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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31) 페루의 숨겨진 아픔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칼 란트슈타이너는 서로 다른 환자들의 혈액을 섞었을 때 일어나는 응집반응을 통해 사람의 혈액을 A형·B형·C형(현재는 O형) 세 가지로 구분했다. 그 후 1902년 AB형이 추가되면서 지금의 ABO식 혈액형 분류법이 완성되었다. 혈액형을 판정하는 방법은 적혈구 표면의 응집원과 혈액의 액체 성분(혈장) 속의 응집소가 결합해 적혈구가 엉겨붙는 응집반응을 이용한다. 과거 17세기 의사들은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려고 시도했으나,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인간의 혈액이 한 종류가 아니라는 것과, 동물과 인간의 혈액은 다르다는 의학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ABO식 혈액형 판정법 발견으로 같은 혈액형끼리 수혈이 가능해지면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때 많은 군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으며 란트슈타이너는 이러한 공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혈액형을 판정하는 방법은 ABO식 혈액형뿐 아니라 Rh식 혈액형, MN식 혈액형 등 무려 31가지 방법이 있다. 혈액형은 국가별·인종별 차이를 보이는데 우리나라 국민의 경우 A형(34%)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은 O형(28%)·B형(27%)·AB형(11%) 순이다.
중국은 전 국민의 48%가 O형이며 미국의 경우 백인의 45%, 흑인의 49%가 O형이고 프랑스와 러시아는 A형이 가장 많다. 특이한 것은 페루 원주민인 인디오들의 혈액형은 거의 100% O형이라는 점이다. 마야인의 O형 비율도 98%나 된다. 이는 유전적 요인과 그들이 겪은 가슴 아픈 역사적 배경의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5세기 무렵 아메리카에는 당시 세계 인구의 10%나 되는 60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유럽 정복자들의 잔혹한 식민통치로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500~600만 명으로 감소하는데 페루나 마야의 경우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퍼진 전염병이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된다. 천연두나 홍역 같은 유럽의 질병에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이 속수무책으로 감염되어 치명적 피해를 본 것이다.
특이한 점은 O형은 다른 혈액형에 비해 면역력이 다소 우세하여 이들 질병에서 생존율이 높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페루와 마야 원주민들의 혈액형이 O형 한 가지인 이유가 나름 설명되는 부분이다. 페루 원주민들은 긴 식민지배의 결과 아직도 가난과 저개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출신으로 페루 시민권자인 레오 14세 교황은 그곳 빈민가에서 20년간이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사회 정의와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교황은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이란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이 부족한 상태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참 신앙인의 자세다. 또 가난은 다른 의미로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서 물욕(物慾)을 비우고 검소한 삶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사도로 활동한 레오 14세 교황을 떠올려보며 그리스도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과학과 신앙] (32) 그 많던 달팽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고등학생 시절 비가 오는 날의 학교 건물 앞 넓은 화단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달팽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달팽이들은 짓궂은 남학생들에게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장난감 신세가 되었다. 교실 칠판에 달팽이 여러 마리를 붙여놓고 어떤 달팽이가 제일 먼저 높이 기어오르는지 내기를 하곤 했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한참 동안 달팽이를 제대로 볼 기회도 여유도 없었는데, 얼마 전 비가 내리던 날 집 주변 화단에서 너무나 오랜만에 달팽이를 보았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씩이나! 너무 반가워서 우산을 쓰고 한참 동안 달팽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날따라 달팽이의 나선형 껍질은 음악 악보의 높은음자리표처럼 보였다. 하늘에서 직선으로 곧게 내려오는 빗줄기는 투명한 공간에 그려진 오선 악보였으며, 빗방울들은 오선 위의 음표가 되고 빗소리는 그대로 음악이 되었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화음과 풍경에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을 때 문득 고등학생 때 보았던 달팽이들이 생각났다. 느리지만 꾸준히 제 갈 길을 가던 달팽이들. 그 많던 달팽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달팽이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로 배가 발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복족류(腹足類)다. 모든 생물은 자극에 반응한다. 동물은 자극을 받아들여 이에 적합한 반응이 나타나게 하는 신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신경계는 이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를 기본으로 한다. 신경세포에는 자극이 이동하는 축삭돌기가 말이집(신경 세포의 신경 돌기를 말아 싸고 있는 덮개)이라는 지질 성분으로 둘러싸인 말이집 신경(유수신경)과 말이집이 없는 민말이집 신경(무수신경)이 있다.
