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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유망하던 민에 대한 대응책이었다는 점에서는 14세기 전반의 정치와는 맥락을 같이 하나, 그 개혁의 근본 방향이 기본적으로 반원정책을 기반으로 하는 내용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왕들과는 다른 측면을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민왕대의 정치를 개혁정치라 한다. 대외적으로 펼친 반원정책과 더불어 대내적으로 실행한 정치에 있어서도 공민왕은 개혁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단행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개혁을 하였다는 것에서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으며, 개혁의 실천과정에 있어서도 비록 측근을 통한 개혁을 펼쳤지만, 공민왕이 주도적이었다는 것은 전제군주로서의 공민왕의 적극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공민왕 즉위 초의 고려정치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며, 그 원인은 원의 영향력과 이에 결탁된 권문세족들에게 있었다. 나라의 위기의식을 공유하며 개혁을 희망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공민왕은 원으로부터의 독립과 왕권의 강화,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개혁을 실시하였다. 비록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개혁의 주도세력의 미비 등의 이유로 인하여 실패하였지만, 이것을 분수령으로 하여 신흥 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의 주체가 되어 더 발전적인 모습의 새로운 국가인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 변화와 개혁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현재의 사회 상황에서 볼 때, 고려후기의 개혁 정치와 국제적 질서의 변동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더욱이 고려 후기의 개혁 정치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사회의 모순과 부패를 진취적이고 자주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길러 발전적이고 안정된 국가사회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기에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공민왕 무렵이 격변기였음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원나라의 통치기를 겪으면서 이미 국가의 기강은 흔들려 있었다. 이 시기 등장했던 신돈이라는 인물은 분명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신돈을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요승, 음란, 포악, 전횡, 참살 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들이다. 물론 단어만을 본다면 부정적 인물이 연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한 행동 중에 옳은 일도 있지만 편견으로 모두 그릇되게 보인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 성리학자들이 고려의 승려들은 타락했다고 주장한 것은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신진 사대부 성리학자들은 기록을 장악했다. 후대 사람들은 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돈의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공민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살펴봐야만 한다. 공민왕은 선대의 왕들처럼 왕권이 미약했다. 겉으로는 고려의 왕이었지만 자신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언제나 불안과 공포가 그를 괴롭혔다. 그것은 고려의 모습이자 진실이 처한 상황이기도 했다. 공포는 불신을 의미한다. 불신이 팽배해 있다면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한다. 그럼에도 공민왕은 자신의 비전을 펼치기 위해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선택된 이가 바로 신돈이었다. 그러나 역시 균열은 내부에서 오는 것일까. 한비자는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면 그는 자신의 현명함을 이용해서 등용한 자를 위협한다고 했다. 공민왕은 신돈의 현명함을 높이 사서 그를 등용했지만 그의 현명함이 곧 자신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돈도 그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마키아벨리는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죽는다고 했다. 새로운 세상을 예언한 신돈은 마키아벨리 말대로 죽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지닌 근본적인 딜레마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돈에게서 얻은 교훈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 사대부에게 조선 개창의 크나큰 가르침이 되었다. 즉, 공민왕이 불안을 잉태하게 된 원인과 신돈의 등장 배경은 조선을 잉태한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신돈이라는 인물에는 고려 말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함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근원적 뿌리도 함축하고 있다. 그를 통해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도기 사회의 전체 모습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의 470여 년 세월이 농축되어 있고 그것을 조선에 이어준 총체적인 활동이 응축되어 있다. 조선의 맹아가 신돈에게 깃들어 있다. 이 때문에 신돈이라는 인물을 보면 고려는 물론 조선 사회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최근 『고려사』를 비롯한 공식적인 기록이나 사회적 편견과는 달리 신돈은 요승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희대의 요승이든 개혁가든, 그는 분명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전면에 나선 6년 동안,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을 하나씩 이뤄나가기 시작했다. 공민왕의 개혁기 중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지지가 신돈을 위시한 개혁세력에게 쏟아졌다. 공민왕은 놀랐을 것이다. 많은 개혁 작업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좌절했고, 성공한다 해도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돈은 죽었다. 그리고 그의 혁신적인 개혁도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그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권문세가나 사원의 경제 세력 혹은 권신이나 무장 세력, 아니면 원나라 군대일까. 신돈을 죽인 것은 바로 그를 신임했던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왜 신돈을 죽였을까. 신돈을 죽인 사람이 공민왕이기 때문에 공민왕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는 것일까. 개혁의 실패도 공민왕의 책임일까. 공민왕은 신돈을 이용해서 개혁을 추진한 것인가. 