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사)우리 역사학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내가 무너지면 조선도 무너진다 - 이순신 1부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177 14.04.27 2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마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영웅이거나 성웅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웅, 성웅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다. 한국사전을 통해 그의 인간적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지극히도 평범하고 보통의 인간이었다. 그를 만나보자. 

 

 

 

[한국사 傳]


2008년 우리는 왜 다시 이순신을 주목하는가. 난중일기에서 인간 이순신을 만난다.


3부작 난중일기

인간 이순신의 기록

제1부 내가 무너지면 조선도 무너진다


충무공 이순신, 우리 역사상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추앙해온 인물도 드물 겁니다. 최근 이순신이 남긴 난중일기 가운데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30일치의 일기가 더 발견돼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새로 발견된 일기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5년 을미년에 일기인데, 여기에는 인간 이순신에 고뇌와 심경이 솔직하게 담겨 있어서 그의 진면목을 한층 더 깊이 알 수 있게 해줍니다. 한국사 전 오늘은 이순신이 남긴 그의 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린 영웅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이순신을 다시 만나 볼 수 있을 겁니다.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아산 현충사. 한 해 수백만 명이 찾는 우리 역사의 성지다. 최근 현충사 박물관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 32일치가 새로 발견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이번에 난중일기에서 보면 빠졌던 것으로 알고 있던 새로운 기록들이 나왔다구요.”

“예, 이것이 충무공께서 친히 쓰신 7권의 난중일기입니다. 그리고 이 난중일기와 이 충무공 전서에 나와 있는 난중일기 여기 두 군데에서도 없었던 32일치 중의 일기가 새로 발견된 이 충무공 유사입니다.”


새로 일기가 발견된 책은 충무공유사. 충무공유사는 17C말 이순신 관련 기록을 발취하여 엮은 책이다. 충무공유사는 모두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새로운 일기는 제7장 일기초에서 발견되었다.


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지금까지 초고본의 형태의 내용을 알 수 없는 을미일기, 그게 전체 내용은 아니지만 32일치의 새로운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 그것은 충무공의 그런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개인적이고 그런 개인의 감정을 토로한 어떤 구체적인 내용들, 이것을 새롭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장수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그런 내면 이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좋은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새로 발견된 일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년째인 1595년 을미년 일기. 전란의 한 가운데 있던 이순신 개인의 감정과 민감한 내용까지 그대로 개록되어 있다.


‘꿈에 아버님이 나타나셔서 13일날 혼례를 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 비록 4일 뒤에 장가를 보내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말씀하시는 모습이 평소와 같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것을 홀로 앉아서 회상하노라니 아주 눈물을 금치 못한다.” 傳 : 을미년 1월 12일 일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순신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보인다. 원균에 대한 평가는 매우 신랄하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傳 : 1595(을미)년 11월 1일.

 


지금까지 알려졌던 난중일기는 임진년부터 정유년까지 모두 7권, 원래 일기는 그해의 간지를 딴 이름이 붙어 있었으나 정조대 忠武公이순신전서를 엮으면서 亂中日記라 불렸다. 이제 이 을미년 일기의 발견으로 이순신의 면모를 더욱 깊숙이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기는 날씨와 그날그날에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쟁직전의 준비상황과 전쟁 후의 전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이순신 자신의 신상과 일상도 상세히 적혀 있다.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溫白元) 4알을 먹었다.” 傳 : 1593(계사)년 5월 18일.

“이야기하며 술을 마셨다.” 傳 : 1592년 3월 3일 일기.

“바둑을 두었다.” 傳 : 1593년 3월 12일.

“어머니의 안부를 알지 못하니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난다.” 傳 : 1595년 6월 4일.


임진년 1월 1일부터 그가 전사하기 이틀 전까지 2594일간의 기록인 난중일기. 무려 13만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 이순신은 이 일기에 조선의 장수이자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모든 것을 기록했다. 마침내 1592년 4월 13일 壬辰倭亂이 勃發했다. 당시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였다. 그날 이순신은 전쟁이 난 줄 모르고 있었다.


