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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16
불황을 극복하는 길 / 지용수 목사
한 요술쟁이가 세상을 떠나면서 딸 셋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너희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줄 테니 말해 보아라.”
첫째 딸은 스타가 되고 싶다고 해서 인기 높은 스타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둘째 딸은 왕이 되고 싶다고 해서 왕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셋째 딸은 스타도 되고 싶고 왕도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술쟁이는 셋째 딸을 스타킹이 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욕심이 많으면 스타킹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언제나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감사해야 합니다. 속히 부하려 하면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품을수록 좋은 욕심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야망, 거룩한 야망은 좋은 것입니다. 기도는 거룩한 야망입니다.
시편 107편 9절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등생은 공부에 주려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전해 주는 지식을 다 받아먹습니다. 그러나 열등생은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것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믿음의 우등생은 교회에서 말씀을 집중해서 받습니다. 그러나 열등생은 말씀은 제쳐두고 딴 생각만 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헛된 욕심을 부리다가 올무에 빠지지 말고, 늘 은혜 받을 욕심을 품어서 은혜 속에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영원히 살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천국)에는 불황이 없습니다. 배신, 재앙, 저주가 없습니다. 교통사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사고도 있고 불황도 있습니다. 가정적인 불황도 있고 지역적인 불황도 있습니다. 어느 도시는 잘 사는데 어느 도시는 어렵고 어느 공장은 잘 되는데 어느 공장은 문을 닫기도 합니다. 또 국가적인 불황을 당할 때도 있고 온 세계에 불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태풍은 없듯이, 태풍이 언젠가는 고요하게 되듯이, 불황이 끝까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황을 만났을 때 불황에 파묻혀 죽으면 안 됩니다. 불황의 끝을 보며 불황을 이기고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불황을 이기는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전서 강해 중인데 제가 이 말씀을 택한 것은 무릎을 꿇을 때마다 계속해서 ‘지금 성도들이 불황에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 줄 아느냐? 불황을 이길 말씀을 증거하라.’는 감동을 주셔서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먹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황을 능히 이길 것으로 확신합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7대 왕으로 그의 아버지는 오므리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 바알을 섬기는 이세벨과 결혼했습니다. 이세벨은 남편 아합을 꾀어서 바알을 섬기게 하고 바알 신전을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을 죽이게 했습니다.
여자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선한 남자도 악한 여자와 결혼하면 악한 남자가 되고, 악한 남자도 선한 여자와 결혼하면 선한 남자가 됩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세울 때는 대통령의 인물이 어떠함도 중하지만 그 부인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인이 우상을 섬기면 대통령도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 부인의 사상이 대통령의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바알을 섬기니 아합도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다 자기도 죽고 이세벨도 패망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하는 정권은 다 무너졌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오늘날의 대통령은 구약의 왕같이 삼권을 다 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권세가 대단합니다. 그러니 대통령이 우상을 숭배하면 나라가 그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대통령과 영부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복된 지도자, 복된 영부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합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니 그 죄얼(죄 값)이 백성들에게 임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아간이 죄를 지으니 죄얼이 그의 가족들에게 임해서 죄 없는 그의 아들딸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으니 아브라함의 집안과 종들까지도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지도자가 중합니다.
교회 담임 목사가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레위기 4장 3절에 보면,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그 죄얼이 온 백성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가 죄를 지으면 죄얼이 온 교인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혜가 없어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담임 목사가 복이 있고 의가 있으면 교인들에게도 복과 은혜와 의가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을 위한 기도는 교우들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아합이 범죄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십니다.
바알은 풍년의 신, 생산의 신입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바알을 섬기면 풍년이 오고 생산이 증가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기 좋게 불황, 극심한 흉년을 주셨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사막의 곤충들이 사는 것은 이슬이 내리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역에 3년 6개월 동안 이슬도 내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극심한 흉년이 왔습니다.