말이집 신경은 축삭돌기에서 도약전도라는 방식으로 자극을 이동시켜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 사람의 경우 말이집 신경을 통한 자극 전달 속도가 1초에 100m 정도이지만 달팽이의 신경은 신호 전달 속도가 매우 느린 민말이집 신경이라 1초에 1m 정도밖에 안 된다. 그만큼 외부 자극에 느리게 반응하고 움직인다.
느리지만 꾸준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달팽이를 바라보며 그동안 나는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져 급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패스트푸드, 총알 택시, 빠른 인터넷 속도, 신속한 음식배달 시스템, 저녁에 주문하면 다음날 새벽 도착을 보장하는 택배 서비스 등 우리 주변에는 ‘빨리빨리’를 최고로 인정하는 인식이 깔린 듯하다.
그러나 빠른 발걸음이든 느린 발걸음이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달팽이가 껍질을 등에 지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보며, 사람도 누구나 자신만의 소명을 달팽이 껍질처럼 또는 십자가처럼 등에 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 소명은 개인에 따라 달라서 어떤 이에게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버텨야 하는 무거운 껍질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자발적인 책임과 희생·헌신을 바탕으로 기꺼이 짊어진 십자가일 수도 있다.
달팽이의 껍질과 몸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내게 주어진 개인적 소명의 껍질을 등에 진 십자가로 여기고 기쁜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과학과 신앙] (33) 우주를 가로질러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계란 프라이 모양의 개망초꽃이 벌써 한 해의 절반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자연의 시간은 어느덧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고 있다. 퇴근길에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나를 우주로 이끈다.
2008년 2월 4일 NASA(미국항공우주국)의 제트 추진 연구소는 팝 그룹 비틀스의 노래 ‘Across the universe’를 지구에서 431광년 거리에 있는 북극성을 향해 보냈다. 이날은 NASA 설립 50주년 기념일인 동시에 비틀스가 이 곡을 녹음한 지 40주년 되는 날이기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는 세 곳의 국제 우주탐사 안테나를 통해 빛의 속도와 가까운 초당 29만 7600㎞라는 엄청난 속도로 전파를 타고 우주로 날아갔다. 비틀스의 노래가 지구를 출발한 지 올해로 17년이 되었으니 약 414년 후에는 노래 제목처럼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 북극성에 도착할 것이다.
해가 진 저녁 퇴근길에 길을 가다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세15,5)라는 성경 구절처럼 저 넓고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에 얼마나 많은 별이 있을지 생각해본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는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비틀스의 노래 제목처럼 우주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가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지구 자전과 함께 하루 한 바퀴 서쪽에서 동쪽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지구 자전 속도는 초속 460m로 1초에 축구장 4개를 가로지르는 빠르기다. 또 지구는 자전하며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따라 1년에 1회 공전하는데 그 속도는 초속 29.8㎞로 대략 서울에서 인천까지 1초 만에 가는 빠르기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 역시 초속 230㎞로 우리 은하 중심을 공전한다. 이는 서울에서 대구까지 1초 만에 가는 속력이다.
우리 은하도 안드로메다 은하를 포함한 약 1300개의 은하로 구성된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중심을 향해 초속 600㎞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글을 읽기 시작한 지 약 1분 30초가 지났으므로 그동안 우주 공간을 5만 4000㎞ 가로질러 이동한 셈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우주의 무한한 시공간을 가로질러 인간은 아주 짧고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잠시 살다 간다.
