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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회복 스크랩 17세 가야소녀는 왜 순장 당했나?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250 14.04.27 21: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추적]

 

17세 가야소녀는 왜 순장 당했나?

 

우리 고대사에 순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는 얘기,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순장 죽은 이를 위해서 산 사람을 함께 묻은 장례법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잔혹하기가 짝이 없는 일이죠. 하지만 그냥 역사 속의 하나의 장례 풍습이라고 생각해 버리기에는 의문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순장됐을까? 산체로 묻혔는지, 살해당했던 것인지, 또 이런 잔인한 풍습은 도대체 왜 생겨난 것인지, 최근 경남 창녕 송현동 15호분에서 함께 묻힌 4 구의 인골이 발견됐습니다. 아마도 순장된 유골들이라고 추정이 되고 있는데요. 과연 이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순장이 된 걸까요. 오늘은 1500여 년 전 실제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기묘한 장례풍습 순장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2007년 12월. 경남 창녕에 한 발굴 현장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창녕 송현동 15호분은 이 지역 최대 규모의 대형 고분이다. 아쉽게도 중요 유물은 이미 도굴 당한 상태였다. 그런데 깨진 토기 사이로 발견된 매장자의 흔적들. 한 눈에도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고분이 조성된 시기는 6C초 무려 1500여 년 전 가야인의 인골이다. 뜻밖의 성과였다.

 

이성준 학예연구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저희가 처음에 발굴을 하기 위해서 들어왔을 때 이 석실 전체 높이의 반 정도가 되는 1.4m 정도, 그 정도가 도굴 구멍으로 인해서 들어온 흙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처음 우리가 들어왔을 때의 분위기는 이 안에 뭐가 있을까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심하게 교란이 되고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북쪽 벽면의 인골을 제외한 나머지는 도굴 때문에 훼손이 심했다. 몸통부분은 아예 없어지거나 뒤섞여 있었다.

 

‘여기 머리뼈 조각이 있는데 이 조각 역시 마찬가지로 이 분 머리뼈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쪽에는 지금 두 분이 섞인 걸로 결론 내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또 묻힌 사람이 있었다. 단서는 남벽 바닥에서 발견된 목관 받침돌 그것은 무덤 주인의 자리였다. 시신이 사라진 주 피장자와 또 다른 4명. 어째서 이들은 한 석실 안에 묻힌 것일까? 송현동 15호분은 순장 묘인가? 여럿이 묻혔다고 모두 순장은 아니다. 시차를 둔 추가 매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순장 묘는 매장자들이 동시에 묻혀야 하며 다시 무덤을 파거나 입구를 열었던 흔적이 없어야 한다. 한번 쌓아올린 봉토 층에 교란이 없어야 된다는 말이다.

 

“흙으로 크게 축조를 할 때에는 뭐 토성도 마찬가지이고 단일한 재료 돌들이 켜 있는 층들이 이렇게 쭉 나와 있고요. 또 이렇게 점토로 돼 있는 것들이 이렇게 있습니다. 여기고 점토로 되어 있죠. 이런 것들을 교대로 쌓아올리고 특히 흙을 쌓을 때에는 단단하게 다져서 현상에 잘 유지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는 것이죠.”

 

 

당시로서는 첨단토목공사 기법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봉토는 1500년 전 그대로였다. 인골의 배치도 순장 묘의 특징을 띤다. 시상 돌의 흔적으로 보아 주 피장자는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웠을 거다. 그 발치 위치한 네 명의 머리 방향은 동쪽이다.

 

박천수 교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순장 자를 주인공과 다르게 교차되게 놓는다는 것은 첫째 주인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순장자 자체가 하나의 물품으로 취급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순장 주인공과 주축 방향을 다르게 한 것은 주인공과 둘 사이를 구별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지난해 4월 인골 수습이 진행됐다. 이례적으로 전문가 3팀이 동시에 투입됐다. 최근 법의학 유전학 같은 첨단 기법이 적극 도입되면서 고(古)인골은 가장 중요한 유물자료가 됐다. 북벽 쪽 인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상태여서 발굴 팀에 기대감은 커졌다. 크지 않은 키에 아담한 체구 뼈의 상태로 보아 10대로 추정됐다.

