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혁신 정객, 김철과 고정훈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 혁신정객 김철
아주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역사에 의미도 없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때로는 좌절의 인생이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지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만났고 사귀었던, 그런 흔히 간과되기 쉬운 인물 10명쯤에 조명을 비추어 본다. 전기가 아니고 스케치다. 필자
신군부의 쿠데타가 있고 비상대책위에 이어 입법회의가 구성되었다. 그때 김철 씨가 그 입법회의에 참여한 것이다. 김정례 여사가 역할을 했다는 뒷소문이다. 추리해 볼 때, 신군부는 정당 구성을 생각하며 명목상의 것이지만 혁신정당도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경우 김철 씨는 창피하기는 하지만 신군부에 일단 굽혀서라도 혁신정당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한신이 저자바닥에서 무뢰배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중국의 고사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전략전술의 차원에서 생각할 때 채택할 수 있는 편법이라고도 생각한다. 독일에서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당을 탄압했을 때 사회민주당 측은 "일단 법을 준수하라”고 지시하며 유연한 전략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준법투쟁이다. 여담 한 가지. 독일 사민당 전당대회가 어느 작은 도시에서 열렸을 때 일부 대의원들이 늦게 와서 대회가 지연되었다. 알고 보니 그 대의원들이 역에 도착하니 차표를 받는 역무원이 자리를 비워 기다리느라고 그리되었다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의 철저한 준법정신이다. 사민당원까지도.
그런데 예상치 않았던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다. 4·19 후의 공간에서 통사당을 함께 했던 고정훈 씨가 시골에 은거하다가 그때 서울에 나타났다. 고 씨는 5·16 후 군부의 탄압으로 5년쯤 형무소 생활을 했다. 내가 조선일보 정치부차장으로 형무소에 가서 석방된 그를 회사 차에 태워 청량리 쪽의 집까지 데려다 주고 가족을 만난 기억이 새롭다. 물론 기사도 크게 썼다. 석방된 뒤 그 자신 수완도 있고 지난날의 인맥도 넓고 하여 사업에, 저술에 맹활약하였다. 특히 정일권 총리의 덕을 보았다는 소문이다. 인도에서 철강을 수입하는 사업에 손을 댄 것이다. 당시 인도는 소련의 대규모 원조를 받아 훌륭한 철강 산업을 이룩했었다.
그런데 고정훈 씨는 사업을 크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의 호기를 발휘하여 친구들에게 술도 계속 통 크게 사고, 여성 교제도 화려하게 했다. 가히 당대의 호남아며 쾌남아였다.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언변하고, 러시아어로 '카투사의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실력하고, 감히 겨룰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카투사 가련한 모습, 유랑의 슬픔이여” 러시아어 모르는 나는 일본어 번역에서의 중역으로 겨우 그 뜻을 알겠는데 그래도 그 느낌이 애처롭다. 러시아어를 잘하는 일본 외교관과 합창하는 것은 그럴듯했다.
나도 청진동 요정에서 대접을 받은 일이 있다. 선우휘(조선일보 편집국장) 양호민(조선일보 논설위원) 와그너(하버드대 교수) 브래드너(미8군 사령관 정치고문, 박신자 선수 남편) 등이 모였었다. 그러한 호기의 결과는 사업의 파탄, 자기 사업뿐만 아니라 외상을 준 단골 요정마저 거덜을 내고,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 시골의 잘 아는 농장으로 은거하고 말았다. 농장 생활은 오래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정치할 때 요정은 아니었더라도 책에, 그림에, 술에, 선거운동에.... 낭비벽이 있어 폭삭했는데 그의 호기는 더했던 것 같다.
그 호걸 고정훈 씨가 신군부 시대에 나타나 혁신정당을 하겠다고 '입찰'을 한 것이다. 결국, 김철 씨와의 라이벌의 재판이 된 셈인데 결과는 고정훈 씨의 승리로 끝났다. 신군부 측은 그들이 입법회의에 참여시킨 김철 씨를 무시하고 밖에 있던 고정훈 씨를 그들이 이용할 혁신정당의 당수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정훈 씨는 민주사회당(신정사회당 등 당명은 여러 번 바뀐다)을 만들고 서울 강남구에서 11대 선거 때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신군부의 속임수에 의한 것. 한 선거구 2인 당선인데 고 씨가 출마한 강남에서는 그때 야당이 공천을 못하게 하여 고 씨가 여당 후보와 나란히 당선되게 유도하였다.
