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성막의 기구들(1) - 증거궤①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10~22)”
가. 증거궤
증거궤에 대한 말씀이다.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라고 했다. 증거궤는 율법궤이다. 율법은 사람이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면 안 되는가 하는 규범, 규례, 규칙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이다. 그래서 증거판이라고 말한다. 율법판이라고 말하지 않고 증거판이라고 한다.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법이라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성품이나 기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법이지만 속을 보면 법을 내신 이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증거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 새겨졌다는 말은 같은 의미다.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증거판에 하나님 말씀이 새겨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없었는데 요한이 최초로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 새겨졌다는 사실을 모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고 그 뜻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돌판은 하나님을 정의하는 것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이 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림이고 정의이고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비로소 돌판에 새겨질 때 우리는 그것을 말씀으로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생명 안에 새겨져서 한 인격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묘사되고 정의되고 그려진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그냥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태교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다 똑 같다. 장로교나 침례교나 다 똑 같다.
어쩌면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가 다 똑같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된 하나님이냐, 유대인의 율법으로 정의된 하나님이냐, 천주교가 그려내는 그런 하나님이냐, 다른 종교의 어떤 교리나 전통으로 정의된 하나님이냐, 이렇게 하나님이 달라진다.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인도 사람들의 오랜 역사 속에서 부처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가 그 부처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사람을 통해서 표현된 부처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석가모니 이전의 힌두교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석가모니로 표현된 부처를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적게 생각한다든지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도, 유대교는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정의된 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예수로 정의된 하나님이냐 아니면 예수로 정의되지 않은 하나님이냐 그 차이이다. 다른 종교인을 만나도 하나님하면 다 똑 같다. 신이라 하든지 여호와라 하든지 바알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뭐라 하든지 간에 다 마찬가지다. 구별할 수가 도저히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예수로 말미암아서 정의된 하나님이 구별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 없이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고, 예수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정의도 가질 수 없다. 예수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예수를 가리켜서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이렇게 표현했다. 그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정의되기 때문에 인생이지만 참 하나님이라고까지 묘사되었다.
증거궤는 장막 안에 있는 기구의 첫째 항목이다. 장막을 짓는데 있어서 맨 첫 번째 항목이기 때문에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장막은 바깥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뜰에는 제단과 물두멍이 있다. 제단에서는 희생의 제물들을 드리는 곳이다. 그리고 물두멍은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갈 때 손을 씻고 들어가는 곳이다. 이것이 바깥뜰에 있다. 물론 바깥뜰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안을 바깥뜰이라고 한다.
그 바깥뜰에서 휘장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성소가 있다. 성소 안에는 진설병을 놓는 떡상이 있고, 등불을 항상 켜 놓는 금등대가 있고, 분향단이라는 향을 피우는 단이 있다. 이 단은 복합적인 향품을 가지고 향을 붙이는데, 불은 반드시 바깥뜰에 있는 제단에서 가져온 불로 향불을 피워야 한다. 그리고 한 번 더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가 나오고 지성소 안에 법궤가 들어 있다. 맨 안쪽에 있고 중심에 있는 셈이다.