“동헌에서 공무를 본 후 활 15순을 쏘았다.” 傳 : 1592년 4월 13일 일기.


화살 한 순은 5발, 이날 이순신은 모두 75발의 활을 쏘았던 것이다. 이순신이 활을 쏘고 있었던 그때 조선 침략을 엿보던 왜는 마침내 부산 앞바다에 도착, 상륙을 엿보고 있었다. 이순신이 왜군의 침략사실을 안 것은 이틀 후였다.


“해일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가 통첩을 보냈는데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傳 : 1592년 4월 15일.


상황은 긴박했다. 비슷한 시각 부산을 지키고 있던 경상 좌수사 박홍의 공문도 도착했다.


“왜적 350여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한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었다.” 傳 : 1592년 4월 15일.


이순신은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그의 첫 번째 장계1)였다. 이순신은 이 장계에서 전쟁대비 상황을 보고 했다.


“신도 군사와 전선을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면서 겸관찰사 병마절도사 우도수군절도사 등에게 급히 공문을 띄우고 각 고을과 포구에서 동시에 공문을 돌렸나이다.”


4월 18일 일기에는 더 심각한 전황을 전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오후 2시경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었고 양산 울산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서 성에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傳 : 1592년 4월 18일 일기.


전황은 악화일로였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 북상을 거듭했다. 급기야 4월 26일 신립의 조선 육군이 충주에서 대패했다. 4월 26일과 27일 드디어 조정으로부터 이순신에게 공식명령이 내려졌다. ‘물길을 따라 출동하여 적을 습격하고 경상도 원균부대와 합세하여 왜군을 공격하라’는 유서였다. 이에 이순신은 휘하의 장수들에게 4월 29일까지 여수 본영으로 모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4월 30일이 되어도 출동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신의 외롭고 단출한 객지의 군사들은 경상도의 물길이 험한지 평탄한지 알 수 없으며 또 신의 소속 전선은 모두 합해도 30척이 되지 못하므로 세력이 매우 약한 형편입니다. 비록 사정은 다급하지만 구원선이 다 오기를 기다렸다가 전략을 의논한 후 출발하여 바로 경상도로 나갈 계획입니다.”


이순신은 구원선 즉 해남을 지키던 전라 우수사 이억기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원래 교수 순천향대학교 사학과

“그 동안에 약 1년 전부터 부임해온 이후에 판옥선 그리고 새로 이제 거북선을 창건하고요. 많은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력전선 판옥선이 25척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듭 일기에 나오기는 합니다만 전라우수사의 합세가 필수적입니다. 근데 아직 4월 30일까지 전라우수군은 출동해온 태세를 보이지 않고 하니 이쪽 문제 저쪽 문제를 생각해볼 때 출전할 수가 없는 것이죠.”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4월 30일에 배를 출발하는 답을 보내온 바 있었다. 한편 5월 1일. 이순신 휘하의 전라 좌수영 장수들이 여수에 모였다. 장수들은 의기충천에 있었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담 첨사 홍양 현감 녹도 만호 등을 불러들였다. 모두 격분하여 제 한몸을 생각하지 않으니 실로 의사들이라 할만하다.” 전 1592년 5월 1일 일기.


다음 날 5월 2일 이순신은 놀라운 보고를 받는다. 남해도 지역으로 보냈던 순찰대들의 보고였다.


“남해 현령, 미조항 첨사,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이 왜적 소식을 한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傳 : 1592년 5월 2일 일기.


경상우수사 원균이 지켜야 할 남해 수군은 도망쳤고 여전히 전라우수사 이억기 부대는 오지 않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이억기를 간절히 기다렸는지 다음날 5월 3일자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방담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의 온다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아연함을 이길 수가 없다.” 傳 : 1592년 5월 3일 일기.


