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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현실』 2020년 여름호, 통권 125호
<철학노트>
나의 아버지
최진석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인상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이렇다. 늦여름 정도의 어느 날이었다. 해는 돌이킬 수 없는 각도로 이미 많이 기울었다. 우리 집은 가족 가운데 한 명이라도 자리에 없으면 그 사람이 들어와야 저녁 식사를 시작하는 느슨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날은 자정이 한참 지나서 저녁을 먹은 적도 있다. 그날도 배가 고팠지만, 저녁상을 차려놓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때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셈하기는 쉽지 않다. 동생이 오리처럼 몇 걸음 뒤뚱뒤뚱 걷다가 넘어지곤 했던 것 같으니, 아마 한 살 정도나 되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다섯 살 정도가 된다. 어머니는 소쩍새가 울기 시작하자 남산머리 쪽 신작로로 나가셨다. 자주 그러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마중을 나가셨다. 투박한 태도와 촌스러운 옷매무새 속에 감추어진 그 설레는 마음은 아주 어린 내게도 파동을 일으켜 전달되었다. 사랑에는 그런 동작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사랑은 꼭 들키는 법이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로 비롯되는 그런 파동을 일으키셨다. 아버지를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던 것 같다. 두 분 사이에 메워지지 않고 존재했던 마음의 격차 때문에 어머니는 평생 아팠다.
아버지는 엄청나게 큰 통나무 같은 것을 어깨에 메고 사립문을 왼손으로 가볍게 제친 후 문짝 아래를 발로 밀치며 들어오셨다. 사립문을 아주 사소한 것처럼 다루셨다. 항상 그랬듯이 어머니는 아버지 뒤로 거리를 두고 따라 들어오셨다. 그날 아버지가 사립문을 밀치는 태도는 이전과 달랐다. 거기에는 사립문을 아끼는 마음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무엇인가 진짜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 외의 다른 것들을 가볍게 다루는 거만함이 드러난다. 나는 그 거만함을 느꼈다. 아버지가 사립문을 평소와 달리 가볍게 밀치시는 것을 보니 (당시에는 분명한 문장으로 언어화하지 못했지만) 아버지 어깨에 걸쳐진 것이 보통은 훨씬 넘는 물건일 것이다. 우리는 배고픈 것도 잊고, 그 소중한 물건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펼쳐지기를 기다렸다. 밥상은 옆으로 밀쳐졌다. 고급스러운 것은 자신만의 자부심을 감추지 못한다. 두루마리를 묶고 있던 몇 가닥의 실을 끊자마자 그것도 마치 세상의 모든 것들이 와서 찬미하는 것을 허락한 듯 마음껏 자부심을 펼쳤다. 아버지는 펼쳐지는 힘을 따라가면서 가볍게 툭툭 도와주기만 했다. 방은 그것으로 꽉 찼다. 그것이 방바닥을 꽉 채우자 이미 있던 다른 것들과 대비되면서 혼자만 빛나고 화려해졌다.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것은 비닐장판이다. 종이를 얼기설기 발라서 가끔 흙이 드러나기도 했던 방바닥이 완벽하게 연마된 부드러운 대리석 바닥으로 바뀐 듯했다. 대리석을 모르는 나이였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완벽한 연마와 고급스러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동생이 오리처럼 뒤뚱거리다가 오줌을 쌌다. 우리 가족은 혼란에 빠졌다. 종이 바닥이었을 때는 오줌이 한 방울만 떨어져도 종이 색깔이 더 진해지면서 바로 표시가 났는데, 이 고급스러운 물건은 오줌이 어디에 있는지 표시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나가 걸레를 들고 오줌을 이리저리 찾으면서 웃고 또 웃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것을 누려도 되는가를 의심하면서 안에서부터 행복이 벅차올라 나오는 웃음이었다. 나는 덩달아 깔깔거렸고, 아버지는 우뚝 서서 내려다보시면서 미소만 짓고 계셨다. 미소에는 위엄이 넘쳤다. 