우주의 시간을 알려주는 초여름의 전령 개망초꽃을 보며 ‘나는 한 해의 절반이 지나는 동안 내가 사는 세상을, 그 속의 작은 우주인 생명체들을 얼마나 돌아보았는가?’ 생각해본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100년, 그 시간은 지구가 태양을 백번밖에 공전하지 못하는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어린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고 꽃은 피고 지며 자연의 모습은 섭리에 따라 순환한다.
시인 김지하(프란치스코)는 그의 시 ‘축복’에서 “우주는 신의 몸 / 네 죄는 삼라만상을 사랑하지 않는 죄 / 사랑을 넘어 차라리 이젠 미물조차 공경하므로 / 용서받으라 또한 축복을!”이라며 자연과 세상 속에 깃든 생명의 의미를 갈구했다. 나의 삶도 우주를 가로지르는 동안 영원의 가치를 갈구하기를 소망해본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과학과 신앙] (34) 그들은 진정으로 ‘일어서는 사자’일까?
1986년 방영된 TV 영화 ‘기드온의 검(sword of Gideon)’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구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액션과 스릴이 가미된 첩보 영화이지만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 속에 결국 폭력의 끝은 어디이고 진정한 평화와 용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수작이었다. 이 영화는 같은 사건을 다룬 유다인 출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2005년)’에 영향을 주었다.
이스라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4-25)는 구약성경 구절을 너무나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은 2023년 가자지구에서 하마스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래 지금도 가자 지구를 초토화시키고 있으며, 이번 6월 13일 새벽에는 이란의 핵 연구 시설과 과학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란을 공습했다. 이에 따른 민간인 피해도 많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며 이란 역시 미사일 공격으로 맞대응하며 중동 지역에 전쟁 확산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이란에 대한 공습 작전명을 ‘일어서는 사자(rising lion)’라 부르며 자신들의 군사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열변했다. ‘일어서는 사자’의 본래 의미는 ‘사자처럼 용맹한 민족’이란 뜻으로 이는 이스라엘이 사자처럼 강하고 용맹한 민족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의 일련의 행동들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려되는 점들이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생태학은 생물학의 중요한 분야로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인간도 결국 생태계를 이루는 수많은 생물 군집 중 하나이며 동물 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원리들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인구팽창과 그에 따른 식량·자원 부족, 주거 공간 부족, 환경오염, 자연파괴 등 인류가 당면한 많은 사회적·지정학적 문제들은 결국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그 원인과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생태계에서 어떤 생물이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먹이 지위, 그 생물의 서식 공간이 차지하는 지위는 공간 지위라 하며 이 둘을 합쳐 생태적 지위라고 한다. 만약 서로 다른 두 생물 사이에 생태적 지위가 겹치게 되면 한정된 먹이와 생활공간을 두고 치열한 다툼인 경쟁이 일어난다.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생물 종의 싸움이 치열해지면 한 종이 다른 종을 전멸시켜버리는 경쟁·배타의 원리가 작용하는데 이는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냉혹한 현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성이 있으며 관용과 용서, 박애의 마음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눈에는 눈을 고집한다면 모든 세상의 눈이 멀게 된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라고 역설했다.
6·25 발발 75주년을 맞는 6월 25일 「남북통일 기원 미사」 제2독서 말씀이 오늘따라 더 무게 있게 들려온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1-32)
[과학과 신앙] (35) 당신의 향기
올해도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몰라 늘 우산을 챙겨야 하는 장마철이 왔다. 잔뜩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눈으로 비를 보고, 귀로 빗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가끔은 눈과 귀가 아닌 코에 들어오는 냄새로 비를 느낀다. 풀냄새 같기도 하고 흙냄새 같기도 한 그것은 바로 비 냄새다. 비가 내릴 때 나는 이 냄새는 빗물 자체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다. 흙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기름 성분이 빗방울과 함께 에어로졸(공기 중에 떠 있는 작은 물방울) 형태로 공기 중에 퍼지는데, 여기에는 토양 속 세균이 만들어낸 화학물질이 들어있어 흙냄새와 비슷한 특유의 비 냄새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비 냄새를 과학자들은 페트리코(petrichor)라 부른다.