꿈을 이루어간 방법과 사고의 틀 안에도 처음부터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그가 품었던 꿈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따라서 우리는 신돈이 품었던 꿈과 그것의 실패요인, 당시의 개혁이 신돈 주도의 개혁이었는지, 아니면 공민왕 주도의 개혁이었는지 살펴보고 우리 나름대로의 신돈과 공민왕의 평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고려 후기 사회 배경 그들은 무신집권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하고 무신들과 혼인관계와 친교를 맺어 고려의 정세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세력 확장은 곧 왕권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권문세족뿐 아니라 원과 관계를 맺어 원의 권력을 등에 업은 이들 중 고려나 고려 국왕을 헐뜯고, 고려 왕실을 부정했던 자들인 부원배들 또한 왕권을 흔들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2) 사회적 배경 한편 사전과 사패전과 다른 계통으로도 농장이 발달하였는데 이는 개간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도랑과 수로를 만들어 저습지나 연해의 평평한 토지를 새로 개간하였다. 은퇴한 관인이나 상층 향리, 동정직자 같은 일부 재지 세력자는 개간해서 농지를 늘리고 농장을 만들었다. 이 농장에서는 전호 농민에게서 소출의 2분의 1을 지대로 징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농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권문세족의 부유한 생활에 대한 부담을 모두 져야했을 뿐 아니라 부족한 국가재정에 대한 세금 부담마저 점점 늘어갔다.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졌고 몰락한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대농장소유주들의 노비가 되어 세금의 부담을 없애고 그들에게 보호받고자 했다. 국가의 토지들은 권문세족과 부원배들에 의해 개인의 농장으로 편입되었고 급기야 그들의 농장은 산과 강으로 울타리를 삼게 되었으며 농민들은 송곳을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농장이 발달하면서 토지점유자 사이에 마찰과 갈등이 커 갔으며 농민의 불만과 저항도 높아갔다. 국가 수조지인 공전(公田)이 점점 줄어들었다. 압량위천(壓良爲賤)으로 양인 농민이 농장주에게 부세까지 포탈당하는 사민(私民)이 되면서 부세 부담자인 양인의 수가 줄어들었다. 3) 대외적 배경 한족들의 반란은 끈질기게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힘이 모자라다고 판단한 순제는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며 1354년(공민왕 3년) 9월 고우에서 난을 일으킨 장사성을 토벌하기 위해 지원군으로 파견된 고려의 종정군은 원나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내란의 실정과 원이 쇠퇴해가는 세태를 생생히 공민왕에게 전달하여, 반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공민왕 왕들은 왕자 시절에는 ‘-군’, ‘-대군’등의 이름을 받았으며 공민왕은 ‘강릉대군’의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 세자가 왕으로 즉위하면 나라에 왕은 국가 내에 단 한사람 밖에 없었으므로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며, 왕이 죽은 뒤 시호나 묘호를 받아 불렀다. 왕에게 붙이는 이름인 충숙왕, 충렬왕, 공민왕 등은 ‘묘호’로, 왕이 죽은 후에 붙이는 이름이다. ‘충’이 붙은 왕들은 ‘원나라’로부터 묘호를 받은 왕들이다. 공민왕은 반원 개혁을 일으켜 몽골식 관습을 철폐시키고 원의 내정간섭을 배제하였으며 명나라가 건국된 뒤 친명관계를 이루는 등 원의 구속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적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한 왕이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충’이 들어간 묘호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이와 함께 공민왕은 원의 시호를 받았던 임금들을 다시 추존(追尊)하여 충렬왕은 경효(景孝), 충선왕은 선효(宣孝), 충숙왕은 의효(懿孝), 충목왕은 현효(顯孝)라고 시호를 정하여 올렸다. 이들에게 효라는 글자를 붙인 것은 원에 충성하라는 의미를 가진 ‘충(忠)’을 뒤엎는 뜻도 있고, 공민왕 자신이 그동안 역대 임금들을 받들지 못했으므로 ‘이제부터 효도를 다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2) 즉위 전까지의 공민왕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하여졌으며, 1344년 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하여졌다. 그는 아버지 충숙왕이 즉위할 무렵 원나라에 인질로 끌려갔으며 약 10년을 원에서 머물면서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의 실상을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그동안 공민왕은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들과 일부 인척을 중심으로 측근세력을 중용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충혜왕과 충정왕 두 차례의 왕위 계승 경쟁에서 패배하였지만 원에서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이하고 2년 뒤, 순제가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즉위시키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였다. 3) 즉위 후 공민왕의 개혁노력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이 고려에 미치는 한 자신의 왕위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선대왕들의 예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비록 원나라 공주인 노국공주와 결혼하였지만 어머니가 원나라 공주 출신이 아닌 고려의 여인이었던 점도 쉽게 원나라를 배척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년) 변발·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년)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일파(奇轍一派)를 숙청하였으며, 원나라에게 빼앗겨 무력을 동원해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에 대해 원나라는 사신을 보내어 항의하였을 뿐 직접 개입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1352년(공민왕 1년) 그동안 인사행정에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의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4) 공민왕의 위기와 신돈의 등용 하지만 조일신은 반대세력인 기철 일당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1352년 9월 기해일, 조일신은 자신의 도당들인 정천기, 최화상 등을 자기 집으로 소집하고 반대파인 기철, 기륜. 기원, 고용보 등을 살해할 계획을 세워 그들의 집에 자객을 보냈는데, 기원만 죽이고 나머지는 죽이는 데 실패하자 조일신은 자신의 일당을 데리고 왕이 거처하는 이궁을 포위하고 숙직하던 판밀직사사 최덕림, 상호군 정환 등을 죽였다. 이렇게 하여 공민왕은 졸지에 조일신 패거리에게 협박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일신은 공민왕을 협박하여 국인을 빼앗아 자신을 우정승 자리에 올리고 자신의 도당들을 권력의 중점에 올려놓았으며 살아남은 기철 등을 포고문을 내려 수색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마저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조일신의 도당들이 죽임을 당해 조일신의 입지가 좁아진 틈을 타 이임복과 김첨수를 통해 조일신을 처단한다. 조일신이 사형당한 후 공민왕은 개혁 정책을 가속화하고 친원 세력인 기철은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기철은 원의 쌍성총관부 소속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자신의 딸들을 원나라에 바친 권겸, 노정 등의 친원 세력의 도움을 받아 공민왕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계획은 쌍성총관부의 천호로 있던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1355년에 고려에 내조함에 따라 난관에 부딪힌다. 