 

 

‘요 치아가 완전히 발치 맨출된 상황이기 때문에 ‘만13세가 지났다’라는 판단이 가능한 기준이 되고 말씀드린 데로 이쪽에 뼈에 끝 쪽 부분이 완벽하게 뼈가 되지 않아 성장판이 열려있기 때문에 저희가 만15세보다는 적지 않을까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기준은 현대인에 대한 기준입니다. 따라서 고대인에게 100% 적용된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1500여 년 전 고(古)인골의 신원확인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수습된 인골은 가톨릭 의대 응용해부학 연구소로 옮겨졌다. 법의학자 정밀분석이 이곳에서 진행됐다. 뼈는 신분을 복원해내는 가장 기초자료다. 뼈에는 신원확인에 필요한 나이, 성별, 키에 대한 정보가 새겨져 있다. 분석결과 4명의 인골은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였다. 석실 입구에서부터 여자, 남자, 여자, 남자의 순으로 누워있었던 것이다. 금귀고리를 한 유골은 여자였다. 상태가 온전한 만큼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뼈에 곳곳엔 사망 당시 나이가 남아 있었다.

 

한승호 교수 가톨릭의대 응용해부연구소

“우리가 이런 것 갖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현재로 선 남자, 여자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나이를 많이 드시면 이러한 봉합들이 서로 닫혀서 서로 연결돼 버립니다. 선이 없어지고 그런데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나이가 그렇게 많이 드신 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희가 알 수 있고요.”

 

 

정확한 나이는 몇 살일까? 인체의 최대한 긴 부위인 팔 뼈, 다리뼈의 성장 판을 살펴보면 추정 나이 폭을 더 좁힐 수가 있다. 뼈의 끝부분인 성장 판은 성인이 되면 완전히 닫혀 흔적이 없어지는데 모든 성장 판이 열려있었다. 치아 또한 완전히 성인이 되기 전이다.

 

 

“아직 발달이 안 된 사랑니가 발달 정도로 보니까 10후반, 17세 정도로 보인단 말이죠.”

 

연구 팀은 고대 가야인의 복원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뼈의 기본 형상은 그 바탕이 될 것이다.

 

한승호 교수

“한국 사람의 특징이 보통 이렇게 앞뒤 특히 뒷머리가 납작한 형이 참 많은데 비교적 이렇게 도드라져 있어요. 상당히 이렇게 옆으로 뒤통수의 뒤로 짱구 모양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송현동 15호분에 묻힌 금귀고리의 인골, 그녀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17세 가야 소녀였다. 송현동 순장 묘에서 가장 온전했던 인골은 17세가량의 가야 소녀였습니다. 전문가의 분석을 따르면 그녀는 150cm 중반 정도의 키에 금귀고리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1500여 년 전에 이 가야 소녀는 죽은 자를 위해서 무덤에 함께 묻혔던 겁니다. 17세, 물론 고대사회에 평균 수명이 오늘날 보다 훨씬 더 짧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어린나이입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젊은 나이에 죽은 자를 따라 죽는 장례 절차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과연 17세의 가야 소녀는 자신의 순장에 운명을 순순히 받아드렸을까요.

 

 

2500여 년 전 고대 중국에서는 한반도보다 앞서 순장풍습이 성행했다. 순장자의 인골은 처참하다.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졌거나 생매장 당했다. 목이 잘린 여러 구의 순장인골들. 심지어 꿇어앉은 자세로 살해당한 모습의 순장자도 있다.

 

권오영 교수 한신대 국사학과

“순장이라는 것이 인간에 강한 예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대 노예제 사회였던 특성으로 이야기 돼 왔습니다. 그래서 순장당한 사람들의 인골이 나올 경우에는 대개 그것을 비판 없이 노예라고 보아왔었죠. 대표적인 예가 요동반도에 있는 강상묘, 누상묘와 같은 청동기시대에서 나온 무덤에서 인골들을 다 순장된 노예로 봤던 북한학계의 견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송현동 15호분 4명의 순장자는 어떻게 죽었을까? 그들 또한 생매장 당했거나 혹은 처참한 죽임을 당했을까? 발굴 팀이 인골에 누운 자세를 세심히 관찰한다. 그런데 송현동 순장 인골은 중국의 경우와 많이 달랐다.

 

박대균 교수 순천향의대 해부학교실

“자세로 봐서는 종아리뼈 전각 뼈의 자세로 봐서는 똑바로 누운 자세로 판단이 되고 그 자세에서 아마 발이 똑바로 있었을 텐데 그게 조금 약간 주저앉은 듯한 어떤 그런 자세하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원래 시신이 사망하게 되면 약간 발바닥 쪽으로 굽혀지기 때문에 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라고 현재 볼 수 있겠습니다.”

