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5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1-3ㄱ.5-16)
"Do you want to be well?"
"Rise, take up your mat, and walk."
말씀의 초대
물이 귀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물이 생명력을 부여하는 하느님 능력의 표상이었다. 주님의 거룩한 집에서 솟아오른 물은 강과 바다까지 흘러 생명을 준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임을 세상에 예견한다(제1독서). 벳자타 연못가에 서른여덟 해를 앓고 있는 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절망에 빠져 있는 이에게 용기를 주시고 다시 걷고 일하게 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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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심리학에서 쓰는 용어 가운데 “내면 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치유되지 않고 성인이 되었을 때 그 내면에 성장하지 못한 ‘상처받은 아이’를 안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지만 내면에는 성장을 멈춘 아이가 있어서 생활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대인 관계의 어려움,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집착, 갑작스러운 분노와 자기 연민 등에 빠져 있는 경우가 바로 성장하지 못한 ‘내면 아이’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벳자타 연못가에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병자의 모습도 ‘내면 아이’를 안고 사는 한 유형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과 이 병자의 대화를 살펴보면 곧바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건강하고 싶으냐?” 하고 묻자 병자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벳자타 물이 출렁거릴 때 아무도 자기를 그곳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어서 치유보다는 동정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건강하고 싶으냐?(=건강하게 되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이 ‘원하느냐’(want)라는 표현 속에는, 건강해지고 싶은 ‘의지’(will)와 ‘갈망’(desire)이 같이 있는지를 묻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면 아이’를 성장시키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치유되고자 하는 의지와 갈망입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상처가 있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 속에 숨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치유를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와 갈망을 가지고 상처와 화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우리를 치유하시고 성장시켜 주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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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벳자타 못’ 물이 출렁거리면 기적이 일어나고, 처음으로 뛰어든 이는 은혜를 입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지금도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38년을 기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끈질긴 인내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측은히 여기시어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병이 나아’ 들것을 들고 가는 그 병자에게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는 ‘무거운 짐’을 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낫게 해 주신 분의 말씀만이 있을 뿐입니다. 38년을 기다린 끝에 얻은 치유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의 시비는 계속됩니다. 그들의 화살은 예수님을 향합니다. 그들 눈에는 38년의 애절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식일 법을 어긴 행동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런 행동을 지시한 사람의 의중만이 관심입니다. 그런 곳에 어떻게 ‘율법의 정신’이 있을는지요? 조직과 단체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면 누군가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사랑은 규칙보다 더 소중합니다. 모든 질서를 뛰어넘는 감동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남자는 38년을 기다린 끝에 ‘사랑의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벳자타 못은 기원전 2세기경, 성전에 맑은 물을 공급하려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치료 효과가 있다는 소문에 병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벳자타 못은 우리 곁에도 있습니다. 애절한 믿음으로 다가가면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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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물을 두려워하였을 뿐 아니라 물에는 어떠한 신이 살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벳자타 못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병자들이 물이 출렁거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미신 때문인데, 벳자타 못의 물이 출렁일 때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병을 깨끗이 치유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삼십팔 년 동안 앓고 있는 병자의 치유 이야기를 봅니다. 이 병자는 자신이 분명 그 연못에 먼저 들어갈 수 없음에도 낫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계속 그 연못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곧, 자신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를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짧은 물음과 함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치유를 위해 이 병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오로지 나으리라는 희망과 믿음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을 때에 당신의 자비하신 마음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의 은총이 있기까지 때로는 삼십팔 년과 같은 기나긴 시련의 기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낫기를 바라는 소망보다 그 소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마음일 것입니다
원하십시오
- 황인수 신부-
애플 컴퓨터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경영자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연설이 한동안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 는 잡스가 졸업생들에게 한 말입니다. 이 말을 ‘배고픈 사람으로,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라.’ 정도로 옮길 수 있을까요.
배고픈 사람, 모르는 사람은 먹을 것을 찾고 배우려고 합니다. 음식을 찾는 사람, 배우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만족에 이르는 사람, 배움에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실함의 차이에 있겠지요. 실상 우리는 원하면서도 절실하게 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반대되는 것을 바라기도 하지요. 절실함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나뉘어 있다는 것이며 확실하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유명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썼습니다. 순교를 열망하면서 로마 교회 신자들이 자신의 구명 운동을 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그 편지에는 ‘나는 그리스도의 밀이니 맹수의 이빨에 갈려야 합니다.’ 라는 성체성사에 대한 아름다운 구절이 나옵니다. 이 편지 말미에서 성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벳자타 못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던 사람에게도 주님께서는 더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 사람의 소원은 딱 하나. 벳자타 못이 출렁거릴 때 못 속에 넣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 못이 출렁거릴 때 제일 먼저 들어가면 치유의 기적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라는 질문에 엉뚱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를 벳자타 못에 넣어주는 것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더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일어나 네 들 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이제 주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이 사람의 다음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이제 건강해졌고 보통 사람과 똑같아졌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행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치유를 받았으니 당연하지 않냐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십시오. 고해성사를 통해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은 뒤에는 주님의 말씀을 무조건 따릅니까? 고해소를 나오는 순간 똑같은 죄를 범할 때도 많았던 우리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복음에 등장하는 그 건강한 사람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정말로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해져서 일반 사람과 똑같이 된 상황에서, 예수님 말씀을 따름으로 인해 다시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어 박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진정으로 건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이러한 말씀을 듣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 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인해 진정으로 건강해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장애물이란 당신이 목표 지점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당신이 목표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면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헨리 포드)
웰빙의 조건
-김성웅신부-
오래전에 몇 개월 동안 오른쪽 다리가 침으로 찌르듯이 절여오고 마비되는 증상이 간헐적으로 찾아왔던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보아도 별다른 원인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찾아오는 증상을 기분 나쁘게 겪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그 증상이 사라진 뒤에야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 마음속에 있는,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화가 몸으로 터져 나왔거나, 혹은 그 미움의 대상을 피하려 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죄의식이 신경을 날카롭게 해서 그리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과 몸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마음의 불균형이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몸의 불균형으로 이어져서 어떤 경우에는 마비 증상이, 더 심한 경우에는 시력이나 청력의 장애가 나타나기까지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건강을 되찾은 이에게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그가 앓았던 병이 심한 죄의식이나 정신적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물론 심신의 질병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죄의 처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죄의 본질, 곧 하느님으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된 상태에서 오는 생명 소통의 부재가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긍정의 힘
-전삼용신부-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햇볕이 너무도 따가운데다가 쉽게 오아시스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과 식량도 다 떨어져 두 사람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아들은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격려하면서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쓰러질 만큼 지쳐 있었지만, 아들이 실망할까 봐 내색하지 않고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앞에 무덤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무덤들을 보자, 아들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보세요, 아버지. 사람들이 이 사막을 다 건너지 못해 결국은 저렇게 죽고 말았잖아요. 우리도 아마 곧 저렇게 될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밝아진 얼굴로 아들을 달랬습니다.