출동 준비를 마친 이순신이 여전히 이억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일기는 휘하 장수인 녹도 만호 정훈이 만나기를 청했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한성 가까이 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정훈은 망설이던 이순신에게 출동을 촉구했다. 주저하던 이순신이 마침내 결단했다. 이순신은 마침내 주기장 등과 함께 다음날 새벽 출전을 약속한다. 조정의 공식출전 명령, 그러나 오지 않는 구원병, 고심하던 이순신은 전쟁 발발 20여일 만에 드디어 단독 출전을 결심했다. 그러나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곧바로 왜적의 소굴을 짓이겨서 요망한 기운들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하나라도 씻고자 합니다.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되는 것이야 신으로서는 미리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傳  : 부원경상도장 1592년 4월 30일.

 


5월 4일 새벽, 결국 이순신은 단독 출천을 감행했다. 24척의 판옥선과 협선 15척 그리고 어선 46척으로 이루어진 전라좌수군만의 출동 그것은 불안한 출동이었다. 여수를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남해를 돌아 통영의 당포와 한산도를 거쳐 거제의 우포에서 처음으로 옥포에서 왜군과 마주쳤다. 그리고 5월 7일 마침내 옥포에서 첫 해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조선 수군의 압승이었다. 모두 26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최소 2천명에서 최대 4천명의 왜군들을 수장시켰다.

 


이어진 합포와 다음 날의 적진포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첫 출동 이틀 만에 치른 세 번의 전투 모두 40여척의 적선을 격침시킨 대승이었다. 반면 전라좌수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전사자 없이 부상자 1명만 발생했을 뿐이었다. 첫 출동에서 압승을 거둔 이순신. 그는 이제 자신감에 넘쳤다.


“적들은 일거에 무너져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 올라갔는데 뒤떨어질까 겁낸 것 같았습니다. 왜적이 만일 배를 타고 본도로 나타난다면 신이 나가서 수전으로써 죽기를 작정하고 막아낼 것입니다.” 傳 : 옥포피왜병장 1592년 5월 10일.


불안했던 단독출전 그러나 이순신은 압승을 거두었고 이로써 자신감을 얻은 그는 전승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한 壬辰倭亂. 이순신은 조정의 출전 명령을 받고도 약 일주일간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부대를 기다립니다. 그만큼 이순신도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첫 출전인 옥포해전에서 세 차례 승전을 거두면서 자신감을 얻게 된 이순신 부대는 이후 계속된 해전에서 승승장구 마침내 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이러한 전승은 철저한 전쟁준비에서 비롯됐다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순신은 어떻게 전쟁준비를 했을까요. 이 준비과정에서 우리는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처참했던 조선군의 상황을 보여주는 발굴이 있었다.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던 동래산성 아래쪽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전쟁유물이 발굴되었다. 칼과 화살촉 등 수많은 무기와 깨어진 투구가 당시 치열했던 동래성 전투를 말해주고 있다. 수많은 유골도 발굴됐는데 유골의 상태가 특이하다.


김재현 교수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이렇게 파손된 부분들을 보면 이렇게 아주 매끈하게 잘려나간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칼이라든가 예기에 의해가지고 이 부분들이 잘려 나간 것이죠. 또한 여자의 인골 아주 젊은 여자 또는 나이든 여자 그리고 젊은 청년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지금의 십대 초반의 인골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아주 다양하게 나온다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 그 당시 전쟁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고 처절했는가 하는 것을 바로 인골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전 초기 조선은 20일 만에 도성을 함락 당했다. 그만큼 왜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했고 전력 또한 열쇠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전혀 전쟁대비가 없었던 조선 그러나 여수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있었다. 1591년 2월 전쟁이 나기 1년 2개월 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이순신은 즉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은 이미 1년여 전부터 나돌았다. 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즉 ‘일본의 명나라 침범계획이 유구국까지 퍼져 있으며 특히 조선도 일본에 굴복하여 명나라 침범에 도울’거라는 말이 나돈다는 것이었다.2) 조선 조정도 전쟁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조정에서는 수군 폐지가 논의되고 있었다. 조선은 왜적들이 해전에는 능하지만 육전에는 능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신립장군 조차 수군을 폐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3) 그러나 이순신의 생각은 달랐다.