사람은 비를 눈(시각)·귀(청각)·코(후각) 등 여러 감각 기관으로 느낄 수 있음에도 과거에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천대받았다. 플라톤은 눈과 귀로 이데아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후각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으며 감각을 중시했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사람에게서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못하다고 했다. 임마누엘 칸트도 후각을 ‘가장 천박하고 없어도 되는 감각’이라 여길 정도로 후각은 과소평가되어왔다.
1991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리처드 액설과 린다 벅은 1000여 개의 유전자로 구성된 후각 관련 유전자군을 발견했는데, 이를 통해 인간의 후각 인지 메커니즘이 밝혀지게 되었고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난해했던 후각에 대한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또 신경의학과 뇌과학 분야의 과학자들은 후각이 다른 감각과 다르게 자극 정보를 분석적으로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후각 정보는 대뇌의 변연계로 보내지는데 변연계는 후각뿐만 아니라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을 포함한다. 따라서 특정 냄새가 어떤 사람이나 사건과 연결되어 있으면 그 냄새를 다시 맡게 되었을 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감정이 되살아난다. 말하자면 후각은 기억의 열쇠인 셈이다. 이러한 현상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하는데,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을 맡으며 과거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서 유래했다.
향기는 꽃이나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나온다. 코의 후각 세포를 통해 뇌를 자극하는 화학물질로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언행과 표정, 인품으로 우리 마음에 기억되는 삶의 향기다. 나에게는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그러한 향기로 기억되는 분들이다. 그들이 세상에 남기고 간 깊고 울림이 있는 향기는 나에게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다. 나도 그분들처럼 향기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과연 지금 나의 향기는, 당신의 향기는 무엇인가? 자기중심적 세계관과 세속적 탐욕,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언행·위선적 모습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악취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생각만 해도 미소가 나오고 그리워지는 인간미 넘치는 향기를 내고 있는가? 나는 타인에게 어떤 향기로 기억될지 이제 스스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과학과 신앙] (36) 착한 사마리아인 법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사람의 심장은 ‘정신의 자리’로 여겨졌다. 따라서 죽은 이를 미라로 만들 때 대부분의 내장 기관은 제거했지만, 심장은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로 여겨졌기에 방부 처리한 후 제자리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장을 ‘지식의 자리’라며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여겼다. 하지만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지능과 감정을 담당하는 것은 심장이 아니라 뇌라고 주장했으며 로마 시대의 의학자 갈레노스 역시 뇌가 사람의 생각과 정서·기억을 조절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뇌와 심장은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진 신체 기관이며 뇌와 심장에 이상이 있을 경우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뇌는 사람이 하루에 소비하는 전체 에너지양의 20%와 전체 산소량의 30%를 소비하는데, 뇌에 에너지와 산소를 공급해주는 펌프 역할을 하는 것이 심장이다. 사람의 심장은 보통 자기 주먹만 한 크기로 질량은 250~350g 정도이며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심장이 정지해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 4~5분 후에 뇌세포 손상이 시작되고 의식 소실 및 사망으로 이어진다. 심정지로 쓰러진 사람에게 즉각적인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해야 하는 이유다.