“얘야,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사막을 거의 다 건넌 것이야.”
두 사람은 용기를 내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살다보면 바라던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희망마저 버린다면 더 이상 남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 포기해야만 할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희망은 끝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덕입니다.
미국의 어떤 곳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다가 잘못하여 냉동 창고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습니다. 다음 날 사람들이 냉동 창고를 열어보았을 때 자신들의 동료가 꽁꽁 얼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신기했던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고장 나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몸이 얼어 있었던 것입니다. 절망은 그 자체로 죽음입니다.
여자에게는 가끔 ‘가상임신’이란 것이 일어납니다. 아기를 갖기를 너무 바라면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배가 커지고 가슴도 부풀어 오르는 등 아기를 가진 것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곧 믿음이 되고 모든 것은 믿는 대로 변하게 됩니다.
우유 시음회에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몇 명이 우유가 상한 것처럼 이상한 반응을 보이도록 시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이 어떠한 반응을 하는지 실험을 하였습니다.
연기자들이 우유를 마시다가 토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니 시음회에 참가한 이들도 우유가 비려서 못 마시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 명은 정말 식중독에 걸려 입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우유는 매우 신선한 우유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38년이나 자신의 병이 고쳐지기를 기원하며 매일 베짜타 연못에 나와 있는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38년이란 숫자는 그 당시 평균수명이 매우 짧았음을 가만하면 평생 기다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가 하루 전에 희망을 잃고 그 곳에 나오기를 그쳤다면 그는 그렇게 죽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희망에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치유 받은 병자는 이렇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나 한 번 보십시오.
베짜타 연못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조차 모르고 다른 것에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또 주위에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가파르나움에서 고쳐진 중풍 병자처럼 그를 들어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을 사람들도 없었고, 그리스도의 이름도 몰라 태생소경처럼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치유해주셨지만 심지어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삶을 바꾸기를 절실히 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손수 그를 찾아가 구원해 주신다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종교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수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수녀님이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에 대학을 다닐 때는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기보다는 성당에 있는 오르간을 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오르간을 더 좋아하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였지만 언젠가는 오르간보다 예수님을 더 좋아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년 뒤에 수녀님이 되기로 결심하고 또 성체 앞에서 “이젠 오르간보다 예수님, 당신 앞에 앉아있는 것이 더 좋아요.”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대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기면 그 분이 다 잘 이끌어 줄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면 더 긍정적이 될 것이고 삶도 그래서 그렇게 믿는 대로 변화되어 나갈 것입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양승국신부-
<인생의 후반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자-베짜타 연못가-의 인생은 비참하다 못해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얻은 병은 끔찍히도 그를 괴롭혔습니다. 세월이 좀 지나면 어떻게 잘 되겠지, 올 한해만 잘 넘기면 끝이 보이겠지? 하고 목을 빼고 기다려봤지만, 남들에게는 잘도 일어나는 기적도 그에게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장 38년의 세월을 기다려왔지만, 그 오랜 세월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베짜타 연못을 찾아왔건만 그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눈에 그의 딱한 처지를 알아차렸습니다. 한번 침상에서 스스로 일어나보고 싶다는 그 간절한 염원을 눈치채셨습니다.
그 오랜 서러움의 세월을 견뎌왔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낫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환자는 기뻐하기는 커녕 볼멘 소리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38년이나 간절히 기다려왔던 일인걸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아직도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는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환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질곡의 세월, 그 오랜 고통의 나날, 그 깊은 슬픔의 나날을 잘 견뎌온 환자에게 예수님 은총의 손길이 다가갑니다.
그 오랜 기다림이 꿈만 같은 치유라는 결실을 맺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 오늘 제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저 역시 겉은 그럴듯해보이지만 정작 알고보면 고질병 환자입니다. 38년도 더 지난 영적인 고질병을 지닌 사람입니다.
주님, 저 역시 이제 그만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진정 낫고 싶습니다.
