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집에 대한 나의 선택
김 상 립
최근에 작가들이 보내오는 수필집을 보면 대략 20%쯤이 수필선집이다. 선집이 그 만큼 늘어난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수필집 발간의 패턴이 바뀐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늘어난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작가들에게 선집을 권유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성싶다. 수필집 몇 권 내고 나면 으레 히 선집을 발간하는 현실은 많은 작가들에게 ‘나도 선집을 내야 되겠구나’ 하는 무언의 압력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내가 80년대 처음 수필에 입문했을 때는 수필선집이란 개념이 없었다. 넓은 의미의 산문에 수필도 포함되어 통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그러던 게 수필이 점차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수필인구도 늘고, 이론서도 계속 발간되어 나오면서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갔던 게다.
초기에 선집이란 개념은 현존작가들보다는 이미 작고한 선배 시인 중에서 유명한 분들을 택하여 후진들이 그를 오래도록 기리자고 시 선집을 발간했던 것이다. 그러던 게 어느새 현존작가들도 선집을 내놓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면서 수필도 선집발행의 흐름을 탄 것이다. 나는 개인 수필집 6권을 발간했지만 아직 선집이 없다. 간혹 선집을 얘기하는 지인을 만나면 적당히 대답하고 만다. 사실은 내게도 선집을 낼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1998년에 3번째 수필집을 상재하였는데, 내가 서울에 살 때 알고 지내던 출판사 2군데에서, 거의 동시에 좋은 조건으로 선집을 발간하자고 제의를 해왔었다. 나는 솔깃하여 ‘며칠 검토해보고 연락 드리겠다’ 하고는 3일 동안 책 3권을 꺼내놓고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작업은 생각과 달리 쉽지 않았다. 원래 내가 책을 낼 때면 원고 50편으로 꾸밀 것을 70편쯤의 원고를 확보해놓고 작업을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버릇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니, 책에 실린 글들은 몇 번씩이나 반복하여 검토하고 나름 미세한 우열까지 가려 게재한 다. 그런 중에 선집때문에 또 작품을 따로 골라낸다는 일이 영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출판사에 거절을 통보했다.
세월은 흘러 2015년에 제5수필집을 발간했는데, 한 달쯤 지나서 부산과 고향에 있는 출판사에서 각각 연락이 왔다. ‘선생께서 다섯 권째 수필집을 발간하셨던 데 아직 선집이 없는 것 같아 연락했다’ 며 ‘원고만 체크해주시면 알아서 좋은 책을 만들어 드리겠다’ 하였다. 나는 행여 싶어 또다시 책 5권을 쌓아놓고 원고를 고르기 시작했다. 책 한 권당 수필 10편씩만 선정하면 된다고 덤볐는데, 내가 아꼈던 작품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데모를 벌이는 것 같아서, 도저히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어 그만두었다.