이미 말했듯이 고 씨는 대단한 어학 실력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한국에도 혁신정당이 있다고, 즉 정당의 자유가 있다고 선전하는 '구실'을 아주 잘 수행하였다. 특히 IPU(국제의원연맹) 등이 그 무대이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도 작용했는데, 김철 씨가 깔아놓은 축적이 있어 정식 회원은 못되었다. 아무튼 신군부로서는 고정훈 씨를 십분 활용한 셈이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을 풀어보았으면 한다. 신군부 측은 왜 어용 혁신정당 창당에 입법회의까지 참여한 김철 씨를 택하지 않고, 입법회의 밖에 있던 고정훈 씨를 선정했느냐는 것이다. 아마 신군부 고위층의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쪽을 취재하지 못했다. 따라서 풍문으로 들은 것과 나의 추리가 있을 뿐이다.
풍문으로 정보에 관계했던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는 그들로서는 김철 씨를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날 SI에 참가하겠다고 여권을 신청하였을 때 해외에 나가서는 심한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여권을 내주면, 참가해서는 당시의 정권을 모질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아마 김철 씨의 소신이고 고집이었을 것이다. 여하간 그래서 또다시 그런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정보기관의 경각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처음에 입법회의에 넣어줄 때와 나중에 관제 혁신정당을 만들게 될 때와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이다. 거기에 아마 외국어 능력도 고려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있다.
나의 추리를 보태자면 이렇다. 고 씨는 평안도 인맥이고, 김 씨는 함경도 인맥이다. 그리고 평안도 인맥이 강하다. 물론 김재준 강원룡 목사 등 함경도 인맥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구체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들면 고 씨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고 역시 같은 평안도 출신에 조선일보 간부로 있던 선우휘 씨와 막역한 사이이다. 그리고 선우 씨는 그 당시 안기부장으로 있던 유학성 장군과 정훈장교 동기생으로 친하다. (유 씨는 정훈병과에서 뒤에 보병 병과로 전과했다.) 유 장군은 신군부가 쿠데타를 모의할 때 가장 고위의 선임 장군이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 하는 것이 나의 추리이다. 단순한 추리일 뿐 증거는 없다.
여기서 같은 혁신계이면서도 항상 경쟁 관계에 있던, 어쩌면 대표적이라 할 라이벌 고정훈·김철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둘의 지연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성장·활동 배경이 아주 다르다. 군의 정보장교 출신과 족청 간부 출신이라는 차이가 우선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접어두고, 아주 오래 전에 내가 둘 관계에 대하여 쓴 칼럼을 소개하겠다.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생애, 고정훈
"5·17 신군부 쿠데타 후, 5·17세력이 국제정치의 필요에 의해 혁신정당을 돌보게 된 가운데서 생긴 고 씨와 김철 씨 간의 반목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다. 민사당의 당수가 되고 11대 국회의원이 되고 IPU(국제의원연맹) 등을 중심으로 화려한 외교도 하게 되었지만 고 씨에 대한 불신은 계속 남게 되었다.
대단한 재사이기에 인간적 신뢰를 얻는 데는 어려웠던 그가 68세로 타계하기까지의 말년 몇 년 동안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진면목을 보였다. 민주사회주의연구회의 이사장으로 두산(斗山) 이동화 선생을 의장, 경심(耕心) 송남헌 선생을 부의장으로 각각 모시고 일해 온 그의 참을성 있는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참 오랜 경쟁자이자 원한이 맺혔을 숙적인 김철 전 사민당수도 고 선생을 병상으로 찾았다. 그리고 많은 민주사회주의자들이 그런 것처럼 기독교 신자로도 충실하였다."
- <정우> 1980년 12월호 '정우칼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79년의 에피소드 두 가지를 소개한다.
박준규 씨는 본인 자신도 자유주의자, 리버럴리스트라고 자처하지만 교육 수준도 높고, 옆에서 보기에도 비교적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서 정치학 강의도 하였기에 혁신진영에 대해서도 이해심이 있는 것 같다. 그 박준규 씨가 1979년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당 의장이 되었을 때다. 그가 나를 부르더니 자기가 당 의장이 되었는데 제1야당의 축하화분은 물론 혁신정당의 축하화분도 있는 게 모양이 좋겠다고 "당신이 김철 씨와 가까운 것 같으니 한번 말해보라"고 나에게 부탁한다.
당시 김철 씨의 정당은 아마 통사당이었을 것이다. 당명이 여러 번 바뀌어 "였을 것이다"는 표현이다. 서울역에서 남영동 사이의 어느 작은 빌딩 2층에 당사가 초라하게 있었다. 거기에 가끔 들리면 선전부장인 안필수 씨가 대개 있었고, 다른 간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사무당원이 두세 명쯤.