“해적을 맏는데는 해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결코 폐하여서는 안됩니다.” 傳 : 선묘중홍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초조했다. 높아가는 전쟁 기운과 육전만 준비하는 조정의 전략이 그를 초조하게 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바쁘게 움직였다.


“동헌에 나가 별방군을 점검하고 각 관아와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傳 : 1592년 1월 3일 일기.

 

 


당시 이순신이 맡고 있던 지역은 5관 5포 현재 지명인 고흥인 흥양 등 5고을과 방답, 사도, 발포, 녹도, 여도의 다섯 포구였다. 1592년 2월 19일 이순신은 휘하 포구에 순시에 나선다.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를 출발 자신이 맡고 있는 섬과 해안지역을 돌아보는 순시 여정 첫 도착지는 백야곶이었다.


“순시하러 떠나 백야곶의 감목관(말 목장 관리)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도 왔다.” 傳 : 1592년 2월 19일 일기.


때는 꽃피는 봄. 그날 산꽃이 피어 무척 아름다웠다고 이순신은 적고 있다. 백야곶과 이목구미를 거쳐 이순신은 고흥반도의 여도로 건너갔다. 그의 순시는 9일간 계속되었다. 이순신의 순시 목적은 각 포구의 군기검열이었다. 군사들의 상태와 무기 그리고 각 포구의 방어시설들을 점검했다. 당시 이순신이 순시했던 곳 중에 하나인 발포. 지금도 당시의 성곽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순신의 순시는 철저했다. 준비가 미비한 부하들은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여러 가지 전쟁 준비에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에게 벌을 주었으며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傳 : 1592년 2월 25일 일기.


준비가 덜된 지역에 대한 이순신의 걱정은 컸다.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섬인지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상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 걱정스러웠다. 첨사는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傳 : 1592년 2월 27일 일기.


이러한 이순신의 초조함과 걱정은 부하들에 대한 처벌과 독려로 이어졌다.


“방답의 병선 담당 군관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傳 : 1592년 1월 16일 일기.

“석수들이 새로 쌓은 해자가 구덩이가 많이 무너져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하였다.” 傳 : 1592년 2월 15일 일기.

“승군들이 돌 줍는 것이 성실치 못하므로 우두머리를 잡아다가 매를 때렸다.” 傳 : 1592년 3월 4일 일기


임무에 소홀한 부하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순신의 엄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는 승병들까지 곤장을 맞아야 했다. 이 시기 이순신은 또 하나의 비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거북선이었다.


“오늘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傳 : 1592년 2월 8일.


장계에서 이순신은 자신이 만든 거북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이 일찍이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 백 척의 적선 속이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 傳 : 당포파왜병장.


이순신이 거북선과 판옥선을 만들었던 여수의 선소.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하루 전날까지 거북선 총통 시험 발사를 했다.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현자 지자 대포를 쏘아보았다.” 傳 : 1592년 4월 12일.


그런데 이 시기에 일기에는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기록이 보이는데 몸이 아팠다는 내용이 연이어 나온다.


“몸이 불편하여 아침 내내 누워 끙끙 앓다가 늦게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傳 : 1592년 3월 21일 일기.

“식후에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차츰 더 아파와서 하루 종일 또 밤새 신음하였다.” 傳 : 1592년 4월 2일 일기.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傳 : 1592년 4월 3일 일기.

“아침에는 통증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전 : 1592년 4월 4일 일기.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아마도 이순신은 미리 이렇게 전쟁 준비를 하는 상황에서 상당히 거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든 측면을 점검하고 또 바른 방책으로 이렇게 전략을 짜는데 상당히 신경을 썼을 겁니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일본의 어떤 침략에 대한 가시적인 이런 분위기도 감지를 했을 겁니다. 이렇게 당연히 그 개인적으로 어떤 정신적?신체적으로 많은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몰려왔을 것이고…….”