 

소녀의 인골은 안정된 자세가 더욱 확연하다. 온 몸을 쭉 펴고 곧바로 누웠으며 가지런히 놓인 팔, 다리 자세로 볼 때 저항의 흔적도 없다.

 

“현재 이분의 자세는 똑바로 누워서 하늘을 바라본 자세로 누워 있습니다. 팔을 보시면 왼팔과 오른 팔 모두 손 등이 하늘로 향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순장자들은 편한 자세로 매장됐으며 배치된 간격 또한 일정하고 가지런하다. 최소한의 생매장의 가혹한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장자는 어떤 방법으로 죽었을까. 경북 경산에 임당동 고분군. 지난 1982년부터 16년 동안 계속된 대규모 발굴이었다. 만여 점 이상의 고대 유물이 쏟아졌으며 수십 여구의 인골이 발굴됐다. 당시 한 순장자의 두개골의 관심이 집중됐다. 뚜렷한 외상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고(古)인골 전문가들은 이것이 죽기 전 둔기에 맞아 생긴 두개골 골절이라고 분석했다. 뼈 안쪽 깊숙이 파고 들어간 상처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확실한 외상에 흔적을 가진 순장 인골은 일부에 불과했다.

 

 

경남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도 순장 인골 수십 여구가 발굴됐다. 고인골 전문가 김재현 교수는 대가야 최대 고분인 지산동 44호분부터 최근 발굴된 73호분의 인골들을 분석했다. 순장자 대부분은 타살의 흔적이나 외상이 없었다.

 

김재현 교수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이번에 우리가 확인된 바로도 역시 여기서 나타난 인골들은 전혀 일반적인 흉기라든가 이러한 것에 있어서 살해되었던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오히려 이들이 만약에 자살이라는 형태로 죽음을 택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잔혹한 방법이 아닌 스스로의 그런 의사에 의해서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죠.”

오히려 경산 임당동 고분에선 순장자가 상당한 예우를 받은 흔적이 발견됐다.

 

‘지금 주피장자의 무릎을 굉장히 붙여가지고 묶어서 묻었기 때문에 나타날 현상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현상으로 나오겠습니다. 순장자 역시도 마찬가지로 다른 순장자와 다르게 가까이 무릎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그것을 염을 해서 염습을 처리한 다음에 무덤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입니다.’

 

김용성 박사 한빛문화재연구원

“주인공이 죽었을 때는 당연히 내가 시중들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을 골랐을 거고 그 사람은 당연히 내가 저승에 가서도 주인공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동천왕이 죽자 근신들이 스스로 순장되기를 바랐으며 결국 무덤 앞에서 따라 죽는 이가 많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왕을 따라 죽는 일을 마지막 신하된 도리라 여겼던 것일까. 송현동 15호분의 순장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던 17세 가야 소녀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스스로 순장되기를 바랐을까. 아니면 죽음을 강요당했을까. 순장자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 의문은 아직 정답을 알 수 없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권오영 교수

“그 순장당한 사람들이 이제 자발적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강제적으로 죽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체의 일부가 절단된 흔적이 보이거나 그럴 경우에는 이건 분명히 강제로 죽임을 당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자발적이냐 알 수 없는 것이 약을 먹거나 아니면 교사를 하거나 이럴 경우에는 정확히 알 수가 없죠. 다만 중동지방의 예를 보았을 때는 순장당한 사람들이 왕의 시신을 따라서 무덤 안에 기꺼이 같이 들어가고 동시에 함께 독약을 먹고 죽는 이런 예들도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이 순장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죠.”

 

지금까지 한반도 지역에서 발견된 순장 묘에는 생매장의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망한 뒤에 매장을 했다는 얘기인데 게다가 심각한 외상을 지닌 인골은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그렇다면 순장자들은 독을 마셨거나 교사를 당했거나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제 3의 방법에 의해 사망했다는 추측이 가능해 집니다. 순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殺人殉葬 多者白數’ 그러니까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했는데 많을 때에는 백의 단위로 헤아렸다.’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옛 부여에서도 순장이 성행했다고 추측이 됩니다. 헌데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순장 묘로 밝혀진 고분 유적이 한반도의 아래 쪽 지역 특히 가야나 신라지역에 집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경북 고령의 대가야왕릉전시관. 가야 지역 최대 규모인 지산동 43호분이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주실과 부실을 가운데 두고 부챗살 모양으로 32기의 순장 석실이 둘러싸고 있다. 주피장자 한 명을 위한 순장자만 40여명. 죽어서도 이런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자는 누구였을까. 이들 대영순장고분에서 출자형 금동관과 같은 화려한 금관식이 출토됐다. 이는 지역의 왕이나 수장 급만이 착용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위세 품이다.