김철 씨를 만나 박준규 씨의 뜻을 전하니 거부반응을 먼저 보인다. 독재정권의 '하수정당'의 당 의장 취임에 그가 축하할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김철 씨는 김대중 씨 등과 손잡고 활발한 반독재 반유신 투쟁을 하고 있을 때다. 김철 씨와 김대중 씨는 동지적 유대가 튼튼했던 것 같다. 김철 씨의 아들 김한길 씨가 나중에 김대중 씨 발탁으로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한 데에는 그런 둘 사이의 인간관계가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여하간 그는 찜찜한 태도로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나하고 친하니 모처럼의 부탁을 박절하게 뿌리치기도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절충안 비슷한 것을 내놓았다. 자기는 모른 체할 터이니 내가 내 돈으로 화분을 사서 자기 이름의 띠를 써서 놓으라는 이야기다. 나의 추측은 만약에 그 화분이 야권이나 혁신진영에서 말썽이 나면 자기는 모르는 일이고 내가 임의로 한 일이라고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농담이지만 궁한 처지에 돈도 아끼고….
박준규 씨의 김철 씨에 대한 관심은 매우 각별한 것 같았다. 김철 씨의 정당은 이미 말했던 것처럼 SI의 옵서버였다가 정식회원이 된 상태이다. 79년 SI의 칼슨 사무총장이 방한한 때다. 국제정치사회에 있어서의 거물이다. 비단 진보진영에서 뿐만이 아니다. 명동성당 건너편에 있는 YWCA건물의 바로 앞 건물의 지하 1층 홀에서 그의 방한을 환영하는 큰 행사가 있었다. 나도 관심이 있어 가 보았더니 대부분이 재야인사 일색이다. 거기에 박준규 공화당 의장이 신형식 사무총장을 거느리고 참석하였다. 여러 사람의 축사가 계속되었다. 아마 5-6명쯤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몽땅 재야인사들이다. 그중에 윤반웅 목사는 그 이름이 약간 특이하여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집권당의 당 의장인 박준규 씨 차례가 오지 않는 게 아닌가. 짐작건대 김철 씨에게 넌지시 귀띔했을 것도 같다. 그런데도 여하간 김철 씨는 완전히 박준규 씨를 무시해 버렸다. 철저하다. 고집이 대단하다.
나도 좀 잘못된 게 아닌가 하고 여겼다. SI 사무총장이 왔는데 집권당의 당 대표가 온 것을 소개하면 좋고, 또한 강압 정치 아래지만 그래도 김철 씨 정당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박준규 씨의 체면을 살려주어도 좋을 것이며, 혹시라도 앞으로 박준규 씨에게 부탁할 거(여권 등)도 있지 않겠는가. 큰 체구에 걱실걱실한 성격의 신형식 사무총장은 드러내 놓고 "김철 씨, 너무한 것 아니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게 항의조의 말을 하였다. 김철 씨의 고집, 좋게 말해서 소신, 폄하해서는 고집 통을 말해주는 좋은 일화이다.
앞서 말한 신군부의 선택에도 관련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일단 입법회의에는 설득해 참여시키고는 혁신정당 창당에서는 배제한 그 과정 말이다.
원외 정치세력들의 의미는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아직 이 원외(院外)들이 정치세력으로 혜성처럼 급상승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외국에서는 프랑스의 지난날의 쁘자디스트나, 서독의 오늘날의 녹색당과 같이 청신한 돌풍현상을 일으키는 예도 있다. 아마 우리나라도 비례대표제를 확충하거나 또는 사회 발전이 더 된다 하면 원외들도 주목을 받으리라고 본다.
원외의 중요인물인 전 통사당 당수 김철 씨가 '원내에 못 들어가더라도 나의 노선을 지켜나가겠다. 원외에서 활동하는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라고 심경을 토로하는 것을 듣고 머릿속에 오래 결리는 것이 있었다."
- <정우> 1984년 4월호 '정우 칼럼'
그가 외로운 혁신정당 활동을 할 때 나는 그를 생각하는 위와 같은 글을 썼었다. 한국에서는 잘 알아주지 않는 그의 활동에도 외국에서의 격려는 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에서의 음양으로의 지원 같은 것이다. 독일에서는 국가가 각 정당에 예산을 주어 국민을 정치교육 하도록 하고 있다. 나치즘의 여독을 해독하려는 민주시민교육을 위해서다. 그 돈으로 기민당은 아데나워재단, 사민당은 에버트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데 한국에는 초기에 에버트재단의 홀체라는 대표가 와서 아주 오래 체류했었다. 나도 그와 친해 술도 가끔 하였으며 그 후원으로 일본에서의 세미나에 권두영 교수와 참석했었다. 에버트재단에서 김철 씨의 정당을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홀체 대표는 한국 다음으로 아프리카로 갔다.
