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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정(水月亭)과 강항의 「수월정기(水月亭記)」·「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
Ⅰ 수월정(水月亭)과 「수월정기(水月亭記)」
수월정은 섬진강 하류의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135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정자이다. 옥천(玉川) 정인관(鄭仁寬) 공이 선축하였는데, 1971년에 후손들이 수월정유허비를 세웠다. 현재의 수월정은 1999년 광양시에서 건립한 것이다. 옥천은 1552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지평, 장흥·밀양부사, 승지, 부제학을 지냈다고 하나, 왕조실록에는 1575년 성균관 전적(典籍) 기록만 보인다. 아들 문과방목에 1576년 영천군수였다. 벗인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제문을 지을 때 관직이 장흥부사이고, 아들 정설(鄭渫 1547~1643)이 1598년 나주목사에서 물러나 이곳에 우거(寓居)하였다.
인근에는 섬진진터 석비좌대(蟾津鎭址 石碑座臺)가 남아있다. 「호남진지(湖南鎭地)」에 의하면 '처음 섬진에 군사를 배치한 분은 이충무공으로 섬진의 건너 쪽인 두치(豆恥)에 조방군(助防軍)을 두어 이곳을 지키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희양지(曦陽誌)」에 정식으로 수군진을 삼은 것은 1705년으로 종8품의 별장을 두었다. "서해관(誓海館)"이란 집무청 및 창고 6채와 아사(衙舍) 등 8채의 집이 있으며, 병선으로는 방선(防船) 2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있었다. 또한 당시의 주둔군은 359명이었으며, 주변에는 민가 88호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수월정이 이름이 난 것은 뛰어난 풍광과 더불어 「수월정기(水月亭記)」와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이 지은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의 뛰어난 문필에 따른 것인데, 수월정기의 저자가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인지 수은 강항인지 논란이 있다. 그것은 「송강집(松江集)」과 「수은집(睡隱集)」에 각각 실려있기 때문이다.
송강집은 1633년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원집(原集)을 발간하였는데, 1677년에 속집(續集)이, 1894년에 별집(別集)이 발간되었는데, 속집(續集)에 실렸다.
수월정기에 나이 오십(1596년)에 관직에 물러났다고 하였으나, 「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에 나주목사 이임이 1598년 5월이므로 52세가 정확하고, 이때는 강항(姜沆)이 1597년 9월에 왜군에 잡혀 왜국에 포로로 억류되었을 때이므로 1600년 귀국 후에 이 글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 정설(鄭渫 1547~1643)
정설의 문과방목을 보면, 1547년 정미생이고 1576년 병자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당시 거주지는 남원이다. 이때 부친의 직책은 영천군수(榮川郡守)이다. 계미년에 졸하고 나이는 93세로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이다. 관직은 부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은퇴 후 80세, 90세에 주어지는 수직(壽職)으로 품계가 올라갔기 때문인데, 계미년은 1643년이므로 나이는 97세가 맞는 듯하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1584년 전 성균박사(成均博士), 1591년 전 군수(郡守)라 하였고, 1597년 12.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는데, 「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에 재직기간은 1598년 1월~동년 5월이다. 1599년 6월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무산되었다.
< 1576년 병자년 식년시 문과방목 >
Ⅰ 수월정기(水月亭記), 강항 「수은집(睡隱集)」
士大夫之進不得 有爲於斯世 棄位而巷處者 必謀明山麗水之濱 池館苑囿之樂. 一以爲淸閑寂寞之娛. 一以抒憂時 戀闕之懷. 六一翁之穎上 杜祁國之於睢陽 皆是已. 前牧使光州鄭侯 年五十而棄於時 遂求先大夫 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 距先廬十里許 選勝爲亭 以水月爲名焉. 余觀夫南方之山 巍然高者 以千數 而白雲爲最奇. 南方之水 可行舟者以十數 而蟾江爲最大. 以白雲之東麓 爲屋山而 以蟾江之上流 置屋下 則勝絶有不暇論也. 而況天下之三神山方丈 居其一煙火食人之生. 世間聞方丈之名者亦罕矣. 其於起居飮食 早夜相對者如何哉! 左嶺右湖 控引島巒 商舡之所走集 市賈之所輻湊. 岳陽朝嵐 鶴洞暮煙. 躑躅成山 火雲成峯. 霜落而千林紅 氷塞而長河白 千態萬狀 畢集於几席之下 則此水月之所 以選勝也. 兵火十年 文物一空 而水月則依舊也. 世降俗末 人心不古 而水月則猶前也. 市道日巧 一錢且湧 而水月則無價也. 棄枯集菀 門雀可羅 而水月則不遐也. 逝者如斯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 浮光躍金 靜影沈璧 而水得月而益淸 月得水而益白. 直與侯之胸采 上下乎同符 則此水月之所 以得名也. 余雖不獲 登公之亭 以幸嘗𥩈 誦侯之歌 見公之書. 已得水月之大槪 而若公之心則 余固知之 於是乎書.
사대부가 벼슬길에 나가 부득이 이 세상을 탄식하며 그 지위를 버리고 거리로 나서는 사람은 반드시 명산이나 아름다운 강가를 찾아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전원을 즐기게 되는데, 하나는 청아하고 한가한 자연에서 적막함을 즐기는 것이고, 하나는 환란을 맞아 임금을 그리는 아쉬움을 달래는 것이다. 육일옹(六一翁 구양수)이 영상(穎上)에 머물 때와 두기국(杜祁國)이 수양(睢陽)에 지낼 때가 다 이런 것이다.