 

박천수 교수

“순장이라는 것은 고령 지산동뿐만 아니라 대가야 권역 고분에서 봤을 때 수장에 한에서만 이루어진 겁니다. 지역에 따라서 경제력이 막강하거나 실력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순장을 행했던 것이 아니고 대가야 왕이 인정한 지역의 수장에 한에서만 순장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대가야 권역의 고분군에 일관된 규제가 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순장 묘가 유독 옛 신라와 가야 지역이었던 지금의 영남지역에서만 성행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순장풍습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신경철 교수 부산대 고고학과

“순장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나라 고대에 우리나라 전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남에만 한정되는 한시적인 그런 습속인데 그게 원래 이쪽 편의 자생이 아니고 원래 뭔가 이유 때문에 북방유목민족의 습속이 영남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게 한시적으로 존재했는데 들어올 때는 똑같이 김해를 중심으로 가야라든지 신라라든지 영남전역에 확산된 영남에만 머물렀던 것입니다. 원래 원류는 아마 북방유목민족의 습속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순장이 북방유목민족의 습속과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있다. 김해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금관가야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 가야연맹의 맹주였다. 금관가야의 지배층 묘역으로 알려진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일찍부터 순장풍습이 유입된 곳이다. 1990년 발굴을 시작할 때 이곳은 볼 곳 없는 구릉지였다. 그러나 순장무덤과 함께 연이어 쏟아지는 가야 유물 수천 점. 국내외 학계가 들썩였다. 일본 고고학자들의 현장답사도 줄을 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 못했던 특별한 유물이 국내 최초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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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솥 동복이었다. 29호분에서 출토된 오르도스형 동복. 중국 내몽고 자치구 오르도스 지역에 북방기마문화 민족을 대표하는 지표유물이다. 말을 탈 때 옷이 흩날리는 것을 잡아주는 호형대구 또한 전형적인 북방기마민족의 유물이다. 어째서 한반도 남쪽 끝에서 북방계 기마민족의 유물이 출토되는 것일까? 내몽고의 성도 후허하오 터에 위치한 박물관.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과 꼭 닮은 오르도스형 동복이 있었다. 내몽고의 호형대구는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낸 듯 김해 대성동 출토품과 닮아 있다.

 

 

순장 또한 북방유목민족의 장례법. 동복과 같은 실용품과 순장이라는 무형의 풍습은 어떤 계기에서 어떤 경로로 한반도 남쪽 끝에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길림성의 대평원 일대는 부여의 옛 영토였다. 길림의 박물관엔 대성동 29호분의 동복과 똑같은 모양의 동복이 전시돼 있다. 분명 한민족의 고대국가였던 부여의 유물이었다. 결국 순장풍습은 북방계 유물과 함께 흔히 초원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대륙의 이동경로를 따라 한반도 남쪽까지 전파된 북방의 습속이었다.

 

신경철 교수

“권력자가 자기가 죽었을 때 순장을 할 시기면 노동력을 전부 없애기 때문에 농경사회는 순장을 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 이제 목축사회 그러니까 목축사회에서는 목축의 먹이에 따라 이동을 하기 때문에 노동력이 필요 없다. 그런데 순장을 하는 거예요. 그게 이상하게 고구려를 뛰어넘고 백제를 뛰어 넘어가지고 영남에만 한정되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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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천년고도 경주. 대릉원 고분군에 황남대총은 국내에서 제일 큰 5세기 신라고분이다. 두 개의 봉분이 이어진 황남대총에서도 순장흔적이 발견됐다. 큰 목곽 안에 왕족인 60대 남자가 안치돼 있고 관밖에 15세 여성으로 밝혀진 순장 자가 묻혀있다. 5만 점이 넘게 출토된 유물들, 신라의 금속 세공 기술이 돋보였다. 신라 최고의 권력을 지닌 왕의 위세품답게 금장신구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화려함을 과시했다. 5C초부터 신라는 주변 속국을 포섭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561년 진흥왕 척경비가 세워질 때까지 창녕가의 토착세력은 조금씩 신라 쪽으로 흡수돼 갔을 것이다.