2022년 5월 서울 구로구에서 중국 국적의 한 40대 남성이 길을 가던 60대 노인을 이유 없이 무차별 폭행해 쓰러뜨리고 사망하게 한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경찰 조사 결과 놀랍게도 길 가던 50여 명의 행인이 쓰러진 노인을 본채 만채 지나친 것이 주변 CCTV에서 확인되어 더욱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때 누군가 빠르게 심폐소생술만 실시했어도 귀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 현장에 착한 사마리아인은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독일·벨기에·핀란드·이스라엘·호주·캐나다의 일부 주에서는 ‘자신 또는 제3자의 위험을 초래하지 않고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구조할 수 있음에도, 고의로 구조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구금 및 벌금에 처한다’고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번 주일 미사 복음에서는 강도를 당해 쓰러진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루카 10,30-37)가 나오는데 이 말씀에서 따온 법을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법이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응급의료 종사자가 아닌 사람이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응급의료 또는 응급처치를 제공하여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死傷)에 대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傷害)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하며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은 감면한다’는 면책 조항 정도만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에서 명시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항을 법률로 강제하거나 처벌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기적 유전자뿐 아니라 성선설이나 성악설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됨의 고결한 유전자가 분명히 있다. 자신의 이해득실을 떠나 참 신앙인이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할 상황에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는 말씀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과학과 신앙] (37) 농업 혁명을 생각하다
2016년 1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의장을 맡은 독일의 경제학자 클라우스 슈밥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언급했다. 드론·사물인터넷·인공지능·3D 프린팅·가상현실·빅데이터·자율주행 자동차·블록체인·양자 기술 등 놀랍도록 진보한 이 시대의 과학기술은 현대 문명의 커다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문명이 혁명적으로 전환된 시기는 여러 번 있었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이를 세 가지 물결로 표현했다. 첫 번째 물결은 빙하기가 끝난 약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농업혁명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200만 년 넘게 사냥과 채집으로 떠돌아다니던 인류는 정착생활을 하며 곡식과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물질적·기술적 측면인 문명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정신적·사회적 측면인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인류의 야생성은 사라졌다. 농업을 의미하는 agriculture라는 단어 속에 문화를 의미하는 단어인 culture가 들어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물결은 18세기에 영국에서 시작하여 유럽으로 확대된 산업혁명이며 이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세 번째 물결은 20세기 후기 산업화 사회에서의 정보혁명(디지털 혁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변화 중에서 인류에게 가장 의미가 큰 것은 농업혁명일 것이다. 인류사에 등장하는 초기 문명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농업은 인간이 먹고사는 원초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가장 기초 수단이기에 농업혁명이 없었다면 뒤이은 문명의 진보도 없었을 것이다.농업이란 인간에게 식량이 될 수 있는 자연 상태의 식물과 동물 그리고 토지와 물 등의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생물이 지닌 에너지를 인간에게 유용한 상태로 전환시키고 모으는 과정이다. 곡식들은 탄수화물 같은 유기물을 생산하여 태양의 빛에너지를 인간에게 유용한 화학에너지로 전환시켜준다. 이러한 과정은 식물의 엽록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인 광합성에 의해 일어나는데 놀랍게도 식물이 포도당 1분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공기 중에 0.03%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산화탄소 분자 6개와 뿌리에서 흡수하는 물 분자 12개가 전부다. 여기에 태양의 빛에너지가 가해지면 엽록체 내부의 여러 효소에 의해 탄수화물인 포도당이 합성된다. 단순해 보이는 이 광합성 작용은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근본이다.
그러나 아직 첨단 과학기술로도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빛에너지를 전환시키는 식물의 놀라운 능력인 광합성이다. 단지 인간은 식물을 통해 빛에너지를 수확할 따름이며 그 일의 최전선에 농민들이 있다. 21세기에도 농업혁명은 진행 중인 것이다.
이번 7월 셋째 주일은 한국 교회가 제정한 ‘농민 주일’이다. 지금 농촌 상황은 농촌 인구 감소 및 고령화, 농업 개방화에 따른 농가 소득 불안정, 기후 변화 등으로 날로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때 이른 폭염에도 묵묵히 땅을 일구고 수확하는 우리 농민들을 위해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할 이유다. “땅이 있는 한 씨 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창세 8,22)
[과학과 신앙] (38) 토끼와 거북이
1145년 고려 인종 때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보장왕의 신하 선도해가 신라의 김춘추에게 들려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있다. 동해 바다 용왕의 딸이 병에 걸리자 치료 약으로 쓸 토끼의 간을 구하러 육지로 올라간 거북이가 토끼를 꾀어 데려가지만, 토끼가 재치있게 그 상황을 모면한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조선 후기에 판소리인 ‘수궁가’와 고전 소설 「토끼전」으로 개작된 이 이야기에서 토끼의 지혜는 거북이를 이겼다. B.C. 6세기경 그리스의 이솝이 지은 우화에는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느리지만 부지런히 기어간 거북이의 노력이 토끼를 이겼다. 이처럼 토끼와 거북이는 옛날부터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현실에서 두 동물의 특징을 비교하면 어떠할까?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은 수명이다. 야생 토끼의 수명은 평균 2~3년으로 짧다. 거북이의 수명은 일반적으로 100년 안팎으로 알려져 있으며 육지 거북이의 일부는 200년까지도 산다. 그래서 거북이는 인간에게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토끼는 생태계 먹이 사슬 하위 단계에 있는 초식동물이라 늘 포식자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사회생활을 하는 습성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스트레스는 코티솔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고 면역 시스템의 약화를 가져와 각종 질병에 취약해져 수명을 짧게 한다. 반면 단독 생활을 하는 거북이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며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강해 질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세포 노화를 결정하는 염색체 말단인 텔로미어를 재생하는 능력이 있어 세포 노화가 더디다.