그리고 기철의 반란계획을 눈치 챈 공민왕이 1356년 3월에 이자춘을 불러 쌍성의 유민들을 동요하지 않도록 부탁한 다음, 5월에 남양후 홍언박으로 하여금 기철, 권겸, 노책 등을 체포하게 하여 처단함으로써 기철 일파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한편 1359년(공민왕 8년)에 이은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은 그 피해가 막대했다. 공민왕은 남부의 안동까지 몽진을 떠나게 되었다. 어렵게 홍건적을 물리친 후의 개경은 궁성이 전소되고 각 도의 문화재 역시 큰 피해를 입은 데다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민왕은 흥왕사의 난까지 입게 된다. 공민왕은 이에 원과 연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꾸준히 추진해온 반원정책을 포기한다. 그 와중에 1364년 고려에 앙심을 품고 최유가 남방 정벌군 10만 명을 고려에서 징발해야한다고 원에 청하였다가 고려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자 기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 왕혜를 고려왕으로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여기에 1만 병력을 거느리고 고려로 쳐들어오다가 최영의 급습으로 대패하고 원에 돌아간 후 고려 정벌론을 주장하다가 원나라 감찰어사 누린의 반대로 오히려 포박되어 고려로 압송된 후 사형되었다. 이후 1365년(공민왕 14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그 외에도 국왕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되고 정권쟁탈 와중에 중요한 측근세력이 모두 제거되어버리는 등 국내외적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정국전환을 위하여 신돈을 사부로 삼고 진평후(眞平侯)로 봉하며,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 판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劈上三韓三重大匡 領都僉議司事 判監察司事 鷲城府院君 提調僧錄司事 兼判書雲館事)의 직위를 주어 등용하였다.
3. 신돈
2) 신돈의 등용, 그리고 신돈과 공민왕의 개혁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원 간섭기 국왕들이 그러했듯이 측근 중심의 정치운영을 계승하고 있었다. 이는 고려의 국왕이 세자시절을 원에서 지내도록 했던 원의 고려에 대한 정책 때문이다. 세자시절을 고려가 아닌 원에서 보낸 고려국왕은 고려국내 정세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고, 결국 원나라에서의 세자시절을 함께한 측근들과 정치를 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탓으로 공민왕은 고려국내에서의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가 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많은 좌절을 겪게 되는 정치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그가 개혁을 시도하려는 동안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잦은 침범, 그리고 대외적으로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는 등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에 도전을 받게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공민왕은 반원노선을 유보해야했으며 그는 사신을 보내어 원나라에 우호적인 자세를 보이고 정동행성도 복구하였다. 한편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무장들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공민왕 자신의 정국주도력을 크게 약화된다. 공민왕 13년에는 흥왕사의 난이라고 하여 공민왕을 암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무장 세력의 입지가 강화되고 공민왕의 측근세력들은 서로간의 암투에 의해 죽게 되면서 공민왕은 정국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주고 일반민의 고통을 분담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찾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 바로 이 때 그의 앞에 신돈이 나타나게 되고 공민왕은 신돈을 생각하게 된다. 공민왕은 신돈을 내세워 그에게 일반 정치에 관한 한 거의 모든 전권을 위임했다. 이와 같은 신돈의 전격적 등용은 국왕권이 약화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색된 것이다. 신돈은 집권하는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부분에서 개혁 작업을 착수하게 된다. 신돈은 정권을 잡은 후 곧 최영을 비롯한 주요 무장 세력을 제거하고 공민왕의 측근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는데 그것은 바로 공민왕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다음에는 세신대족, 초야신진, 유생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대대적인 정국개편 작업을 시도한다. 그가 시행했던 개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의 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잡기 위하여 실시한 전민변정사업이다. 그래서 신돈은 이것을 추진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게 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려후기 농장의 발달로 농민이 몰락하게 되었으며 인한 국가재정의 파탄을 극복하기 위해 빼앗긴 토지를 되돌려주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려 놓아 국가의 공민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것이 전민변정사업의 내용이다. 이러한 개혁은 신돈이 시행하기 이전에도 시도되었으나, 개혁의 대상이었던 권세가들에 의해 실시된 개혁이었기 때문에 개혁은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돈에 의해 주도되었던 개혁은 이러한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이전의 개혁정치와는 달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신돈은 전민변정사업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로서 산관 통제 책과 순자격을 실시하였다. 산관의 통제책은 지방의 은퇴한 전직 관료들이 백성을 침탈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고, 순자격의 실시는 연령, 근무연수와 고과를 통해 순차적으로 관리로 등용하거나 관품을 높여주는 제도를 말한다. 또한 개혁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왕 측근의 몇몇 재추를 선발하여 궁중에서 기무를 참여케 함으로써 도당의 권한을 제약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제도로서 내재추제를 실시한다. 마지막으로 성균관의 중영과 과거제도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연고주의가 해체되고, 신진세력이 대거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공민왕은 왜 아무런 정치적 연고도 없고 기반도 없었던 신돈을 이렇듯 중용하여 개혁을 추진했던 것일까. 