우뚝 선 채 아래로 하사하시던 아버지의 위엄 있는 미소와 그 아래서 오줌을 찾아 걸레질을 하면서 깔깔대던 나머지 식솔들의 경쾌한 웃음들이 얽혀서 직조해낸 광경은 내가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 가운데서는 가장 행복한 풍경이다. 이때부터 가정의 행복을 인식할 때는 이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가 오랫동안 남자와 아버지를 어느 정도 동일시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일 것이다. 거대한 비닐장판 두루마리를 어깨에 메고 사립문을 밀치며 들어오는 아버지의 거만한 모습은 적어도 수컷의 삶이라는 것이 어때야 하는지를 매우 강하게 심어주었다. 이것은 내게 각인되기 위해서 아주 먼 고대부터 교육 자료로 마련된 것 같았다. 인간이 겨우 인간의 형상을 갖추면서부터 수컷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동이 트자마자 굵은 눈썹에 이슬을 주섬주섬 앉히며 길을 나섰다가 해가 져서 다시 새벽만큼의 빛만 허용될 즈음에 맘모스 뒷다리를 턱 하니 어깨에 걸치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날 아버지가 메고 들어오신 맘모스 뒷다리는 비닐장판이었다. 길을 나선 수컷은 어쨌든 맘모스 뒷다리 하나는 걸쳐 메고 돌아와야 한다. 그런 자라야 무릎걸음으로 걸레질을 하며 행복에 겨운 채 깔깔거리는 식솔들을 내려다보며 무게감 있는 미소로 자신이 처한 공간을 평정할 수 있다. 남자의 격이란 모름지기 맘모스 뒷다리로 지켜진다. 이날은 이것을 배운 날이다.
아버지는 내내 근면하셨다. 나름대로 맘모스 뒷다리를 메고 들어오는 남자의 품격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셨다. 말수가 적으셨지만, 아버지는 누나나 동생에게보다 특히 내게 남자란 모름지기 맘모스 뒷다리를 잘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워낙 잘 준비된 것들이라 그냥 태도만으로도 내게 깊이 박혔다. 말수가 적은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의사를 세계에 전달하는 방식을 따로 갖는다. 태도나 몸짓이나 눈빛들이 그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나 4학년 정도였던 어느 날,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어느 묘한 시점에 아버지는 나를 깨우셨다. 어려서 나는 입이 매우 짧았다. 입이 짧아서 먹는 일을 싫어할 정도였다. 그런 내가 그 시간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내 허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간에 밥을 해준 어머니의 노고를 어루만져드린다는 의미에서 물에 말은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내가 밥을 먹을 때 바라봐주던 어머니의 눈빛은 나에게 큰 성취감을 안겨주곤 했다. 그리고는 마루에 먼저 나가 앉아 계시던 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아버지는 옆으로 서서 같이 걸어주시는 법이 없었다. 항상 앞에서 뚜벅뚜벅 걸으실 뿐이다. 어머니에게도 그러셨고, 내게도 그러셨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새벽 들판의 대보 길을 건너 읍내 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길은 숨이 찰 정도로 버거웠다.
버스 터미널에는 딱 봐도 아버지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일군의 아버지들이 몇 명 먼저 와 있었다. 지금 거슬러 추측해보면, 아마 함평군의 선생님들이 함께 견학 가는 날이었을 것이다. 다른 아버지들은 다 혼자였다. 나는 좀 어색하고 불편했다. 아들을 데리고 온 사람은 내 아버지 혼자였다. 터미널 가게에서 아버지는 또 오리 알 두 개를 사셨다. 오리 알은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건네주신 오리 알을 까서 먹는 일은 고역이었다. 왜 그리 크기도 한지. 어쨌든 나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오리 알을 꾸역꾸역 먹다가 아버지가 안 보는 틈을 타서 반은 차 밑으로 던져버렸다. 오리 알을 먹다가 버린 채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를 때도 아버지는 손을 잡아주지 않으셨다. 나는 버스의 덜컹거리는 운율을 따르다가 잠이 들었다.
