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제수 받은 이거(李遽, 1532~1608)가 1605년(선조 38) 자신의 102세 된 모친 채씨부인(蔡氏夫人)과, 강신(姜紳, 1543~1615)의 모친 윤씨부인(尹氏夫人) 등 장수를 누린 10여 명의 사대부 집안 대부인(大夫人)들을 위하여 잔치를 연 장면을 그린 화첩인 경수연도와 1724년 월성(月城) 이씨(李氏) 이종애(李種厓)의 8남매가 모두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는 것을 기념하여 그 후손들이 이틀간 잔치를 베푼 것을 기록하여 만들어진 담락연도의 연회장면과 사대부가의 잔치에 씌여진 음악과 춤을 공연한다.
궁중무용
1.초무(初舞)
초무(初舞)는 이름 그대로 ‘처음으로 춤을 아룁니다’라고 알리는 서무(序舞)의 구실을 한 것 같다. 문헌에 초무의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719년(숙종 45)으로 <기해진연의궤>에 나타난다. 이 의궤에 자세한 춤의 절차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제3작을 올릴 때, 보허자령의 연주에 따라 무동 2인이 초무를 춘다고만 하였다. 1828년(순조 28)의 <무자 진작의궤>의 정재악장에 따르면, “두 무동이 북향하여 손을 바꿔가며 이마에 손을 올리면서 춤춘다.”라고 하였다. 1901년(신축) '외진연시 무동각정재무도홀기' 등 홀기에 춤의 진행순서와 음악들이 기록되어있다.
2.광수무(廣袖舞)
광수무(廣袖舞)를 제목 그대로 풀이하면 ‘넓은 소매로 추는 춤’이다.
문헌에 광수무의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719년(숙종 45)으로 <기해 진연의궤>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구체적인 정재도가 전하지 않으며, 단지 경현당(景賢堂) 진연의 제7작에서 광수무를 춘다는 내용만 전한다. 그 뒤 1828년(순조 28) <무자 진작의궤>의 정재악장에 따르면, 무동(舞童)이 북향해서 서로 마주하고 춤춘다고 하였다. 현재 전하는 유일한 홀기인 연대미상의 '무동 각정재무도홀기'에 정재 진행순서가 기록 되어 있다.
3.향발무: 향발은 두 손에 작은 향발을 들고 춤추는 정재이다. 향발무의 무보(舞譜)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한다. 1719년(숙종 45)의 <숙종기해진연의궤(肅宗己亥進宴儀軌)>, 1744년(영조 20) <영조갑자진연의궤(英祖甲子進宴儀軌)>, 순조 이후의 여러 가지 진찬의궤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향발무는 무고(舞鼓) 등과 더불어 빠지지 않는 인기 레파토리였음을 알 수 있다. 악절에 맞추어 경쾌하게 울리는 향발 소리는 연향의 흥취를 돋구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보인다. <악학궤범>과 조선조 말기의 <정재무도홀기>에서는 향발 정재의 연행에서 오양선(五羊仙) 창사를 쓰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4.처용무: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875~885) 때의 처용설화(處容說話)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춤이다. 처용무는 처용가면과 처용의 독특한 복식을 착용하고 오방(五方: 동?남?서?북?중앙)에서 오행(五行)의 운행(運行) 의미를 해석하듯이 춤춘다. 그리고 처용가를 노래함으로써 열병(熱病)이 스스로 물러가고, 태평(太平)과 복록(福祿)의 진경(進慶)을 염원하게 된다. 즉, 처용무를 춤추는 목적은 못된 전염병인 역병(疫病)이 없는 태평한 세상에서 복록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막중한 역할을 ‘처용’이라는 한 존재에게 부여한 것은 그가 신인(神人)으로 탄생했고,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민족적 신앙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기초가 되어 처용무는 신라로부터 오늘에까지 면면히 계승된 유구한 역사적 전통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며,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하였다, 또한 처용무는 인류 문화로서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인정받아 2009년 9월 30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제4차 무형문화유산정부간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관동무(關東舞)
관동무(關東舞)는 정철(鄭澈, 1536~1593)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는 정재이다. 관동별곡은 송강 정철이 45세 되던 1580년(선조 13)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關東) 산수(山水)의 수려함을 읊은 장편 시이다. 문헌에 관동무의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848년(헌종 14)으로 <무신 진찬의궤>에 나타난다. 이 의궤에 따르면 “여기(女妓) 8인이 2대로 나뉘어 관동별곡을 병창(竝唱)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갔다하고 돌며 춤춘다.”라고 하였으며, 자세한 절차가 기록된 홀기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