공민왕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시의 국내외적인 위기 상황 때문에 스스로 정치적 한계를 느끼게 되어 자신이 일선에 나설 경우에 입게 될 여러가지 불이익과 거센 반발을 충분히 계산하여 비교적 이해관계가 적은 승려 신돈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를 통해 왕권강화와 지배체제의 대대적인 재정비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돈의 등용과 그를 통한 개혁은 공민왕이 의도한 것이었으므로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신돈의 개혁은 공민왕이 신돈을 통해 행한 측근 정치의 한 변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이 개혁은 신돈의 개혁인 동시에 공민왕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돈의 등용과 그의 개혁이 바로 공민왕에 의해 주도되고 추진되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개혁의 실패 원인과 영향 신돈이 제거된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당시 신돈의 개혁은 너무나 급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반대 세력은 권문세족뿐만 아니라 유학자, 신진사대부들도 신돈이 정치를 주관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공민왕이 개혁의 의지를 가진 왕이었다고 하나, 공민왕이 즉위 이후에도 원의 간섭은 여전하였고 그에 따른 부원세력의 세력 역시 건재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을 정점으로 하여 국왕 측근세력과 권문세족에 의해 반원개혁이 추진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국왕 측근세력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개혁을 단행했던 당시의 세력은 국왕 측근세력이 권문세족의 세력을 누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측근세력 내부에도 스스로 와해될 수 있는 소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공민왕 개혁의 정치적 과제가 부원세력의 제거와 원 간섭의 배제라고 할 때, 부원세력에 대해서는 국왕 측근세력의 입장이 대체로 일치 하였으나 원의 간섭을 배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국왕 측근세력은 점차 축소 되어갔고, 그만큼 권문세족의 세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공민왕의 노력으로 개혁은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하였고, 공민왕을 중심으로 정국이 유지 될 수 있었으나 홍건적의 침입과 그들을 물리치는 과정, 또한 왕을 시해하려는 사건 등으로 공민왕의 왕권은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때 큰 활약을 하는 무장세력 혹은 무신들은 기존의 권문세족과 그 출신이나 정치적 성향 면에서 크게 구별되지 않았고, 권문세족 역시 이 당시 급격한 정세 변화 속에서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였다. 즉,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왕의 세력은 축소되어지는 반면, 권문세족은 왕의 세력을 뛰어넘는 당시의 지배층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지배층들이 만들어낸 당시 사회적 문제는 일반 백성들의 토지를 탈점하여 대농장을 소유하였으며, 그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실시되지만 신돈 이전의 개혁들을 보면 그 추진세력들이 바로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인 권문세족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들의 원인을 국왕 측근세력이나 부원세력들에게서 찾았고 정작, 자신들은 개혁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신돈의 전민변정사업은 달랐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였으며 개혁을 실행에 옮길 때에는 당시 사회의 지배계층인 권문세족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즉 당시로서는 기득권층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도 계획을 실행에 옮겨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개혁을 단행하였기 때문에 그의 개혁은 당시 사회구조를 생각해 봤을 때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학자, 신진사대부들이 그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신돈의 출신배경에 한 이유를 들 수 있겠다. 신돈은 승려 출신이었기 때문에 승려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고, 특히 유학자들의 경우에는 왕이 주체가 되어 정치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지만, 정작 그 때에는 한 승려가 왕의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아 개혁정치를 실행해 나가려 했기 때문에 그들은 신돈의 정치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신돈은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하려 하였고 이것이 공민왕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독자적인 세력이란 공민왕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아니라고 본다. 신돈이 등용될 때 그의 상황과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할 때 그의 상황을 보면 둘은 모두 그를 지지해 줄 수 있는 무리들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돈은 그동안의 개혁정치를 하면서 그를 뒷받침해주고 그의 개혁을 추진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세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이에 신돈은 권문세족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신진관료들에게 주목하게 되어 그들과 정치적으로 제휴하여 그들을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층에 반발 할 수 있는 집단으로 성장하게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이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한 것은 권문세족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세력기반도 가지고 있지 않아 공민왕 자신의 개혁의지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개혁이 진행되면서 신돈이 점차 자기 세력을 확대, 강화해 나가는 것으로 보았고 신돈을 견제하게 되는데, 후에 공민왕은 "신돈이 모반을 꾀한다"는 정보를 찾고 그를 빌미로 신돈을 제거하게 된다. 이것으로 신돈은 역모를 도모한 대역 죄인으로 낙인찍혀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그의 목은 개경의 동문에 매달리는 등의 수모를 겪게 된다. 공민왕 자신이 그를 등용시켜 맨 앞에서 개혁정치를 단행하도록 만들었지만 이렇게 신돈을 죽이는 데에는 불과 5일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로는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원, 명 교체에 따른 대륙정세의 변동과 그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 1368년 명이 건국된 뒤 명과의 외교관계가 급진전되었다. 당시 원제국은 내전으로 인해 정국이 더욱 어지럽게 전개되었으며 강남에서는 주원장(명나라 태조)이 중원의 패자로 자리 잡아 갔다. 게다가 원의 대도가 명에 함락되는 등 당시 중국의 정세는 명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공민왕은 중국 내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정세를 탐지하고 안정된 국제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공민왕의 반원 성향과 당시의 중국정세를 놓고 보았을 때 공민왕은 명을 선택하게 되고 친정을 함으로써 명과의 외교관계를 발전시키려 했었을 것이다. 공민왕으로서는 국내적으로 개혁에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었고 왕권도 어느 정도 강화되었기 때문에 신돈이 나서서 자신의 일을 대행하는 것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직접 친정을 해야 만이 명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대리자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1370년, 공민왕은 친정을 선포하였다. 