바알이, 우상이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바알이 풍년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것을 깨닫도록 하나님께서는 풍년 신 바알을 섬기는 백성을 쳐서, 불황을 주신 것입니다. 불황이 오니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그때 엘리야는 이세벨과 아합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습니다. 이세벨이나 아합의 눈에 띄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나라는 하나님의 종들을 존경하고 예우하는데, 복이 없는 나라는 하나님의 종들을 죽입니다. 북한은 공산화 되자 먼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저렇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목사님들에게 예우를 잘 해주는 편입니다. 그런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복 있는 나라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 복을 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종을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요단강 동편에 있는 그릿 시냇가로 가라. 아무도 없는 빈들의 시내 근원으로 올라가라. 거기에 물이 있다. 그리고 내가 네게 먹을 것을 갖다 주겠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릿 시냇가에 가서 외롭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때때로 굉장히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군 복무 시절, 내무반에서 회식을 할 때마다 혼자 구석에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혼자 술을 마시지 않고 구석에 있으면 마음이 이상해지고 고독해집니다.
하나님을 믿다보면 그럴 경우가 있습니다. 친척들이 모여서 고스톱도 하고 노래방에도 가는데 그 분위기에서 믿음을 지키려다 보면 집안에서 왕따 당할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도 믿음을 지키려다 보니 혼자 숨어서 고독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숨어 있으니 먹을 것이 없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릿 시냇물을 마시게 하시고, 아침과 저녁에는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마시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가뭄이 계속되니 나중에는 시내의 근원마저 말라 물이 없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시돈 땅 사르밧 지방으로 가라. 거기에 가면 너를 공궤할 한 미망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회사에서 혹 해고를 당해도 끝이 아닙니다. 그 회사에서 끝이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그릿 시냇가의 물이 말랐으면 그릿 시냇가가 끝이지, 엘리야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그릿 시냇가의 물이 마르자 엘리야는 사르밧 지방에 가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길을 예비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지방에 가니, 그 성문 앞에서 한 부인이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그 부인을 보는 순간 ‘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인이구나.’하는 감이 왔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도 못한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너는 내 자녀가 되었다. 너는 구원 받았다. 너는 죽어도 천국에 간다.’라는 감동을 주셔서 믿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업을 할 때도 ‘여기에 투자하면 흥하겠구나. 여기에 투자하면 망하겠구나.’하는 영감도 주십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이런 영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이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시험에 나오겠네. 이것은 시험에 나오지 않겠네.’하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이런 분별력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학생은 무엇이 무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의지하여 공부하면 성령님께서 어떻게 공부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감동에 늘 주의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6.25가 발발했을 때 북한의 한 목사님이 고민을 했습니다. 만일 북한이 공산화가 되면 교인들은 죽고 교회는 문을 닫게 될 것이 뻔한데, 예배당을 지키다가 순교해야 할지 남한으로 피난가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인이 예배당보다 더 중합니다. 교인이 참 교회이고 교회는 예배당입니다. 그런데 순진한 목사님은 교회를 두고 가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서 “주여! 제가 남한으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여기에 남아서 교회를 지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하며 하늘을 바라보는데, 하늘에서 산새들이 뱅글뱅글 돌다가 남쪽으로 좍 날아갔습니다.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나를 남쪽으로 가라고 하시는구나.’하고 편안하게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 서울에서 큰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새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나귀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니 나귀를 통해 책망하셨습니다. 닭을 통해 베드로를 회개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쓰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땔감을 줍고 있는 여인을 본 순간 그 여인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인이라는 감을 잡은 엘리야가 말했습니다.
“부인, 물 한 그릇만 주시오.”
이스라엘의 샘 근원이 거의 다 말랐는데도 그 부인의 집에 있는 샘은 깊어서 그 때에도 샘물이 솟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깊은 샘입니다. 세상이 목마르고 가정이 목말라도 우리 예수님에게서는 신선한 은혜의 샘물이 항상 솟아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는 곳입니다. 교회에 오면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말을 듣고 물을 뜨러 가는 여인에게 엘리야가 말했습니다.
“부인, 오는 길에 떡도 한 조각 갖다 주시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하나님 앞에서 제가 말하는데, 우리 집에는 떡이 없습니다. 통에 밀가루가 조금 있고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이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그것으로 떡을 해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 합니다.”
“부인,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떡을 만드시오. 그 떡 하나를 먼저 내게 갖다 주고 그 후에 아들과 함께 부인이 떡을 드시오. 하나님께서 지면에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 통에 가루가 끊이지 않고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소.”