생명은 항상 깊은 곳에 들어 있다. 사람의 생명도 깊은 데 들어 있다. 뇌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것들은 바깥쪽에 있는데 우리가 숨 쉬고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뇌의 가장 깊은 데 들어 있는 간뇌라고 한다. 그래서 머리가 깨지더라도 그곳은 손상을 입지 않아서 숨을 쉬고 살아 있다. 의식은 죽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은 속에 있는 간뇌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깊은데 있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성소도 그렇게 되어 있다. 법궤는 가장 중심에 들어 있다. 궤는 장막의 중심이고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성막을 짓는 목적은 이 궤를 위해서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성막은 궤를 중심으로 싸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 궤를 중심에 놓고 싸고 있는가? 그 궤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새겨진 돌판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궤가 있고 궤 속에 다시 돌판이 들어 있다. 그 생명을 위해서 성막이 지어져 있다. 성막의 중심은 법궤이고 법궤의 중심은 돌판이고 돌판의 의미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하나님 자신의 증거,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를 들어 말할 수 있다. 교회를 성막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바로 법궤라고 할 수 있다. 법궤를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고 법궤의 어떠함이 확산되어진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어떠함이 확산된 것이 교회이고 법궤의 어떠함이 확산된 것이 바로 성막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명이고 심장이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별 것이 다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해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회, 전도가 중요하다는 교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로 그것도 다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바깥뜰에 있거나 성소 안에 있는 것이지 그런 것들이 심장은 아니다. 심장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심장이라는 말은 인격이 심장이라는 말이다. 교회의 심장은 한 인격이다. 교회의 생명은 한 인격이다. 한 인격이 없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를 볼 때 교회의 심장이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하다. 교회의 심장이 그리스도라고 했지만 그것이 한 인격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것이었는지가 문제이다. 인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고 믿음일 수도 있고 기도일수도 있다. 그런 것들이 교회의 심장을 이루고 있었는지 아니면 영원한 인격, 십자가에 못 박힌 영원한 인격이 심장이 되어 있었는지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날에도 역시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만큼 세상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가 라든지, 얼마만큼 성경에 충실하냐 라든지, 얼마만큼 전통을 잘 지키고 있는가 라든지, 이런 것으로 교회를 평가하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오직 교회의 평가기준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 인격 자체이다. 그 인격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이 궤는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증거의 체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예표임
첫째로 법궤는 하나님의 증거의 체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하나님의 증거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볼 때, 그 궤는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증거의 체현이다. 아직 살아 있는 한 사람이 나오기 전에 증거궤는 하나님의 증거의 체현이었다. 돌판의 어떠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치수를 맞추어 궤를 만들고 그 궤위에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금을 입혀 만들어 놓은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 하나님이 몸을 입고 나오시면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생명이 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율법이 생명이 된다면 이런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골로새서 2장 9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했다. 신격의 충만,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고 있다. 신성이 그냥 신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 안에 거하고 있다. 한 인격이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으로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정의이고, 묘사이며, 설명이다.
보통 종교 안에서 하나님이라고 하면 불도 내리고 바람도 불게 하는 기사와 이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 어떤 인격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인격의 독특함, 독생자의 영광인 한 인격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을 내릴 수 있고 바다를 가를 수 있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 병자를 고칠 수도 있고 사람이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다. 종교 생활을 할 때 하나님 하면 인격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능력을 생각한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어떤 존재, 초월적인 존재, 인간을 초월해서 있는 어떤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분으로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우리와 하나 되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을 인격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시대에 많은 이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적이 많이 있었어도 그분을 접촉할 수 없었다. 그분의 인격을 접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율법이 나오게 되었고 율법은 그 안에 그분의 인격을 묘사하고 있다. 능력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홍해 바다를 갈랐다든지 반석을 쳐서 물이 나왔다든지 하는 이적들을 율법에 쓴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 생각, 뜻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인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이적만을 보고 살았던 것이 아니고, 이적은 잠깐이고, 일상적인 생활은 전부 율법에 의한 생활이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생활, 하나님과 동역하는 생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 이것이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이었다. 이것이 결국 신약에 오면 한 인격으로 함축되고 표현되고 체현되어서 하나님은 결국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정의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생각은 아주 얇은 생각이다. 그는 인격인 면에서 독생자이지, 능력을 행하기 때문에 독생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그가 독생자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의미에 있어서 독생자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처럼 능력을 행할 수가 없고, 또 능력을 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구원의 목적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가 바다를 가르는 능력이 있고 별 것이 다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인격을 필요로 한다.
불은 지금도 하나님이 내리려면 내릴 수 있다. 굳이 사람의 손을 통해서 할 필요가 없다. 사람 손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또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 사람이나 불러다 쓰면 된다. 그렇지만 인격은 아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그냥 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인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의미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17:7)”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2) 하나님을 접촉하고 누리는 실체로서 그리스로를 예표함
두 번째는 하나님을 접촉하고 누리는 실체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접촉하고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법궤였다. 법궤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서 하나님을 누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그림자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접촉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참 인격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그 인격은 접할 수 있다. 아무리 기사와 이적 많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접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경외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은 누릴 수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과 인격적인 접촉을 할 수 있다. 그분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을 하나님자신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로마서 9장 5절에 보면 예수를 가리켜“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영원히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었다. 결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고 신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완전하게 표현되었다는 의미에서 “영원히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법궤로서 예표되고 법궤의 실체로서 육체가 되시고 인격이 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한 인격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처음 그렇게 되었는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노아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여러 선지자들도 이 인격을 만나서 이 인격을 표현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 온전하지 않고 다 부분적이었다. 이 사람들은 능력을 행하거나 기적을 일으키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그것을 백성에게 선포했던 사람들이다.