이는 곧 신돈의 실각으로 이어져 다음해에 신돈이 유배되고 그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개혁정치도 중단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이 역사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개혁 중에서 우리는 성균관의 중영이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공민왕은 기존세력 대신 새로운 정치개혁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성균관의 중영을 실시한다. 이것으로 이색, 김구용, 박상충, 정몽주, 박의중, 이승인, 정도전 등 젊은 문신들이 모이는 데, 이들이 신진사대부이다. 신진사대부들은 여말의 전제개혁이나 조선건국을 둘러싼 대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이기에 공민왕대 성균관 중영의 정치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성리학에 깊은 지식을 지닌 인물들로 신유학 학문의 수용과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들의 사상은 후에 조선왕조를 이상사회로 이루기 위한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결국 신진사대부를 다수 등용한 공민왕과 신돈은 그들의 개혁이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조선건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낳은 셈이다. 5. 공민왕과 신돈 개혁과정에서의 의문점과 우리의 견해 먼저 그의 절망감이 노국공주의 죽음에서만 비롯되었던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나라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 때부터 줄곧 연경에서 생활해온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배원 정책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개혁 과정에서 공민왕은 많은 재상들과 뜻이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해세력으로 여겼다. 이는 무엇보다도 개혁세력의 주체가 개혁대상인 권문세족이거나 어느 정도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친원 세력의 정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원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홍건적의 침입이 고려에도 영향을 미쳐 그의 배원 정책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강력한 개혁추진은 성공에 다다를 때쯤이면 여지없이 방해의 그림자가 늘어지곤 하였다. 원나라 복속체제 아래에서 왕권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원나라의 힘에 지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민왕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실시한 개혁의 끝은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공민왕은 자신의 곁에는 유대, 혈연, 지연관계로 얽힌 방해세력밖에 없음을 인식한다. 그 무렵 고려는 최영 등 무장출신들이 원의 간섭과 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움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던 신돈을 등용한다. 다음은 이를 뒷받침하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쓰여 진 기록이다. 공민왕은 대족출신의 세신(世臣)과 초야출신의 신진과 문생 좌주로 패거리를 짓는 유생 등 세 부류는 쓸 만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세상을 떠나 우뚝 홀로 서 있는 사람을 얻어 인습으로 굳어진 폐단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즈음 신돈 스님을 보고 나서 ‘그는 도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출신인데다가 일가친척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마음 내키는 대로하여 눈치를 살피거나 거리낄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왕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자신이 다시 개혁을 실시하는 것 보다 신돈이 하는 것이 혹 실패하더라도 위험부담이 적었다. 자신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의 개혁에서 신돈은 자신에게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기성세력의 철저한 매도에도 불구하고 신돈은 집권한지 석 달 만에 공민왕이 늘 불안하게 느끼던 대신들을 거의 파면 축출하고 좌주 문생의 파벌도 없애버렸으며 무장을 대표하는 최영마저 조정에서 쫓아버렸다. 그리고 그는 새 인물을 등용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을 숲으로 돌아가게 만든 세력들이 공민왕의 앞에서 사라졌다. 왕의 명목으로는 축출할 수 없었던 이들이 한 순간에 휩쓸려나갔다. 신돈을 통하여 기득권 세력을 제거하고, 실패했던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다룬 개혁교서가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이루어지고, 신돈이란 자가 등장하고부터 아무리 애써도 안 되던 것들이 쉽게 이루어졌다. 왕권과 기득권의 싸움에서 벗어난 공민왕은 자신의 뜻대로 힘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공민왕은 주변에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과 국외정세로 인해 잇따라 개혁에 실패하였고 노국공주의 죽음에 설상가상으로 좌절감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 신돈이란 자가 나타나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개혁에 불을 붙이고 거침없이 해나가니 그 절망감은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절망감에 휩싸인 공민왕이 처음에 신돈을 등용한 것도 자신의 정권을 모두 내맡겼다기보다 공민왕은 이해타산으로 인해 정치를 이용하는 자가 아닌 자신의 개혁을 지지해주는 응원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신돈이 행했던 개혁을 살펴보면 공민왕이 행하려 했던 개혁을 그대로 정계를 개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왕권강화를 목표로 한 무장 세력의 축출이며 국왕의 측근 중용, 국가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전민추정사업,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이용한 폐단을 막기 위한 과거제도 개혁이었다. 아이러니한 공민왕의 신돈 제거 역시 공민왕이 정계에 손을 놓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공민왕은 자신을 대신하여 해결해줄 자가, 자신을 지지해주는 자가 필요했던 것이지 자신이외에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원하지 않았다. 1370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보낸 친서에서 알 수 있듯이 공민왕을 고려국왕이라 칭하고 신돈을 상국으로 부를 만큼 신돈의 위세는 왕 못지않게 대단해졌다. 권문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내세운 신돈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자 신돈은 공민왕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2) 과연, 신돈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는가. 신돈은 공민왕에게 긴 51자 직함을 받았는데 대체로 “공신으로서 행정의 총책임을 맡고 관리의 비리를 적발하는 감찰 업무와 스님에 관련된 일과 천문과 기상과 복서를 보는 책임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중요 업무에 대한 많은 권한은 공민왕이 신돈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지지를 대변한다 할 수 있다. 