그때 나는 선집에 대한 나름의 방향을 잡았다. 만일 내가 수필집을 10권까지 낸다면 그 때에 가서 선집을 하나 내겠다는 계획이다. 책 제목은 ‘남평의 수필선집’으로 하고, 책의 소제목은 각 수필집의 제목을 그대로 따와서 책 발간 순서대로 배열하고, 그 밑에 해당 책에서 각 5편씩의 글을 뽑아 싣는다. 다만 글을 고르는 기준은 각 각의 책이 지향했던 방향이나 내용에 제일 잘 부합하는 작품으로 한다. 내가 이런 방법으로 선집을 내려는 이유는 선집이란 원래 새로운 창작집이 아닌 까닭에 기 발표한 것 중에 암만 좋은 작품을 모은다 해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여태껏 발표한 작가의 글을 총 망라하여 그의 수필 세계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편집해 주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집을 일반 독자들이 읽는다 해도 ‘이 작가는 이런 방향의 글들을 써 왔구나’ 하고 보다 쉽게 이해할 것이고, 뒤에 오는 평론가가 혹여 나를 두고 평전이라도 쓸 기회가 생기면 책을 다 읽지 않더라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2021년에 발간한 여섯 번째 책 이후에는 선집요청이 없어서 별 관심 없이 지냈는데, 올 봄 대구 소재 어떤 출판사에서 선집발간을 기획했다며 동참을 희망했다. 나는 건강문제를 앞세워 극구 사양했고, 출판사측은 ‘생각이 바뀌면 연락하라’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었다. 이런 일을 겪으며 느낀 것 중 하나가 어떤 작가가 작품집을 적게 내었든 많이 내었든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실 보통의 10권 수필집이 뛰어난 한 권보다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고, 10권이 있음으로 해서 작가가 더욱 빛날 수도 있을 터이니 무조건 다다익선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책에 대한 평가의 핵심은 누가 어떤 작품을 이 세상에 내어 놓았느냐가 답이 될 것이고, 결국 독자들이 판단할 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 나는 책 발행 숫자에 집착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또 더 이상의 책을 발간 하는 게 나에게도 독자에게도, 펄프의 원료가 되는 나무에게도 별 도움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보태졌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는 책 두 권 분량의 원고가 여분으로 있지만 출판을 머뭇거리고 있다.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현재 내가 힘든 투병 중인 까닭에 수필뿐만이 아니고 삶 전체를 하나 하나 정리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선집 목표치를 채울 수 없게 되면 자연 출간계획은 미완성인 채 남을 게다.
바야흐로 수필선집은 붐을 탄 것 같아 수필집 두 세 권 내놓고 선집을 발간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난다. 하기야 작가가 선집을 꼭 내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능할 것이니 남들이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닐성싶다. 또 좋은 책이라고 출판사에서 공짜로 발간하여 준다면 마다할 이유도 없을 터이다. 나는 다른 작가들의 선집에 대해 별도로 언급 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실행 못하는 작업을 했으니 그만큼 능력이 있다 여기면 될 것이고, 또 반응이 좋은 선집이 보이면 아낌없이 힘찬 박수를 보내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수필선집은 오직 작가 개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 본다. 내가 선집 없는 수필가로서 문필생활을 마감하려는 것도 다 내 선택일 뿐이다. (2024. 6)
첫댓글 세상에 아직 까지도 공짜가 있다고 믿는 분은 그의 영혼이 순수한 게 아니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무지몽매한 자를 경계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경에는 "눈을 뜨면 광명, 눈을 감으면 암흑"이라고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대오각성과 영혼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노력은, 그냥 노력이 아니고 달마조사께서 9년 면벽하듯이 용맹정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껍질이 째지는 아픔이 없이는" 아무 것도 내 것으로 이룰 수가 없는 게 삶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회장님
나는 순수하게 수필선집에
대한 솔직한 나의 생각을
썼을 뿐인데 댓글이 아주 종교적이고 철학적입니다
그려. 나는 우리수필문학이
유행타는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요.
@남평(김상립) 우선 남평 선생님께서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생각이 깊어져 계시고 사상이 무르익어 있으니 지금부터 정말 후인들에게 도움이 될 말씀들을 쏟아내어서 들려 주실 수가 있다고 여기는 때문입니다.
선집에 대한 제 소견은 이렇습니다. 몇 십 년 단편도 아닌 원고지 10매 내외의 수필을 써 놓고 보면, 평생을 일관되게 흘러온 작가의 중심 된 사상의 흐름이란 것이 글의 맥을 타고 드러나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중심 된 사상으로 대변될 수 있는 작품들을 한 권으로 다시 모으면 작가의 정신(문학)세계가 될 것이고 명료하게 드러난 그 선집이
후세인들에게 울림을 주는 의미가 있으니 다시 추려셔 선집을 내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남들이 지게 지고 장에 간다고 해서 나까지 거름지고 장에 가는 것이 싫다는 뜻이겠지요. ^^
@정임표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