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인문학, ‘사무사’의 숨결
-차 한 잔을 통한 <불안>의 인식론적 고찰 -
권대근
수필가,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우리는 '세계' 라는 말을 쓰죠. 그런데 우리가 세계라고 할 때, 그 세계라는 것을 명사와 형용사 중심으로 볼 수도 있고, 또 동사 중심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세계'라고 말할 때 흔히 머리에 지구나 다른 별들, 나무, 사람, 꽃,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아니면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별빛, 꽃의 색깔, 이런 것들이 떠올린다. 이렇게 떠올리는 세계는 바로 명사와 형용사를 중심으로 생각한 세계다. 그런데 꽃이 피어나는 것, 지구가 도는 것, 나무가 자라는 것, 사람이 걸어가는 것, 눈이 오는 것,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 이런 것들을 머리에 떠올리면 그것은 동사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동사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세계를 사건들의 총체로 보고 있는 거다. 다시 말해서'thing'이 아니고 'event'로 보는 것이다. 이 인간 세계의 사건이라고 하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인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논의 대상이다.
최근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모든 것의 시초는 스티브 잡스의 “애플의 창의적인 제품은, 애플이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라는 이 한마디가 촉매제가 된 것이다. 그간 한국사회에 일어난 현상을 보면 인문학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극심한 취업난의 88만원 세대와 양극화에 잠식된 서민들은 심신의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실용주의에 염증을 느낀 대중은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인문학(Humanities)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문학이 사회 중심 사건으로 떠올랐다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왜 인문학에 굶주려 하는가, 그 이유를 고흐의 선배 <고갱>의 그림 <타히티섬>을 통해 찾아보자.
고갱은 현대문명에 지쳐 타이티섬에 가서 원시적인 색채를 이용,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아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른>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있으며, <여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삶의 위기가 논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차와 인문학, ‘사무사’의 숨결을 찾아보는 것은 불안을 떨쳐낼 수 있다는 차원에서 가치와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II. 클릭
차는 부처님전에 올리는 육법공양물에도 있고, 신라시대에는 원효방에서 원효대사가 차를 마셨다는 기록을 이규보가 시에서 남겼고, 설총도 화왕계에서 차를 마셨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다성인 초의선사가 차시를 남겼다. 이렇듯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 차문화운동이야말로 소중한 우리 것을 찾는 또 다른 길 중의 하나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직도 자욱한 안개와 먼지 속에 가려져 박제된 전통문화에 숨결을 불어넣는, 다시 말해 삶에 있어서 ‘삿된’기운을 몰아내는 부채와 같은 것이 바로 다도문화를 꽃피우는 것이 아닐까. 차문화와 인문학은 언제나 함께 있어왔다. 수도꼭지만 있다고 수돗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수원지가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수원지 같은 것이고, 차문화는 수도꼭지 같은 것이 아닐까. 차는 만물을 살리는 물을 만나 그 조화로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차는 물의 신이요, 물은 차의 몸이라 했다. 차는 물을 만나 비로소 하나가 된다. 차의 길은 모든 종교와 철학과 예술을 관통한다는 측면에서 다도는 인문학이다라고 할 수 있다.