전 목사 광주 정공은 나이 오십에 벼슬을 그만두었을 때, 선친인 옥천 선생의 광양에 있는 별장을 찾았는데, 옛집에서 십 리 거리이고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정자를 지었으니, 이름을 수월(水月)이라 하였다. 내가 보건대 남쪽의 산은 우뚝 솟은 것이 천 개의 봉우리쯤 되는데 백운산이 가장 특이하다. 남쪽의 강도 배가 다닐만한 곳이 십여 군데로 섬강이 가장 크다. 백운의 동쪽 언덕은 정자의 동산이 되고, 정자의 아래는 섬강의 상류로서 그 경치가 절경이니 말할 것도 없다. 하물며 삼신산은 방장이고 거기 기거하며 불 피워 밥을 짓는 삶을 살고 있다. 세간에 듣기에 방장의 이름 역시 희소하다. 거기에서 음식을 즐기며 기거하며 밤낮으로 상대함은 어떠한가!
왼쪽은 영남이고 오른쪽은 호남이니, 섬과 만을 끌어들여 장사하는 배들이 모여들고, 장사와 물건이 모여드는 곳이다. 악양의 아침 안개, 학동의 저녁연기, 철쭉꽃은 산을 메우고, 붉은 노을은 봉우리를 물들인다. 서리 내리니 온 숲에 단풍 들고 얼음이 가득 차, 긴 강은 하얗다. 천태만상이 모여드는 자리의 아래쪽 이곳이 명승을 터 잡은 수월정이다. 전쟁 십 년에 문물은 사라졌는데, 수월정은 그대로다. 세상이 그릇되고 풍속은 어지러워 인심도 옛것이 아니건만, 수월정은 이전과 같다. 시도에서 하루의 기술자를 부려도 일 전을 치러야지만, 수월정은 한 푼도 받지 않는다. 낙엽 지고 마르면 무성하게 우거지고, 집안의 참새는 그물 쳐 잡을듯하니, 수월정은 틈이 없다.
가는 것은 이와 같은 데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차고 기욺은 저와 같은데 죽으면 성하고 쇠함도 없다. 빛은 물 위에 떠 금빛으로 뛰고 달그림자는 고요함이 옥구슬 빛처럼 깊으니, 물은 달빛을 받아 더욱 맑고 달은 물을 만나 더욱 희다. 바로 정공의 흉금과 아래위로 부신을 맞춘듯하니, 이 수월정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나는 비록 수월정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공의 가사를 암송하고 공의 편지를 읽어 본지라 이미 수월정의 대강 모습을 알고 있다. 마치 공의 마음을 나는 확실히 알기에, 여기 글을 쓰게 되었다.
원유(苑囿) : 예전에, 울을 치고 금수(禽獸)를 기르던 곳. 또는 초목(草木)을 심는 동산과 금수를 기르는 곳을 아울러 이르던 말.
청한(淸閑) : 청아(淸雅)하고 한가(閑暇)함.
육일거사(六一居士) :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 만년에 지은 호. 그 유래는 ‘책 1만 권, 금석문 1천 권, 거문고 1개, 바둑 1판, 술 1병, 시인 1명(1만 권+1천 권+1+1+1+1=6개 '일')을 가지고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영상(穎上) : 중국 안휘성(安徽省) 서북부의 회하(淮河)와 영하(潁河)가 만나는 곳
두기국(杜祁國) : 두기는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애첩인데, 진양공(晉陽公)이 세상을 떠나자, 국사(國事)이던 조둔(趙遁)은 강보에 싸인 태자 이고(夷皋:晉靈公) 대신 진문공의 서자로서 가장 장자(長子)인 두기의 아들 공자 옹(雍)을 국군(國君 임금)으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여, 도망하게 되었으며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수양(睢陽) : 중국의 옛 지명.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송나라의 땅.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상구시(商丘市)의 남쪽에 있음.
옥천선생(玉川先生) : 정설의 선친인 정인관(鄭仁寬) 공의 호. 1552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응교, 사헌부지평, 밀양부사, 부제학 등을 지냈다. 이퇴계(이황), 기고봉(기대승)과 도의(道義)로 사귀었으며, 남쪽의 선비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南士從學者 日塡門前)
별업(別業) : 살림을 하는 집 외에 경치(景致) 좋은 곳에 따로 지어 놓고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
좌령우호(左嶺右湖) : 임금이 있는 한성을 기준으로 남쪽을 바라볼 때, 좌측이 영남이고 우측이 호남이다.
세강속말(世降俗末) : 세상(世上)이 그릇되어 풍속(風俗)이 어지러움.
영허(盈虛) : 충만(充滿)함과 공허(空虛)함. 차고 기욺. 번영(繁榮)함과 쇠퇴(衰退)함.
소장(消長) : 쇠(衰)하여 사라짐과 성(盛)하여 자라남.
부광약금(浮光躍金) 정영침벽(靜影沈璧) :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글귀이다.
■ 송강 정철(鄭澈)과 수은 강항(姜沆)의 수월정기(水月亭記) 차이점
수월정기는 「송강집(松江集)」에도 실리고, 「수은집(睡隱集)」에도 실렸다.
한 작품인데도 두 본(本)의 차이점은 상당한 부분에서 한자가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의미의 차이 없이 다른 한자로 대체되는 곳이 대다수인데, 예를 들면 송강본은 ‘필점명산(必占名山)“이라 한 것을 강항본은 ’필모명산(必謀明山)‘이라 하고, 송강본(松江本)은 ‘歐陽公’이라 하고, 수은본(睡隱本)은 ‘六一翁’이라 하는 식(式)이다.
둘째는 아예 내용이 다른 부분인데, 송강 수월정기의 중간 부분은 강항의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의 제목과 내용을 여러 군데 인용하였다. 어린폭주(魚鱗輻湊), 위천천무(渭川千畝), 학동조람(鶴洞朝嵐), 악양모연(岳陽暮煙), 척촉성산(躑躅成山), 화운성봉(火雲成峯) 등이다. 글의 말미에 송강본(松江本)은 ‘故於是乎. 書辛缺秋 旣望 烏川鄭某記’라고 마치고 있으나, 강항본(姜沆本)은 ‘於是乎書’로 마친다.