일행은 어느 거대한 대문 앞에서 멈췄다. 내가 책에서만 봐왔던 “공장”이라는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비료공장이었다. 나는 그렇게 큰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큰 것을 아침 일찍부터 보는 일은 일단 말을 잃게 하였다. 나는 어떤 기술로도 내 마음속의 복잡한 심사를 표현할 길이 없다. 공포, 두려움, 외경심, 숭배감, 벗어나고 싶은 마음, 깊이 빠져들고 싶은 마음 등등이 뒤엉킨 상태다. 묘하게 어떤 슬픔 비슷한 감정도 느껴졌으니, 이 세상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복잡한 심사의 정체를 들여다보느라 혼자 바쁜 내게 아버지는 집을 나선 이후로 처음 한마디 하셨다. “으디 가지 말고 여그 서 있어라 이!” 나는 말뚝처럼 서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온 어린애가 나 혼자라는 점이 그냥 창피할 따름이었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갔다 오시더니 지금 세상의 A4용지 크기만 한 묵직한 봉지를 내 품에 안겨주셨다. 그리고는 두 번째로 말씀을 하셨다. “으디 가지 말고 여그 서 있어라 이!” 잠시 후에 똑같이 생긴 묵직한 봉지를 하나 더 들고 오셨다. 견학 온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주는 비료 기념품이었다. 한 봉지씩만 주는데 아버지는 한 번 더 받으려고 줄을 다시 섰다가 받아오신 것이다. 창피하고 또 창피했다. 아버지가 대범해 보이지도 않고 위대해 보이지도 않았다. 한 봉지 더 받을 것을 도모하고 나를 세워놓으신 그 태도가 나는 자잘해 보였다. 무언가 손에 넣으려고 적극적이기만 한 모습이 오히려 초라했다. 그때 내 마음으로는 아버지가 그깟 기념품에는 눈길도 안 주시는 것이 차라리 나았겠다 싶은 것이다. 비료공장은 크고, 아버지는 작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버지는 현실적인 성공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느낌은 아버지를 더 작아 보이게 했다. 슬픈 얘기에 눈물 흘리는 꼴을 보지 못하셨다. 사내는 울면 안 된다고 하셨다. 걸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열심히 살면 구걸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열심히 살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열심히 살지 않으면 거지가 된다고 하셨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하셨다. 그저 사는 일에만 집중해도 부족하다고 하셨다. 텔레비전에서 죽거나 우는 장면이 나오면 바로 꺼버리셨다. 인색한 점도 있으셨다. 그런 인색함 때문에 내가 여유롭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차비를 쥐어서 보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내가 가정을 꾸리고도 한참 후이다. 공부하라는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성공을 기대하는 눈빛은 매우 강렬하셨다.
대학교 1학년 말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술이 덜 깬 채로 늦잠을 자고 있었다. 반 지하 방 유리창을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서 계셨다. 어제 2학년부터 해야 할 전공을 정하고, 그 내용을 알려드리는 전보를 쳤던 기억이 났다. 아마도 결근을 하고 오신 것 같다. 아버지의 47년 교직 생활에 내가 기억하는 첫 결근이다. 유일한 결근일 것이다. 260명의 서강대 문과 계열 동기생들 가운데 3명이 철학과를 지망했다. 그 3명의 아버지는 모두 다 결근하셨을 것이다. 철학과에 대한 인상은 그랬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나 인생의 성공을 포기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었다. 사실 그때 나도 삶을 가볍게 보는 묘한 기류를 내면에 품고 있었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은 맞다. 아버지는 철학과를 선택한 이유 같은 것은 아예 묻지 않으셨다. 물으셨으면 더 난감했을 것이다. 철학과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다. 철학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겠는가.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니가 고시를 보먼 좋겄다.” 나도 가볍게 말씀드렸다. “철학을 먼저 해야 고시를 잘 붙는다요. 그렁께 부전공은 정치외교학으로 허요.”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아버지는 일어나셨다. 더 말해봐야 별 소용이 없겠다고 느끼셨는지, 아니면 내 말씀에 설득이 되셨는지는 모를 일이다. 실제로 나는 정치외교학을 부전공으로 정했고, 한 학기 정도 지나 전공 문제가 더 이상 집안의 문제가 되지 않을 때 쯤 그것을 독문학으로 바꿨다. 한 학기 더 지나서는 또 바꿨다. 졸업할 때 부전공은 사회학이었다. 아버지는 고시를 통과하여 판검사가 되는 아들을 꿈꾸셨으나, 나는 전혀 생각이 달랐다. 내내 아버지는 철학을 공부하는 나를 마뜩잖아하셨다.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알아채고도 남음이 있었다.
