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3838]배숙자여사-水亭(수정)
배숙자여사 - 水亭(수정)
李白《過崔八丈水亭》
최씨의 물가 정자에 들러서
高閣橫秀氣 고각횡수기
淸幽幷在君 청유병재군
檐飛宛溪水 첨비완계수 宛溪 경정산 동쪽의 강
窗落敬亭雲 창락경정운
猿嘯風中斷 원소풍중단
漁歌月裏聞 어가월리문
閑隨白鷗去 한수백구거 白鷗..海客狎鷗 관련
沙上自爲群 사상자위군
높은 누각에 빼어난 기운 가로 지르고
맑고 그윽함이 그대와 함께 있네
처마에는 완계의 물이 날아가고
창문에는 경정산의 구름이 떨어지네
원숭이 울음소리 바람속에 끊기고
달빛 속에 어부의 노래 들린다
한가하게 흰 갈매기 따르며
모래사장에서 스스로 무리를 이루네
김정회(1903-1970)는 자가 중립(中立)이고 호는 보정(普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인으로 선조는 조선 개국 공신인 익원공(翼元公) 사형(士衡)이며 14세조는 영모당(永慕堂) 질(質)이고, 증조는 만수당(晩睡堂) 영철(榮喆)이며 아버지는 회천(晦泉) 재종(在鍾)이다. 그는 1903년(광무 6) 10월 28일 호남의 영산인 방장산 기슭의 도산(道山)에서 출생했고, 어려서부터 종조(從祖)인 항재(恒齋) 순묵(純黙)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약관에 경서자집(經書子集)을 두루 통달했다.
1941년 여름에 금강산에 가서는 명경대, 연화담, 만폭동, 옥류동, 망군대, 만물상, 해금강을 둘러보고는 주옥같은 명시를 남겼으며, 가끔 월명암과 개암사도 만유(漫遊)했다.
보정은 수정(水亭:보정 김정회가 편액을 씀) 옆에 사각형의 연방죽을 만들어 놓고, 해마다 연향을 맡으며 차를 마시면서 시를 지었다. 보정의 문집인 '연연당문고’에서 ‘수정상련(水亭賞蓮)’시를 음미해보자.
“날(日)을 살펴 정자에 오르니 연봉오리들이 촘촘하고(課日登亭數蓮朶), /
반쯤 핀 것은 적고 피지 않은 것만 많구나(半開猶少未開多). /
작은 봉오리 큰 봉오리가 층층(層層)으로 생기니(小峯大峯層層出), /
반 이랑의 네모진 못에 모두 연꽃들이로구나(半畝方塘都是花).”
보정은 오로지 시속에 타협하지 않고 부귀와 영달을 멀리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연과 벗하면서 여생을 즐기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교우로는 고당 김규태, 효당 김문옥 송농 이동범 등으로, 이들은 시문과 서화로 교환함으로써 낙을 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이들은 모두 신구의 학문을 겸한 지성인이지만, 일제의 암흑기에 묵묵히 지방의 교육에 힘쓰며 교육에 헌신한 학자이며 예술가들이다.
김정회고가는 현재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당 등 4동과 정자, 화장실 등 모두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수당(晩睡堂)’이라고 쓴 편액이 있다. 기단의 네 모퉁이에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받기 위한 돌확이 놓여 있다. 안채 동쪽에 있는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둥글게 다듬은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동쪽에 창문이 두 개 있다.
안채 서쪽으로는 ‘수정(水亭)’이라 쓰인 편액이 걸린 사각 정자가 있으며, 뒤뜰에 연못으로 보이는 웅덩이가 있다. 안채 뒤편의 복분자밭 너머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축대의 높이는 약 250㎝ 정도이다.
고가 초입에는 못(池) 가득하게 연화(蓮花)가 만발한 채 연밥이 영글고 있었고, 발산하는 연꽃의 향기를 따라 대문으로 가는 길에는 돌담 사이로 박석이 깔려 있어 마치 정원을 산보한다.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06>
보정 김정회와 수정(水亭), 그리고 연꽃차(연잎차)
고창출신 김정회(1903-1970) 선생의 자는 중립(中立)이고 호는 보정(普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인으로 선조는 조선 개국 공신인 익원공(翼元公) 사형(士衡)이며, 14세조는 영모당(永慕堂) 질(質)이다.
증조는 만수당(晩睡堂) 영철(榮喆)이며 아버지는 회천(晦泉) 재종(在鍾)이다.
