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볼 수 있는 심미안審美眼(연중 제30주일)
마르코복음 10,46-52
불의의 사고로 장님이 된 사람에게 갑자기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조금 전만 해도 낮과 밤이 뚜렷이 구별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있었다. 날마다 사랑하는 아내, 남편, 자녀, 친구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암흑천지가 되고 말았다. 이 장님은 자기가 눈먼 사람임을 인정하는 데 12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는 눈이 멀어지기 전에 보았던 이 세상을 상상의 나래를 펴고 기억한다. 육안만 닫혔을 뿐, 정신적이고 영적인 눈, 마음의 눈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육안이 열린 사람이 보지 못하는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다. 시력을 잃는다고 해서 희망과 미래를 향한 전망까지 잃는 것은 아니다.
“눈먼 이로 태어난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시력은 있지만 미래를 향한 전망이 없는 것이다.”(헬렌 켈러)
마음이 딴 곳에 있으면 눈은 멀어진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시야에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사라진다. 마음의 눈을 떠야 자신과 이웃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다른 사람을 잘 보아도 자기를 잘 보지 못한다. 마음의 눈이 닫힌 사람은 이웃의 외모는 다 보아도 그의 마음은 보지 못한다. 마음이 없으면 가족들이나 친구들을 보아도 가족이나 친구로 보이지 않고 남으로 보이는 법이다. 마음이 딴 곳에 있으면 눈은 먼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지고, 황금가루에 눈이 먼다. 질투는 눈을 천개 가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한 눈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보지 않으려는 사람보다 더 눈먼 사람은 없다.”(요나탄 스위프트)
육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는 장님들에게는 굉장한 선물이 틀림없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눈을 뜨고도 남의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만 찾아낸다면, 이웃의 말 못할 고민을 간파해내어 위로하지 않는다면, 눈을 뜬 보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력을 회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선물은 마음의 눈, 믿음의 눈을 떠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 수 있는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친절은 귀먹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눈먼 사람이 볼 수 있는 언어다.”(마크 트웨인)
“사랑이 많은 사람은 장님일지라도 건강한 사람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볼 줄 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쉽사리 띄지 않는 것을 발견해낼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그는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베풀고 계심을 깨달았다. 자기와 이웃의 마음속에 현존하고 계심을 보는 눈이 떴다. 그는 하느님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생을 허락하셨음을 믿고 따르는 눈이 떤 신앙인이 되었다. 눈을 뜬 이 장님은 남들은 잘 못 보지만 자신의 눈엔 이웃의 좋은 점을 간파해내는 심미안을 얻었다. 그는 이웃이 말하지 않는 슬픔과 기쁨을 간파해내는 혜안을 가지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는 사람이다. 이 눈 뜬 장님은 이웃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요 모든 사람과 세상만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뜬 사람이다. 그는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배려한다. 이처럼 눈을 뜬 사람만이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웃과 사랑을 속삭이며 영원히 행복의 극치 속에서 산다. 그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는 사람’, ‘항상 보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은 이러한 사람이 되어 행복한가?
“한 사나이가 어둡고 좁은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맞은 편에서 눈먼 이 하나가 등불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 같은데 왜 등불을 들고 다니지요?’ 그러자 이 눈먼 이가 대답했다. ‘내가 이것을 들고 걸어가면, 눈뜬 사람들이 눈이 먼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부딪히는 일이 없이 비켜가기 때문입니다.’”(탈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