전체적으로 한 작품은 진본(眞本)이고 한 작품은 가본(假本)인데, 상당히 작위적(作爲的)이다.
| ■ 송강집 (松江集) 鄭澈의 文集. 原集 2권‚ 續集 2권‚ 別集 7권‚ 합 11권 7책. 原集은 정철의 아들 鄭弘溟(1592-1650)이 김제군수로 있던 1633년(인조 11)에 정철의 遺稿를 수집하여 간행한 것이며‚ 이후 1674년 玄孫 鄭治가 重刊하였다. 續集은 1677년(숙종 3)경에 李選(1632-1692)이 繕寫하여 帙을 이루었다. 이어 1894년(고종 31)에 정철의 후손인 鄭雲鶴이 창평군수로 있을 때에 정철의 遺稿 중 그때까지 간행되지 않은 정철의 手墨筆帖에서 분명한 것들을 골라 別集을 편찬하고‚ 여기에 이미 간행된 原集·續集과 年譜 등을 보완‚ 改刻하여 간행하였다. 문집 첫머리에 1622년(광해 14) 申欽이 쓴 序와 1633년(인조 11) 李廷龜가 쓴 序가 있으며 이 문집의 편찬 기준을 밝힌 凡例가 있다. 原集의 권1은 시 234수‚ 권2는 雜著 6편‚ 疏箚 5편으로 되어 있으며 1632년 張維가 쓴 後序‚ 1633년 金尙憲이 쓴 跋文‚ 그리고 1674년 重刊때에 宋時烈이 쓴 重刊跋이 있다. 또 原集의 끝에는 정철의 큰아들 鄭起溟(1558-1589)의 遺稿인 ≪華谷遺稿≫(일명 ≪伯氏遺稿≫)가 첨부되어 있다. 續集은 권1에 시 315수‚ 권2에 雜著 2편‚ 疏 4편‚ 啓 10편‚ 祭文 9편‚ 書 33편이 있고‚ 부록으로 <峒隱與牛溪書>가 있다. 別集의 권1은 시 33수‚ 賦 4편‚ 墓碣 1편‚ 祭文 1편‚ 書 2편‚ 家間書 3편‚ 雜著 5편으로 되어 있으며‚ 권2는 世系圖와 年譜上‚ 권3은 年譜下‚ 권4는 賜祭文·祭文·挽詞·行錄‚ 권5는 行狀·諡狀‚ 권6은 神道碑銘·墓表·傳‚ 권7은 卞誣疏·書·記述雜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장각에는 세 종의 ≪松江集≫이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동일본의 책이다. 한편 ≪松江遺稿≫는 ≪松江集≫의 原集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
< 수월정기 원문(原文) 비교 >
ㅇ 水月亭記, 정철 「송강집(松江集)」
士大夫之進不得 有爲於斯世棄位 而巷處者 必占名山麗水之濱 池館園囿之樂. 一以爲淸閒寂寞之娛 一以敍憂時 戀闕之情. 歐陽公之穎上 杜祁公之 睢陽 皆是已. 前錦牧 光山後人鄭侯渫 年五十而棄於世也. 遂求先大夫 玉川先生之別業 於光陽 距先廬四十里 而居之選勝 築亭名曰水月. 余觀夫南方之山 嵬然高者 以千數 而白雲最奇. 南方之水可勝 舟者以千數 而蟾江爲最大. 以白雲之東麓爲屋上 而以蟾江之上流 置屋下則 形勝有不可論也. 而況天下之三神山 方丈居其 一煙火食者之生世間 聞此山之名者亦罕矣. 其於起居飮食 早夜相對爲如何哉! 左嶺右湖 控引島巒 來船去舳 雲飛而鳥逝 官津野墟 魚鱗輻湊 渭川千畝 鄴水朱華 鶴洞朝嵐 岳陽暮煙 躑躅成山 火雲成峯 霜落而千林紅 氷塞而長川白 千態萬象 畢集几房之下 則水月之所 以選勝也. 兵火十年 文物一空 而水月則依舊也. 世降俗末 人心不古 而水月則猶昔也. 市道日巧 一錢且涌 而水月則無價也. 棄枯集菀門雀可羅而水月則 不遐也.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浮光躍金 靜影沈璧 而水得月而益淸 月得水而益白. 直與侯之胸 次瑩澈同符焉 則水月之所 以命名也. 余雖不獲 登侯之亭 誦侯之歌 見侯之書. 粗得水月之萬 而若侯之方寸則 余固知已 故於是乎. 書辛缺秋 旣望 烏川鄭某記.
ㅇ 水月亭記, 강항 「수은집(睡隱集)」
士大夫之進不得 有爲於斯世 棄位而巷處者 必謀明山麗水之濱 池館苑囿之樂. 一以爲淸閑寂寞之娛. 一以抒憂時 戀闕之懷. 六一翁之穎上 杜祁國之於睢陽 皆是已. 前牧使光州鄭侯 年五十而棄於時 遂求先大夫 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 距先廬十里許 選勝爲亭 以水月爲名焉. 余觀夫南方之山 巍然高者 以千數 而白雲爲最奇. 南方之水 可行舟者以十數 而蟾江爲最大. 以白雲之東麓 爲屋山而 以蟾江之上流 置屋下 則勝絶有不暇論也. 而況天下之三神山方丈 居其一煙火食人之生. 世間聞方丈之名者亦罕矣. 其於起居飮食 早夜相對者如何哉! 左嶺右湖 控引島巒 商舡之所走集 市賈之所輻湊. 岳陽朝嵐 鶴洞暮煙. 躑躅成山 火雲成峯. 霜落而千林紅 氷塞而長河白 千態萬狀 畢集於几席之下 則此水月之所 以選勝也. 兵火十年 文物一空 而水月則依舊也. 世降俗末 人心不古 而水月則猶前也. 市道日巧 一錢且湧 而水月則無價也. 棄枯集菀 門雀可羅 而水月則不遐也. 逝者如斯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 浮光躍金 靜影沈璧 而水得月而益淸 月得水而益白. 直與侯之胸采 上下乎同符 則此水月之所 以得名也. 余雖不獲 登公之亭 以幸嘗𥩈 誦侯之歌 見公之書. 已得水月之大槪 而若公之心則 余固知之 於是乎書.
