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김용민, 베드로, 정형외과 의사)
의대 6년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삶이었지만, 졸업 후 군의관 훈련소에서부터는 저 자신의 의지나 희망과는 무관한 낯선 세계들이 줄지어 나타났습니다. 처음 배치된 전남의 바닷가 무안은 서울에서 7시간 넘게 걸리는 머나먼 곳이었기에 혼자 지내고 있는 막내아들의 결혼 문제로 부모님은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명절을 지내러 잠시 서울에 왔다가 지금의 아내와 갑자기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옮겨가게 된 소록도에서 소록도의 종교적 분위기를 접하면서, 이렇게 독실한 신자를 만나게 된 것은 뭔가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록도 생활 막바지에 결혼하였고, 아이 낳는 것을 서두르지 않기로 하여 가족계획을 시행하였지만, 아들과 딸이 차례로 태어났습니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딸의 돌을 치르기도 전에 셋째가 생겼습니다. 당시의 인구정책은 둘도 많으니 하나만 낳으라던 시절이었으므로 인공임신중절이 당연시되던 분위기였습니다만, 아내는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어떻게 없앨 수가 있느냐며 아무리 힘들어도 잘 받아들이자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첫째와 둘째를 유치원 차에 태워 보낸 후 세 살배기 막내와 귀가하던 아내를 비탈길에서 굴러 내린 차가 덮쳤습니다. 아내는 심한 골반 골절을 입고 서울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은 뒤, 3개월 이상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역시 부상을 당한 막내를 포함해 어린 세 아이는 서울 친척 집으로 분산 수용되었고, 가족의 삶은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다섯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인 것은 사고로부터 4개월도 더 지난 뒤였습니다.
다행히 세월과 함께 가족의 상처는 아물어갔고, 저는 다른 지방의 국립대학으로 이직해서 이사한 지 1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아내가 근심 어린 얼굴로 넷째의 임신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 소식은 저희에게 참으로 큰 십자가로 다가왔습니다. 사고로 골반이 변형된 상태라 출산에 대한 우려도 심각했지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힘이 들었을 아내는 또다시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잘 받아들이자고 하였습니다. 요즘은 애국자 소리를 듣지만, 당시는 아이가 넷이라면 모두 의아해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네 자녀는 지금 장성하여 각자의 길에서 열심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정책대로라면 세상에 못 나왔을 셋째는 외국인 한국어 교육으로 국위 선양을 하고 있고, 큰 걱정 속에 태어난 막내딸은 사회과학도로서 장차 우리 사회를 위해 큰일을 하려는 포부로 정진 중입니다. 4남매가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에 쏟아지는 주위의 부러움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인 데에 대한 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인생사에서 어떤 일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거나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그저 “네”로 답하며, 순명하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길이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은총의 길이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