눈앞에 다가온 전쟁, 그러나 부족한 준비와 시간,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오는지 약 1년 2개월 뒤에 임진왜란은 발발했습니다. 이순신에겐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전운을 감지한 이순신은 그래서 더욱 초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개전 초기 단번에 무너진 조선 육군에 실체는 조선 수군에 부담을 한층 더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전승의 신화를 일궈 나갑니다. 이러한 연전연승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이순신이 가졌던 또 하나의 무기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그것이었습니다. 전세의 흐름을 바꾼 한산대전을 중심으로 그의 전술과 함께 깊은 고민과 결단을 만나봅니다.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은 바다를 막아 버렸다. 일본군의 전략에 큰 차질이 발생했다. 특히 보급이 문제였다.


나카니시 다케시 역사연구가

“예를 들어 200석을 실은 배 한 척이 평양에 도착하면,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3일 동안 그것으로 먹고 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만약 부산에서 육로로 운반하려면 말이 500마리 필요합니다. 그리고 물론 운반할 500명과 호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에 도요토미가 특명을 내린다. 세 장수에게 연합군을 꾸려 조선 수군을 먼저 치라는 것이었다. 당시 진해 지역은 왜 수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이 지역의 왜의 장수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등이 도요토미 명령에 따라 모였다. 그러나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단독으로 출동하여 거제도 북쪽에 상륙했다. 그런데 1592년 6월 11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난중일기가 빠져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이순신의 행적은 조정에 올린 장계를 통해 알아볼 수밖에 없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부대와 함께 출동한 이순신은 노량에서 원균과 합류, 7월 8일 드디어 한산해전을 치르게 된다.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일본군은 통영과 거제 사이의 바다길인 견내량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이순신 함대는 약 50여척, 일본군은 73척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 이순신은 특별한 작전을 구상했다.


“견내량의 지형은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처럼 큰 배가 서로 부딪혀서 싸우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왜적들은 만약 형세가 궁해지면 바다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가겠기에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완전히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순신은 먼저 5, 6척의 판옥선을 보내 적을 선제공격 유인하도록 했다. 나머지 함대는 양쪽으로 나누어 섬 그늘에 매복시켜 두었다. 이순신의 작전은 주요했다. 일본군들이 추격을 해왔다. 이순신은 즉각 학익진을 형성했다.


“여러 장수들이 학의 날개를 편 듯한 모양의 진형을 이루어 일제히 진격하라고 명령을 내리니 각각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쏘아대어 먼저 적선 두 세 척을 깨트렸습니다.” 傳 : 견내량파왜병장.


전투는 조선 수군의 압승이었다. 적선 73척 중에서 59척을 격침시켰다. 9천여 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한산해전 이틀 후 이순신 함대는 안골포에 나타났다. 이곳에 있던 왜선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포구에 깊숙이 처박혀 저항을 포기한 왜군을 치기란 쉽지 않았다. 안골포는 지형이 좁고 조수간만에 차가 심해 판옥선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7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에 걸쳐 끈질기게 안골포를 공격했고 역시 대승을 거두었다.


“안골포 성 안팎으로는 흘린 피가 땅에 가득하여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왜적들의 사상자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傳 : 견내량파왜병장.


한산해전과 안골포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은 거제 동쪽까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조원래 교수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사형선고가 내려진 해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전쟁상태는 계속되지만 이미 전쟁은 끝난 것과 다름이 없는 그때가 한산도 해전, 안골포해전 이른바 한산대첩의 7월 8일에서 7월 10일까지의 시점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3개월여 만에 완전히 전세를 역전시킨 이순신. 그러나 이순신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592년 8월 24일자 일기에는 그의 4차 출동이 기록되어 있다.


“오후 4시쯤에 배를 출발시켜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진 뒷 바다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傳 : 1592년 8월 24일 일기.


이번 출전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부산은 왜군의 본거지 이순신은 이곳을 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육로를 따라 평양까지 진격했던 왜군 그러나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로가 완전히 끊기자 왜의 육군 일부가 후퇴, 부산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이들에게 결정타를 가하고자 했다. 이순신은 부산포의 왜군을 격멸시킨다면 전쟁 자체를 끝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원래 교수

“조선 수군 측에서는 왜 부산포의 본영 적의 본영을 갖다가 직접 총공세를 취해서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그런 의도를 보이고자 한 것은 수륙양면에서 공격을 하게 될 경우에 부산진에 공격을 하게 될 경우에 ‘이제 전쟁을 종결시킬 수도 있겠다’하는 이순신의 판단이죠.”