부인이 그 만화 같은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하니 통에서 가루가 계속 나오고 병에서 기름이 샘처럼 나왔습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그 부인과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 날’이 우리 뜻으로 보면 며칠 간이지만 히브리어로는 ‘야민’으로 오랜 기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면에 비가 내리는 날까지’는 ‘비가 내려 곡식이 익어 추수할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다가 이번에 새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엘리야와 그 부인과 아들만 먹은 것이 아니라 그 친척이 다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식구가 영어로는 family인데 그 집안을 말합니다. 조금 남은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 했던 과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니 자기만 불황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친척에게까지 그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의 친척들이 “아무개 집에 가루가 솟아난대. 기름이 흐른대.” 하며 그의 집에 모여서 살았으리라 믿습니다. 얼마나 귀한 삶입니까?
작은 은혜를 받으면 자기 자식밖에 기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큰 은혜를 받으면 요셉처럼 70명 친척도 다 살립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요셉 같은 축복의 사람, 샘 곁의 무성한 나뭇가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큰 은혜를 받아서 불황을 극복하고 8촌, 10촌의 친척들, 친구들까지 도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의 헌금으로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사례비를 주고 우리 교우들을 교육하고 우리 교회 활동만 한다면 약한 교회입니다. 많은 농촌 교회를 돕고, 많은 목회자들과 그 자녀들의 교육을 돕고, 많은 선교사들을 돕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 복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도와주는 것을 피곤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돕는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는 일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누가복음 6:38)
우리가 손을 움츠리면 하나님께서도 움츠리십니다. 우리가 나누어 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시어 더 넘치게 하십니다.
사르밧 과부는 은혜를 받고 잘 되어서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불황을 극복해서 자기와 자기 아들만 산 것이 아니라 친척까지 살렸습니다.
이 어려운 때에 불황을 극복하여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까지 살리는 여러분과 저와 우리 교회, 한국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불황을 극복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엘리야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잘 되어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숨어 살게 되어도, 가정을 떠나 고독하게 살게 되어도, 피난길에 접어들어 마실 물도 없고 먹을 빵 하나 없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도 감사만 하지, 불평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젯밤에 까마귀가 가져다 준 떡과 고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까마귀가 자기 발을 씻은 다음에 떡과 고기를 가져다 주었겠습니까? 토끼 똥도 밟고 산돼지 똥도 밟은 그 발로 떡과 고기를 가져다 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가져다 주어도 엘리야는 불평하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야채도 없고 과일도 없고, 매일 같은 것만 가져다 주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시냇물이 말라도 불평하지 않고 이겨냈습니다.
또 사르밧은 이방 땅입니다. 그 이방 땅에 가게 되어도 엘리야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죽을지언정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에는 밀가루가 조금뿐이고 병에는 기름이 몇 방울뿐이어서 마지막이 되었는데도 통곡하지 않고 넋두리 하지 않고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고 땔감을 줍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살아 있는 것,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시고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에스더는 시골 처녀이고, 고아입니다. 사촌 오빠 밑에서 자랐지만 왕비가 되었습니다. 왕비는 학력이나 가문과 관계없이 최고의 여자입니다.
우리의 가문, 학벌, 외모도 별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왕자, 공주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가치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자건거를 타도 하나님 앞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입니다.
한 유명한 강사가 수많은 사원들 앞에서 교육을 할 때의 일입니다.
강사가 100불짜리 지폐를 꺼내어 사원들에게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 한 분에게 이 지폐를 주고 싶습니다. 받고 싶은 분은 손을 드십시오.”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강사가 갑자기 지폐를 막 구기더니 “다 구겨진 이 지폐를 받고 싶은 분은 손을 드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강사가 지폐를 바닥에 놓더니 구둣발로 지근지근 밟았습니다. 지폐가 아주 구겨지고 더럽혀졌습니다. 강사가 사원들에게 그것을 보이며 다시 말했습니다.
“이렇게 더러운 지폐를 받고 싶은 분은 손을 드십시오.”
