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주일 강론(나해)
하느님을 더 가까이 할 수 있다면
인도 빈민가에서 일생을 바친 한 의사의 삶을 그린 영화 ‘시티 오브 조이’(감독 롤랑 조페)의 실제 주인공 프란치스 라보르드(71)신부가 1999년 한국을 찾았다.
서울대교구 사제 피정과 가톨릭사회복지 종사자 피정 지도를 위해 한국을 찾은 라보르드 신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베풀겠다는 것보다 그들의 삶 속에 실제로 동참하고 함께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며 교회 사회복지 활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영화 ‘시티 오브 조이’는 당초 라보르드 신부의 일대기를 그릴 예정이었으나 라보르드 신부가 간곡히 사양해 주인공이 사제가 아닌 의사로 각색됐다. 그러나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대부분 라보르드 신부의 실제 삶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데레사 수녀가 인도의 어머니라면 라보르드 신부는 인도의 아버지. 프랑스 출신으로 51년 사제서품을 받고 65년 인도로 가, 30여년이 넘게 인도 빈민들을 위해 헌신해온 라보르드 신부는 실제로 빈민들과 함께 공장에서 일하는 등 가난한 이들의 삶에 동참해 왔다. 라보르드 신부가 이처럼 평생을 인도 빈민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가난한 이들 속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에 있다.
“가난한 이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신앙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통해 저 자신이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교회의 사회복지 종사자들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표시했다.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은 복음이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에 항상 귀 기울이고 살아갈 때 하느님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스스로 평범한 삶을 살아온 라보르드 신부의 꿈은 소박했다. 그 꿈은 큰 돈을 필요로 하는 근사한 빈민구제 센터나, 대규모 사회복지시설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통해 한사람이라도 더 하느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물질적인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인도인.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인도인. 그는 이미 인도인이 되어 있었다.【우광호 기자】 1999,6,12 평화신문
오늘의 성경 말씀과 연관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다. 제가 부족하지만 잠비아에 와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유 또한 이 부르심과 상관이 있다. 나의 부족한 선교 활동을 통하여 가나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면 필자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오늘 독서의 말씀과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 소명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또 이 소명에 어떻게 응해야 하는가를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다. 우선 요한복음은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세례자 요한이 주선한 그의 두 제자와 예수의 만남이고, 후반부는 안드레아가 주선한 베드로와 예수의 만남에 대한 것이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만남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은 예수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묘사한다. 무한한 사랑의 능력으로써 모든 인간, 모든 시대를 쳐 이기고 자신의 희생과 무죄함을 힘입어 온 세상을 구원하실 ‘고난 받는 종’으로 예수를 표현한다. 요한은 예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중개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라는 요한의 말씀에 요한의 두 제자는 구체적인 계획 없이 오로지 원의와 호기심에 이끌려 예수를 따라간다. 예수께서는 다짜고짜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랍비,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자신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회적으로 답하고 있다. 예수를 더 잘 알고 그분과 친구가 되고, 또한 그분에 대한 체험을 얻기 위해, 그분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자신들의 척도에 예수를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여기서 ‘묵는다.’ 라는 말은 손님이자 친구가 될 사람을 온전히 파악하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를 자기 존재의 ‘생명적’인 요소로 느낄 수 있는 체험을 하게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표현은 선생님 우리도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당신이 누구신지 가르쳐주십시오. 또 당신이라는 인물의 신비를 알게 해주십시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와서 보라"하고 간단히 대답하신다. 내가 누구인지, 또 이미 나와 함께 살아야 될 너희들의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지’를 체험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깊은 지식과 학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곳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의 소개로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예수는 베드로를 눈여겨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케파(바위)라 부르겠다."라고 하시면서 베드로가 젊어지게 될 운명을 예고하신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 모든 이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이에게는 사도로, 설교자로, 교사로, 전도자로 또는 병 고치는 치유자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으로 그 밖의 여러 가지 다양한 사도직의 형태로 주어지고 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이 성전에서 자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이야기다. 사무엘은 주님께서 세 번이나 부르시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다가 엘리가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나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다시 주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하느님의 부르심은 이루어져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하느님이 함께 계셨고, 그가 한 말은 모두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비록 사무엘처럼 생생하게 주님의 음성을 듣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사제가 이마에 물을 붓고 인호를 박아주었을 때 마귀와 세속과 육신을 끊어버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착하게 살기로 결심했고 이 부르심에 응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이 부르심을 저버리는 삶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자신을 투신하는 일이요, 무언가 고귀한 가치에 자기를 쏟아 붓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봉헌한 프란치스 라브르도 신부님의 마음, 그런 마음의 자세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지 않겠는가? 실상 우리의 몸은 오늘 고린토 1서의 말씀처럼 하느님 부르심에 맞갖고 거룩하게 살라고 있는 것이지 우리의 욕정이나 음행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우리의 몸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겸손하고 순결하게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여 언제든지 그분과 형제들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 마음을 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