38년짜리 환자가 당신의 능력으로 치유되어, 기쁨과 환희의 후반전 인생을 보냈듯이, 저 역시 이제 슬픔과 상처와 전반전 인생을 마무리짓고 주님의 자비에 힘입은 은총의 후반전 인생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전국 곳곳에서 이 꽃나무 때문에 축제를 할 것입니다. 분홍색이나 흰색을 띠는 이 나무의 꽃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도 하지요. 이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요? 맞습니다. 벚나무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져서 전국 곳곳에서는 벚꽃축제를 3월 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야마모리라고 하는 사람이 벚나무를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벚나무의 수명은 짧다. 그 이유는 꽃을 많이 피우기 때문이다. 벚나무는 소나무나 전나무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 아마 이것이 하늘과 땅의 이치인가 보다. 그래서 벚나무는 무상한 나무다. 그런데 한 나라나 한 집안의 영광도 오래 갈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전북 전주∼군산 간 100리 길은 벚나무 꽃길로 유명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많은 벚나무가 노화 상태에 있다고 하네요. 이 벚나무 꽃길이 만들어진지 불과 3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그 이유가 바로 화려한 꽃에 있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꽃은 나무의 기운을 약하게 하며, 한순간에 활짝 피었다가 한순간에 우수수 떨어지기 때문에 병충해에도 약하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무의 수명이 짧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습이 어쩌면 흥망성쇠 하는 우리 인간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항상 화려함만 계속되는 삶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출발점에서부터 전력질주를 하면 금세 지쳐서 낙오되는 것처럼, 화려함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더욱 더 실망과 실패도 커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한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너무 기뻐할 것도, 또 너무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면서 기도하며 천천히 기다리면 분명히 화려하고 멋있는 미래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벳자타 못에서 38년이나 앓아누워 있었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벳자타 못은 가끔 물이 출렁거릴 때가 있는데, 그때 제일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일 먼저 못에 뛰어 들기 위해, 못 주위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못을 바라보면서 못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렸지요. 하지만 38년 동안이나 벳자타 못에서 앓아누워 있는 사람을 못에 먼저 넣어주는 사람도 없었고, 또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8년 동안벳자타 못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희망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감은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희망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실망과 좌절감 뒤에 화려하고 멋있는 미래가 보장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참 기쁨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희망이란 눈뜨고 있는 꿈이다.(아리스토텔레스)
깨어남
-정명숙 수녀-
웰빙 시대 너도나도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을 찾습니다. 얼짱 몸짱을 만드느라 몸도 마음도 바쁜 세대입니다. 무엇을 위한 웰빙이고 몸만들기입니까? 무엇이 정말 웰빙일까요? 우리 인간은 몸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예수님은 벳자타 못가의 병자에게 물으십니다. 삼십팔 년 동안이나 병으로 앓아온 사람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의식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자기 존재의 근원적 깨어남으로 초대하십니다. 자기 마음속 깊은 갈망을 들여다보라 하십니다. 진정 무엇이 낫기를 원하는지, 참으로 건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잠에서 깨어날 수 없습니다. 깨어남은 자기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직면하도록 합니다. 자신에게 갇혀 마비된 모습으로는 내 존재의 전인적인 건강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하십니다. 들것(나를 안전하게 하는 것들)에 누워 안주하면서 내가 하느님이 빚어주신 순수한 내 존재 자체로 서지 못하고, 도움만 바라는 나약함을 딛고 일어나라 하십니다. 두려움 때문에, 불안 때문에 마비된 내 모든 것에서 일어나 걸으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건강만이 아니라, 내면의 건강도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
-김혜경-
12년이 넘게 로마에서 교육 받은 딸을 데리고 귀국하여 한국의 고등학교에 재입학을 시켰습니다. 전혀 다른 교육 방식에도 저의 강력한 요구에 큰 저항 없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가끔 학교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학교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등교육 방향이 수능에 맞추어져 있고 딸과 같은 학생에 대한 학교 측 배려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한국어조차 힘든 딸로서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도권 교육의 껍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 알맹이 없는 교육의 허구를 비판하던 딸이었지만 결국 딸은 순명으로 가방만 들고 다니기를 2년 남짓 했습니다. 그러던 중, 딸이 감기에 걸렸습니다. 등교시간이 되도록 열이 떨어지지 앉자 저는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하루 쉴 수 있도록 결석 처리를 부탁했습니다. 선생님은 의사의 진단서가 있어야 결석 처리가 가능하다며 진단서를 제출하라고 했고, 전 하루 정도 쉬고 나면 바로 주말이라 괜찮아질 정도의 열이 있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진단서를 (학교에 제출하기 위해) 끊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선생님은 학교의 규칙을 말했고 전 딸의 상태에 대해 말했지만, 학교의 규칙이라는 것이 부모의 말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음에 분개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서른여덟 해나 병을 앓던 환자도 안식일에는 치유해서는 안 된다는 유다 규범을 내세워 주님을 몰아붙이는 유다인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는)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을 내려놓지 않는 주님의 방식이 눈에 뜁니다. 사람보다 규범을 앞세우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자기가 편리한 대로 그 규범을 조작하여 힘없는 사람을 짓밟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유다인들은 로마법에 있는 사형 제도까지 차용하여 주님을 못 박은 그 무서운 가능성을 오늘 복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가 되리라!