그러나 부산 공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의도와 달리 조선 육군에 협공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전투였다. 일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왜적들은 총을 잡고 활과 화살을 옆구리에 끼고 모조리 산으로 올라가서 여섯 군데로 나누어 진을 치고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총알과 화살을 쏘아대는데 마치 비 오듯 우박 쏟아지듯 했습니다.”


일본군은 포격도 가해왔다.


“때로는 큰 철환을 쏘았는데 그 크기가 모과만 했으며 또 굵은 자갈이 날아왔는데 그 덩어리 크기가 사발만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졌습니다.” 傳 : 부산파왜병장.


조선 수군도 피해를 입었다. 모두 여섯 명의 전사자와 2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큰 손실은 녹도만호 정운의 전사였다. 이순신에게 첫 출전을 진언하던 바로 그 정운이었다. 이순신보다 무과 6년 선배로 이순신이 가장 아끼고 신뢰하던 장수였다. 이순신은 정운의 전사를 매우 애통해하며 그의 사당을 지어줄 것을 선조에게 요청했다.


“배를 돌릴 무렵 탄환에 맞았는데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부질없이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한다면 이야말로 지극히 애통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산해전 역시 압승이었다. 적선 470여척 중에서 120척을 격침시켰다. 왜수군 전투력의 1/4를 쳐부순 것이다. 이후 왜군은 더 이상 전선을 확대하지 못했다. 한산대첩과 부산해전에 승전, 이는 전쟁의 물줄기를 완전히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치밀한 전략, 전술 그리고 결단으로 거둔 이순신의 승리였다.


한산해전과 부산해전 이후 임진왜란은 사실상 끝이 났습니다. 이후 왜군은 모두 남쪽으로 내려가서 성을 쌓고 길고 긴 농성에 들어갑니다. 이처럼 이순신은 절대 열쇠의 전황을 역전시켜서 왜의 침략 야욕을 꺾어 버렸습니다. 이제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조선의 장수가 된 이순신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순신 개인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고통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장수이기 이전에 한 여인의 아들이었으며, 지아비였고 또 아버지였습니다. 그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죠. 이순신의 난중일기 곳곳에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희생당한 부하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남겨져 있습니다. 호령하던 장수의 이미지와는 달리 애민한 감성을 지닌 이순신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부산해전 이후 이순신은 제사를 지냈다. 바로 녹도 만호 정운에게 올리는 제사였다. 정운은 부산해전에서 왜군의 철환을 맞고 전사했다. 이순신은 특별히 정운을 신뢰하고 아꼈다. 그 해초 다섯 포구를 순시할 때도 정운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았다. 녹도만호에 애쓴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4) 왕에게 올리는 장계에도 이순신은 정운을 극찬하고 있다.


“그간 세 번 싸워 이길 때 매번 앞장섰고 부산의 큰 싸움에서도 몸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잊어버리고 앞장서서 적의 소굴로 쳐들어가 하루 종일 싸웠는데 힘껏 쏘아 댔기에 적들은 꼼짝도 못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傳 : 청 정운 추배리대원사 장


이순신은 직접 제문을 지었다.


“믿고 의지했던 것은 오직 그대였는데 앞으로 어이하리. 진중의 여러 장수들 원통해하기 그지없다오. 백발의 늙으신 부모님은 장차 그 누가 모실지 황천까지 뻗친 원한 언제 가서야 눈을 감을런지. 아 슬프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랴. 슬픔 머금고 극진한 정성 담아 한잔 술 바치니 아 슬프도다.”