그것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했다든지,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감동했다든지, 어떤 말을 했다든지 이렇게 쓰여져 있다. 선지자들의 말을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민27:18)”했고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대하24:20)”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전부 그들이 인격적인 접촉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와서 그 백성에게 전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쭉 따라오다가 점점 더 밝아져 마지막에 가서 한 열매를 맺은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나무가 다 자라서 마지막에 열매가 열렸다 하는 것과 똑 같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히1:1)”라고 한 것처럼 여러 모양으로 말씀했다는 것은 다 부분적이었다는 뜻이다. 여러 모양으로 말씀했다. 어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런 면을 말하고, 어떤 선지자는 하나님의 저런 면을 말하고, 여러 모양으로 말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최종적으로는 아들로 말씀하셨다. 아들 안에 와서 부분적인 것이 전체적인 것이 되고, 불충분하던 것이 온전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법궤가 완전하게 실현된 한 인격을 만나게 되고, 이 인격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나. 법궤는 성막의 중심
법궤는 성막의 중심이다. 이것은 교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거처의 중심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의 중심인데 이것은 중심 중의 중심이다. 생명 중의 생명이다. 이 중심 사상, 이것을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앞에는 전 인류가 있다. 전 인류 안에서 택함 받은 것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중에서 택함 받은 사람이 제사장들이다. 제사장들 중에서 더 택함 받은 것이 성막이다. 성막 중에서 더욱 택함 받은 것이 법궤이다. 중심 중의 중심이다. 한 성막 안에 바깥뜰이 있고,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고, 법궤가 있고, 법궤 안에 돌판이 있다. 이렇게 어떤 중심성을 갖고 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택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그 많은 인류 가운데 이스라엘만을 택하셨는가? 이 중심성 때문이다. 하나님이 온 인류를 택하지 않은 게 아니다. 온 인류를 창조하셨으므로 온 인류의 하나님이다. 꼭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드러났다. 왜냐하면 택함 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택했다 할 수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 절대적인 필요 때문에 하나님과 최초로 가장 중심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는 격언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사실 알고 보면 목마른 사람이 먼저 만난다. 이스라엘이 그런 백성이다. 다른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도 살 수 있는 백성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상황은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못 사는 백성이었다. 하나님이 아니면 못 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손이 먼저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 우리가 해 봐도 그렇다. 정말로 다급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유가 많아서 죽을 때쯤 가서 보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다음에 생각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다. 좀 편안하면 나갔다가 또 좀 어려우면 오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바로 그런 이치이다.
하나님이 왜 인류를 모두 다 택하지 않고 이스라엘만을 택했는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표현하고 보여야 되겠는데, 하나님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사람을 통해서는 자기 자신이 온전하게 표현될 수가 없다. 다급한 사람을 통해서 완전하게 표현되지, 다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완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맛없는 음식도 맛있다. 그렇지만 배부른 사람은 아주 좋은 음식을 줘도 별로 맛이 없다. 그래서 그 가치를 정확하게 나타낼 수가 없다.
도루묵이라는 고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동해안으로 피난을 가서 마땅한 음식이 없어서 목어라는 물고기를 올렸는데 먹어 보니까 참 맛이 있어서 생선 이름을 신하에게 물으니 ‘목어’라 했다.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목어’라 할 수 없어서 임금님이 ‘은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그래서 환궁한 후에 갑자기 그 고기가 생각나서 가져오라고 했다. 분명히 궁중에서 요리를 했으니까 더 잘 했을 것인데 먹어 보니까 별로 맛이 없었다. 궁중에서 너무 좋은 것을 많이 먹으니까 별 맛이 없었다. 그래서 도로 목어라고 하라 해서 ‘도루묵’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고기를 먹어보니 맛이 있었다. 다른 고기와 다른 특성이 있는데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맛이 있다. 싱싱하기만 하면 참 맛있다. 나는 배고픈 사람에 속한 모양이다. 맛있게 느껴진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 맛을 정확하게 표현해낸다. 그리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게 되고 하나님을 정확하게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이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고 높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이스라엘은 결코 잘나서 택함 받은 백성이 아니고 사실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어려움에 처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인 상황이 그렇다.