■ 수월정기(水月亭記)는 누구의 작품인가?
정설(鄭渫)의 본관은 광주(光州)인데 광주정씨 족보를 보면, ‘年五十棄官僑居光陽 玉谷選築水月亭於蟾津江上 松江鄭先生序其亭’이라 하였다. 즉 ‘정설공은 50세에 관직을 내놓고 광양에 임시 거처하였다. 옥곡(부친 정인관)은 성진강가에 수월정을 선축했는데 송강 정선생이 그 정자에 서문을 썼다’고 한다. 이는 이 작품들이 「송강집(松江集)」에 실리고 여러 경로를 통하여 많이 알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후일, 기정진의 고족제자인 유학자 월파(月波) 정시림(鄭時林)의 유품(遺品)에 「선부(選賦)」라는 필사본 책자가 있는데, 종유(從遊) 학자인 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의 서실에서 필사하였다고 부기(附記)하였다. 내용 중, 수월정기와 수월정삼십영의 제1영과 제2영의 시를 싣고 이를 정철(鄭澈) 소작(所作)이라 하였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과 인물의 생몰 시기로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나주목사(羅州牧使) 정설은 1547년생으로 1597년 12월에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598년 1월부터 5월까지 재직하고 은퇴하였다. 1599년에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무산되었다. 수월정기에 나이 오십에 기관(棄官)하였다고 하였다. 정확히는 52세이다.
반면,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은 1593년에 졸(卒)하였으므로 수월정기에 언급한 ' 연오십기관(年五十棄官) '의 1597~1958년에는 이미 고인(古人)이었으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송강집(松江集)」은 세 차례 간행되었는데, 원집(原集)은 1633년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김제군수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속집(續集)은 1677년 이선(李選1632-1692)이 선사(善寫)하여 간행하였는데, 권1에 ‘수월정기(水月亭記)’를, 권2에 ‘차수월정이수(次水月亭二首)’를 실었다. 아울러 별집(別集)은 1894년에 후손 정운학(鄭雲鶴)이 평창군수로 있을 때 그때까지 실리지 않은 것을 추가 발간하였다. 즉 ‘수월정기’는 원집(原集)에 실리지 않고 후일 추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월정기에 언급한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은 강항의 「수은집(睡隱集)」에 실려있다. 반면 수은 강항(姜沆 1567~1618)은 정유재란 때 1597년에 남원전투에서 전 참판 이광정 휘하에서 양곡 운반을 맡았는데 왜군 선봉의 급습으로 의병이 흩어지자, 군산으로 후퇴하던 이순신 장군 군영으로 가던 중 1597년 9월 왜군에 잡혀 일본에 억류되었다가 1600년에 송환되었다. 1598년엔 왜국에 있었으므로 귀국 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강항은 이 지역 문인들과 교류도 상당히 많았다. 특히, 강항의 장모는 옥천 정인관(鄭仁寬)공의 아우인 정인홍(鄭仁洪) 공의 딸이다. 정인홍 공의 외손자이고, 정설(鄭渫)은 20세 연배의 외당숙(外堂叔)이다. 강항은 광주정씨의 척족(戚族)으로서 외삼촌들과의 교류도 많았다. 「수월정기」와 「수월정삼십영」을 쓴 배경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혼선은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최근 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수월정기’는 수은 강항(姜沆)의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다.
■ 강항은 광주정씨 척족(戚族)
정설은 강항의 외당숙이고, 강항은 정인홍의 외손자이다. 정화, 정운은 외삼촌인데 각각 만사와 관련 시를 썼다. 외할머니 제주양씨는 양팽손의 따님으로, 양팽손은 1519년 기묘사화와 관련하여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Ⅱ 강항(姜沆)의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
제1영 대동풍월(大洞風月)
부세공명오십년(浮世功名五十年) 뜬세상 공명은 오십 년
귀래사벽객무전(歸來四壁客無氈) 돌아오니 사방 막히고 객 덮어줄 담요도 없네
유유계풍여삼월(惟有溪風與杉月) 생각해 보니 계곡에 바람 불고 삼나무에 걸린 달빛 있으니
취지응불비문전(取之應不費文錢) 이를 가져도 값 치를 일이 없구나!
제2영 악양연하(岳陽煙霞)
연하심쇄악양천(煙霞深鎖岳陽天) 깊은 연하에 묻힌 악양 하늘은
정사홍몽미판전(正似鴻濛未判前) 바로 천지개벽의 심판 전 모양이네
분명방장신선자(分明方丈神仙子) 분명 방장산은 신선의 모습인데
격단어초진객선(隔斷漁樵晋客船) 막히고 갈림은 어부와 나무꾼 같고 진나라 객선과 같구나!
홍몽(鴻濛) : 하늘과 땅이 아직 갈리지 아니한 혼돈 상태.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원기(元氣)
진객선(晋客船) : 중국 진나라의 객선처럼 다른 나라 풍경인 양 낯설다.
* 귀향한 수월정에서 아직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불안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제3영 경수천암(競秀千岩)
천암경학천부용(千岩競學千芙蓉) 천개의 바위가 배움을 다투듯 천 줄기 연꽃
직입여문제구중(直入閭門第九重) 바로 마을에 들어서니 구중궁궐이 줄지어 있네
의시와황보천석(疑是媧皇補天石) 이것이 와황이 돌을 다듬어 하늘을 기운 것인가 싶은데
지금편편낙횡종(至今片片落橫縱) 지금은 조각조각 어지러이 떨어져 있네
와황보천석(媧皇補天石) : 와황은 중국 신화에서 복희씨의 여형제로, 여와(女媧)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인류를 창조하고 하늘을 수리한 창조의 여신이다. 오색의 돌을 다듬어 하늘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 女媧。相傳為伏羲氏之妹,曾鍊石補天,後世遂尊稱為「媧皇」
제4영 쟁류만학(爭流萬壑)
중추훤회석선개(衆皺喧豗石扇開) 돌부채 열리니 사람들은 시끄러워 눈썹 찌뿌리고
동림청일은청뢰(洞林晴日殷晴雷) 동네 숲은 활짝 갰는데 숨은 곳에 우레 소리 들리네
빙군막이향로폭(憑君莫詑香爐瀑) 향로봉 폭포는 임금에 기대 으쓱거리지도 않고
쟁사분종만학래(爭似分從萬壑來) 다툰 후 나뉘고 줄지어 겹겹이 갈라진 골짜기로 흘러내리네
훤회(喧豗) : 떠들썩하다. 시끄럽다.