-김찬선신부-
요 며칠 감기 몸살을 앓았습니다. 10년 넘게 한 번도 아프지 않다가 오래간만에 아프니 제가 다른 사람보다 아픈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늘 병을 달고 사는 사람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늘 건강한 것 때문에 아픈 분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38년간을 병으로 누워있던 사람의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그리고 얼마나 지겨웠을지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는 치유를 위해 벳자타 연못 주랑에 나와 있었지만 연못에 집어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누군가 자기를 연못에 집어넣어줄 사람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토록 오래 병으로 거기에 누워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긴 기간 그곳을 지나간 사람 수없이 많았어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눈여겨보고 즉시 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가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건강하기를 원하는지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어떤 사람은 오지랖이 넓어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 힘겨운 사람, 오만 사람이 다 눈에 들어와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고 자기와 자기 가족 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양성을 담당하고 있을 때 아침이면 강아지 운동시킬 겸 앞마당을 산책하였습니다. 산책을 하다보면 저는 자연스럽게 나무상태가 눈에 들어오고 돋아나는 새싹도 보곤 하는데 정작 그곳을 담당하고 있는 형제는 나뭇잎이 벌레 먹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수도원 처음 들어와 갖가지 고민이 너무도 많아 다른 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무나 풀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까지 볼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픈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만큼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어떤 사람은 아픈 사람이 눈에 들어와도 그로 인해 자기생활이 지장을 받는 것이 싫어서, 또는 돕지도 않을 것이면서 괜히 마음만 불편한 것이 싫어서 아예 외면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울 마음이 아예 없는 사람입니다. 無心하다는 것인데, 마음이 虛해도 안타까운데 마음이 없다니, 곰곰 생각하면 이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합니까? 그러니 아픈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돕는 사람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고 예수님처럼 따듯하고 거룩한 마음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더 묵상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야 했구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도왔다면 예수님께서 도우실 필요가 없으셨겠지요. 북한 일을 하다보면 종종 부닥치는 것이 말로는 북한 동포라고 하는데 사실은 너무도 많은 사람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운이 빠진다고 할까요, 맥이 빠진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니 힘이 납니다. 그러니까 제가 힘을 내고 그러니까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관심하니까 내가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안 하니까 내가 할 때 나는 오늘 복음의 예수가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 말씀하시듯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가 사는 것이고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잠깐이나마, 아니 조금이나마 지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여행
-양승국신부-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한 아이를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던 한 직업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몇 번이고 제게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나중에는 전화 받기가 너무 지쳐서 "제발 알았으니 이제 하루에 두 번씩만 전화해라"고 당부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꼭 일주일이 고비였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너무 힘들어요." "나를 왕따 시켜요" "그만 두고 아르바이트나 할래요."라며 전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남자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적어도 한 달은 버텨봐야지. 조금만 참아보자"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아이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 아이로부터 수신자 부담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디냐?"
"응급실 요."
"어느 병원이야? 내가 당장 갈께."
"아니요. 오실 필요 없어요. 담당 의사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암이래요. 오늘 오후에 수술 들어가는데, 기도 좀 해주세요. 수술 끝나면 연락드릴께요."
아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이가 뻥을 치는 줄 알면서도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 날 같은 시간에 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어떻게 됐냐?"
"의사 선생님이 잘 끝났대요."
"지금 어디냐? 당장 갈께."
"아니에요. 지금 공사현장에서 노가다 뛰고 있어요."
"뭐, 방금 암수술 끝낸 녀석이 노가다를 뛰어? 그건 그렇다 치고 노가다는 왜?"
"돈 좀 모아서 죽기 전에 여자 친구랑 마지막으로 겨울여행 한번 떠나려구요."
그 아이의 언행을 바라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손에 잡힐 듯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젠 정말 잘 살아야겠다" "앞으로 다시 또 한 번 그런 짓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다부지게 마음을 먹지만 일주일을 넘기기가 힘듭니다.
의지력 부족, 그것이 우리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한계입니다. 중국집으로 편의점으로 취직은 잘합니다. 그러나 한 달을 버티고 첫 월급을 타내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을 다루는 TV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지 과대망상증에 걸려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이 귀찮고 짜증나는 현실을 떠나고 싶습니다. 지불능력도 안되면서 신용카드를 발급 받습니다. 신용카드가 우선 너무 편리하고 좋으니까 이것저것 충동구매를 시작합니다. 점점 씀씀이가 과감해지고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 줄기고 보자"며 자포자기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 카드회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합니다. 이미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나서 집이라도 팔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우리 청소년들이 안고 있는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점은 현실 판단능력의 상실입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38년간이나 병으로 시달리던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 병자는 마음으로는 간절히 낫기를 원하지만 치유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물이 움직이는 순간이 와도 몸을 꼼짝할 수 없기에 늘 치유의 은총에서 제외되곤 했습니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우리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이 거친 세상에서 홀로 방황하다 가서는 안될 길을 향해 휘청휘청 걸어가는 아이들을 봅니다. 가슴만 아플 뿐이지요.
그 누구도 따뜻한 손을 내밀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기에 죽음의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간절히 새 생활을 원하지만 몸이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으켜 세워주는 도움의 손길입니다.
죽음의 길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 세 가지는 즉각적인 개입,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 구체적인 투신입니다.
새벽을 열며
모든 일은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웃으면서 사는 사람은 매일 웃을 거리를 만들어간다고 하네요. 그래서 요일별로 어떻게 웃는지 한번 말씀드릴께요.
월요일은 원래 웃는 날, 화요일은 화사하게 웃는 날, 수요일은 수수하게 웃는 날, 목요일은 목욕하고 웃는 날, 금요일은 금방 웃는 날, 토요일은 토끼처럼 뛰면서 웃는 날, 일요일은 일단 웃고 보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항상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날 그날을 매일 화내는 날로 만들어 갑니다. 이번에도 요일별로 어떻게 화를 내는지 말씀드릴께요.
월요일은 원래 화내는 날, 화요일은 화끈하게 화내는 날, 수요일은 수틀리면 화내는 날, 목요일은 모질게 화내는 날, 금요일은 금방 다시 화내는 날, 토요일은 토라지면서 화내는 날, 일요일은 일단 화내고 보는 날이라고 합니다.
과연 항상 웃는 사람과 항상 화를 내는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더욱 더 행복할까요? 항상 웃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반면에, 화를 잘 내는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한 가지만 봐도 항상 웃는 사람이 더욱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오늘 화요일인데 과연 나는 화사하게 웃는 날로 만들까요? 아니면 화끈하게 화내는 날로 만들고 있을까요?