국제차예절교육원 정지연 원장은 ‘차는 특정한 계층만의 문화이거나, 일정한 형식이 반드시 수반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열린다도를 주창하고 있다. 그녀는 ‘신세대의 차생활은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고와 관념을 버리고 편안하게 마시는 한 잔의 차로 자신의 여유로움을 찾고, 가족을 생각하고, 친구를 <배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과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문화로 형성되어야 한다’는정 원장의 주장은 차정신인 ‘사무사’정신로 통하며, 고운 최치원이 짓고 쓴 ‘진감선사 대공탑비’에 나오는 ‘수진오속’의 정신인 것이다. 이는 차가 인문학정신과 맞닿아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인문학정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고지는 ‘소통’이기 때문이다. 결국 차정신인 배려와 소통은 현대철학의 과제이기도 한 <타자-되기>에서 <우리-되기>로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생활은 산업화 공업화 되면서 사람들의 정서가 점점 더 메마르고 거칠어지고 있다. 비록 식생활은 풍족해 졌으나 오히려 식탐과 과식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고 있다. 특히 요즘 신세대들이 즐겨 마시는 탄산음료는 정신적으로 <불안감>을 더해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차생활은 현대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정지연 원장의 주장은 차를 마신만큼 선이 된다는 ‘다선일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면서 향기로운 차향을 닮은 사람을 그립게 한다. 일단 내 마음이 편안해야 된다. 소통도 타인을 위한 배려도 마음이 평정된 뒤의 문제가 아닌가. 이런 차원에서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인 다도문화가 그 꽃을 활짝 피워나가야 하리라 믿는다. 오늘 <차와 인문학>의 매칭이 이루어진 것 도 모두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그런 다인의 다도정신이 피워낸 결실이리라 본다. 삶에서 불안이 사라진다면, <불안>을 떼어놓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정지연 원장은 “까마득한 옛날. 차는 인류의 시작과 같이했다고 한다. 불이란 것이 없을 때는 생식을 했다. 어느 날 신농이란 사람이 불을 관장하고 난 후 사람들은 익혀먹었을 것이다. 더불어 차는 끓여서 마시기 시작했고 신농이 백가지 약초를 맛보다 72가지의 독에 걸렸다. 그런데 차를 마시고 해독이 되었다고 하여 차의 약용설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의 본 강의는 불안을 인식론적으로 접근하여 어떻게 하면 불안을 제거할 수 있는지, 불안의 그 근거를 찾아보고, 차의 역할을 되짚어보도록 하겠다.
그러면 인류 역사의 기원과 함께 시작된 사건을 중심으로 <불안>의 역사를 살펴보자. 100억년 전 한반도는 적도 부근에 위치했다. 38억년 전 동아시아 쪽으로 이동하였다. 100만년 전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면서 전두엽 발달하기 시작했다. 만년 전부터 기억 세포가 늘어났다.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야수, 자연재해였다. 최초의 공포였다. 밤이 오면 공포가 엄습했다. 3-4세 아이는 밤이 오면 불안해 한다. 복숭아 먹다 버린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자, 농경사회가 시작되었다. 정착생활을 하면서 남녀가 같이 삶았다. 씨를 뿌리니 뭔가 나더라는 기억으로 지식이 쌓았다. 번개만 치면 성이 올라왔다.(고대) 10달 뒤 아이가 생겼다. 기차소리만 나면 성이 올라온다(현대). 가족 집단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 두려운 것은 근친상간이었다. 살인이 생겼다. 늙은 아버지가 죽었다. 자식들은 죄책감, 죄악감으로 뭔지 모르지만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원시 제사가 생겼다. 평소 잘 드시던 것 놓고 절을 했다. 동생이 형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자꾸 물었다. 형이 자존심이 있으니, “아버지는 하늘로 갔다.” 이때부터 아마도, ‘하늘에 우리 계신 아버지가 나온 게 아닐까’(개인 생각), 아버지가 뭐라더노? 형은 “-~하지 말라”하더라. 이렇게 해서 ‘금기’ <십계명>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계속 되면서 고대국가가 생겼다. 폴리스(동네)에는 율법이 있었다. 현대에 와서 법으로 금기가 생겼다. 원시시대는 야수, 어둠, 농경사회는 근친상간, 살인, 현대로 오면서 도덕의식이 생겨났다. 2500년 전후해서 서양에는 예수, 동양에는 부처, 공자 등을 신봉하는 종교들이 나와서 본능적 욕구를 억압하는 가운데 양심이 생겨났다. 로마교황청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억압’했다. 13-14세기 르네상스가 오자, 서양은 억압된 본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지난 600년간은 인간이 자유를 위하여 모든 투쟁을 해오면서 자아를 넓혀온 역사였다. 왕도 없애고, 아버지도 없애고, 과학이 발달이 발달하면서 자연 정복 등 일련의 사태로 전진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프로이트가 나와 서양 사람을 해방시켰다. 성해방, 여성해방이 논해졌다. 본능을 안 주어서 병이 났다는 것이다. 서양도 쌓이고 쌓인 본능이 풀려, 100년 전 본능이 의식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불안>이 싹텄다. 오늘날에는 종교들이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억압한다. 프로이트는 본능을 마음껏 나타낼 수 없어서 불안이 나타났다고 한다.