바벨의 시대에 아브라함이라는 작은 사람이 서 있을 자리가 없었다. 갈대아 우르에서 그 사람이 서 있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객지로 나온 것이다. 객지로 나온 사람치고 본토에서 잘 살았던 사람이 없다. 본토에서 잘 사는 사람은 객지로 나오지 않는다. 자기 집 잘 사는데 뭐 하러 객지로 나오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잘 못사는 사람이 객지로 나온다.
나도 내가 태어났던 고향에서 잘 살았으면 안 나왔다. 내가 거기서 못 살게 되어서 나온 것이다. 못 살아서 나왔으니 나온 것 자체가 감사했다. 앞으로 무엇이 보장되느냐 안 되느냐 보다 일단 거기를 떠나는 것이 나에게 해방이었다. 그래서 나왔다. 그래서 다시는 돌아갈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후회해 본 적도 없다.
늘 그런 길로 왔다. 늘 후회하지 않는 길로 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의지가 강하고 현명해서가 아니다. 그래서가 아니고 뒤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뒤로 돌아가는 곳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회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우리 형제들이 처음에 따라 오면서 늘 망설이고 뒤돌아보고 자기가 잘못 온 것 아닌가 한다든지, 인생에 손해 보는 것 아닌가 한다든지, 따라갔다가 자기 인생이 뭐가 될지를 고민한다든지 하는 걸 보면서 속으로 이 사람들은 확실히 나보다 환경이 좋은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객관적으로 나보다 환경이 다 좋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고민하는 사람이나 후회하는 사람들을 별로 동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보다 다 여유가 있고 배부르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한다. 괴롭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면 좀 굶어 봐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차마 그렇게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 ‘그래 좀 굶어봐라 그러면 맛이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결코 잘 난 백성이 아니다. 좋은 환경에 있었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소망이 없는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적합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어려움이 오니까 또 불평했다.
그것을 보면 사람 속에는 끝없는 불평이 있고 조금만 불편하면 옛날 생각을 하는 게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광야 생활이 애굽 생활보다 현실적으로 훨씬 불안하다. 애굽에서는 종은 종이지만 그래도 밥 세끼는 먹을 수가 있는데, 여기서는 밥 세끼도 보장이 안 되니까 훨씬 더 불안한 생활이다. 그러므로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불러서 광야 40년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는 광야 생활 못하겠다. 정말 죽어도 못 하겠다, 가나안 땅에서 우리가 굶어 죽을지언정 다시는 광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이 안 되었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택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점령하게 했는가? 역사적으로 본다면 참 불공평하고 부당하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기 전까지 가나안 족속들은 상당히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당시로는 상당히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서 다 점령을 했다.
성경을 그냥 그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해라. 이것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이다. 내가 약속한 땅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괜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민족이 들어와서 침략을 한 것 아닌가? 침략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논리로 역사 안에서 정당화되겠는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정당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을 만약 역사적으로 본다면 아주 모순된 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의 땅을 점령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지금 만주 땅을 가서 점령하라는 것과 똑같다. 그렇다면 일본에게도 한국 점령해라 이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안 되겠는가?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이 책을 보면 아주 모순이 많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표현할 백성을 찾고 있고 절대적으로 땅이 필요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원리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거기서 농사짓고 잘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땅이 아니면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잘 했느냐, 잘못 했냐 할 수가 없다. 광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농사짓는 땅으로 가지 않으면 자기들은 살 수가 없다. 생사가 걸려 있기 때문에, 생사가 걸려있는 한 잘잘못이란 것이 없다. 내가 지금 죽게 되었다면 거기서 무슨 선이니 악이니 좋은 거니 나쁜 거니 이런 기준이 있겠는가? 그런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자리에 가면 사느냐 죽느냐만 중요하지, 선이냐 악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을 하는 게 그렇다. 전쟁을 생각해 보면 사람을 죽이는데 그걸 선이라고 하겠는가? 악이라고 하겠는가? 편안할 때 앉아서 하는 말이 악이니 선이니 이러지, 그 현장에 가서 이것이 옳은 건가 나쁜 건가 이러고 있다가는 자기가 총 맞아 죽으니까 선악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하여간 적에게 총을 쏘아야 내가 살게 된다.
