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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영등포구 지명 유래(신길동,여의도동,양평동,도림동,문래동,당산동,양화동)
한강수 추천 0 조회 228 12.06.07 07: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등포역)

 

# 영등포구

조선시대에는 여의도동만이 한성부 연희방에 속했으며 양화동이 경기도 양천현에 속하고 나머지 전 지역은 경기도 금천현에 속했으며, 1895년 여의도동을 제외한 전 지역이 인천부 금천현에 속하였으며 양화동은 역시 인천부 양천군에 속하였다. 1896년 여의도동만이 전처럼 한성부에 속하고 나머지 전 지역이 경기도 금천군에 속했으며 양화동은 경기도 양천군에 속하였다. 그 뒤 1914년 대부분 지역이 경기도 시흥군에 속하고 여의도동이 고양군에, 그리고 양화동은 김포군에 속하였다. 그 후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하여 당시 경성부 구역을 확장하였는데 이때, 대림동만이 경기도 시흥군에 속하고 나머지 전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 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출장소를 폐지하고 구제(區制)를 실시하였는데 이때 영동포구를 비롯해서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마포구, 용산구 등 7개 구를 설치하고 행정기관으로 영등포구역소를 두어 구장의 관할하에 있었다. 광복 후 1945년 종전의 구장을 구청장으로 하고 구역소를 구청으로 하여 영등포구청이 되었으며, 1946년 정(町)을 동(洞)으로 개명하여 영등포구에 속하였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동면의 구로리ㆍ도림리ㆍ번대방리가 영등포구에 편입되었으며 곧 이어 리(里)는 동으로 바뀌었다. 그 뒤 1963년 법률 제 1172호에 의한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ㆍ김포군ㆍ부천군의 많은 지역이 영등포구로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3년 대통령령 제 6548호로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ㆍ신설되었는데 관악구로 나간 마을은 노량진ㆍ상도ㆍ봉천ㆍ본ㆍ흑석ㆍ동작ㆍ사당ㆍ대방ㆍ신대방ㆍ신림ㆍ방배ㆍ잠원ㆍ반포ㆍ서초ㆍ양재동 등 21개 동이었다. 그 후 1977년 대통령령 8666호에 의하여 강서구 분리ㆍ신설되어 염창ㆍ목ㆍ등촌ㆍ화곡ㆍ신월ㆍ마곡ㆍ가양ㆍ내발산ㆍ외발산ㆍ공항ㆍ방화ㆍ개화ㆍ과해ㆍ오곡ㆍ오쇠ㆍ신정동 등이 강서구 관할이 되었으며, 3년 뒤인 1980년 대통령령 제 9630호에 의하여 구로구가 신설되자 구로ㆍ가리봉ㆍ독산ㆍ시흥ㆍ고척ㆍ개봉ㆍ오류ㆍ궁ㆍ온수ㆍ천왕ㆍ항동 등이 구로구의 관할이 되고, 영등포ㆍ여의도동 등 9개 동이 영등포구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산2동 주민센터 앞)


# 당산동

마을의 언덕에 당(堂)집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 마을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 지칭했는데 이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이를 보호했고, 또 당집인 동제당이 있어 당산이라고 불려지게 됐다. 조선시대에 웃당산ㆍ원당산ㆍ벌당산의 자연부락이 합쳐진 동이다. 웃당산은 현재 은행나무재가 있는 당산동 110번지 일대로 약 20가구가 있었으며, 원당산은 4ㆍ5ㆍ6가 일대로 옛날 당집이 있는 마을로 약 40가구가 살았다. 벌당산은 안당산이라고도 했는데 벌판이 있던 곳에 생긴 20가구의 마을로 당산동의 안쪽 마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 상북면 당산리였다가 1895년 칙령 제 98호에 의해 인천부 금천군 상북면 당산리가 되었으며 1896년 칙령 제 36호에 의하여 경기도 금천군 당산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북면 당산리라 하다가 1920년 영등포면 당산리가 되었으며 1931년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 당산리라 하다가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 당산정이 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 아래 있었으며 그 뒤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영등포구가 설치됨에따라 이의 관할 아래 있었다. 1945년 영등포구에 속했으며,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당산동으로 하여 영등포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산동은 1ㆍ2ㆍ3ㆍ4ㆍ5ㆍ6ㆍ7가로 되어있다.

 

 

대림동

신대방동(新大方洞)의 '대(大)'자와 신도림동(新道林洞)의 '림(林)'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 상북면 도야미리 등이었으며 1895년 칙령 제 98호에 의해 인천부 금천현에 속했으며 1896년 칙령 제 36호에 의해 전국을 13도 339군으로 개정하고 5등으로 구분하였는데 대림동은 경기도 38군의 4위에 해당되는 경기도 시흥군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일제가 자의로 부ㆍ군을 통폐합할 때 이곳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도림리로 하였으며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동면 도림리로 하여 변동없이 내려왔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에 속하여 도림리가 신도림동이 되었으며 그 뒤 1980년 대통령령 제 9630호에 의하여 구로리가 신설되고 이어 서울특별시조례 제 1362호에 의해 동 명칭 및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때 신도림동을 대림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도림동

산 형국(形局)이 마을 뒤에 성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국도(國道)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가 도림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 상북면 도야미리 등이었다가 1895년 칙령 제 98호에 의하여 인천부 시흥군에 속했으며 1896년 칙령 제 36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동면과 상북면에 속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기도 고시 제 7호에 의해 일제가 자의로 부ㆍ군을 통폐합 할때 도림동은 도성 밖이라 하여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도림리가 되었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하여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고 도림정이라 하여 영등포출장소 관할 하에 있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를 실시하여 영등포구역소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도림동으로 바뀌었으며,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해 있던 도림리 일부가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도림동으로 불리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문래동