이순신은 엄격하고 무서운 장수였다. 군율을 어긴 부하들은 가차 없이 처형하거나 곤장을 쳤다. 그러나 부하들의 희생 앞에서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정작 나라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 이순신은 스스로 부하들을 챙겼다. 부상자와 전사자들은 낱낱이 장계에 보고했다. 비록 노비라 하더라도 그 소속과 실명을 밝혔으며 특히 전사자에 대한 대우는 각별했다.


“시신은 배에 싣고 돌아가서 장사 지내주게 하고 그 처자들은 달리 구휼하는 법에 따라 구휼해주도록 지시하고 부상자들은 약물을 나누어주어 충분히 치료해주도록 장수들에게 각별하게 엄하게 지시하였습니다.” 傳 : 부산파왜병장


신병주 교수

“또 자기의 사랑하는 부하들에 대한 이런 관심과 애정까지 정말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노라면 아 이순신은 정말 저 강인한 장군이 ‘저렇게 여린 부분도 있었구나’, ‘저렇게 섬세한 부분도 있었구나’라고......”


그의 일기 곳곳에는 가족에 대한 걱정도 묻어나고 있다.


“아침에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보냈다.” 傳 : 1594(갑오)년 8월 27일 일기.

“관동의 숙모가 양주 천천으로 파난 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傳 : 1593(계사)년 5월 16일 일기.

“아들 염의 병도 어떠한지 모르는 데다가......” 傳 : 1593년 8월 2일 일기.

“아들 울이 학질을 앓는다는 소식도 들었다.” 傳 : 1593년 8월 23일 일기.


이순신은 4형제 중 셋째였다. 위로 희신과 요신은 모두 여섯 명의 조카를 남기고 일찍 죽었다. 큰아들과 작은 아들들을 앞세운 그의 어머니에겐 이순신은 마지막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순신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은 지극한 것이었다. 난중일기 맨 처음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된다.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傳 : 1592년 1월 1일 일기.

“아산 어머니께 문안드리려고 나장 두 명을 보냈다.” 傳 : 1592년 2월 14일 일기.

“아침에 어머님께 보낼 물건을 쌌다... 홀로 객창 아래 앉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傳 : 1592년 4월 8일 일기.


전쟁 도중 이순신은 아산의 어머니를 여수로 모셨다.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게 된 마음이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傳 : 1594년 1월 1일 일기.


여수로 모신 뒤에도 어머님의 대한 이순신의 보살핌은 각별했다. 그는 조선의 장수 이전에 효성 지극한 한 아들이었다.


“종 목년이 해포에서 왔는데 이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답장을 써서 미역 다섯 동과 함께 집으로 돌려보냈다.” 傳 : 1592년 5월 18일 일기.


또 그의 일기에는 어머니에 안부를 염려하는 기록도 숱하게 나온다.


“어머니 편지도 왔는데 평안하시다고 한다. 정말 다행이다.” 傳 : 1593년 6월 1일 일기.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고음천에 도착하였다.” 傳 : 1594년 1월 11일 일기.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傳 : 1595년 6월 9일.


자신을 던져 나라와 백성을 구한 이순신. 그러나 그는 부하의 희생 앞에 울었고 가족 걱정에 잠 못 이뤘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고독했던 조선의 장수였다.


閑山島夜吟 - 이순신 詩


한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水國秋光暮)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진중 높이 떴구나(驚寒雁陳高)

가슴에 근심 가득 잠못 이루는 밤(憂心轉輾夜)

새벽달이 들어와 활과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세계의 어느 장수도 이순신처럼 긴 전란의 기록을 남긴 이는 없습니다. 가장 내밀한 기록인 일기를 쓰면서 이순신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일기는 이순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어쩌면 일기를 쓰는 그 순간만큼 자신과 가장 깊숙이 만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하며 또 숱한 고통과 고독을 정제해 나갔을 지도 모르죠. 한 개인의 7년간의 일기이자 전란의 기록인 亂中日記, 이 진솔한 기록이 있었기에 우린 박제화 된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에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가 우리를 더욱 매료시키고 그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1) ‘인왜경대변장’ -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옵니다.

2) 선조실록 1591년 10월 23일.

3) 선묘중흥지.

4) 1592년 2월 22일기.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