바로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가장 좋은 날을 만들 수도 있는 반면에, 가장 형편없는 날로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벳자타라는 못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그런데 이 사람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사실 이 벳자타 못의 물이 출렁일 때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병을 깨끗이 치유 받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연못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못에 넣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연못에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건강해지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는 연못에만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고 부차적인 것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그러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사랑은 뒷전에 두고서 나의 물질적인 욕심으로 주님을 점점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매일 매일을 좋은 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날로만 만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가장 좋은 날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가장 멋지고 좋은 날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빠다킹신부
나를 살리러 오신 예수
-허찬란 신부-
요한 복음사가는 수학자 같습니다. 요한 복음은 전반부에 “세상을 살리러 오신 예수님”, 후반부에 “그 살리는 방법으로 사랑을 택하심”으로 나뉘며 전반부 예수님의 활약상은 유다이즘에서 완전을 뜻하는 일곱 가지 표징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일들이 다 놀라운 일이지만, 요한 복음사가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일곱 가지 사건을 배치하는데 그 세 번째가 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살리심을 알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병자가 양의 문 옆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못 받아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과 함께 38년을 앓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질병과 오랜 병고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그만큼 깊었음을 얘기합니다. 또한 요한 복음사가의 전형적인 인간 심리 분석 방법인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인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만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모르는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얘기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구원을 바라는 인류 안에, 가장 보잘것없는 이, 바로 38년이란 오랜 세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버려진 불쌍한 인간, 바로 내 자신을 살리러 오심을 얘기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안에 자리하는 세상 속의 하느님 나라를 알면서도 함께하지 못하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방향상실, 매일 이어지는 공허한 삶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등에 업고 베짜타 못가로 향하고 계십니다.
구원을 주는 만남
-최성기 신부-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서 외로움을 더 깊이 느낀다고 한다. 어디를 가든 사람에 둘러싸여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어 보이지만 도시인들의 외로움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발견되는 우울증과 관련이 있고, 자살·약물 중독·알코올 중독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반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준다.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남자들이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고, 혈압이 약 30mmHg 높아진다는 연구도 발표되었다. 만남이 많다고 해서 외로움을 덜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는가보다 어떤 수준의 만남을 갖는가가 우리 삶에 더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축제를 준비하는 예루살렘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벳자타의 소경이 누워 있는 주랑에도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수없이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수없이 많은 말이 오고 갔다. 하지만 그곳에 누워 있던 사람들도 우리 시대 사람들만큼이나 외로운 이들이었다. 자신들이 앓고 있는 병에서 오는 소외감, 늘 그 자리에서 기적을 기다리는 풍경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데서 오는 외로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섭섭함은 벳자타 못가에 무리지어 있던 병자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벳자타 못에 집착하게 되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없었기에 기적이나 신기한 현상에 마음을 더 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적은 그들이 바라는 곳에서 오지 않았다. 기적은 예수님과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벳자타의 소경은 마침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 고통의 시간을 인정해 주는 사람, 나에게 구원을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이런 만남이 있었기에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갈 힘’을 받게 된다. 이런 만남이 내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적어도 내 문제를 안고 살아갈 힘을 준다. 세상을 살아갈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내게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마음을 받아주고 알아주고, 내 삶을 존중해 주는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우리 주변에 있다. 내 들것까지 들어주지는 않더라도 내가 들것을 들고 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 그런 지인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자. 나 역시 다른 이에게 구원을 주는 만남을 가꾸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청하자.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장효강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삼십팔년 된 병자이야기가 들려집니다. 병자는 자기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벳자타라는 연못 옆에 다른 많은 환자들과 함께 누워 있습니다. 벳자타는 은헤의 집이라는 뜻으로 천사가 와서 물을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환자가 무슨 병이든 낫게 한다는 전설이 있는 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못 주위에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병자들이 일년내내 머물며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환자들 가운데 왜 예수님은 이 삼십팔년된 병자를 고쳐 주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 환자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포기하지 않고 낫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인 행동으로 응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이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게 한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낙담하고 불신에 가득 찰 수 있는 병자였으나, 주님의 손길 앞에서 의심을 버리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삶을 힘들게 하고 괴롭혀 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들, 그래서 더 더욱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 저사람 도움을 청해보지만 도움이 안될 때 우리는 절망하고,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축제의 열기로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준비하고 그들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차 있습니다.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수없이 많은 말이 오고 갑니다. 하지만 그곳에 누워 있는 병자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들에게 있어 병자들은 어쩔수 없는 버림받은 존재들이거나, 거리를 복잡하게 하는 귀찮은 짐과도 같은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셨습니다. 그 병자들 중에서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소외된 그 병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고, 그의 열망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벳자타 못에서 기적을 바랬지만, 정작 그를 살리는 기적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육신의 나음의 기적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무엇보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받아들여준 영혼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많은 친구들이 있고, 또 내가 도움을 베푼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지고 있는 짐을 해결해주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의지하고 희망을 두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그 분은 오늘 내 고통의 벳자타 못으로 오시어 먼저 손길을 내미시고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하는 축복된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다림
-김훈일 신부-
벳자타 못가의 병자들은 기다립니다. 천사가 내려오기를. 이 병자들의 눈은 오직 못에 담겨진 물만을 응시합니다. 대화도 없고 옆에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질병으로 고생해 왔는지, 얼마나 치료를 받으려고 다녔는지, 그래서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 묻지도 않습니다. 가끔 형식적인 대화가 오고 가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병고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저 “누가 저 연못에 제일 먼저 뛰어 들어 병이 나을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더욱 정직한 관심은 내가 제일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는 걱정입니다. 병이 심각한 사람일수록 못가의 기적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못가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곳에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합니다. 죽어가면서도 경쟁에만, 자식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답니다. 그에게는 이제 기다림도 사치입니다. 아무도 그의 고통을 보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절망, 체념, 포기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건강하기를 원하느냐.” 자신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다가서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 병자는 이제껏 헛된 기다림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수십 년간의 헛된 믿음과 경쟁을 버리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갑니다. 참된 기다림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베짜타의 움직이는 물
-강영구신부-
부활(復活)은 자유인이 누리는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는 경천애인(敬天愛人)하는 절대 자유인(無碍人)입니다. 하늘을 섬기고 사랑을 사랑하는 일이라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그분을 옭아매지 못하고, 무덤도 그분은 묻어두지 못합니다.