모두 손을 들자 강사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맞습니다. 이 지폐가 아무리 구겨지고 짓밟혀도 100불의 가치는 여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불황을 만나든, 누구에게 욕을 먹든,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 우리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 월세방에 살게 되어도 우리의 가치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한 달에 1000만 원씩 쓰다가 생활이 어려워져 50만 원밖에 쓰지 못해도 우리의 가치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우리에게 주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따라 합시다.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선생님이 초등학교 3학년에게는 대학 시험 문제를 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 풀 수 있는 시험 문제만 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황을 주시고 어려움을 주셔도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우리 마음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도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재산을 지키고 우리 보물을 지켜야 되지만, 그보다 더 지킬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마음이 살면 다 사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엘리야는 아무리 목마르고 배고파도 시냇가만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군대와 홍해만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신이 살아 있었습니다.
풍랑만 보지 말고 불황만 보지 말고 어려운 환경만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산 것은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로 가라 하시니 엘리야는 “예.”하며 순종했습니다. 가니 물이 있고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다 줍니다. 또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라고 하신 말씀에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집의 통에서 가루와 기름이 계속 나왔습니다. 그래서 살았습니다.
사르밧 과부도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떡을 만들어서 내게 먼저 주시오.”라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만 산 것이 아니라 친척까지 살렸습니다.
이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불황이 밀려와도 하나님 말씀에 바보처럼 그대로 순종하면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은 소 천 마리, 양 오만 마리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의 말이 유산이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의 재산을 얼마나 받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축복의 언어, 축복의 말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축복의 말을 얻어서 복 있는 사람이 되었고 자자손손 왕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말의 축복을 잃어버린 에서는 복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말도 이렇게 재산이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면 말씀이 현실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황이 밀려와도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성실하게 살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필라델피아에 효심이 지극한 찰스 스윈드라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무거운 가방에 물건을 넣어서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며 소년은 ‘우리 엄마가 저렇게 고생을 하시는구나. 가벼운 가방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늘 생각하다가 종이 가방, 쇼핑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특허 내어 그는 재벌이 되었습니다. 찰스 스윈드가 종이 가방을 만들어 재벌이 된 것은 그의 효성 때문이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1-2)
잘되기를 원하면 이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만 순종해도 잘되는 것입니다. 건강하기를 원하면 이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기만 해도 건강하고 잘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부모님께 “어머니, 지금 어려운 때라서 잘 섬기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하지 말고, 어려운 때일수록 잘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식은 잘 먹이고 입히고, 몇 백만 원씩 빚을 내어서까지 주면서도 부모님께는 잘 못하면 되겠습니까? 자식에게는 조금 못해도 먼저 부모님을 잘 섬길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잘되게 하시고 장수하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우 중 한 분은 목 좋은 곳에 있는 점포 하나가 전 재산인데 연세 드신 부모님께서 시골의 좋지 않은 집에 사시는 것이 마음 아파 부부가 의논하여 그 점포를 팔아서 부모님께 양옥집을 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좋은 자개장도 넣어 드리고 정원수도 심어 드렸더니 1,100만원이 남아 그 돈으로 땅을 조금 샀습니다. 그 부모님께서 “얘들아, 이곳에서 300년 살고 싶다.”하시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교우의 가정이 얼마나 잘되는지 모릅니다. 자녀들이 얼마나 잘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부모님을 잘 섬길 때 여러분 가정이, 여러분의 사업이 잘 되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위할 때 여러분의 가정이 편안했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멸시하고 부모님을 내동댕이치듯 업신여기는 그 가정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아무리 불황이 와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가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야가 기도했다. 사르밧 과부가 기도했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엘리야도 기도의 사람이고 부인도 기도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물론 그 부인도 늘 기도하며 산 사람이었음이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부인의 집에 보내신 것은 그 집의 샘이 깊은 이유도 있겠지만, 늘 기도하는 그 집에 복을 주시기 위함인 줄로 저는 믿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캄캄해도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빛을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황이 와도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새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사에서 해고당해도 회사를 너무 저주하지 마세요. 회사도 살기 위한 몸짓입니다. 회사가 무너지지 않고 살기 위해 자기 손을 자르듯이 아픈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사원들을 해고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회사들이 잘되고 잘되어서 사원들을 해고하는 일이 없고 더욱더 증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케몬스 윌슨이라는 미국의 한 남자가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해고 통지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이 해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관 사업을 해라.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여관을 만들어 보아라.’라는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작은 여관을 만들었더니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 그 여관이 두 개, 세 개 …… 열 개……, 백 개로 늘어나 마침내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홀리데이인입니다. 케몬스 윌슨이 해고당했기 때문에 홀리데이인을 창업하게 되었고 재벌이 된 것입니다.