그걸 누구보고 잘했다 하고 못 했다 하겠는가? 죽은 놈만 잘못한 것이다. 거기서는 정의라는 것이 없다. 6.25 전쟁이나 이런 역사를 두고 지금 와서 배부른 사람들이 잘했니, 잘못 했니 한다. 그런데 그 때 당시로는 그것을 잘못했다 잘했다 할 수가 없다. 거기서 그런 평가라는 것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지도 않는다. 죽느냐 사느냐만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런 자리에 있는 백성이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간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본다면 땅이 없어서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 가나안을 점령해 들어갔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정당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칠족을 멸하고 들어가라고 했다고 하면 모순이 생긴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생사를 주관하고 있는 하나님이지, 선악을 주관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항상 어떤 편에 서 있느냐 하면 사느냐 죽느냐 하는 편에 서 있다. 선하냐 악하냐 하는 편에 있는 게 아니고 사느냐 죽느냐 하는 데 있다.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 이 사람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살리는 게 급하기 때문이다. 결코 도덕을 무시해서가 아니고 선악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선과 악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는 게 급선무고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
이것을 잘못하면 무 율법주의로 생각할 수도 있고 무도덕주의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한다든지,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멸망받기 합당한 일이다. 도덕이나 율법이 무시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해서 그런 것뿐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의 땅을 점령하는 것은 나쁜 것이니까 너희는 광야에서 죽어야 한다.’ 이러면 참 하나님이 되겠는가? 정의의 하나님은 될지 모르지만 살려주는 하나님은 안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는 가나안 땅을 정복해라’ 했으므로 도덕적으로는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이지만 살려주는 하나님이 되었다. 생명주는 하나님이 되었다.
왜 이스라엘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이런 문제이다. 이스라엘 속에 제사장을 택할 때도 똑같다. 모세가 산에 있는 동안에 아론과 사람들이 모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경배를 했다. 그래서 모세가 제사장 백성을 택할 때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출32:26~27)” 했을 때 누가 나왔나? 오직 레위인만 나왔다. 그래서 레위인 족속이 제사장이 되었다.
레위인들의 조상 레위는 야곱에게도 큰 충격을 준 아들이다. 세겜에서 디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의 추장 하몰을 죽이고 살육을 했던 사람들이다. 잔인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영원히 잔인한 사람으로 남았지만, 제사장 백성이 된 레위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생명을 걸고 나왔기 때문에 제사장이 되었다. 레위인들이 제사장이 된 것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된 것이 아니고 사느냐 죽느냐하는 관점에서 되었다. 생명의 관점에서 되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느냐 죽느냐 하는 자리에서 제사장이 되었다.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구조는 바로 이렇게 생명의 구조로 되어 있다. 가장 깊은 지성소의 법궤 위에는 속죄소라고 하는 곳이 있다. 거기는 항상 양이나 염소 희생의 제물의 피를 가지고 거기다 뿌려야 하는 곳이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다. 생명은 도덕보다 더 앞에 있다. 생명은 선과 악보다 더 앞에 있다. 살아야 도덕도 있고 법도 있지, 죽는데 도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처의 중심인 증거궤는 결국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은 중심 중의 중심이다. 생명 중의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하나님의 말씀, 법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 중의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첫째로 꼽아야 될 문제가 바로 이 법궤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 인생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춰 있다 하더라도 내 안에 법궤가 없다면 그러면 법궤 없는 성막이 된다. 인격 없는 인생이 된다. 돈도 있고 지위도 있고 다 있다고 해도 만일 그리스도가 없으면 뭐가 되겠는가? 인격 없는 인간이 된다. 인격 없는 인간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허수아비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인격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인격은 우리가 말하는 인격과는 다른 개념이다. 개념이 다른 인격이다. 사람이 노력해서 만들거나 수양을 해서 쌓은 어떤 도덕적인 것을 인격이라고 한다. 이 인격이 아니면 사람이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사람도 만일 어떤 도덕이나 선을 빼 버리면 짐승이나 매 한가지가 된다. 본능만 남기 때문이다.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말이나 소를 옷 입혀 놓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도덕을 모르면 그렇다는 말이다. 배우지 않는다는 말은 수학이나 과학을 배운다는 말이 아니다. 도덕을 모르면 사람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교 사상이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이러한 도덕을 닦아서 이런 도덕성을 가져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덕이 우리 인간의 생명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이 한 인격이 우리의 생명이다. 참 도덕은 알고 보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온다. 참 도덕, 참 진실, 참 진리는 바로 이 한 인격에서 나온다. 이 인격이 없이 어떤 도덕을 닦는다든지, 수양을 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꾸며 만든 것이다.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참으로 도덕적이려면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절대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할 때 그것을 일 번으로 생각해야 한다.