그러나 탐진치(貪瞋痴-탐욕, 미움과 증오로 성냄, 집착과 아집, 편견으로 눈멂 따위를 말함) 삼독(三毒)에 빠진 사람은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로잡힘은 죽음이며 묻힘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로또 복권이 인생을 역전시켜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복권당첨만을 기다리는 병들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이용해서 돈 벌이를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삼독(三毒)에 빠진 죽음의 자식들이 벌이는 웃지 못 할 사건입니다. 베짜타의 못물이 자신을 병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많습니다. 못물이 움직이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그들의 집착과 어리석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예수는 삼독(三毒)에 빠진 병들고 어리석은 인생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베짜타 못가를 떠나십시오. 부활한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一明)
† 안식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 † -박상대 신부-
어제 복음은 예수께서 이방인 고관의 아들을 원격(遠隔) 치유하신 기적 이야기였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7개 표징사화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치유한 기적 이야기이다. 무대는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예수께서 오순절 축제를 지내시기 위하여 상경하신 것으로 추정된다.(1절) 모든 유다인들은 13살이 되면 일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축제를 지낼 의무를 가졌었다. 그것은 유다인의 3대 축제일로서 과월절(뻬샤흐; 3월~4월), 오순절(샤부옷; 5월~6월), 그리고 초막절/추수감사절(수우콧; 9월~10월)이었다.
요한복음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과월절을 해방절이라 칭하고 있다.(13,1) 유다인들의 달력은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안 달력과 판이하게 다르다. 유다의 달력은 우리 달력의 3,4월에 해당하는 니산달로 시작한다. 과월절 축제는 니산달 즉 정월 14일째 날에 해당된다.(민수 28,16) 예를 들어 2004년의 과월절은 유다력 5764년 니산 14일이며, 우리 달력으로는 2004년 4월 9일이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오순절 축제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내린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과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말한다. 참고로 세 번째 축제인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는데 이스라엘 성조들의 유목생활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가나안으로 향했던 40년간의 방랑생활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로는 추수감사절과 합쳐 지냈던 축제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38년간 중병에 시달린 병자가 치유를 받는 이야기는 분명 40년간의 방랑생활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38년이나 중병으로 앓고 있던 병자에게 사실상 희망이란 없었다. 한 가닥 희망은 베짜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4절) 그러나 그것도 그의 희망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병자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예수를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줄 수 있는 사람 중에 하나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베짜타 연못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분은 스스로 육체와 죄의 치유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 홀로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그분의 이름 외에 어떤 이름도 구원을 줄 수 없다고 사도 바울로도 확신하였던 것이다.(로마 10,13 참조) 그래서 치유 받은 자가 유다인들에게 가서 자기 병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라고 말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15절)
마침 안식일에 이루어진 병자의 치유사건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으나,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다음 대목들을 준비하는 의미도 가진다. 안식일에 행한 병자의 치유사건이 아들의 권한과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증언을 계시(啓示)하는 도입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이유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는 파국에 박해를 몰고 온다.(16절) 안식일법을 실제로 어긴 사람은 요를 걷어들고 간 사람이지만, 그렇게 하라고 예수께서 시켰으니 법을 어기도록 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병자의 치유 이전뿐 아니라 이후에도 '믿음'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그를 치유하셨다. 왜? 예수께서 이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오히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하심으로써 예수 자신의 신비가 부각된다. 38년간 병자였던 이 사람을 유다인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병자가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을 본 유다인들이 그와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안식일법을 어겼다하여 추궁하는 모습이라니... 결혼 10년에 겨우 얻은 딸을 두고 아들이 아니라 하여 며느리를 추궁하는 시부모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수님은 인간의 참담한 처지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을 두고 다른 것은 절대 따지지 않는 참된 의사이시다. 나아가 안식일 위에 군림하는 주님이신 것이다............◆◆◆
걸어가라(요한5,1-16)
-유광수 신부-
예수님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서른 여덟 해나 들것에 누워서 앓고 있는 환자에게 물으셨다. 환자에게 이 말은 복음이다. 이 환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건강해지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 환자뿐만 아니라 베짜타라고 불리는 못 주변에는 눈먼 이, 절름거리는 이, 팔다리가 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왜냐하면 물이 출렁거릴 때에 그 못 속에 들어가면 혹시 병이 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병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고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느니까. 누구나 환자라면 그곳에 와서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렸다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제일 먼저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 희망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 모여 있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희망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인간이다. 어떤 사람도 나름대로 희망을 갖고 있다. 그 희망이 또 오늘을 살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나의 희망은 무엇인가? 나의 꿈은 무엇인가? 지금 나의 간절한 바램이 있다면 그 바램이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이, 절름거리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은 누구인가? 꼭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이 어쩌다가 가끔 물이 출렁거릴 때 제일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병이 낫는다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그래도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기다리고 있는 이 병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주님을 보지 못하는 눈먼 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지 못하고 절름거리는 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명의 양식을 먹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하여서 영양실조에 걸려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신자들의 모습이다.
