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수도 카투만두를 떠나오는 것이 아니라 탈출하는 것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카투만두는 내가 32년 전 부터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 하고는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가깝게는 2년전 보다도 현저히 바뀌고 있었다.
이렇게 네팔이 빨리 바뀐 뒤에는 몇가지 요건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마오들의 활약으로 산중의 사람들이 불안해서 수도 카투만두에 많이 내려와서 그런다고 했다.
그리고 활동한 마오들도 이제 그들이 정권을 잡은 관계로 카투만두에 내려와 머물기에 그런다고 했다.
카투만두에는 숙소가 모자라 시 외각에는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차량의 소음과 먼지 쓰레기 이젠 카투만두에서 살기가 싫다.
그런 관계로 전력소모가 많아 하루에 16시간이 정전되고 수돗물이 몇칠씩 걸러 나오고 해서 지내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는 네팔 젊은 인력이 산업연수원으로 교육받고 해외로 나가 노동으로 벌어온 돈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오토바이를 구입해서 카투만두는 온통 오토바이 세상이 되었다.
오토바이는 좁은 골목과 언덕이 많아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네팔 지형적 특성에 적합한 운반수단으로 해서 오토바이 도시가 되었다.
길을 건넌다든지 좁은 골목길을 갈 때는 겁이 날 정도이다. 여기서 다쳐봐야 본인만 손해다.
그래서 카투만두를 떠나 포카라를 최종 정착지로 하고 무조건 서쪽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였다.
옆지기는 카투만두에 3번째 온 관계로 관광은 하지 않아도 되고
아들은 이곳에서 앞으로 3년의 세월을 견뎌야 하므로 시내 관광은 지가 알아서 할 것 같아 무조건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무거운 짐은 트랙킹사에 요금을 주고 포카라의 아는 집으로 부치고 몇일 먹을 쌀과 비상식 그리고 양념 일부만 지참하고 길을 떠난다.
부분 부분 로컬버스도 타고 짚차도 타고 농가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잠도 자고 그들이 먹는 란이라든지 짜파개티, 알루(감자) 삶은 달걀을 사먹으면서 이틀만에 고루카에 당도했다.
고르카는 카투만두에서 포카라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 중도에 내려 다시 갈아타면 반나절이면 당도하는 거리지만 이번에 네팔에 온 목적중에 한가지는 많이 걸으면서 돌집과 흙집의 자료를 많이 구하는 일과 그리고 멋진 책 표지모델을 ?아보기로 하였기에 3개월동안 시간이 있으므로 한가하고 넉넉한 심경으로 트랙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 카투만두에서 가장 값이 저렴한 로컬버스를 타고 말라카우에 내려 다시 차를 갈아타고 다딩에 내려 그곳에서 짚차를 대절해서 고루카와 가장 가까운 산중마을인 다바에 내려 1박을 하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마침 산언덕 능선의 마을이라 히말라야 산맥의 설산이 바로 코앞에 나타나 그동안 건조기의 카투만두 분지의 먼지 구덩이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한 것이 다행으로 여겨진다.
좌측에는 마나슬루(8163m)가 보인다 마나슬루는 세계등반사상 두번째로 많은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다. 그 것도 우리나라 등반대의 일이라 자꾸만 눈이 그곳으로 가곤 한다.
이 산 능선마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7천급의 봉우리는 내가 산이름을 몰라 지도에서 ?아 원문그대로 옮겨싣는다 파빌7110m, 랍샤 찰보7150m, 가니시7405m, 양가라7429m가 한 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어 히말라야 설산을 한테 모아 놓았다.
이렇게 히말라야 고봉이 한곳에 모여 있는 곳은 내가 알기로는 안나푸르나 1 2 3 4봉과 남봉의 다섯봉우리가 한데 모여 네팔의 제1의 트랙킹지역으로 입장료도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지역의 입장요금의 배인 2000루피를 받는 안나푸르나 보다 더 가까이서 7천급의 고봉을 볼 수 있는 것이 행운중에 행운이였다.
다음날 아침일찍 먹고 하루종일 걸어서 고르카에 당도 했다.
고르카를 오는 도중 차량의 길도 없고 그렇다고 험한 산길은 아니지만 산능선길을 중심으로 서쪽을 걷다보면 오른쪽의 7천급 설산은 계속 보면서 걷게 된다.
산능선이지만 대부분의 집들이 산 능선에 있기 때문에 마을 수돗물 시설이 잘되어 어디를 가든지 물은 넉넉하였다.
가는 곳 마다 돌로 지은 장방형의 돌집에다 대부분 지붕도 얇은 돌을 이은 집이지만 실내는 그냥 흙바닥이고 침대가 몇개 놓여있는 그러 집이다.
오는 중에 아주 오래된 전통의 둥근 집을 보았다.