제5영 분지춘화(分地春花)
일도소양일도신(一度韶陽一度新) 한결 햇살이 밝아지니 한결 새로워져
산가계활미전빈(山家契闊未全貧) 산골 집은 외떨어졌는데 아주 가난한 것은 아니네
임지홍자경시절(任地紅紫競時節) 이곳은 붉게 물들어 시절을 다투고
장점정대만의춘(粧點亭臺滿意春) 좋은 터 지은 수월정에 봄기운이 가득하네
결활(契闊) : 삶을 위하여 애쓰고 고생함.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소식(消息)이 끊어짐.
임지(任地) : 관원(官員)이 부임(赴任)하는 곳. 여기는 귀향한 수월정이 있는 곳
장점(粧點) : 좋은 땅을 가리어 집 지음. 생전에 자기 묻힐 무덤 자리를 정하여 광중(壙中)을 미리 만들어 둠.
제6영 방장하운(方丈夏雲)
방장산운산상산(方丈山雲山上山) 방장산의 구름은 산 위에 산을 이루고
수심천첩유무간(愁心千疊有無間) 걱정은 천 겹인데 있든 없든지 간에
종용미위삼농망(從龍未慰三農望) 용을 따르니 원망 없이 농사를 짓고
벽락표연거우환(碧落飄然去又還) 푸른 하늘에 떨어져 바람에 나부끼듯 가고 또 오네
종용(從龍) : 용이 구름과 비를 몰고 오니 곧 ‘제때 비가 내린다.’라는 뜻.
삼농(三農) : 1 봄갈이, 여름 갈이, 추수(秋收)로 이루어진 세 단계(段階)의 농사(農事). 2 ‘농사(農事)’를 달리 이르는 말. 3 봄, 여름, 가을의 세 농사철(農事-).
제7영 백운추월(白雲秋月)
일편빙수만리부(一片氷輸萬里浮) 한 조각 얼음 수레가 만 리를 떠가고
백운산상백운추(白雲山上白雲秋) 백운산 꼭대기에 가을의 흰 구름 떠있네
빙수문착차시월(憑誰問着此時月) 이때의 달을 누구에게 물어볼까?
응조장안명월루(應照長安明月樓) 장안을 비추는 명월루로다
제8영 순암동설(蓴岩冬雪)
순암동설적성퇴(蓴岩冬雪積成堆) 순암에 겨울 눈 내리니 쌓여 언덕이 되고
의시목왕중벽대(疑是穆王重壁臺) 이 언덕은 마치 목왕의 중벽대 같네
수착왕공학창좌(誰着王恭鶴氅坐) 누군가 왕공이 학창의 입고 앉아 있듯
신선초출낭풍래(神仙初出閬風來) 신선이 처음 왔다는 낭풍에 왔네
목왕(穆王 BC992~922) : 주나라의 제5대 왕이자 천자. 재위 기간은 55년
| 동쪽의 서(徐)나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보라는 이가 목왕의 수레를 끌어 하루에 1,000리를 달려 목왕을 도왔고, 이에 보답으로 조성을 분봉하였고 조씨 성을 갖게 되었다. 훗날 주 효왕으로부터 영성까지 받고 진(秦)읍을 영지로 받으니, 최초의 통일제국이 될 진나라의 시작이었다. 조보의 또 다른 후손인 조숙대는 춘추 5패 중의 하나가 될 진(晉)나라로 가서 대부가 되었고, 그 후손이 기원전 403년 주나라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으니 이 나라가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조(趙)나라였다. |
중벽대(重壁臺) : 주 목왕이 3일간 통곡했다는 곳
| 주 목왕의 '중벽대'는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 유래한 것으로, 목왕이 15년 봄 정월에 곤씨(昆氏)라는 손님이 머물렀는데, 목왕이 중벽대를 지었다고 기록하였다. 문학고사에서 중벽대는 항상 목왕이 통곡하며 망자를 그리워하고 이별을 애도하는 이미지와 연결되어, 고금의 사랑하는 사람의 별세에 대한 깊은 애도를 상징한다. 周穆王的「重壁臺」源自《竹書紀年》,記載於穆王十五年春正月,留昆氏來賓,穆王作重壁臺。在文學典故中,重壁臺常與穆王痛哭思念亡者、傷悼離別的形象相連,象徵古今對所愛之人離世的深刻哀思 |
왕공(王恭 ?~398) : 동진(東晉) 사람. 전장군, 청연이주자사 등을 지냄
낭풍요지(閬風瑤地) : 곤륜산(崑崙山)의 꼭대기에 있다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
제9영 동령조돈(東嶺朝暾)
화륜비출석문동(火輪飛出石門東) 석문 동쪽에 불 바퀴가 날아와
광사부상만리홍(光射扶桑萬里紅) 부상에서 빛을 쪼이니 만 리가 붉게 물드네
각억동룡연루진(却憶銅龍蓮漏盡) 동룡이 생각을 멈춰 연루에서 시각을 멈추니
구성초일영중동(九城初日暎重瞳) 구성의 처음 떠오르는 해가 순임금의 중동을 비추네
연루(蓮漏 蓮華漏) : 1030년 북송(北宋)의 용도각(龍圖閣) 직학사(直學士) 예부시랑(禮部侍郞) 연숙(燕肅)이 발명한 물시계
초일(初日) : 첫날. 처음 떠오르는 해
중동(重瞳) : 겹으로 된 눈동자. 순임금은 중동(重瞳), 왕망(王莽) 역시 중동이었다고 한다.