구약에서는 돌판을 일 번으로 생각했다. 바깥에 양장은 좀 찢어져도 상관이 없는데 만일 돌판이 없어져 버리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후대에 와서 법궤가 없는 성전이 있었다. 법궤를 잃어버린 성전, 그래서 껍데기만 있었다. 요즘에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쓰듯이 돌판이 없는 성전이 있었다. 그래서 “그 성전을 헐어라 사흘 동안 내가 일으키겠다(요2:19).” 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돌판은 신약에 오면 한 인격이다.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신약의 중심이고 우리 인생의 중심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이 인격 때문에 존재한다. 인간의 중심은 무엇인가? 바로 이 인격이 우리의 중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내용이고 하나님의 집의 내용이다. 법궤는 하나님의 집을 상징하는 것이다. 돌판은 곧 하나님 거처의 내용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궤는 성막의 내용물 중의 내용물이다. 성막 안에는 여러 가지 내용물이 있는데 그 내용물 중의 중심이다. 상도 있고 등대도 있고 향로도 있고 다 있는데 이것들은 다 모두 이 법궤를 보좌하는 것이다. 법궤를 보좌하는 것이므로 내용물은 될 수 있지만 중심은 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등대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떡상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향로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발하자’ 이것이 중심인 교회도 있고, 또 ‘말씀을 먹자’ 이것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도 있다. 향로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향은 기도니까 ‘기도를 중심으로 하자’ 이런 교회도 있다. 다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심 중의 중심은 아니다.
법궤가 유일한 중심이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심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내용물 중의 내용물은 무엇인가? 중심 중의 중심은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오늘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사랑의 종교다, 믿음의 종교다, 봉사의 종교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얼빠진 사람들이다. 얼빠졌단 말은 무슨 말인가? 법궤가 빠졌다는 말이다. 정신 빠진 사람보고 얼빠진 사람이라고 한다. 항상 멍청해 있는 사람이 얼빠진 사람이다.
내용이 없는 사람, 중심이 없는 사람, 핵심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이 얼빠진 사람이다. 사랑도 좋고, 믿음도 좋고, 봉사도 좋고, 다 좋은 것들이다. 우리가 가져야 될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용물 중의 내용은 아니다.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그것을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핵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을 봐서 합격하려면 핵심을 잘 알아야 합격한다. 주변 것만 많이 알고 핵심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시험장에 가면 시험 가기 전에 아는 것은 많은데 시험장에 가면 답을 못 쓴다. 왜냐하면 답안지를 요구할 때는 핵심을 요구한다. 고등고시 합격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안 한 것이 아니고 많이 하기는 했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이 있고 4학년 졸업하고 몇 년을 공부해도 합격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누가 더 많이 알겠는가? 많이 알기는 공부를 오래한 사람이 더 많이 알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1학년 때 합격을 했는가? 내 생각에는 이 사람은 공부는 많이 안했지만 핵심을 알기 때문이고 떨어진 사람은 아마도 핵심을 몰라서 그런 것 같다.
우리가 교회에 다녀도 핵심을 모르면 안 된다. 주변 것은 다 많이 아는데 핵심을 모르면 답안지 쓸 때 쓸 수가 없다. 핵심만 안다면 출제자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핵심을 가지고 다 응용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핵심을 모르면 수만 가지를 외워서 있다 보면 이번 시험에 가면 이쪽 귀퉁이를 잊어버리고 다음 시험에 가면 저쪽 귀퉁이를 잊어버린다.