영혼까지 잠식시키는 불안, 불안의 원인과 그 극복 방법은 없을까? 모든 현대인은 불안을 가지고 있다. 불안은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 문제는 불안의 정도다. 불안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하는 걱정에서 생긴다.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일어날 때, 뭐가 일어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면 불안은 없다. 불안의 미래의 것이다. 의식하든 안 하든 안 일어났으면 하는 게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 있다고 치자,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 불안하다. 남북 긴장 뉴스만 봐도 불안하고, 일어나든지 말든지 하면 전쟁이 나도 안 불안하다. 불안은 내가 세상을 통제하려고 하는 데서 생긴다. 불안을 없애려면, ‘내가 미약한 존재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즉 우주의 한 점으로 우주 공간을 내가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내 반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내 할 일을 하고, 일어나면 그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 ‘나는 원하는 것이 없다, 걱정이 없다. 나는 자유다. 부족한 대로 순리대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마음이 원하는 게 많으면 불안이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랑이 나를 버리면 어쩔까? 집착이다. 의부증으로 넘어갈 소지가 있다. 믿고 살아야 한다. 확실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믿는 게 낫다. 머리 속으로 걱정한다고 확인이 안 된다. 남편이 안 보이면 남편을 머리 속에도 마음에도 담지 마라. 생각하고 의심하면 더 난다. 생각은 집착을 낳는다.
불안하다고 느낄 대는 전문가와 상담하라. “내가 그 생각을 못 했군요.” 혼자 생각하면 더 악화된다. 생각을 줄여야 한다. 문제는 집착이다. 우리 가족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한다고 안 일어나는 게 아니다. 걱정의 초점을 바꾸어라. 집을 나서는 순간 집을 잊어라. 자기 할 일만 신경 써라. 세상의 지혜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라. 지혜를 닦고, 생각을 접어라. 불안의 시작은 집착이다. 번뇌의 하나다. 본질적으로 보면, 집착할 거가 하나도 없다. 버려라, 버리고 버려라. 더 버릴 게 없는 게 불안을 제거하는 길이다. 생각해서 버리지 말고.
III. 로그아웃
힘들겠지만, <불안>이 엄습해 오면 한 잔의 차를 앞에 놓고, 그 <불안>이라는 놈을 노려보고, “그래 어디 함 해보자” 이렇게 맞서라. 세상에 안 될 게 어디 있나? 마음 굳게 하고 이겨내라고 권하고 싶다. 자신에게 -“난 문제 없어” 뇌한테 -“불안을 치료하라.” 불안한테 -“내 마음에서 나가라.”라고 명령하는 것이 어떨까?그 답은 정 원장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정 원장은 “다도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맑고 편안하다. 다도하는 사람들의 몸과 동작은 자연스러움의 극치다. 다도는 마음이 혼란하거나 불안 할 때 안정되게 해주는 도구적 행위이다. 마음은 곧 정신을 좌우하고 행복의 지름길을 안내 해 준다고 생각한다. 평온하기 그지없고 자유롭기 그지없는 삶, 인생의 고행과 역경 속에서 자신을 찾고 행복을 찾는 길이 다도하는 생활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이은희 수필가의 수필 속에 흐르는 그림자 형상, 삿된 기운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사무사’의 첫걸음일 것이다. 그녀가 ‘삿된’ 기운을 퇴치하기 위해 전통에서 마음의 고운 결을 찾았듯이, 우리도 차 한 잔을 마시는 사건 속에서‘사무사’를 생각하면, 꾸부러진 마음결을 곱게 펼 수 있으리라.
*저작권은 권대근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