일제 때 이곳에 방직공장이 들어서자 일본인들에 의해 '사옥동(絲屋洞)'이라 불리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광복 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이라고 지었다는 해석이 있고 일설은 학교와 관공서들이 들어서자 "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전자의 설을 주장하는 주민들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 상북면 도야미리 등에 속했으며 1895년 칙령 제 98호에 의해 인천부 금천군 상북면에 속했으며 1896년 칙령 제 36호에 의해 경기도 금천군 상북면에 속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도림리에 속했으며 1936년 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관할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이 되어 일제식 동명인 도림정이 되었다. 그 뒤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영등포구 사옥동이 되어 영등포구역소 관할 아래 있었다. 1946년 미군정법령 제 106호에 의해 서울시 영등포구 사옥동으로 하였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도림동 일부와 영등포동 일부를 사옥동으로 하였다가 1952년 문래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문래동은 1ㆍ2ㆍ3ㆍ4ㆍ5ㆍ6가로 되어 있다.

 

(신길1동 소재 영신초등학교)


# 신길동

신길동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길(新吉)'이란 새로운 좋은 일이 이 마을에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신길리였으며 1895년 칙령 제 98호에 의해 인천부 금천군 하북면에 속했으며, 1896년 칙령 제 36호에 의하여 경기도 시흥군 하북면에 속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경기도 시흥군 북면 신길리였다가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하여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이 되어 일제식 동명인 신길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하여 구제도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역소의 관할이 되었다. 광복이 되자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영등포구 신길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양평동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어 서민들의 한강 도강(渡江)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楊花津) 근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 즉 '양화진(楊花津)'의 '양(楊)'자와 벌의 '평(坪)'자를 따서 양평동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 상북면 양평리였으며, 1895년 칙령 제 98호에 의해 인천부 금천군 상북면에 속했으며 1896년 칙령 제 36호에 의해 경기도 금천군 상북면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경기도 시흥군 북면 양평리라 하다가 1920년 시흥군 영등포면에 속했으며 1931년 시흥군 영등포읍 양평리로 했으며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영등포출장소에 속하여 일제식 동명인 양화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역소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양평동은1ㆍ2ㆍ3ㆍ4ㆍ5ㆍ6까지 있다.

 

# 양화동

양화동은 관할 행정동인 양평2동에 부속된 법정동으로서, 한강의 선유도에 인접하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한강을 건너다니던 양화도나루터 주변지역인 이 일대에 옛부터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혀진 이름입니다.
지금의 양화대교 하류쪽의 김포공항으로 가는 양화교 근처에 한강을 건너던 나루터인 양화도(楊花渡)가 있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 남산면 양화리였으며 1895년 칙령 제 98호에 의해 인천부 양천군 남산면에 속했으며 1896년 칙령 제 36호에 의해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양화리였다.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일제가 자의로 부ㆍ군을 통폐합을 단행할 때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가 되었으며,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하여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하에 두면서 일제식 동명인 양화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역소에 속하였는데 역시 양화정이라 하였다. 그 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양화동으로 하여 영등포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의도국회의사당)


# 여의도동

조선시대 잉화도ㆍ나의주 등으로 불렸던 여의도는 이 섬이 홍수로 잠길 때도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만은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 사람들이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돼 여의도가 됐다고 한다.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여의도에 대해 '서강(西江) 남쪽에 있는 축목장으로 사축서ㆍ전생서의 관원 한 사람씩을 보내 목축을 감독한다'라고 적고 있어 조선 초부터 이곳이 땅이 넓고 편평하여 양과 염소를 기르는 국립목장 노릇을 한 곳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말의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율도(밤섬)와 여의도는 서로 붙어 있었는데 홍수로 갈라졌다고 하며 나의주라고 기술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이곳은 고립된 섬이 아닌 현재의 영등포동에 이어진 삼각주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성외) 여의도계 여의도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여의도계 여의도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하여 종래 서울 성밖 지역 8방을 8면으로 고쳤는데, 이때 여의도는 경성부 연희면 여의도였으며 그 뒤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성외 지역 8면을 경기도 고양군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여의도는 건너편 율도와 함께 용산면과 서강면을 합한 용강면 여율리라 했다가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하여 경성부에 편입되어 여의도정이라 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 실시에 의해 영등포구역소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등포시장역)


# 영등포동

영등포동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포(浦)'는 물가, 즉 바닷가나 강가를 의미하는 글자이지만 '영등(永登)'이라는 명칭이 어떤 의미에서 붙여졌는지 의문이다. 우리 민속에 음력 정월 또는 2월중에 '연등놀이' 또는 '영등굿'이라는 것이 있다. 이 갯마을이던 영등포의 지명이 우리 고유의 민속인 '연등' '영등'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지 막연하게 추측해 본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영등포리였으며 1895년 칙령 제 98호에 의해 인천부 금천군 하북면에 속했다가 1896년 칙령 제 36호에 의해 경기도 금천군 하북면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경기도 시흥군 북면 영등포리라 하였으며 1920년 시흥군 영등포면에 속하다가 1931년 시흥군 영등포읍 영등포리라 하였으며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하에 두면서 일제식 동명인 영등포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 실시에 의해 영등포구역소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영등포동으로 하여 영등포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등포동은 현재 1ㆍ2ㆍ3ㆍ4ㆍ5ㆍ6ㆍ7ㆍ8가로 구분되어 있다. 

 

- 본글은 지익훈님의 블러그에서 인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로가기  http://blog.naver.com/mdo1993/12005578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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