떨어진 사람은 다 그렇다. 어느 한 가지 문제가 잘못 되어서 떨어진다. 세 가지 문제가 나오는데 어느 하나가 잘못되어 떨어진다. 금년에는 요것 두 개는 되었는데 저쪽 하나가 잘못 되고, 내년 시험에는 저것 두 개는 되었는데 이쪽 한 개가 잘못 되어서 항상 떨어진다. 핵심이 없기 때문이다. 얼이 빠졌다는 것이다.
성전 안에 만일 법궤가 빠지면 얼이 빠진 것이다. 교회 안에 만일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얼이 빠진 것이다. 인생 안에 이 인격이 빠지면 얼이 빠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용 중의 내용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인생을 살 때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핵심을 알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핵심 정리를 잘 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핵심을 아는 사람이 시험을 잘 치는 사람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결국 시험대에 오를 것 아닌가? 지금도 물론 우리가 시험대에 올라 있다.
지혜롭게 사는 사람과 어리석게 사는 사람을 보면 핵심이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핵심이 없는 사람은 다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핵심 아닌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험 전날 밤새도록 잠 안자고 공부하는데 핵심은 공부 안하고 다른 것만 공부한 사람이다. 수고는 남보다 더 많이 하지만 소득은 없다.
나도 나이만 젊었으면 고등고시 시험을 한번 보고 합격을 해서 ‘봐라’ 하겠는데 지금은 할 수가 없다. 물론 그런 실력도 없지만 내 마음에 꼭 될 것 같다. 왜 그것을 못 할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을 공부하고 왜 핵심을 모를까?’이런 생각이 든다. 핵심을 가지고 법을 만든 것이고, 또 법이란 건 원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내가 핵심을 안다면 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법을 만들 수 있는 사람 같으면 왜 답을 못 쓰겠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알고 이 핵심이 있어야 인생을 살 수 있다. 이런 형편에는 이렇게 살 수 있고 저런 형편에는 저렇게 살 수 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왜 그런가?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리스도만 있으면, 그 핵심만 있으면 이렇게 문제 내든지, 저렇게 문제 내든지 마찬가지다. 똑 같은 것이다. 핵심만 안다면 내가 문제를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법을 만들 수 있다. 핵심을 가지고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도 핵심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만들어 가야 한다. 또 핵심을 가지고 교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가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사랑을 동원한 것도 없고 믿음을 동원한 것도 없고 봉사를 동원한 것도 없고 어떤 방법을 동원한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되었는가? 이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집의 내용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집의 내용이신 법궤, 인생의 내용이신 그리스도, 우리 인생의 내용인 이 한 인격,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인격, 그 자리, 인생의 위치, 이것이 중심 중의 중심이다. 이 중심에서 살아야 내가 여기에 처할 줄도 알고 저기에 처할 줄도 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서 일체의 비결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하다보면 믿음이 안 되고, 믿음을 하다보면 사랑이 안 된다. 그래서 행위냐 율법이냐, 행위냐 믿음이냐, 이런 토론도 있다. 이것은 핵심이 없기 때문이다. 핵심만 알면 아주 간단하다. 신학교 다닐 때 논문을 쓰라는데 이것을 쓰라고 했다. 믿음이냐 행위냐 로마서에서는 믿음, 야고보서는 행위, 그러니까 서로 모순된다. 이것에 대해서 쓰라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하게 썼는데 아주 잘 썼다고 했다. 핵심만 알면 간단하다.
인생의 내용은 한 인격이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핵심부터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핵심 정리를 해서 핵심에서부터 살아나가야 한다. 성막은 이 핵심의 확산이다. 교회는 이 핵심의 확산이다. 어떤 방법으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핵심의 확산이다. 인생의 목표, 인생의 핵심을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고, 이것이 없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게 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앞에 성막을 보여 주시고 그 성막을 중심 중의 중심으로 이끌어서 법궤를 짓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계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인격으로 우리에게 발견되게 해 주시고 우리가 이 핵심 중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핵심 중의 핵심 속에 우리 인생을 건설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단번에 주신 이 믿음 위에 우리 인생을 건축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여기서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