 

신경철 교수

“5세기 대부터 신라가 영남의 강자로 등장합니다. (신라가 강자로) 등장하면서 원래 가야 지역의 많은 부분이 신라 쪽으로 정치적으로 많이 기울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하나가 창녕의 이런 고분군들인데 (이른바) 비사벌가야예요. 내용을 보면 친신라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중시하는 것은 친신라적이지만 신라가 직접 다스린 게 아니라 원래 토착세력의 지배자들, 지역의 왕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줬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출자형 금동관은 전형적인 신라양식이다. 똑같은 금동관이 경산을 비롯한 순장고분 곳곳에서 발견됐다. 이런 화려한 위세품은 신라왕실이 하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주보돈 교수 경북대 사학과

“경주 지배집단은 새로이 신라영역으로 들어온 지역에 대해서 지방관을 직접 파견해서 지배해나갈 체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기존의 지방 지배세력을 이용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반대급부로 위세품을 부여하는데 위세품을 부여받은 지배세력은 당연히 정치적, 경제력을 가지게 되고 그걸 바탕으로 큰 규모의 봉토를 가지는 고분을 조성하게 되고 순장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사벌 혹은 바와가야로 불렸던 경남 창녕은 5세기 전후로 교통 교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창녕 송현동 고분의 주인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권역과 낙동강을 건너 세력을 확장하려는 신라 사이에서 고민했을 비와가야의 왕이었다. 그리고 왕이 죽자 그의 무덤엔 당시 순장의 풍습에 따라 금귀고리를 한 17세 가야 소녀가 같이 묻혔던 것이다.

 

죽음을 다루는 의식에는 엄격한 절차와 규율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그 사회에 종교, 문화 그리고 가치관 같을 것들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곤 하는데요. 안타깝게도 순장의 절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순장 묘의 유적을 통해서 추측을 해볼 따름이죠. 최근 들어서 역사학자들은 한 가지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고 있습니다. 장례법에 따른 순장자의 명단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왕이 죽고 나면 순장하게 될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얘기죠. 바꿔 말하면 왕의 무덤에는 아무나 함께 묻힐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지금까지 순장자는 비천한 신분 그러니까 노비나 노예나 전쟁포로와 같은 신분이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는데요. 송현동 고분에서 나온 가야 소녀는 금귀고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남지역의 다른 고분에서도 예를 들자면 화려한 금장신구를 갖고 있었다거나 혹은 곡옥, 은제마구 등은 지닌 채로 발견된 순장자의 인골들이 있었습니다. 과연 왕을 따라서 순장된 사람들은 어떤 신분들이었을까요. 송현동 인골의 DNA를 통해서 생전의 그들의 신분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최근 순장 묘에 묻힌 피장자의 관계를 밝히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인골의 DNA 분석은 그 핵심기술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송현동 고분 순장자의 DNA를 분석해보기로 했다. 오래된 뼈에선 DNA를 추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대퇴골 뼈 정강이 뼈같이 크고 단단한 뼈를 선택한다. DNA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비교적 높기 때문이다. DNA를 추출, 증폭시키는데 성공하면 피장자의 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지상현 박사 국립문화재연구소

“출토 인골의 DNA를 분석을 하면 인골의 모계라든가 부계의 혈연관계를 알 수 있고요. 그 다음에 인골의 성별, 그 다음에 인골이 어떤 질병을 갖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전반적으로 분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1500여 년 전 지배자의 무덤에 함께 묻힌 4명의 순장자. 가족 혹은 친척일까. 아니면 아무 관계도 아닐까. 혈연관계 분석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법이 주로 활용된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어머니로부터만 유전되기 때문에 모계 혈통을 알 수 있다.

 

“그 두 번째와 네 번째 순장자 같은 경우에는 동일한 어머니 쪽에 조상형을 갖고 있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순장자 중 남자 두 명은 같은 모계 즉 어머니 쪽의 혈통이 같았다. 이들은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었을까. 대가야 초기 순장묘 지산동 73, 75호분 지난해 이곳에서 발굴 팀을 깜짝 놀라게 만든 특별한 유물이 출토됐다.