1994년 김철 씨가 68세로 별세하였을 때의 이야기는 내가 김정례 여사에 관해서 글을 쓰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빈소는 여의도 성모병원에 차려졌다. 문상을 가니 발인 때 추도사를 해달라는 부탁이다. 응당 수락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 무렵 현직 노동부 장관이 죽산 조봉암 씨의 기일에 망우리의 묘소에서 있는 추도식에 참석했다 해서 말쟁이들이 약간 말을 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런데 근무시간에 다시 김철 씨 영결식에 가서 추도사를 한다면 또다시 말썽을 일으키려 할지 모를 일이다. 김영삼 정권은 비록 민주화 후라 하더라도 보수정권이 아닌가. 그래서 미안한 일이지만 사양한 것이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 아들인 김한길 씨가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할 때다. 태평로의 프레스센터에서 당산(堂山) 전집 출판기념 겸 김철 씨 업적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다. 당산은 김철 씨의 아호. 김한길 씨와 부인인 탤런트 최명길 씨가 나서서 손님을 맞는 등 행사는 매우 화려했다. 고생 고생 평생을 마친 김철 씨로서는 사후에 크게 호강을 한 셈이다.
그런데 기념세미나에서 비끄러져 나갔다. 발표자의 한 사람인 경상대의 장상환 교수가 발표에서 김철 씨의 업적을 아주 객관적으로 엄격하고 냉혹하게 평가해 버린 것이다. 추모행사는 고인을 좋게좋게 평가하는 마당인데, 그리고 그러는 것이 관례인데…. 주최 측이 인선에서 그런 점을 고려 않은 것 같았다. 장 교수는 학자의 입장에서 엄격하게 학술세미나처럼 발표한 것이다. 장 교수는 진보적인 학자로 이름이 나 있다. 민주노동당의 정책위원장을 맡은 적도 있고, 처남들이 유명한 진보학자였던 김진균 교수와 그리고 역시 진보파인 김세균 교수다.
장 교수의 평가를 요약하면 이렇다. 1) 부산정치파동 때 족청의 간부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2) 혁신정당운동을 계속 했다고 하지만 간판만 유지한 게 아닌가. 그것도 의미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다. 3) 신군부 쿠데타 후 입법회의에 참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 다만 박정희 정권의 유신 후 김대중 씨 등 재야와 손을 잡고 반유신투쟁을 적극적으로 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좀 가혹한가. 거듭 말하지만 장 교수는 객관적이었고, 주최 측이 일종의 축하행사에 인선을 잘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나는 장 교수의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뜻은 없다. 다만 장 교수는 김철 씨를 직접 알지 못했고, 기록에 의지하여 평가한 것이라면, 김철 씨와 30여 년에 걸쳐 가끔 만나고 지냈던 나의 평가는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미 묘사한 바와 같이 김철 씨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권투선수였을 정도로 의지도 강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족청을 한 것을 반드시 나무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중국에서 광복군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이범석 장군이 해방 후 조직한 족청이 아닌가. 나라 만들기에 기여한 그 나름의 공을 인정해야 할 줄 안다. 물론 '민족지상 ․ 국가지상'이란 장개석 중국 국민당 총통에 영향 받은 후진국 파시즘의 냄새는 강하게 났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의 중학 시절에 보고 들은 견문으로는, 족청이 그래도 첨예한 좌우익의 대립에서 얼마간의 완충역할은 하였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부산정치파동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혁신정당의 간판만 걸고 내실이 없었다는 것은 맞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엄혹한 정치상황을 고려할 줄 안다. 나와 서울대 동기로 가까이 지내던 서울상대의 임종철 교수가 한때 김철 씨 사회민주당의 정책위원장으로 일했었다고 소개했다. 아마 임 교수의 눈으로도 그때는 그 정도의 정치활동밖에 못하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장상환 교수가 선배인 임종철 교수의 위치에 있었다고 가정해 본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한번 상상을 해보았으면 한다.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되고, 진보정당이 그래도 몇 석이나마 국회의석을 차지하게 된 요즘이다. 그 이전은 말하자면 전사(前史)시대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전사시대에 외롭게 고생스러운 일생을 투쟁하며 살다 간 김철 씨를 새삼 떠올리며 추모한다. 그는 그래도 혁신정치운동에 생을 바친 외로운 투사다. 고인에게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