처음 접하는 둥근 집이라 호기심도 가고 해서 사진을 많이 찍다보니 그 곳에서 점심도 해 먹고 해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이번 여행길에는 가이드와 포타 없이도 그동안 네팔말도 조금 알고 우리 식구가 3명이므로 강도나 험한 꼴을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고르카는 조그마한 도시지만 잠을 잘수 있는 호텔이 4곳이었다. 우리는 가장 저렴한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드르바르(왕궁)를 ?아 나섰다.
고르카는 드르바르(왕궁)가 2곳이였다. 하나는 도시 중심에 있었고 하나는 산 정상에 있었다.
고르카는 24왕국 ㅣ대로 불리는 18세기에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던 고르카왕 프리티비 나라연 사허는 군사적으로 우수한 인물로 즉위하자마자 주변 왕국을 복속시키고 카투만두를 공략해 점령하고 카투만두 왕국의 왕위를 물려 받았다.
그 뒤 고르카 왕족 프리티비 왕이 죽은 후에도 세력을 계속확장해 19세기에는 대영제국과 맛섰다.
네팔군은 막강하였기에 2번의 전쟁에서도 영국은 승리할 수 없었고 마침내 포기하고 우수한 고르카 병사들을 용병으로 체용하기에 이러렀다. 네팔 출신 용병을 의미하는 영어 "구르카"는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계속)
이 사진은 '하누만 도카'이다.
더르바르(왕궁이란 뜻)광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옛 왕궁 입구 앞의 광장이 나오는데 그 곳에는 항상 총검ㅇ로 무장한 위병들이 서 있는 좁은 입구 앞에는 붉은색 천이 걸려 있는 원숭이 신 하누만 동상이 나온다. 이곳이 하누만 도카이지만 옛왕궁과 그 부근을 하누만도카라고 불린다.
쉬염부나트이다.
카투만두 시내 서쪽 근교 2km정도 녹음에 둘러싸인 언덕꼭대기에 새하얀 스투바 하나가 있다.
카투만두 분지가 호수였던 때 부터 언덕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쉬염부나트 사원이다.
여행자들이 많이 묵는 숙소인 타멜지역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면 강이 나오고 계속걸어가면 바로 나온다.
꼭 택시를 타지 않아도 걸어가면서 네팔의 뒷골목도 구경거리이고 경비도 줄이고...
드러바르(왕궁)광장에서 아셈시장으로 가는 초입
여기에 오래된 네팔건축물을 많이 볼 수 있고 네팔에서 가장 붐비는 아센시장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같이 없는 것이 없다.
키르티푸르 광장에서 아래로 보면 나오는 학교이다.
카투만두에서 서남쪽의 언덕에 있는데 마치 시간이 정지된듯한 네와르족의 오래된 건물이 많이 나오는 곳인데 볼거리는 2곳인데 2곳의 거리가 언덕위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 자칫하면 1나는 그냥 못보고 내려오게 된다.
하나는 칠란데오 스투바 또 하나는 우마마훼쉬르 사원이다.
고루카에서 나타난 사하왕조가 카투만두를 침공할 때 마지막으로 함락된 도시이다.
원숭이가 많이 사는 수웸부나트이다. 카파른 계단을 오르면 원숭이가 많이 나타난다 비닐 같은 소리나는 것을 손에 들고 가면 바로 달려들어 비닐을 채어가니 조심해야 한다. 이 곳에서 카나투만두 전역을 볼 수 있다.
첫댓글 좋게는 문명이 발달하고 있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물들기 시작했다는 네팔이라지요~~~
카투만두에서는 과거의 왕궁 건물이나 앗산시장과 주위의 관광지를 둘러보고 바로 때묻지않은 산이나 촌으로 트랙킹을 나서야 합니다.
먼지 소음으로 옛날에 비해 사람 살 곳이 못 되는듯 합니다.
세세한 설명또한 역사의 일부를 보는것 같아 즐겁습니다."고르카" 군대 용감성... 옛 18세기 그 용병들? 그들을 부추긴 티벳 침공한 때부터 ...널리 알려지니 지금까지도 그 나라 최고의 희망 업종...아~ 글구 "구들연구소" 많이 듣던...혹 양양에 있지 않나요?
맞습니다. 구들연구소 사진을 빌려 싣다 보니...
ㅎㅎ저위에 머리 질끈 동여맨 분이 구들 연구소 무운 선생님 그옆에 가족분들도 계시구면유~~
무운 구들 연구소 무운 선생님도 알고 보니 ... 산을 무척 좋아하고.. 네팔을 돌집 흙집 자료를 찾으러
머물던 시간이 많았던 같더군요..
고맙습니다.
가끔 들어와서 함께 배우면서 즐겨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