공민왕이 추진하던 개혁을 대신 행하면서 그는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시 수구 세력인 권문세족들의 공적 1호가 되는 극과 극으로 평가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이러한 양극의 평가 속에서도 꿋꿋이 개혁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공민왕의 지지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기득권 세력의 신돈에 대한 반발은 공민왕의 신돈에 대한 믿음으로 오히려 비판 세력들이 제거 당했기 때문이다. 신돈은 집권하기 전부터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받아 집권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공민왕의 보호로 다행히 두 차례의 모반 사건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발을 억누른 것은 아니었다. 신돈으로서는 당연히 이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방안 가운데 하나가 5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의 부활이었다. 신돈은 스스로 5도도사심관이 되어 각 지방을 직접 통제하려고 하였다. 신돈은 이를 통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신돈이 스스로 자기방어의 필요성을 인식해 추진했던 것으로 공민왕에게는 왕권의 위협을 의심하게 되는 계기로 보여 진다. 공민왕은 그리하여 신돈이 제기한 5도도사심관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심관 제도를 파한 충숙왕의 뜻을 내세워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민왕이 이를 거절한 실제 이유는 ‘각 주의 사심관만큼 큰 도둑은 없다’는 그의 사심관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권문세족의 세력화에 불만을 가지고 개혁을 추구해온 공민왕이 신돈의 세력화 역시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공민왕은 조일신․기철․최유․김용 등 친원파 세력과 대립하면서 권문세족 등의 세력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공민왕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신대족․초야신진․유생 등 기존의 정치집단을 불신하고, 세상을 떠나 홀로 서 있는 신돈을 중용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는 신돈의 세력형성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고려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기현․최사원 등이 복심이 되고 이춘부․김란 등이 우익이 되어 신돈의 당파가 조정에 가득 차게 되자 왕도 스스로 불안해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신돈의 당파’라 함은 개혁을 위해 힘을 실은 자일뿐, 한 세력이라 할 수 없었다. 불신으로 인한 공민왕과 신돈의 대립은 그동안 믿음으로 걸어오던 개혁의 성공문의 마지막 종점이 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신돈은 미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고 왕의 후광을 입었기에 주변에는 적들로만 가득 찼다. 이런 요인은 신돈에게 세력형성의 어려움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돈은 5도도사심관 부활로부터 기득권․세력 형성이 아닌, 불안하기만 했던 자신의 위치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릴 적부터 미천한 신분으로 불교계에서도 어느 무리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정계에서는 세력을 등에 입은 사람들을 상대로 개혁을 실시해야만 하였다. 이는 왕의 후광만으로는 신돈 역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할 것임을 인식한 것이 아닐까. 고려시대 사회에서 백성들의 지지는 신돈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공민왕에게 신돈이 큰 힘의 지지자가 되듯이 신돈에게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줄 지지자들이 필요했다. 이는 자신의 의견과 동일하며 힘을 키워낼 세력이 필요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득권을 위한 길이 아닌, 자신과 같이 개혁의 길을 걸어줄 새로운 인재들의 힘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이다. 3) 공민왕 주도의 개혁인가, 신돈 주도의 개혁인가. 그리고 명에 사신을 보내 친명 정책을 뚜렷이 하였다. 또,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 먼저 원의 간섭으로 변형된 관제를 3성 6부의 구관제로 복구하고 권문세족의 관직 독점의 중심기관이었던 정방(政房)을 폐지하였다. 특히, 공민왕은 그 말년에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과감한 개혁론을 내세워 권신들을 축출하고 신진 사대부를 등용하였으며,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양인이 되고자 호소하는 자를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고려후기 개혁정치는 국왕의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국왕은 왕위계승이나 권력개편에 성공한 후 개혁교서를 반포하여 이를 통해 이전 권력층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왕위계승이후 여러 차례의 개혁을 꾸준히 진행 중이던 공민왕이 왕권의 강화를 위해 신돈을 이용했다는 주장이 강하게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미천한 신분으로 인하여 뚜렷한 지지 세력이나 파벌이 없던 신돈을 이용함으로써 공민왕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또 다른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개혁과정에서의 신돈의 역할이 적었던 것이 아니다. 신돈은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각처에 유교문을 붙여 이르기를“근래에 기간이 몽땅 파괴되어 탐오가 떳떳한 관습으로 되어 종묘, 학교, 창고, 시사 등의 공수전과 국내 사람들의 세업 전민은 기의다 호부하고 세력이 있는 집들이 강탈 점령하였다.…이제 도감을 설치하고 그 시정 사업을 담당케 하였으니 서울에서는 15일 이내로, 지방에서는 40일 이내로 자기 잘못을 알고 스스로 시정하는 자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기한이 경과한 후에 일이 발각된 자는 처벌할 것이며 무고한 자는 그 벌을 도루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령(令)이 발표되니 새도 있는 많은 집들이 강점했던 전민을 그 주인에서 반환하였으므로 일국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를 통해 공민왕기 개혁의 주요 내용인 전민변정도감은 신돈이 왕에게 간언하여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공민왕으로부터 일정부분의 권한을 양도받은 신돈은 공민왕을 대신하여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고, 공민왕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개혁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적으로 신돈이 주체가 되어 실행된 개혁은 아니었다. 다만, 공민왕의 커다란 개혁의지를 실행시키는 몇 가지 방안의 하나로써 신돈이 참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4)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중을 위함이었나,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나. 