제10영 서산낙조(西山落照)
미양렴렴백운간(微陽瀲瀲白雲間) 흰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넘치더니
원소분명입난산(遠燒分明入亂山) 멀리 타오르며 산에 어지러이 들어서네
원재주서군막도(元在住西君莫道) 본래는 서쪽에 사는데 해는 길이 없고
야조환왕자순환(夜朝還往自循環) 아침저녁으로 돌아와 거주하니 스스로 순환하는구나!
제11영 조종서수(朝宗逝水)
백곡종래유소존(百谷從來有所尊) 많은 골짜기가 흘러드는 소중한 곳이 있으니
징강일야향동분(澄江日夜向東奔) 맑은 강물이 밤낮 분주히 동쪽으로 향하네
천봉불폐조종로(千峯不閉朝宗路) 천개의 산봉우리 막히지 않고 바다로 이르는 길
일야영과도해문(日夜盈科到海門) 밤낮으로 강을 가득 채운 후 바다에 이르는 문일세
조종(朝宗) : 1 중국에서 제후(諸侯)가 천자(天子)를 알현하던 일. 봄에 만나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만나는 것을 종(宗)이라 한다. 2 강물이 바다로 흐르는 것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영두(盈科) : 강을 가득 메움
제12영 귀시행인(歸市行人)
종고섬진호요진(從古蟾津號要津) 예부터 섬진은 주요한 나루인데
녹하포반사어린(錄荷包飯似魚鱗) 푸른 연잎으로 밥을 말은 모양으로 물고기 비늘과 닮아있네
분명일항유기우(分明一閧有奇偶) 분명 싸우는 소리 들리고 기이한 모습이 있는데
감소구구농단인(堪笑區區壠斷人) 씁쓸하고 용렬하게도 농단하는 사람도 있다네
구구(區區) : 1 제각기 다름. 2 떳떳하지 못하고 구차(苟且)스러움. 3 잘고 용렬(庸劣)함.
농단(壠斷 壟斷) : 1 깎아 세운 듯한 높은 언덕. 2 이익(利益)이나 권리(權利)를 독차지함을 이르는 말.
제13영 평사낙안(平沙落雁)
평사십리정만만(平沙十里淨漫漫) 모래톱 십 리는 깨끗하고 멀기도 먼데
새안행행점우한(塞鴈行行點羽翰) 변방 기러기는 날고 또 날고 점점이 깃털이 박혀있네
상집경방증격고(翔集更妨矰繳苦) 무리 지어 나는데 방해꾼 화살은 괴로워
애명막한도량난(哀鳴莫恨稻粱難) 슬피 울며 원망마라! 벼·기장 찾기도 어렵구나!
만만(漫漫) : 멀고도 지리(支離)함
증작(矰繳 繒繳) : 주살. 활쏘기의 기본자세를 연습(練習·鍊習)할 때 오늬와 시위를 잡아매고 쏘는 화살.
제14영 유안비앵(柳岸飛鶯) 버드나무 언덕 나는 꾀꼬리
양류청청삼월모(楊柳靑靑三月暮) 버드나무 푸르른 늦은 삼월
금의공자환시인(金衣公子喚詩人) 꾀꼬리가 시인을 부르네
생황백전영수여(笙簧百囀寧須汝) 생황처럼 계속 지져궈 모름지기 나를 편안토록 하기에
지애년년부기빈(只愛年年不棄貧) 단지 사랑스러워 매년 찾게 되니 가난을 떨치지 못하네
금의공자(金衣公子) : ‘꾀꼬리’가 노란색인 데서, ‘꾀꼬리’를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제15영 청파목독(靑坡牧犢)
이월춘풍입소흔(二月春風入燒痕) 이월 봄바람에 불 그을린 풀밭에 들어서니
자우장독자성군(牸牛將犢自成群) 암소는 송아지 거느리고 스스로 무리를 이뤘네
상파설초하계음(上坡齧草下溪飮) 언덕 위에 풀을 뜯고 시내로 내려와 물마시고
태묘희생불원문(太廟犧牲不願聞) 태묘의 제물이라! 듣기도 싫구나!
자우(牸牛) : 암소
태묘(太廟) : 종묘(宗廟)의 정전(正殿). 임금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 그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시던 일.
희생(犧牲) : 천지신명(天地神明) 따위에 제사(祭祀) 지낼 때 제물(祭物)로 바치는 산 짐승. 주로 소, 양, 돼지 따위를 바친다.
제16영 죽림서오(竹林栖烏) 대나무밭에 둥지 튼 까마귀
권조비환각유서(倦鳥飛還各有栖) 지친 새 날아와 각자 둥지를 틀고
위천천무여운제(渭川千畝與雲齊) 위천의 너른 밭에 구름 낀 정자를 품었네
상풍렵렵월교교(霜風獵獵月皎皎) 서리 바람 솔솔 불고 달빛은 희고도 흰데
경기시문반야제(驚起時聞半夜啼) 놀라 일어나 시간 물으니 한밤중이라 지저귀네
위천(渭川) : 위수(渭水). 감숙성 오서산(鳥鼠山)에서 발원하여 협서성을 지나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당나라 왕유(王維)
가 지은 「위천전가(渭川田家)」에서 따온 듯하다. 왕유(701~761)의 대표적 전원시로, 석양이 비추는 한적
한 위천 농가 풍경을 통해 ‘귀가’와 ‘은거’에 대한 그리움을 시경으로 그린 작품이다. 왕유는 시인이자 남종화
의 창시자인 화가요, 벼슬은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 ■ 위천전가(渭川田家), 왕유(王維) 참조 <https://blog.naver.com/simmugaye> 사광조허락(斜光照墟落) 석양은 들녘의 농가를 비추고 궁항우양귀(窮巷牛羊歸) 궁벽한 골목으로 소와 양 돌아오네 야노염목동(野老念牧童) 노인은 목동을 걱정하며 의장후형비(倚杖候荊扉) 지팡이 짚고 사립문에서 기다리네 치구맥묘수(雉雊麥苗秀) 꿩이 우니 보리에 이삭 패고 잠면상섭희(蠶眠桑葉稀) 누에는 잠들어 뽕잎 드물다 전부하서립(田夫荷鋤立) 농부들은 호미를 메고 서서 상견어의의(相見語依依) 마주보며 정담을 이어간다 즉차선한일(卽此羨閑逸) 이를 보니 한가롭고 편안한 생활 부러워 창연음식미(悵然吟式微) 서글피 〈式微〉를 읊조리네 |
엽렵(獵獵) : 1 매우 슬기롭고 날렵함. 분별(分別)이 있고 의젓함. 2 (잎사귀가 하늘거릴 정도로) 부는 바람이 가볍고 부드러움.