병이 낫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못에 와서 언제 물이 출렁거릴 지도 모르면서 그 물이 출렁거릴 때만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이 바로 오늘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 가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그곳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이들이다. 베짜타라는 못은 또한 율법을 가리키기도 한다. 옛날에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율법에 얽매여서 오직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다.
오늘날 베짜타라는 못은 복음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즉 병든 우리를 낫게 해주는 것은 복음이지 교회 건물이 아니고 신자라는 이름이 나를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5,10)라고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샘인 말씀을 먹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단지 나의 병을 고쳐주시겠지 하고 형식적이고 수동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일어나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은 말씀이다. 서른 여덟 해 동안이나 누워있던 환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한 것은 베짜타라는 못의 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었듯이 우리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은 미사 참례를 하러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 아니고 또 활동이 아니다. 정말로 우리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다섯 번이나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들것에 누워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은 시체라는 말이다. 일어나라는 말은 부활하라는 말이다. 무엇이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가? 그것은 그가 누워있는 들것이 아니다. 그를 부활시키는 것은 "일어나 들 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던 말씀이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걸어간 것은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 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고 그가 그 말씀대로 따랐기 때문에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를 그 동안 누워있게 만들었던 들 것은 무엇인가? 복음에서 말하는 들것이란 율법을 말한다. 율법은 결코 그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이 그에게 들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에게 들것은 여러 가지 일 수가 있다. 나의 고정관념, 나의 악습. 나의 잘못된 신앙생활, 악습, 게으름 등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에 얽매여 있어서 일어나 걸어가지 못하고 있다.
일어나 걸어간다는 것은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살릴 수 있고 병든 나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나를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의 샘이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먹지 않으면 그리고 그 말씀의 못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치유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나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생명의 샘인 말씀의 못에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고 치유시켜 줄 수 없는 베짜타라는 연못에 누워 낫게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 신앙 생활해온 기간이 어느덧 서른 여덟 해가 되는 사람도 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5,10)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말씀이다. 제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자. 아무리 말씀이 중요하다고 제가 누차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또 서른 여덟 해 동안 누워지내야 할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오늘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다섯 번이나 말씀하신다.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사랑은 법 위의 초월적 행위 †
어제 복음의 소경에 대한 기적사화에 이어 오늘 복음도 역시 38년간의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모두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은 이와같이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차 닥쳐올 '십자가의 길'을 예증하는 목적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쨋든간에 오늘도 뜨겁게 안식일 논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이렇게 하느님과 동등한 행세를 하는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님이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당시 법적으로 접촉이 금지된 세리(마태=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더욱 더 바리사이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주님은 금식 문제에 대해 설명하면서 바리사이의 종교 형식을 낡아빠진 옛 것으로 간주하시면서 그들의 비뚤어진 마음에 더 불을 붙였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갈등 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요한은 오늘복음(요한 5장)을 통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주님을 박해하게 되는 또 다른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I.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1.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
주님은 유다인 절기를 맞아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셨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때가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지 거의 1년이 되었을 때였다고 추정하는데 대강 그 내용을 보면 1)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루살렘에서 약 8개월 정도 머무셨고, 2) 사마리아에서 잠시 들려 복음을 전한 후에 다시 갈릴래아 내려가셔서 그 곳에서 약 3-4개월 정도 머무신 것으로 보아 1년을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절기를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경건하다고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킵니다. 주님 역시 이러한 관례를 따라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번 절기를 지키신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성전정화사건과 오병이어사건이 과월절에 일어났으며(요한 2,13. 6,4),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고(요한 7,2), 봉헌절에 설교하셨으며(요한 10,22), 마지막 예루살렘 사건 역시 과월절에 일어났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요한 11,55).
유다인들은 다음과 같은 절기들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4월(현대력; 유대력으로 정월 14일)에 과월절을 지켰는데, 이 날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과월절이 지난 후 50일 째 되는 날에 그들은 오순절을 지켰으며, 이 날은 칠칠절, 또는 추수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마지막으로 10월(현대력)에 지켰던 초막절은 그들이 출애굽 때에 광야에서 살던 일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그 외에도 2-3개의 절기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오늘복음에 언급된 절기가 어떤 절기였는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과월절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오순절이라고 하나, 성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고, 오늘복음 내용의 핵심주제로 보아 절기라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기에 그냥 넘기기로 하겠습니다.