친구들의 근황을 물으실 때도 한참 동안은 판검사 하는 친구들을 먼저 물으셨다. 또 그 친구들의 이동 상황은 어찌나 그리도 잘 알고 계신지 모른다. 나보다 먼저 알고 내게 물으실 때도 있었다. 이런 일은 내가 신문에 실리고 텔레비전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잦아들었다. 아버지에게 현실적인 성공이란 곧 판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현실적으로 성공하는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아버지에게 내내 서운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현실적인 성공 너머에 있을 법한 의미나 가치 등, 무지개를 닮은 것들을 살피지 않은 것이 내내 아쉬웠다. 비닐장판 두루마리를 어깨에 걸쳐 메고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시던 아버지의 위대함이 점점 덜 느껴지면서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사립문을 열던 아버지의 거만한 자태에는 어렴풋이 시도 있었고, 음악도 있었고, 삶의 정체를 파고드는 번뇌도 있었고, 죽음에 대한 통찰도 있었고, 신과의 소통 능력도 있었었다. 그러나 그날 그때뿐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분이 함께 함평의 군립요양병원에서 말년을 보내셨다. 내가 따뜻이 모시지를 못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거기서 살다 가셨다. 어머니가 먼저 가시고 아버지는 3년 정도 후에 뒤따라 가셨다. 아버지와 나는 평생 어색했다.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는데, 나만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나는 어머니에게 하루에 한두 번은 꼭 전화를 드렸다. 해보 할매 얘기며, 은주 엄마 얘기 등을 함께 나누었다. 뒤뜰의 머위, 매화, 모과, 석류, 고로쇠나무들도 다 우리 모자의 말 반찬들이었다. 나 술 많이 먹는다고 아버지가 동생 시켜서 심은 헛개나무 얘기할 때는 많이 웃기도 했다. 오가피 잎을 데쳐서 나물 해 먹는 얘기도 재밌었다. 어머니가 자주 가양주를 담그시는 바람에 동생이 즐겨 마시고 아랫배가 나왔다는 얘기할 때는 둘이서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안 계셔서 제일 아쉬운 것이 이런 자잘한 전화 통화다. 어머니가 가시고 아버지 혼자 남으셨을 때 나는 이제 전화할 곳이 없다는 생각만 했다. 아버지에게는 전화가 걸어지지 않았다. 그분이라고 어찌 생각이 없고 느끼는 바가 없으셨을까. 아버지는 무척 서운하셨을 것이다. 그 마음이 내게 전해지는 날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기신 마지막 말은 “나 인자 그만 먹을란다”였다. 유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말씀을 남기셨다. 이 말씀 속에 혹시 나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들어있지 않을까 해서 또 가슴이 찢어진다. 아버지는 생전에 내게 전라도와 함평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되도록 응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신 적이 있다. 부산은 그렇게 자주 가면서 왜 전라도에는 안 오냐고도 하셨다. “불러줘야 오제, 내가 그냥 오는 일이 아니어라우” 이렇게 말씀드린 후부터는 더욱 신경을 쓰셨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1주일 전쯤 함평군에서 인문학 강의를 할 일이 생겼다. 함평군에서는 나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내가 대동면 향교리 서교마을로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손불면 궁산리의 신평마을 어르신들도 모셔왔다. 인문학 이야기를 너무 집중해서 듣고 계시던 어르신 몇 분들이 강의 중에도 눈에 들어왔는데, 그분들이 바로 그 어르신들이었다. 강의 내용이야 무슨 상관들이셨겠는가. 최현기 아들이 강의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들 하셨을 것이다. 내 친구 연섭이 아버지도 오셨고, 성길이 형님인 이장님도 오셨다. 강의를 끝내고 바로 아버지에게 갔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의식이 많이 흐려지셨다. 