개혁을 실시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것을 효과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과연 어느 쪽이냐 했을 때, 신돈의 개혁은 민중을 위해서라기보다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전민변정도감의 내용을 보면 그 개혁은 일반민을 대상으로 개혁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려사』기록을 보면, “이 명령이 발표되자 권세가들이 많이 빼앗은 땅과 백성들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 신돈이 겉으로는 공평한 척 꾸미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사고자 무릇 천한 사람들이 양인 되기를 호소하면 한결 같이 양인으로 해주었다. 그러자 노비로서 주인을 배신한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성인이 나왔다’고 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토대로 보면, 신돈은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와 강압에 의하여 노비가 된 백성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 권문세족들이 탈점했던 전민(田民)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준 경우가 많아 백성들에게 ‘성인이 나왔다’라는 찬양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그의 개혁이 민중을 위한 개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돈의 다른 개혁들이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이었으며, ‘전민변정도감’정책 역시 그 출발은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농장의 확대와 농민의 몰락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고갈은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 바로 ‘전민변정도감’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도 원래의 신분으로 복구시켜 주기 위해 세워진 정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의 토지문제의 해결은 곧 권세가의 세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왕권이 강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돈의 정치개편을 보면 위의 개혁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산관(散官)의 통제책’, ‘순자격(循資格)’, ‘내재추제(內宰樞制)’를 실시한다. 이 중에서 ‘내재추제’는 당시 힘이 강했던 ‘도당(都堂)’ 때문에 미약했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로써, 왕 측근의 몇몇 사람을 선발하여 궁중에서 기무를 참여케 한 제도이다. 그리고 성균관의 중영과 과거제도의 개혁 역시 신돈의 중요한 개혁인데, 이것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제거만으로는 개혁이 불완전하기에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정치개혁 세력을 육성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신돈의 개혁의 출발이 왕권강화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공민왕이 권문세족을 비롯한 기존의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신돈에게 국정을 맡긴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민중 혹은 왕권강화, 이렇게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혁의 일차적인 목적인 왕권강화를 우선으로 하고 더불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한 것이 신돈의 개혁이라고 생각된다. 5) 공민왕․ 신돈과 권문세족의 대립 구도는 유교를 지향하는 세력과 불교를 지향하는 세력 간의 대결 양상이었나. 여기에서 공민왕은 역대 선왕 및 기자(箕子)에 대한 봉사(奉祀)를 언급하여 그의 자주의식의 일면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정치면에서 왕의 권능을 직접 발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경제면에서는 불법적인 전민탈점(田民奪占)에 대한 시정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얼마 뒤 8월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은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공민왕은 1365년(공민왕 14)에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제2차 개혁운동을 단행했다. 이때의 주요개혁사업은 불법으로 약탈한 권문세가의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환원시켰고, 국역을 기피하면서 향촌사회에서 하층민을 괴롭히는 한량관을 군사조직에 편속시켜 거경숙위(居京宿衛)를 맡게 했으며, 유교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과거시험을 사장 중심에서 경학 중심으로 바꾸어 유학의 성격을 혁신한 것 등이다. 유학을 혁신하여 유교정치를 강화하였지만, 전적으로 유교에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 사원들이 많은 토지를 겸병하여 백성을 궁핍한 처지로 내몰았다 할지라도, 공민왕의 개혁요소에 절대적인 유교의 신봉이 나타났거나 불교를 억압하려는 요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보우를 왕사(王師)로 봉하고 부(府)를 설치하여 원융부(圓融府)라 하고 좌우사(左右司), 윤승(尹承), 사인(舍人), 좌우보마배(左右寶馬陪), 지유(指諭), 행수(行首) 등의 관속을 두었다. 왕이 보우를 영경궁에 맞아 들여 스승과 제자 간의 예로써 서로 대하였는데 그의 호위와 의장이 왕의 출입 때와 비슷하였다. 왕의 생일이라 하여 왕이 보우를 내전에 불러 들였고 중108명에게 음식을 주었다. 그 때 중으로서 절의 주지(住持) 자리를 구하는 자들은 다 보우에게 붙어서 청탁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선교 중문(禪敎宗門)의 절 주지는 스승이 심사 배치하라! 나는 다만 임명서만 내리겠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중들이 앞을 다투어 그 제자로 되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공민왕이 당시의 대승이었던 보우를 스승과 제자의 예로써 대하였고, 그에게 극진하게 대접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불교에 대해 공민왕이 핍박했다면 과연 스님인 보우를 스승의 예로써 대하였을까. 당시의 불교의 사원은 토지를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경우가 많았고, 또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등의 부패가 심각하였다. 하지만,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수준으로 그치고 있고, 불교에 대해 억압을 한 흔적은 볼 수 없었다. “공민왕이 하루는 웬 사람이 칼로 자기를 지르는 것을 어떤 중 하나가 곁에 있다가 구원해 주어서 화를 면한 꿈을 꾸었다. 이튿날 태후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김원명(金元命)이 신돈을 데리고 왕에서 현신했는데 그 모습이 꿈에 본 중과 흡사해서 왕은 크게 이상히 생각하고 데리고 이야기해본즉 대단히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했고, 제 말로 도통(道通)했다고 하면서 고담준론으로 궤변을 토하여 왕의 마음에 꼭 들었다. 공민왕은 본래 불교를 신앙한데다가 또 꿈도 약시한지라 이때부터, 자주 비밀리 내전으로 불러들여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본래 불교를 신앙한데다가’ 라는 구절을 통해 이렇게 공민왕의 평소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공민왕은 불교를 탄압할 목적으로서 유교를 진흥시킨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군신간의 도리와 왕은 하늘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사상을 근거로 한 유교를 진흥시킴으로써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유교를 국가통치 사상으로 받아들여 정치이념을 확립하였으므로, 고려 에는 자연히 유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또한 불교는 국교로서 왕실과 귀족들의 보호를 받아 크게 융성하였다. 