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수능시험을 치른 날
대입 관련 추억들이 이리저리 많이
보인다. 대학을 선택할 때 나 또한
색다른 추억이 있어서 한 마디.
나는 대학을 그야말로 얼떨결에
정했다. 대학과 관련해 우리 집안
분위기는 다른 집과 좀 달랐다.
공부를 잘 해도 서울대를 지망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내 형도 고교 성적이
문과 최상위권이었으나
사립대를 찾아갔다.
부모님은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셨다.
고교 선생님들만 "너, 왜 그래? 왜 그래?"
하며 안타까워 했다고 들었다.
집에서 국립대에 대한 별 욕심이
없었던 이유는 대학 재학 중에
군대를 갔다가 세상을 떠난
나의 큰 형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해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장남이었다.
효자답게 장학금 받으며 사립대를
다녔으니 세상의 평판과는 별개로
집안에서는 그 대학이 가장
좋아보였을 수도 있겠다.
집안 분위기가 그러니, 나는
국립대를 아예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능력도 되지 않았으니, 나로서는
선망도 갈등도 없었다.
나는 두 학교에 지원서를 썼다.
우리 때는 두 학교를 지원한 뒤
한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과는 불문과로 정했다.
그런데, 내 형이 있는 학교에
가야 하나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형은 법대를 다녔으나
문학회를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불문과에 가고, 또 글을 쓰겠다며
문학회를 기웃거리면 누구 동생으로
'낙인' 찍히기 십상. 형은 학내 문학상들을
받아서, 학교의 그 바닥에서는
제법 이름이 나 있었다.
나는 그 학교 문학회 사람들을 형 친구고
선후배고 간에 거의 모두 알던 터였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갔다. 나는 형이 군대를 가기 전까지
고교시절을 그들과 한 방에서 뒹굴었다.
결정을 하지 못한 채 담임한테
어디 가겠다고 통보하러 갔는데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담임도 어디를 가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했다. 연대나 고대나 거기가
거기고, 수학 선생님이니
인문계열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래도 제자한테 말은 해야겠는데
마침 어떤 선생님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담임이 "어이, 강선생. 고대 불문과 어때?
영문과 나왔으니 잘 알 거 아냐?"
그 강선생은 "불문과 좋지"라고 했다.
내가 듣기에 그분도 뭘 알고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담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럼, 너 고대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더 생각하지 않고 그곳으로 갔다.
그 학교 농구팀도 좋아하던 터였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갔던
그곳에서, 나는 너무나 운이
좋게도, 엄청난 분들을 만났다.
요즘 말로 하면 한 마디로 대박이 난 거다.
대표적인 분이 강성욱 선생님이다.
세계일보 조용호 기자는 "국내
보들레르 연구 대가로 프랑스
현대시 연구의 틀을 정립했다"고 적었다.
우리는 그 연구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것은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기에 빠져들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어쩌다가 옆길로
새는 바람에 박사공부를 하지 못했으나
기자 생활을 하든 무엇을 하든
나는 강 선생님한테서 배운 바대로
하려고 애를 썼다.
2018년 수능일 다음날 선생님이
소장하셨던 보들레르 『악의 꽃』 초판본이
고대 도서관에 기증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
다른 장서들은 일찌감치
도서관에 들어갔으나(얼마나 귀한
책들이 많았는지, 그 목록을
고대출판부에서 책으로 출간했다)
『악의 꽃』 초판본만은 스승의 뜻에
따라 제자인 황현산 선생님한테로 전해졌다.
아마도 "번역을 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고대 도서관에 기증된 보들레르 『악의 꽃』 1857년 초판본. "출간한 지 160년이 지났는데도 종이 질이 양호하고 글자가 선명해 당시 인쇄술 수준을 보여줄 뿐 아니라 컬러 표지는 물론 맨 뒷장의 출판정보에 이르기까지 낱장이 뜯어지거나 훼손되지 않아 보관상태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성욱 교수 생전에 일본에서 보들레르 전시를 기획하면서 대여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강 교수는 당시 이 책을 구입하면서 아내의 결혼반지까지 팔았고 손에 넣은 뒤에는 만세삼창을 외쳤다고 강 교수 유족은 전한다. 조재룡 교수는 “보들레르 초판본을 갖는다는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해 국립박물관에서 보존하거나 ‘모나리자’ 원본을 소장하는 것과 같은 문화사적 의미가 있다”면서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시집이라 더욱 그러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세계일보 조용호 기자) http://www.segye.com/newsView/20181115002683?fbclid=IwAR3rSGBjfJaKY50chdX6kv6ZY_2xi5FT4t_63vCClk6zXym3326bYOQURqc
황 선생님은 번역을 마쳤으나 주석은
달지 못했다고 했다.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황 선생님으로서는
아쉬움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통탄스러운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