아버지 귀에 대고 “아버지, 함평군에서 불러서 강의하고 왔어라우” 하고 크게 말씀드렸다. 가슴이 미어졌으나 울음은 참았다. 그 흐릿한 의식으로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애쓰고 애쓰시다가 실눈을 뜨고 잠시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더듬더듬 내 손을 잡으셨다. “함평군 초청으로 강의를 한 것 보니 니가 성공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맘에 드는 일을 내가 했을 때, “잘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고맙다!”라고 하셨다. 이날도 아마 속으로는 “고맙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나 인자 그만 먹을란다”고 말씀하신 후 대여섯 개의 달이 몰래 떴다 지고 떴다 지고 난 어느 날 초저녁이었다.
광주나 함평에 일이 있어 내려오는 날에는 먼저 일을 보고 난 다음에 아버지를 찾아뵙곤 했다. 아버지 귀에 대고 ‘성공 보고’를 한 금요일 저녁에 일단 서울 내 집으로 왔다. 이틀 후 일요일에 ‘참 배움터’가 조선대학교 강당을 빌려 주최하는 강의가 있어서 내려왔다가 아버지 곁에 머물 요량이었다. 임종은 하고 싶었다. 어머니 임종은 하지 못했다. 토요일 저녁부터 불안감이 갑자기 더 커졌다. 그래서 급히 기차표를 바꿨다. 강의를 끝내고 아버지에게 갈 일이 아니라, 강의 전에 먼저 가고 싶었다. 새벽 기차에 올랐다. 익산쯤 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7시가 조금 안 된 시각. 사람에게는 듣기 전에 그냥 알아버리는 능력이 있다. 전화벨이 울리자, 임종하는 효도의 길이 이미 지났음을 직감했다.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혼자,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셨다. “나 인자 그만 먹을란다”고 말씀하신 후, 8일간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 그리고 가셨다.
곡기를 끊는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다. 수련의 정도가 고도로 높은 선사들에게만 있는 일인 줄 알았다. 매우 현실적이셨으며, 세속의 성공을 귀하게 여기셨던 내 아버지에게는 전혀 가능하지 않을 일로 여겼다. 곡기를 끊는 일이 위치한 곳에 있는 언어들을 아버지에게서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곡기를 끊는 일과 아버지 사이에는 연결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가셨다. 유언다운 말씀 한마디 남기지 않으시고, 오직 곡기를 끊은 사실만 남기셨다. 이 세상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셨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오후 2시에 나는 조선대학교 강당에서 하기로 정해진 강의를 하러 함평농협 장례식장을 조용히 나섰다. 어머니 장례식 때 중국에서 열리는 ‘한·중 1.5트랙 대화’ 회의에 참석하려고 함평농협 장례식장을 나섰듯이 말이다. 일단 조금 걷기로 했다. 조금 걷기로 한 걸음이 부질없이 많아지고 길어졌다. 어디선가 아버지의 낮고 느린 말투가 들렸다. 갑작스런 일이다. “니 강의를 들어보고, 니 글을 읽어보먼, 가끔 죽음에 대해서 이리저리 말도 잘 하드만. 나는 살기 바빠서 죽음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다. 거그다가 철학이 먼지도 모르니 죽음을 놓고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른다. 근디 말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죽을 수 있다. 먼지 몰라도 나는 이렇게 죽을 줄 안다.” 한마디가 더 들렸다. “너는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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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중국 북경대학교 철학박사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경계에 흐르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인간이 그리는 무늬』,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