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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정꼴짝 원문보기 글쓴이: 쇠돌이(안병주)
동방문명의 뿌리 배달국시대(18대 환웅, 1,565년)
◎ 환웅桓雄의 대이동과 광명나라 배달(倍達)의 개국
환국말기인 약6천년 전 환국의 대이동 때, 평소 동방에서 원시생활을 하던 인간을 구제하고 싶은 꿈을 간직해오던 환웅(桓雄) 천황(天皇)께서는 환인(桓因)의 명을 받고 제세핵랑군이라 불리는 동방문명 개척단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삼신산)으로 오셨다. 거발환 배달환웅이 동방 백두산 일대에 문명을 개척할 당시 그 지역에는 토착민이었던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살고 있었다. 즉, 배달국은 환웅께서 이 웅족과 호족의 협력으로 결합(부족연맹)하여 건국한 것이다. 이 두 족속은 환웅께 하늘의 계율을 따르는 밝은 백성(桓族)의 일원이 되기를 간절히 구하고 3·7(21)일간의 수도생활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때 웅씨족은 마침내 순종하여 광명의 백성(桓民)으로 교화되었고, 사납고 약탈에 능한 호족은 교화에 실패하여 사방으로 유리되었다.
도읍은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밑의 신시(神市)에 정하시고, 나라이름은 ‘배달(倍達)’이라 하셨다. 배달건국의 창세이념은 환인으로부터 내려받은 ‘홍익인간(弘益人間) · 재세이화(在世理化) · 광명개천(光明開天)’ 의 3대정신으로 정하시고, 토착족인 웅족, 호족을 융합하여 교화하였다. 이 배달국은 초대 거발환 환웅으로부터 제18대 거불단 환웅까지 역년 1,565년(BCE 3898~2333년)동안 지속되었다.
배달국은 인류 시원문명국가인 환국의 환인천제(桓因天帝)의 정통성을 유일하게 계승한 장자국이다. 그 이유는 환국의 마지막 환인이자 7대 지위리 환인으로부터 정통의 표시인 천부(天符)와 인(印) 3개을 받았고, 명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은 이 배달국 시대 때부터 정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한민족을 반만년 배달민족 또는 배달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바로 환웅천황의 신시배달 건국의 역사적인(실제 있는) 사실에서 유래된 것이다.
◎ 신시(神市) 시대 (1대~13대 환웅)와 청구靑邱 시대(14대~18대)
배달국(倍達國,BCE3898 ~ 2333년)은 신시 배달국 시대(神市,1대 ~ 13대 환웅)와 청구 배달국 시대(靑丘,14대 ~ 18대 환웅)로 나누어지는데, 신시(神市)배달은 제1대 배달(倍達) 환웅(桓雄)께서 BCE 3898년에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개천(光明開天)의 건국이념을 가지고서 백두산 신시(神市)에 개국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청구(靑丘)배달은 제14대 치우(蚩尤) 천황께서 BCE 2707년에 재위에 오른 후, 청구(靑丘) 즉 지금의 만주산동반도 태산(泰山)아래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한다. 신시(神市)는 서불로도 불리다가 서라벌(서불의 사투리)로 바뀌다가 오늘날의 서울이란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이 우리나라를 예로부터 청구(靑丘)라고 불렀는데,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원동중의『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국(桓國)의 말기에 환인(桓仁)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종을 주어, 환웅(桓雄)은 3,000명을 이끌고,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니,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신시 역대기(神市歷代記)』에는 더욱 상세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倍達國)은 환웅(桓雄)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神市)이다. 뒤에 배달국(倍達國) 14대 치우(蚩尤)천황이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적혀있다.
◎ 신시神市 시대 1대 거발환 환웅(居發桓, 94, BCE 3897, 120세)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86, BCE 3803, 102세)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99, BCE 3717, 135세)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107, BCE 3618, 129세)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93, BCE 3511, 115세)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98, BCE 3419, 110세) 7대 거련 환웅(居連, 81, BCE 3320, 140세)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73, BCE 3239, 94세) 9대 양운 환웅(養雲, 96, BCE 3166, 139세) 10대 갈고 환웅(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E 3070, 125세)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92, BCE 2970, 149세)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105, BCE 2878, 123세)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67, BCE 2773, 100세)
◎ 청구靑邱 시대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E 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89, BCE 2597, 118세)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56, BCE 2453, 99세)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72, BCE 2452, 97세)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E 2380, 82세)
◎ 신시배달은 동방문명의 뿌리: 교화敎化 시대
환웅 천황께서는 상기 3대 이념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신교의 경전이었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설하고 하늘의 진리로 교화하였다. 배달국 시대는 교화의 시대로서 초대 거발환 배달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BCE 3898년, 신지(神誌=사관)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鹿圖)문자’를 만들게 했는데,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 태호복희太昊伏犧(BCE 3528 ~ 3413): 역사상 최초로 우주관 정립
- 배달의 동방 9족(九夷) 가운데 풍이(風夷)족 출신으로 인류역사상 최초로 풍씨 성(姓)을 썼음 - 「태백일사」의「신시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제5대 태우의 천황의 12대 막내아들임 - 송화강에서 하도(河圖)를 계시받아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으신 분임 - 우주의 변화원리를 음양논리로 처음 밝혀 역철학(태극·음양·오행·팔괘)의 창시자가 됨
태호복희씨
따라서 주역은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절시켜 나간 성인들이 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 인데, 모두 동이족 혈통출신. 주역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태호복희의 하도
◎ 염제 신농神農(BCE 3218 ~ 3078): 경농과 의학의 창시 - 제8대 안부련 환웅의 신하로서 웅씨족의 후손이었던 소전(少典)의 아들임 - 풍씨 성이 15대에서 단절되어 염제신농의 강씨 성姓이 현존하는 인류최초의 성씨가 됨 - 백가지의 약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하여 경농과 의학의 창시자로 불림
◎ 제 14대 자오지 치우천황(BCE 2706 ~ 2598): 배달문화의 최고 전성기 - 도읍을 청구(산동반도에 소재)로 옮김
-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함
- 중국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황제 헌원(기원전 2692~2593년)과 그 유명한 탁록(하북성 소재)에서 10년간 73회의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음
-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됨 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兵主)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낸 후 군사를 일으키며,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더욱 공경함
- 당시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헌원에게「삼황내문」을 전하고 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쳐 줌으로써 한족의 황하문명의 뿌리역할을 함
탁록대전 상상도
결론적으로 위대한 우리 한민족은 인류 최초의 시원역사인 환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신시 배달국을 열어 동방문명의 뿌리가 되었으며, 중국 한족이 그토록 자랑하던 황하문명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발해연안문화인 홍산문화, 요하문화, 우하량문화가 그 확실한 증거다.
이 배달국을 이어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으로 국통맥이 이어져 한민족 상고문화의 최고 전성기인 47대 단군(2,096년)의 찬란한 역사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 한족과 일본에 의한 상고역사의 왜곡으로 이러한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하여 한민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안타깝고 서글픈 역사현실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