해고를 당해도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새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전라남도 해남의 한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하기 때문에 그의 집이 너무 가난해서 그는 도저히 중학교에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 감사하며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닌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닌다.’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하며 공부해야 됩니다.
집이 가난하여 도저히 중학교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 아이는 너무나 공부가 하고 싶어서 40일간 작정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공부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하겠으니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40일간 울며 기도한 후 ‘하나님 전 상서. 하나님, 저 공부시켜 주세요'라는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우체부 아저씨가 그 편지를 보고 고민하다가 해남의 한 교회 목사님께 그 편지를 갖다 드렸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감동한 목사님이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스위스 바젤 대학원까지 공부를 다 시켰습니다. 그때 그 아이가 바로 대학 총장인 오영석 박사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디를 보아도 길이 없었습니다. 사방에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 열두 시에도, 새벽 두 시에도 기도실에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기도실의 기둥을 붙잡고 “하나님! 하나님”하며 운 날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에게 이런 저런 길을 열어 주셔서 오늘에 이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무리 어려운 불황에서도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한 시간 기도했더니 참 좋았습니다. 두 시간 기도하니 방언이 터졌습니다. 세 시간 기도하니 방언 노래가 나왔습니다. 네 시간 기도하니 환상이 보였습니다. 기도 속에 들어가면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다섯 시간 기도하니 능력이 나왔습니다. 여섯 시간 기도하니 영이 맑아졌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여덟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니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그를 존경했습니다. 나중에는 그가 ‘나는 하루에 여덟 시간 기도한다.’하며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신앙심이 깊은 분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그는 그분을 만나자마자 말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여덟 시간 기도합니다. 그러니 능력을 받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자 신앙심이 깊은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에 여덟 시간 기도한다면 나머지 열여섯 시간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때 그의 교만이 깨어졌다고 합니다.
‘아, 내가 기도하는 것을 자랑하고 있구나.’
우리가 호흡을 계속하듯이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여덟 시간 기도해도 열여섯 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잘 되었다. 늘 기도하고 있으니 새벽 기도하러 나오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벽 기도는 해야 됩니다. 그리고 새벽 기도하는 것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새벽 기도하는 것도 자기의 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새벽 기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간 것은 자기들이 올라가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주셔서 간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새벽 기도회에도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낮 예배에도 나오기 힘든데 어떻게 새벽 기도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새벽에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자랑하지 맙시다.
그러나 어쨌든 기도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그래, 우리는 축복을 만나도 축복이고, 불황을 만나도 결국은 축복으로 바뀌는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구나. 우리는 행복하구나.” 할렐루야!
한 농부에게 너무 늙어 일을 제대로 못하는 나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나귀가 어쩌다 실수로 깊은 우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우물은 매우 깊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아서 동네 사람들이 메우려 했던 우물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에 나귀가 빠져서 울부짖었습니다. 주인은 나귀를 건져주려 했지만 우물이 너무 깊어 끌어올리기가 힘들었습니다. 나귀를 살려 주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묻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고 또 그 우물은 어차피 메워야 하는 것이니 주인은 이웃 사람들을 불러내어 삽으로 흙을 퍼서 우물 속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등에 흙이 떨어지면 몸을 툭툭 털었습니다. 등에 흙이 떨어질 때마다 툭툭 털어내다 보니 흙이 많이 쌓여 그것을 딛고 나중에는 나귀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흙이 아니었으면 나귀가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삽질을 했습니다. 보디발 부인이 요셉을 죽이려고 삽으로 흙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툭툭 털고 일어서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에게 흙을 퍼붓는 삽질이 없었으면 요셉은 시골에서 양이나 치다가 인생을 끝내었을 것입니다. 그 삽질 때문에 요셉이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일도 하나님께서는 좋은 쪽으로 밀어붙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우리 옆에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과 함께 불황을 극복하며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