 

조영현 원장 대동문화재연구원

“이 고분의 특징은 순장 곽에 순장자가 관을 쓰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래에 관이라고 하면 대개 그 지역의 최고 지위자에 하나의 위신제로 알고 있었지만 순장자도 상당한 신분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상당한 지위가 있었다고 우리가 완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주곽이 아닌 외부 순장 곽에서 금동관식이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관리나 귀족계급이 아니라면 쓸 수 없을 법한 관식이었다.

 

“단순한 시녀라든지 단순한 종자가 저렇게 금동관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순장의 대상은 바로 그 리스트를 정해져서 반드시 주인공이 저 세상에 가더라도 가까이 있었던 사람 또 신분적으로도 높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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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박물관인 경산 임당동에서 출토된 다양한 먹을거리 유물이 전시돼 있다. 토기 속엔 여러 마리 분량의 닭 뼈가 담겨있는가 하면 말뼈를 비롯한 동물 뼈가 많이 나왔다. 내륙에선 구하기 힘들었을 조개도 수북하다. 7,80cm의 상어는 아주 특별하고 진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김대욱 박사 영남대 박물관

“여기 임당에는 주로 동해에나 남해에서 잡히는 각종 어류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아마 그 당시에 어떤 육로 내지는 해로를 통해서 외부에서 공급된 것으로 판단이 되고 그런 것들이 이 중심 고분군내에는 많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골에서 직접 식생활을 유추해낸다. 일생 동안 먹은 음식은 그대로 기록되는데 뼈에서 이런 식생활 기록을 뽑아내는 것이 골화학분석이다. 1500여 년 전 송현동 순장자들은 무엇을 먹었나?

 

지상현 박사

“현재 가야 순장자들의 분석결과는 자료에서 보시면 전반적으로 육류와 곡식을 골고루 섭취를 했기 했는데 특히 네 번째 마지막 순장자 같은 경우는 다른 순장자보다 육류 섭취가 좀더 많이 먹은 것으로 확연하게 나타난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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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지역의 최고 지배자가 죽자 4명의 측근의 그의 죽음을 따랐다. 두 명의 남자는 호위무사나 근신이었고 여인들은 가까이 왕을 모시던 시녀였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주군을 따라 죽어야만 하는 이들을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해답은 당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경산 임당고분에 부장품들. 크고 작은 토기류, 동제 다리미도 있다. 심지어 밥을 쩌 먹던 시루까지 왕은 살아서 사용하던 것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간 것이다.

 

김세기 교수 대구한의대학교

“고대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저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간다. 그런데 이승에서의 신분이 저승에서도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과 연관해서 보면 대가야왕이 가지고 있는 그런 권위와 권력을 저 세상에서도 똑같이 유지하라고 측근도 있어야 하는 등등”

 

 

6세기 초 신라 지증왕은 순장 금지를 명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7세기 말 통일신라의 무덤에서 다양한 토용들이 출토됐다. 순장자의 자리를 토용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한 뼘 정도 크기의 토용은 문관이나 무사 일반 백성까지 다양한 신분을 표현하고 있다. 여인이 옷깃을 들어 눈물을 훔친다. 악사는 애끓는 음악을 연주하고 무릎 꿇은 남자는 통곡한다. 모두 주인공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흙으로 빚어진 인형은 고대 사회의 무덤의 주인공과 함께 순장됐던 신하나 시녀, 호위무사의 다른 모습이었다.

 

권오영 교수

“신라의 경우에는 6세기로 접어들면서 불교를 공인하고 그와 함께 순장을 금지 시키고 이 무덤에 많은 양의 에너지를 투입하는 이런 단계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죠. 역시 그것은 순장이 해지 됐다라고 해서 어떤 국가, 지배집단의 권력의 강도가 약해졌다가 아니라 오히려 한 단계 성숙한 단계로 올라간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부족국가 체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중앙집권국가 시대로 접어들면서 백성은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구성원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3, 4백년간 성행했던 순장제도는 사라집니다. 인간을 제2의 제물로 쓸 수도 있다는 순장풍습은 그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는 원시적인 사회풍습이었기 때문이죠. 1500여 년 전 17세의 가야 소녀는 왕이 죽자 순장됐습니다. 이 소녀는 후궁이었거나 아니면 왕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궁녀일수도 있습니다. 살아서 모시던 왕을 죽어서까지 섬긴다. 이 이상한 내세관. 이것이 왕에 대한 복종이든 강제된 죽음이었든 지금의 우리가 그 내막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 가야 소녀는 왕의 무덤에 함께 묻히는 것을 자신의 숙명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 용도는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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