* 관직을 마치고 수월정에 돌아온 정설을 지칭한 듯한 시이다.
제17영 장교목적(長郊牧笛)
면우롱상초여연(眠牛隴上草如烟) 언덕 위에 잠자는 소 풀은 안개에 묻히고
목적일성횡만천(牧笛一聲橫晩天) 목동의 피리 소리만 하늘에 가득 울리네
년년절진강두류(年年折盡江頭柳) 강 머리 버드나무는 매년 부러져 죽는데
고취전호공질전(鼓吹傳呼恐疾顚) 북소리 울려 응원해도 병들어 쓰러질까 걱정이네
제18영 원포어가(遠浦漁歌)
일성하처어가오(一聲何處漁歌傲)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뱃노래 드높은데
성축사풍세우과(聲逐斜風細雨過) 노랫소리 이어 사풍 불더니 가랑비 지나가네
서당옥패영운향(書堂玉佩縈雲響) 서당에 패옥을 두르듯 구름이 에워싸니
쟁사사옹가차가(爭似蓑翁歌此歌) 도롱이 두른 늙은이도 다투듯 뱃노래를 부르네
제19영 죽통인천(竹桶引泉) 죽통으로 샘물 끌어오기
산객리생궁백교(山客理生窮百巧) 산객이 살아가노라면 온갖 기술이 궁한데
죽간분인세천청(竹竿分引細泉淸) 죽간을 쪼개 끌어들이니 가는 샘물이 맑기도 하네
전성백보청운습(傳聲百步靑雲濕) 백 보 건너 소리가 들리고 청운이 축축하니
가기소중병마경(可起消中病馬卿) 소갈병 앓는 마경을 일으킬 수 있을까?
소중(消中) : 소갈증(消渴症)의 일종. 식욕은 왕성하나 여위고 식은땀이 나며 오줌이 자주 나옴. 당뇨병.
마경(馬卿) : 중국 전한(前漢)의 문인(文人)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자(字)는 장경(長卿). 무제(武帝) 때 서남이(西南夷)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는데 늘 소갈병에 시달렸다. 경제(景帝) 때 벼슬에서 물러나 후량(後粱)에 가서 「자허지부(子虛之賦)」를 지어 이름을 떨쳤다. 그의 사부(辭賦)는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20영 수침용량(水砧舂梁) 물다듬이 절구 도랑
갑득청천일도장(閘得淸泉一道長) 수문으로 맑은 샘물을 얻는 하나의 긴 도랑길
세용향도백여상(細舂香稻白如霜) 가는 절구로 향기로운 벼를 찧어 서리처럼 하얗네
삼허불부장군복(三虛不負將軍腹) 삼허를 걱정하지 않으니 장군복이고
침저무로노맹광(砧杵無勞老孟光) 늙은 맹광도 다듬이질 노고를 덜겠네
삼허(三虛) : 1 세 가지의 허(虛)한 것. 맥(脈)에 있어서 허한 것, 병(病)에 있어서 허한 것, 진단(診斷)에 있어서 허한 것을 이른다. 2 몸의 기운도 허(虛)하고 천기(天氣)도 허(虛)한데 허사(虛邪)를 받아 정기(正氣)가 상한 것.
장군복(將軍腹) : 고대 중국 무장들의 경우, 이는 단순히 게을러서 나온 배가 아니라 강력한 전투력과 지구력을 상징하는 '지방에 싸인 근육(脂包肌)' 구조로, 장기간의 훈련과 전투를 버티기 위한 체형으로 여겨졌다.
침저(砧杵) : 다듬잇방망이. 다듬이질을 할 때 쓰는 방망이.
맹광(孟光) : 동한(東漢) 양홍(梁鴻)의 처로, 품행과 덕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제21영 간죽매국(間竹梅菊)
황국매화덕유린(黃菊梅花德有鄰) 노란 국화와 매화는 그 덕으로 이웃인데
모년생활탁총균(暮年生活托叢筠) 만년 생활을 대나무 숲에 맡기네
긍장도리경안색(肯將桃李競顔色) 장차 복숭아와 오얏이 얼굴을 다툴텐데
직대빙상방견진(直待氷霜方見眞) 바로 얼음과 서리를 만나면 진면목을 보리라
제22영 오설송황(傲雪松篁)
화고무염조침가(花枯無艶鳥沈歌) 꽃 지고 아름다움 사라지니 새들도 슬피 울고
사미청산한기다(死尾靑山寒氣多) 푸른 산도 죽은 듯 꼬리 내려 한기만 가득하네
유유청송겸록죽(惟有靑松兼錄竹) 생각해 보니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 있으니
대동심설내군하(大冬深雪奈君何) 추운 겨울과 깊이 쌓인 눈도 송죽을 어찌하리오!
