마트폰의 SNS를 통해 쉼없이 문제가 발생했다. 야동 보는 것과 음담패설적 농을 섞어 말하는 것 때문에 오해를 받고 SNS로 이성과 만나며 이런저런 일에 얽히고, SNS에서의 욕과 싸움, 왕따 등으로 여러 번 문제가 있었다. 스마폰이 S삶을 쥐고 흔들었다. 가볍게 버튼을 누르지만 현실의 폭풍은 무거웠다. 자전거를 좋아하기에 자전거에 관련된 그림책 등을 줘보기도 했지만 S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졸업 무렵과 졸업을 하고 당장 생존의 자립 문제가 다가오자 자격증 책을 가지고 씨름하고,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경험을 쌓으며 사회를 배우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지만, 한편 S가 살아가면 끝내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아 아쉽다. 특별한 관심이 없는 한 사회 인문적 소양을 얻기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선량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상일 것이다.
한편 M은 앞의 두 친구와 비교하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 전혀 돌봄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M이 학교에 왔을 때 놀랐다. M은 전혀 돌봄을 받지 못했고, M이 가진 것은 스마트폰과 학교 친구들이었다. 학업은 당연히 관심 밖이었다. M의 입에는 거친 욕이 쏟아졌지만 M은 착한 심성을 가진 학생이었다. 처음 본 M의 글은 역시 책을 읽고 글을 써보지 않은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보다 심각한 것은 경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경제적 빈곤이 스마트폰에 과의존 하게 만들고 또래집단의 좁은 관계 외에 사회적 경험이 전무했다. 경제적 부와 빈곤이 어떻게 세습되고 고착화해 차별로 작동하는지 M은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M은 집중하고 지속하는 힘이 있었다. 낮은 자존감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근육운동을 했고 그것에 의해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다. 책은 고통스러웠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글로 쓸 때는 생각하는 힘이 느껴졌다. 가난으로 인한 삶의 불안이 생각을 독려하는 것 같았다.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졸업을 하고 M은 취업을 하였지만 스마트폰 도박으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몇 년을 일해서 갚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재미로 시작한 인터넷도박이 가난한 청년의 삶에 노예적 족쇄를 채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M의 경우처럼 스마트폰 도박으로 삶이 뒤틀린 다른 학생도 있었다. 스마트폰 도박은 인터넷게임과 함께 남학생들의 하위문화로 삶을 황폐화시키는 주된 문제이기도하다.
한편 여학생들의 경우 스마트폰 과의존이 우울증과 만나 우울증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 경우 자해로 발전하기도 한다. 기질 혹은 가정의 문제에 의해서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스마트폰이 도피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것이 현실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SNS 관계망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스마트폰 안에만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아이들은 오히려 현실이 낯설다. 어서 빨리 그들이 살고 있는 스마트폰현실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스마트폰에서 깨어난 의식과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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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학생들에게 보다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것은 게임중독이다. 게임 안에서 즉각적으로 자극반응시스템에 익숙해진 뇌는 전두엽을 공백상태로 놔두고 편도체를 끊임없이 활성화시킨다. 생각 없는 흥분상태에서 게임을 살아간다. 게임세계의 이분법은 디지털와 일치한다. 선과 악, 생존과 죽음, 나와 적, 전체 아니면 무, 이런 대립관계 안에서는 이해도 사유도 필요 없다. 점점 참을 수 없게 된다. 재미가 없다. 외롭다. 심심하다. 보다 재미있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스마트폰을 하는 것이다. 점점 강한 자극에 길들여져서 현실이 점점 낯설고 권태로워진다. 게임, 웹툰, 음악, 영상. 의미보다 쾌락이 필요하다. 인간의 뇌 회로판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스마트폰 중독이 심화되기도 했지만 현실세계를 대체할 메타버스의 세계가 핵폭발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급속히 무능해지고 무력해질 것이다.
아이들은 점점 더 심각하게 중독상태에 빠져들고, 조만간 몸과 정신이 업그레이드된 스마트폰과 완전히 일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독이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뭔가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방향으로 전진하는 문명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배타적인지 모르고 있다. 근본적인 질문과 사유도 차츰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사는 정보의 세계는 더이상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돈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돈이 된다면 비현실도 현실이 되고, 돈이 안 되면 현실도 비현실이 된다. 의미가 사라진 시대에 모든 가치의 자리는 돈이 차지한다. 비정상이 정상을 압도하고, 비현실이 현실을 압도한다.
그리고 뭐가 남겠는가? 알다시피 돈은 노예를 만든다. 신석기 시대 이후 노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노예제는 전쟁포로가 아니 정상 상태에서는 소유의 독점에 의해 배제된 비소유자들이 자신을 소유자들에게 기탁하며 시작된다. 인터넷도박에 빚을 지고 노예같이 일을 해서 빚을 갚아야 하는 청년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그들이 노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렇게 전도되어가는 가상현실의 현실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누가 정상을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짜 현실계가 무엇인지 묻고 발견하고 그것과 견주어 가상현실의 거짓을 폭로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맥락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한 개 정보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맥락이 사라진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처럼 이제 맥락을 읽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미래의 예언자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다시 구약의 시대에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는 이렇게 저물고 있는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지 않는 인간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스마트폰 중독 상태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