그는 1903년(광무 6) 10월 28일 고창 방장산 기슭의 도산(道山)에서 출생했고, 어려서부터 종조(從祖)인 항재(恒齋) 순묵(純黙)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약관에 경서자집(經書子集)을 두루 통달했다.
1941년 여름에 금강산에 가서는 명경대, 연화담, 만폭동, 옥류동, 망군대, 만물상, 해금강을 둘러보고는 주옥같은 명시를 남겼으며, 가끔 월명암과 개암사도 만유(漫遊)했다.
보정은 수정(水亭:보정 김정회가 편액을 씀) 옆에 사각형의 연방죽을 만들어 놓고, 해마다 연향을 맡으며 차를 마시면서 시를 지었다.
보정의 문집인 '연연당문고’에서 ‘수정상련(水亭賞蓮)’시를 음미해보자.
“날(日)을 살펴 정자에 오르니 연봉오리들이 촘촘하고(課日登亭數蓮朶), /
반쯤 핀 것은 적고 피지 않은 것만 많구나(半開猶少未開多). /
작은 봉오리 큰 봉오리가 층층(層層)으로 생기니(小峯大峯層層出), /
반 이랑의 네모진 못에 모두 연꽃들이로구나(半畝方塘都是花).”
보정은 오로지 시속에 타협하지 않고 부귀와 영달을 멀리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연과 벗하면서 여생을 즐기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교우로는 고당 김규태, 효당 김문옥 송농 이동범 등으로, 이들은 시문과 서화로 교환함으로써 낙을 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이들은 모두 신구의 학문을 겸한 지성인이지만, 일제의 암흑기에 묵묵히 지방의 교육에 힘쓰며 교육에 헌신한 학자이며 예술가들이다.
김정회고가는 현재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당 등 4동과 정자, 화장실 등 모두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수당(晩睡堂)’이라고 쓴 편액이 있다. 기단의 네 모퉁이에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받기 위한 돌확이 놓여 있다.
안채 서쪽으로는 ‘수정(水亭)’이라 쓰인 편액이 걸린 사각 정자가 있으며, 뒤뜰에 연못으로 보이는 웅덩이가 있다. 안채 뒤편의 복분자밭 너머엔 사당이 있다.
고가 초입에는 못(池) 가득하게 연화(蓮花)가 만발한 채 연밥이 영글고 있었고, 발산하는 연꽃의 향기를 따라 대문으로 가는 길에는 돌담 사이로 박석이 깔려 있어 정원을 산보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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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은 고창읍내에서 서쪽으로 주곡마을 지나 도산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서당 뒤에는 연당이 있으며 옆에는 아담한 정자와 우물이 있다.
이곳은 17세기경에 세워진 역사가 있는 서당으로 처음에는 진사 오도환이 건립한 후 사위소유가 된 것을 안동인 김영철(호 만수당 김정회의 증조)이 인수, 터전을 잡는다.
만수당 김영철은 옛 서당을 헐고 새 강당을 짓고자 하였는데, 그의 장손인 회천 김재종이 숙부인 김순묵과 협력, 오늘날의 도산서당인 만수당을 1907년에 건립했다.
인근 학동들을 모아 강당(晩睡堂)으로 사용했으며, 1934년에는 도산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입학식과 교실이 준비되기 전까지 1학기 동안 사용됐다.
도산서당 만수당에는 전라관찰사를 했던 해사 김성근이 행서로 쓴 편액이 있다.
만수당에는 기정진이 짓고 쓴 만수당기와 금성 오준선(吳俊善)이 쓴 만수당후기가 있으며, 정인철과 석촌 윤용구는 만수당에 대한 내력을 적은 시문과 주련이 붙어 있다.
도산서당에는 연못가에 아담한 정자가 있는데 바로 수정(水亭)이다.
정자 주변에는 고목인 이팝나무가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정자 앞에는 돌로 축대를 쌓은 연못이 있어 수정이라 붙인 것으로 본다.
수(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으로, 수성(水性)만 잘 지키면 화난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무병장수 할 수 있다.
수정이란 편액은 이곳에 터를 잡은 만수당 김영철을 위해 증손인 김정회가 행서로 썼다.
아주 작은 편액이지만 글씨는 수려하며 단아한 필획으로 구사되어 있다.
관지를 보니 '상낙세가(上洛世家)'와 '증손정회(曾孫正會)'라고 각자되어 있어 보정이 증조를 향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