또 포유류인 토끼는 체온이 일정한 정온동물이라 체온 유지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며 그만큼 먹이를 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하지만 파충류인 거북이는 주변 온도에 따라 체온이 변하는 변온동물이라 토끼처럼 체온유지에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없으므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다른 동물보다 신체 대사 속도가 5배 정도 느려 적은 양의 먹이로도 생존이 가능하다.
사람도 거북이처럼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적게 먹으며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더 건강하고 즐겁고 오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늙어감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어떻게 늙어 가는지는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거북이의 지혜, 느림의 미학을 선택하면 어떨까?
7월 넷째 주일은 교회가 정한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노인이 되고 조부모가 된다. 2024년 12월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1024만 4550명으로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가 되었다. 오랜 시간 흐르는 물이 바위와 흙을 깎아 깊은 계곡을 만들며 시간의 역사를 새겨넣듯이 자식들과 젊은 세대의 미래를 위해 노년 세대가 흘린 땀과 희생은 그들의 손과 얼굴에 계곡 같은 주름을 만들었다.
그렇게 노년의 부모·조부모의 손과 얼굴에는 인고의 세월을 지나온 역사가 담겨있다. 우리가 그분들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다. ‘너희는 백발이 성성한 어른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을 존경해야 한다.’(레위 19,32)
[과학과 신앙] (39) 탐욕의 우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atom)란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로 핵과 전자로 구성된 물리적 입자 개념이다. 물질을 이루는 기본 성분을 언급할 때는 원소(element)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원소는 물질의 종류를 나타내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2015년 IUPAC(국제 순수·응용 화학 연합)가 공식 인정한 원소의 종류는 118가지인데 주기율표에서 원자번호 21번 스칸듐(Sc), 39번 이트륨(Y) 그리고 57번 란타넘(La)부터 71번 루테튬(Lu)까지 총 17종의 원소들을 ‘희토류(희귀한 흙이라는 뜻)’라 한다.
희토류의 매장량 자체는 희귀하지는 않지만 순수한 홑원소 형태로 추출하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어 희토류라 부르며 공정 과정에서 환경오염을 유발한다. 희토류는 배터리, 디스플레이의 재료, 영구자석, 레이저, 첨단 무기 등에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전체 희토류 매장량 대부분은 중국에 있으며 중국은 미·중 무역 전쟁에서 희토류 자원 무기화를 통해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하고 있다. 지난 4월 30일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광물 협정을 체결해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희토류에 대한 이권을 인정받는 대신 군사적 원조를 약속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희토류다. 희토류는 구하기 어렵고 가치가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이른바 명품 대접을 받고 있다. 이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할 경우 가격이 상승한다는 경제학 원리인 ‘희소성의 원칙’을 잘 보여준다.
희소성의 원칙은 흔히 명품이라 불리는 물건에서 확인된다. 이탈리아의 슈퍼카 브랜드 페라리는 일부러 수요보다 적게 만들어 브랜드 프리미엄을 유지하며, 프랑스의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는 직영 매장만을 운영하고 가방 제작을 일주일에 2개로 제한하는 등 고도의 희소성 전략을 구사해 제조 가격보다 훨씬 높은 고가를 유지한다.
