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삼의 기원
산삼에 대한 기원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수천 년 전부터 민간 약제 (보신용) 쓰여 왔다 .
최초의 문헌을 살펴보면 중국의 전환원제시대( 서역기원전 33-48 ) 사유의 <급취장>이라 전해지며 약물사의 한편에 나오지만 사상 처음 명약의 한가지로 인삼(人參) 삼자가 기록되어 있음으로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모후산 에서 최초의 발원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며 BC 57년 삼국시대부터 경험에 의해 산삼의 효험이 고려삼 이라는 이름으로 약용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수많은 산삼들 중에서도 가장 품질이 좋은 것으로는 동방 즉, 우리나라로부터 들어온 인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무제에게 보내어진 한반도의 산삼을 보고 세 가닥의 가지와 다섯 개의 잎 을 지닌 삼으로서 모두 음지에서 자라며 피나무 숲에서 발견되는 매우 훌륭한 천연품종의 삼이라며 그 생태까지 명확히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국내산 산삼의 효과가 국. 내외 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고 신비한 약초로서의 가치가 치솟았다. 이러한 양국의 산삼 위기와 인삼재배 사실은 중국 명조시대 이시진이 인삼을 명약 중의 명약으로 소개한 '본초강목'이나 '본초비요'등에서도 여러 곳에 걸쳐 시사되고 있다, 산삼의 수요가 나날이 높아지자 자연히 천연삼의 채취만으로는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일부 심마니들은 고육지책 으로 나마 인위적인 삼의 재배가 점차 비밀리에 소량씩 재배하게 되었다
삼의 보신용 재료로 사용한 근거를 보면 후한건안년도 (서기 196-200) 장중경의.<상한론>에 있는 총 113개 의 처방중 산삼의 배합처방이 21개나 수록 되어 있다.
그후 명의별록. 신농본초경. 신농본초경집주. 경약전서. 방약합편. 동의보감등 많은 의서에 보신 또는 약제로서 산삼의 기록이 있다.
고려산삼의 재배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의 깊은 산에 자생 하였어나 많은 채취로 인한 산삼의 감소와 소비증가로 인하여 공급량이 부족하여 인공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1080 고려 11대 문종때 자연산 천연산삼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홍삼으로 가공하여 제조 하였어며 1122년 고려 인종때 인공재배가 시도 되었어며 1392년 고려 공양왕때 인삼의 인공 재배가 성행하였다.
또 다른 기록인 조선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정종 14년 양산군수 남학문이 한여름에 올렸다는 상소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영남지방이 비록 예전부터 산삼의 고장이라고 불려지고는 있지만 산삼이 점차 귀하게 되어 이제는 가종풍을 이루고 있다고 하소연을 겸하여 보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중국과 왕실을 위하여 조달해야할 산삼의 엄청난 할당량에 비추어 그 조변이 너무나도 힘들게 된 산지의 백성들은 터전을 포기하고 아예 자신의 고향을 떠나버리는 경우도 발생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형편은 당시의 중국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은데, 후한 안제시대 의 허진이 집필한 '설문해학'에는 인삼을 '약초출상당'이라고 하여 중국 태행산맥에서 캐낸 이른바 '상당삼'이 우수함을 일렀지만 그나마 뭇사람들이 너도나도 절제 없이 채 삼 함으로써 거의 절멸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국의 산삼 위기와 인삼재배 사실은 중국 명조시대 이시진이 인삼을 명약 중의 명약으로 소개한 '본초강목'이나 '본초비요'등에서도 여러 곳에 걸쳐 시사되고 있다.
한편, 인삼의 자생이 전혀 없었던 일본은 1935년 고려인삼을 테마로 하여 '인삼사'라는 책을 조선총독부 전매국 명의로 편찬했는데, 이 또한 당시 나라가 강점 당했던 역사성을 배제하면 사실상 우리의 문헌이나 다름없다.
지금은 고려삼이라 칭하며 부르나 실제 신라삼을 으뜸으로 하여 .백제삼. 고려삼의 순으로 그 품질이 인정되었으나 현재 통칭하여 고려삼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