전국에 많은 사원이 건축되어 불교미술이 발전하고, 방대한 대장경이 편찬 판각되는 등 불교문화 역시 발전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유교 두 문화가 함께 발전하였다. 또한 고려 말, 유교를 사상적 배경으로 삼는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된 이후에도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수준에 그치고 불교와 유교를 공존을 인정하였다. 공민왕과 신돈, 권문세족의 정치적 대립의 구도를 유교지향세력과 불교지향세력간의 대결로 보는 것은 지나친 의도 확대라 생각된다. 그 당시의 유교는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측면에서 치국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불교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몸을 다스리는 수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유교와 불교는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하면서 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우왕은 정말 신돈의 아들이었을까. 만약 우가 신돈의 자식이라면 신돈을 죽여 버린 공민왕이 그를 후사로 삼을 이유가 있을까? 아들이 없으면 종친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 후사로 삼지 자신이 죽인 타성(他姓) 인물의 아들을 후사로 선택할 까닭은 없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하면서 이전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신돈의 집에서 데려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민왕이 당시 일곱 살이었던 우를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책봉할 때에 어느 누구도 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우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그를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제기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왕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함께 폐위될 때에도 그의 정통성이 부정되지는 않았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은 창왕 1년(1389) 11월에 우왕이 이성계를 죽이고 복위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비로소 제기되었다. 만약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면 그를 폐하고 신돈의 손자인 창왕을 왕위로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1389~1392)을 즉위시키면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勝者)에 의해 쓰여 진다. 『고려사』는 이성계를 창업군주로 하는 조선시대에 그 신료들에 의해 쓰여 졌다. 다시 말해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은 충분히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즉, 조선의 개창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집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Ⅲ. 결 론 신돈은 점차 자신이 성공하지 못하고 반역자가 될 수도 있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자기를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좌절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고조되면 현재의 흐름을 뒤엎고자 한다. 그 하나가 진짜 반란일 수도 있다. 신돈의 반역 모의가 사실이었는지는 논외로 하자. 신돈과 공민왕이 최종적으로 꿈꾸었던 세상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은 갈라서게 되었고, 신돈은 공민왕의 손에 제거된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 시기의 개혁은 공민왕 주도의 개혁이었으며 신돈은 단순히 공민왕의 개혁 추진에 있어 등용되었던 인물임에 분명하다. 신돈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한 공민왕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 공민왕은 그동안 수많은 오해와 논란의 전면에 있었고 고려 말이라는 시기가 겹쳐 치적이 평가절하 됐다. 고려 말 과감한 반원정책을 추진하여 나라의 자주권을 되찾았고, 북벌정책으로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등의 치적 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공민왕이 오늘날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자주적이며 실리주의적 인물 등용과 과감한 개혁의지 때문이라고 본다. 공민왕의 시대는 가히 5, 6년에 한번 꼴로 개혁을 시행하였을 만큼 개혁정치의 시대였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원명교체기의 외부적 상황과 더불어 고려왕조의 내부적 개혁동향, 그리고 바로 이를 수렴할 수 있었던 개혁군주 공민왕 덕택으로 전개될 수가 있었다. 공민왕은 개혁이 실패하고 그 자신이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긴 하였지만 백성들의 여망에 힘입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쟁취하였으며 숱한 내란과 외침을 극복해나가면서도 23년의 재위기간이나 군림할 수 있었고 그의 재위시대는 국왕과 재상과 관료들의 권력균형이 가장 안정을 이루었던 시기, 미래 근세조선의 개혁의 이정표가 되었던 시기로써 평가되었다. 그러한 공민왕 시대를 지탱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공민왕 자신의 정치적 지도력, 더 나아가 왕권강화와 개혁정치를 위한 그의 비정하고도 처절하기까지 했던 정략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돈이라는 인물이 걸출하고 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신돈은 공민왕이 전권을 맡긴 것을 착각을 한 나머지 과도하게 권력욕을 탐내었으며 그 결과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공민왕 그리고 신돈이 추진했던 개혁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건국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이 후원했던 신진사대부들이 고려의 중흥이 아닌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창건한 것이다. 공민왕과 신돈은 결국 뱀을 가슴에 품고 키워준 셈이다. 암탉이 뱀의 알을 품어 부화시키면 알에서 나온 뱀은 암탉을 물어 죽인다. 공민왕은 비록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지만, 그 열망은 조선 왕조를 여는 급진 개혁 세력의 등장을 예고했고, 결국 조선의 전제 개혁으로 그 꿈을 이루었다. 이번 조사를 하면서 신진사대부에 의해서 부정적인 면모가 부각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던 공민왕과 신돈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고, 역사의 어두운 면에 감춰져있던 개혁군주 공민왕에 대해 재조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글을 마친다. □ 참고문헌 구본창, 『패자의 역사』, 도서출판정한PNP,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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