사람들이 명품을 선호하는 현상은 심리학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과시욕구와 열등감을 덮기 위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경제학자 베블런은 「유한계급론」(1899)에서 이를 ‘과시 소비’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이제 우리나라의 20~30대 소비층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명품 선호현상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돈이나 비싼 물건을 과시하며 자신을 돋보이려는 신조어로 ‘플렉스 하다’는 표현이 생겨날 정도다. 그러나 명품을 소유한다고 그 사람의 가치도 높아지고 인간적으로 명품으로 보일지는 의문이다.
희소한 가치에 대한 욕심은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지위 욕심에서도 볼 수 있다. 정당하지 못한 행위와 남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로 살아온 사람이 남의 노력을 마치 자신의 업적인 양 등에 업고 출세에만 몰입하는 행태를 우리는 가까운 주변에서 그리고 뉴스에서 종종 접하게 된다.
청빈을 강조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 속에서 죽기 위해 자기를 맨바닥에 눕히라고 했다. 검소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100달러(약 14만 원)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 나 자신은 아닌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과학과 신앙] (40) 지구를 위한 병자성사
025년 전 세계는 혹독한 기후 위기와 씨름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가 폭염과 폭우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7월 열대야 일수는 22일로 1994년의 최장 기록인 21일을 넘어섰다. 또 7월 30일 밤부터 다음날 31일 새벽 서울 최저기온은 29.3도로 기상 관측을 시작한 지 117년 만에 가장 무더운 밤 기온으로 기록됐다.
유럽에서는 6월 말부터 열사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최고 기온이 42도를 기록한 그리스는 아크로폴리스 관광을 금지시켰다. 프랑스에서는 지열 과다로 인한 지하 송전선 이상으로 정전 사태 및 고열로 인한 산불 피해가 발생했다. 미국 동부 지역에 형성된 열돔 현상은 150년 만에 워싱턴 D.C.의 체감 온도를 49도까지 끌어올리는 살인적인 폭염을 보였으며, 텍사스주의 폭우는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초래했다.
도대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2024년 지구의 평균기온은 2015년 파리협약에서 합의한 기온상승 한계치인 1.5℃를 넘어 산업화 이전 시대보다 1.55℃나 올라갔다. 지구 온난화가 빨라지면서 하루 평균기온이 32도를 넘는 혹서기가 길어지고, 전 세계적으로 1년의 절반 이상이 여름이 되어버렸다. 빙하는 더 빨리 녹아내리고 해수면은 상승하며 바닷물도 뜨거워지고 있다.
1979년 영국의 제임스 러브록은 「가이아,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란 저서를 통해 지구 환경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화학과 생물물리학 그리고 의학을 전공하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 연구소에서 화성 생명체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지구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자기 조절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지구는 지구 시스템을 이루는 기권(氣圈)·수권(水圈)·지권(地圈)·생물권(生物圈)들에 의해 적정한 환경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을 지닌 생명체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이름을 따서 가이아(Gaia) 이론이라 부르는 그의 이론은 범지구적 환경문제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은 생명체인 지구에 암세포처럼 작용해 현재 지구는 자가조절 능력을 잃어버렸다.
2023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구 온난화가 지속된다면 폭염·산불·홍수·가뭄 같은 자연재해 발생은 더 빈번해지고 육지에 사는 동물과 식물 14%가 멸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비극적 결말을 막기 위한 지구환경 및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과 개선 노력은 단지 환경운동가만의 몫이 아니다. 정치·경제·과학 기술 종사자 그리고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이며 우리 같은 소시민의 작은 노력이 더해지고 생활화되어야 하는 인식의 문제이자 실천의 문제다. 왜냐하면 이제 인류에게 기후 위기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이아 이론처럼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본다면 지구는 지금 중병에 걸린 병자(病者)다. 당장 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상황은 심각하다. 아픈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위로와 치유의 은총을 주는 병자성사를 행한다. 기후위기라는 중병으로 신음하는 지구에게도 우리의 기도를 담은 병자성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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