2. 베짜타 연못가를 찾으신 예수님
주님은 예루살렘에 가신 후에 양문 곁에 있던 베짜타라고 하는 연못을 찾으셨습니다. 베짜타는 "불쌍한 자들의 집"이란 뜻을 가진 일종의 병원이었습니다. 이 곳에는 환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시설(행각)이 5개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오늘날 "안네의 연못"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연못의 4모서리에 행각이 하나씩 있고(4개), 연못을 둘로 나누는 중앙 부분에 1개의 행각이 있어서 총 5개의 행각이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수영장과 같은 곳이었으며, 그 물은 치료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5개의 행각에는 수많은 병자들과 소경, 절름발이와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가끔 천사가 이 연못에 내려와서 연못의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이때에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낫게 된다고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병자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환자들 중에는 38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환자로 지낸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묵상되는 점은 죄로 인해 영적인 질병에 걸려 막연한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죄라는 질병에 걸려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누군가가 나타나서 구원?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 환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
주님은 그곳에 있는 수많은 환자 중 38년 된 중풍병자를 보시고 그가 이미 오랫동안 병에 시달려 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려온 것을 보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주님은 지금도 죄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찾아 오셔서 "낫기를 원하느냐?" 고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직접 고쳐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이 움직일 때에 자기를 물에 넣어 줄 사람을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이 움직일 때마다 물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소망을 가지고 이 곳에 있었지만 병을 치료할 수 없어서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기 주변의 동료들은 모두 다 자기 몸을 고쳐보려고 주변의 동료를 돌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38년 된 병자는 기적같이 몸에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명령대로 병이 나아서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말아서 들고 걸어갔습니다.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 38년 동안 일어나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주님께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친히 찾아와 고쳐주시는 자비롭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안식일에 대한 논쟁
1. 유다인들의 비난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고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다인의 경우 물건을 들고 걸어가는 일은(물건을 운반하는 일로 간주되어) 안식일에는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은 38년된 병자가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을 보고 그가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이 곳에서 언급된 유다인은 유다인 중에서도 특히 주님을 반대하던 바리사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물건을 들어올리거나 운반하는 일을 금지했는데, 그들이 이러한 금지 조항을 만든 것은(레위 17,21, 느혜 13,15)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이 말씀들은 안식일이 세속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성서에서는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안식하신 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생계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 금해야 할 여러 가지 규정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규정은 너무나 까다롭고 복잡해서 원래 안식일의 의미를 상실할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까다로운 법을 벗어나서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유다인의 책망을 들은 병자는 자기가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은 누군가가 시켜서 한 일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이 날에 병 고침을 받았던 사람은 담대하지 못하고 소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유다인들에게 소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치유해 준 사람에게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그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한 사람이 누구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고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누가 자기에게 명령을 했는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병자를 낫게 하신 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주님은 쉽게 몸을 숨길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후에 주님은 성전에서 다시 그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나았다"고 하는 말은 완전형으로 그가 완전하게 치유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르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 병자는 과거에도 큰 죄를 지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죄를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도 주님은 이미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며, 지나간 죄에서 벗어나서 다시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 죄로 인해 야기되는 병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질병의 경우 나음을 입은 후에 더 심한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죄에서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그가 한번 병이 나은 후에도 계속해서 죄 가운데에 머문다면 그는 더 큰 병에 걸릴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예수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떠난 후에 즉시 유다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사람이 예수였다고 알렸습니다. 그는 자기를 고쳐준 주님을 배반하고 즉시 가서 유다인들에게 가서 알린 것을 보면 그는 평소에 신의가 없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께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III. 묵상마무리
(1)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아니 그럼 병자가 낫기를 원하지,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38년이란 긴 세월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포기하고 낙망해서 지쳐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희망을 일으켜 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아주 간절한 소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어주시는 말씀입니다.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속에 만족해 있으면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손길을, 하느님의 은총을 필요로 생각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세속에서 행복해 죽겠습니까? 그러면 39년 40년째도 그렇게 지내십시오....(그러면 안되겠지요!!!)
(2) "일어나라"라는 명령을 받으신다면.....
하느님의 기적은 본인의 노력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38년이나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서 요를 걷어 가지고 가라"는 말은 말 같지도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명령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하느님의 능력이 합쳐져야 은혜가 내려진다는 정신입니다. 원하지도 않고 노력조차 아니하는 사람에게 늘 필요한 은혜가 척척 내려진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로버트로 만드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3번씩이나 넘어지셨으나 또다시 일어나셨습니다.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七顚八起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인간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노력과 의지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입니다. 한두번 넘어진 것을 가지고 세상이 모두 끝난 것처럼 엄삼 떨지 마세요!!!
(3)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라는 명령을 받으신다면....
아니, 그냥 가기도 힘든데 무슨 요까지 들고 가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말이 보통 사람들이 쉽게 내던지는 항의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정당하고 잘난 항의인 것 같습니다만 어떤 일에도 십자가의 고통은 따르기 마련입니다. 아무런 고통도 없이, 아주 편하게 성공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순기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매고 걸어가거라"...어떻게 하시렵니까?
(4) 아무리 오랫동안 실패와 좌절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계속적인 노력과 투지는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38년이란 세월은 정말이지 긴 세월입니다. 그런데도 그 연못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 한결같이 누워서 움직이는 샘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은근과 끈기입니다. 마치 페니실린같은 약을 만든 사람의 정열 같은 것이 우리 인생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언제나 포기와 실망은 금물입니다. 좌절이란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단어입니다. "내가 있는데 왜 낙망을 하느냐?"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직도 한숨만 쉬면서 자포자기하고 있습니까!!!
(5) 남의 성공과 선행을 비판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습니다. 그런 가라지같은 못된 종자가 어디엔든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비단 오늘날과 같은 정치판뿐만 아니라 일상 우리의 주변에서도 남의 성공이나 선행을 칭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선가 누구인가 반드시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것과 요를 걷어들고 가라한 것이 안식법을 어겼다해서 시비를 거는 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소위 법을 잘 안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반대와 시비를 걸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은 겸손을 잃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6)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말씀은 (사순 제4주일의 복음인)요한 복음 9장 3절의 태생소경 치유 때 벌어지는 죄와 죄의 값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은 태생소경의 불행은 그 자신이나 부모의 죄 값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마치 그의 중풍이 그 자신의 죄 값으로 인한 것처럼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병과 죄, 죄와 죄 값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질병은 다 그의 죄 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기의 사상도 그런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도 그의 죄 값은 아니었듯이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해 그 값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그것이 바로 병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병이나 Aids가 바로 그런 경우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천벌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자연적인 인과율의 법칙일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고도 합니다.
오늘의 중풍병자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신 것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의 전과를 다 아셨기에 하신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잘못으로 인해 그러한 결과가 왔는지를 아셨기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더 이상 죄를 짓지 맙시다.
-두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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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은 꾀가 나서 몇개월째 받던 수업을 빼먹고 결석문자를 보냈지요. 그런데 ㅇ오늘의 강론을 읽으며 '아쿠' 했습니다. ㅎㅎ
이 말씀이 쉬고자 꾀를 낸 내 모습에 물을 끼얹네요. ㅎㅎ
'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1-3ㄱ.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