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압제와 착취의 이야기도, 백인의 짐 이야기도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유럽 제국들은 너무나 큰 규모로 다양하고 수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무슨 주장에 대해서든 그에 맞는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 제국들은 세계 곳곳에 죽음과 압제와 불의를 퍼뜨리는 사악하고 기괴한 집단이었을까?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이들이 저지른 범죄로 백과사전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제국이 사실은 새로운 의학, 더 나은 경제적 형텬, 더 큰 안보를 제공해서
피지배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했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그런 업적으로 채워진 백과사전도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제국들은 과학과 긴밀히 협력했던 덕에 엄청난 힘을 발히했고 세계를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으므로,
이들에게 간단히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다.
제국들은 우리가 아는 세상을 창조했고,
여기에는 우리가 그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도 포함된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과학을 좀 더 사악한 목적에도 사용했다.
생물학자, 인류학자, 심지어 언어학자들까지
유럽인들은 다른 모든 인종에 비해 우월하며
따라서 이들을 지배할 권리(아마도 의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를 가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를 제공했다.
윌리엄 존스가 모든 인도-유럽어는 고대의 단일 언어의 후예라고 주장한 이래,
많은 학자들은 그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찾으려 애써왔다.
학자들은 최초의 산스크리트어를 말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3천여 년 전 중아아시아에서 인도로 침공했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리아(Arya)라고 불렀다는 데 주목했다.
가장 초기의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이리이아(Airiia)로 지칭했다.
그래서 유럽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 모두를 (그뿐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고트어, 켈트어)탄생시킨
원시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리안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위대한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이 모두 아리아인이라는 것이 우연일까?
그다음 영국.프랑스.독일의 학자들은 근면한 아리아인들에 대한 언어학적 이론을 다윈의 자연선택이론과 결합시켰다.
그리고 아리아인이 단순한 언어 집단이 아니라 생물학적 실체 ( 인종 )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더구나 그저 그런 인종이 아니라 지배인종,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밝은 색이며, 눈이 파랗고, 근면하며,지극히 이성적이고,
온 세상에 문화의 기초를 놓기 위해 북방의 안개 속에서 출현한 인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도와 페르시아를 침공한 아리아인들은
현지 원주민과 결혼을 해서 흰 피부와 금발 머리를 잃어으며,
이와 함께 합리성과 근면성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인도와 페르시아의 문명은 쇠퇴했다.
한편 유럽에선 아리아인이 인종적 순수성을 보존했다.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이들이 지배에 적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열등한 인종과 섞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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