제23영 어약연지(魚躍蓮池)
착파창태일석허(鑿破蒼苔一席許) 푸른 이끼를 파내어 한 자리 마련하여
청천수곡십경하(淸泉數斛十莖荷) 맑은 샘물을 가득 채우니 연 꽃대가 열 가지네
천광운영홀파쇄(天光雲影忽破碎) 하늘의 햇살을 구름이 가려 홀연 깨뜨리니
지유유어발발과(知有遊魚潑潑過) 물고기가 이를 알고 팔딱팔딱 지나가네
제24영 상감풍안(霜酣楓岸)
청녀편침초안풍(靑女偏侵楚岸楓) 서리가 침범하니 초안에 단풍들고
천림일야염성홍(千林一夜染成紅) 온 산도 하루아침에 붉게 물들였네
빙수설여서풍도(憑誰說與西風道) 서풍이 가는 길을 누가 같이 말해줄까
절막사표금엽공(切莫斜飄錦葉空) 비껴 부는 바람이 아니어도 비단 같은 나뭇잎이 허공에 날리네
청녀(靑女) : 서리를 맡은 여신(女神). 서리의 다른 이름.
초안(楚岸) : '초안(楚岸)'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楚) 영토 내의 강이나 하천 주변의 언덕 및 강변 땅을 뜻하는 한자어이다. 고대 시가에서 자주 등장하며, 주로 삭막한 바람이 부는 '초강의 차가운 강변'과 같은 서정적이고 황량한 배경을 묘사할 때 쓰인다. 예를 들어 두보의 《남선고풍희제사운(纜船苦風戲題四韻)》에서 "초안 삭풍질"은 초강변의 매서운 찬바람을 묘사하고 있다."楚岸"是漢語詞彙,拼音爲特指戰國時期楚國境內的江河沿岸陸地。該詞語在古代詩詞中頻繁出現,如杜甫《纜船苦風戲題四韻》中"楚岸朔風疾"描繪了楚江岸邊的凜冽寒風 <百度百科>
제25영 남교송객(南橋送客)
남교방초녹처처(南橋芳草錄萋萋) 남교의 향기로운 풀은 푸르고 무성한데
파주사두석선휴(把酒沙頭惜解携) 술잔 잡고 모래톱 머리에서 작별을 아쉬워하네
여차강산여차경(如此江山如此景) 강산이 이렇고 경치도 이리 좋은데
권군무석잠시계(勸君無惜暫時稽) 자네 아쉬워 말게! 권했는데 잠시 후 고개를 떨구게 되네
해휴(解携) : 서로 떨어져서 작별함. 분몌(分袂). 분수(分手).
제26영 북리초붕(北里招朋)
북리초명붕만좌(北里招朋朋滿座) 북리에서 친구를 부르니 자리를 가득 메웠는데
약비계우즉원옹(若非溪友卽園翁) 은거한 친구라기 보단 농사꾼 같다
은권위보주맹도(殷勤爲報主孟道) 깊이 마음 다해 보답할 것은 맹자의 가르침뿐이고
막설가빈신양공(莫說家貧新釀空) 집이 가난하다 말도 못하고 새로이 술 담을 일은 꿈도 못 꾸네
계우(溪友) : 속세(俗世)를 떠나 산골짜기에서 은거(隱居)하는 벗.
제27영 용탄범주(龍灘泛舟)
연래오도부창주(年來吾道付滄洲) 새해가 오니 유교의 도는 창주에 부치고
애향용탄탄상유(愛向龍灘灘上遊) 용탄을 좋아해서 용탄에서 노네
수저어룡암백발(水底魚龍諳白髮) 물속에 어룡이 백발을 알아보니
불수경랑파허주(不愁驚浪破虛舟) 빈 배를 부술 파도에 놀랄 일도 없겠네
오도(吾道) : 유교(儒敎)를 닦는 사람들이 말하는 유교(儒敎)의 도(道).
창주(滄洲) : 누구의 호(號) 같은데 알 수 없다.
제28영 구연조어(龜淵釣魚)
구연어사면남어(龜淵魚似沔南魚) 구연의 물고기는 남쪽의 물고기를 닮아있고
파조내투세우여(把釣來投細雨餘) 가랑비 내린 후 낚싯대를 던지네
정유팽선반유회(鼎有烹鮮盤有鱠) 솥에는 생선을 삶고 쟁반에 생선회 있으니
노래모포미전소(老來謀飽未全疎) 나이 들어 배불리 먹는 것도 완전히 드문 일은 아니네
제29영 송하전다(松下煎茶) 소나무 아래 송방울 차
송자전다송영리(松子煎茶松影裡) 소나무 그늘에서 솔방울로 차를 끓이고
송근반박청송풍(松根盤礡聽松風) 분재에 심은 소나무 뿌리에서 소나무 바람 소리 듣네
송풍본재송지상(松風本在松枝上) 송풍은 본래 소나무 가지에서 나는데
홀입선생석정중(忽入先生石鼎中) 갑자기 선생이 오시니 돌솥 가운데 있네
송자(松子) : 솔방울
반착(盤礡) : 분재(盆栽)
제30영 매변작주(梅邊酌酒)
일상이취노매근(一觴移就老梅根) 술잔 들고 자리 옮기니 노매화 뿌리
위시청향박주존(爲是淸香撲酒尊) 이 맑은 향기가 흐르니 술 단지에 머리 숙이네
취후부지산일모(醉後不知山日暮) 취하여 산속에 해 저무는 것도 모르고
담연소월정황혼(淡烟疎月正黃昏) 옅은 안개 끼고 희미한 달 오르니 바로 황혼이구나!
< 수은집(睡隱集)의 수월정기,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
■ 강항(姜沆) 1567~1618
조선 중기에, 교서관박사,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영광 출신으로,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강극검(姜克儉), 어머니는 통덕랑 김효손(金孝孫)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고,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1597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았다. 의병이 흩어지고 영광이 함락되자 장인 김봉, 형 강준(姜濬) 강환(姜渙),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고자 했으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 · 지리 · 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惺窩], 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우리나라의 과거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 경연조저(經筵朝著), 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제례·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 억류 중 두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1602년 대구교수(大邱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으며,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몸소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 ·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근사속록(近思續錄)』, 『근사별록(近思別錄)』, 『통서(通書)』, 『정몽(正蒙)』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들은 모두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 『강감회요(綱鑑會要)』, 『좌씨정화(左氏精華)』, 『간양록(看羊錄)』, 『문선찬주(文選纂註)』, 『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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