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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 대한 비판 : 너희의 지혜는 폭력이다(1-5)
우리는 인간의 현실을 알고 인간을 사랑하며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실망은 필연입니다. 우리가 신뢰해야 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사람은 의지나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결국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이기심이 자신에게도 깊이 지잡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1-5)
욥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종들과 어린 아이까지 그를 멸시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이제 욥의 대답의 시작은 빌닷의 즐겨 사용하는 어투를 흉내 냅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표현은 8:2과 18:2에서 빌닷이 입을 떼는 상용 어구였습니다. 상대의 말을 빌리는 논쟁 기법은 첫째, 상대가 해준 말을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만약 악인의 운명이 빌닷이 묘사한 그대로라면, 그 운명을 맞이할 사람은 바로 빌닷입니다. 둘째, 상대방이 한 말의 기표(시니피앙)를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시니피에)를 전혀 다르게 함으로써 상대의 말을 약하게 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익숙한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욥은 빌닷의 표현을 빌려 시작하지만, 이번에도 욥의 대답은 앞선 빌닷의 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2-3절은 2인칭 복수 동사를 사용하여 욥의 영혼을 말살하는 폭력적인 말을 한 것이 빌닷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지혜’가 고통 받는 자의 영혼을 괴롭히고 짓부수는 짓이라고 고발합니다(2). 바른 길을 가르치려는 친구들의 ‘위로’는 욥에게 있어 “모욕”과 “학대”에 다름 아닙니다(3).
4절은 개역개정이 의문문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평서문입니다. ‘옴남’은 ‘확실히’, ‘진실로’라는 의미의 부사인데, 욥은 이 부사를 비꼬는 투나 반어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12:2의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라는 문장도 표면적 의미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4절을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그래, 정말 내가 잘못했다고, 잘못이 내게 있다고 치자’ 정도가 됩니다. 허물이 있다고 가정할 뿐 자신의 허물 때문에 심판받는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옴남’으로 시작하는 5절에도 반어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5절을 직역하면 ‘너희는 나보다 더 커서 나의 잘못을 가르쳐준다’입니다. 가정법 상황을 전제합니다.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내게 자만하는구나.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을 입증할 증거를 갖고 증언해 다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한탄(1): 고난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달라(6-12)!
아무리 단단한 강철도 한여름의 열기에는 휩니다. 기반이 단단한 사람도 시련의 무게가 크면 금세 무너질 것 같은 한계점에 이릅니다. 욥의 상태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세 친구에게 정죄를 받았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가혹한 시련을 맞아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6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7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7-12)
욥의 진심은 6절부터 표현됩니다. 여기서도 욥은 빌닷의 논거에 반박합니다. 빌닷이 재앙이란 악인이 스스로 쳐놓은 그물과 올가미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 할 때(18:8-10), 욥은 이를 부인하면서 그 그물은 하나님께서 내게 둘러치신 것이라고 항변합니다(6). 자신이 누군가를 해치려는 악한 마음으로 함정을 파놓은 것이 아니라는 무죄 주장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지금껏 줄곧 해오던 진술의 연장입니다. 욥의 앞길이 막힌 것도(8), 그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9) 그의 희망이 뿌리까지 뽑혀버려 이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10)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자신을 공격하시며(11), 한 번의 재앙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한꺼번에 재앙들이 몰려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입니다(12). 자신의 행악이 불러온 재앙이 아니라는 증언입니다. 욥의 진술은 1장에서 연속된 재앙에 대한 진술(1:13-19)과 일치합니다.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인간에게 이렇게 “까닭 없이” 주어지는 고난은 ‘폭력’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7). “까닭”을 알면 고통을 견딜 힘이 더 생길 수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이를 원망하거나 아니면 잘못된일을 바꾸거나 고치거나, 혹은 후회를 통해서도 고통의 시간을 견뎌낼 힘이 조금은 더 생깁니다. 그러나 욥은 그 “까닭”을 모르고 어떠한 논리(인과응보 같은)로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입니다. 그는 단지 고통을 호소합니다. 아무리 도와달라고 간청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사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음을 아파합니다(7).
욥의 한탄(2): 내게는 아무도 없다(13-20)
자신이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폄하 하는 것만큼 교만한 모습은 없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십니다. 성경은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는 이들을 꾸짖고 있습니다(약 4:12).
13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13-20)
욥에게 임한 고난은 첫째로 재산과 가족을 잃는 것이었고, 둘째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었습니다. 이 고난은 또 다른 고통을 초래합니다. 욥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세 친구)은 욥을 정죄하기에 급급하고, 그 외의 친척과 지인들은 욥에게서 멀어졌습니다(13). “형제들”과 ‘지인들’의 반의어가 바로 “낯선 사람”(이방인)입니다. 욥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반대로 뒤집어졌다는 것이 반의어들의 짝으로 표현됩니다. ‘가까운 것’이 ‘멀어졌고’(14a), ‘알던 것’이 ‘잊혔다’(14b). 욥의 집에 얹혀살던 ‘난민’과 ‘여종’이 욥을 ‘낯선 사람’이자 ‘외국인’으로 취급합니다(15). 종이 주인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 뒤집혀서 오히려 주인이 종에게 은혜를 입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16).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인 아내와 가족, 형제들이 욥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18). 욥의 아내에 대한 진술은 여기 외에 2:9-10과 31:10에 나옵니다. 176절의 ‘내 배의 자식들’은 그 자체로는 욥의 후손(자녀와 손주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욥의 자녀들이 모두 사망했다는 앞선 진술에 비추어 ‘배’를 어머니의 자궁(모태)으로 해석함으로써 모순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은 곧 형제자매를 지칭한다고 해석하면, 17b절은 13절의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와 무리 없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가 여전히 현재 욥과 함께 있는가 아닌가, “내 허리의 자식들”이 욥의 자녀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형제를 지칭하는지, 혹은 어딘가 배 다른 자녀들이 또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욥이 말하자 한 것은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까이 있어야할 사람들이 멀어졌고(19a), 욥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온 사람들이 욥에게 사랑과 보호를 되돌려 주지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19b).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되는 원리라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친구들을 향한 탄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21-22)
성도는 죽음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에게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성도는 지금 욥이 친구들에게 말하는 경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인 우리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21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21-22)
욥은 친구들에게 통 사정합니다: ‘나의 친구들아, 너희는 제발 좀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눈물 어린 호소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는 방식으로 욥은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합니다. 다시 한 번, ‘불쌍히 여겨달라’는 동사 ‘하난’은 “까닭 없이”의 ‘힌남’과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입니다. 제발 욥 자신에게서 고난의 까닭을 찾으려 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기” 때문입니다(21b). 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만으로도 충분히 괴롭습니다. 친구들의 ‘위로의 말’과 ‘지혜의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고난만큼이나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원: 내 눈으로 하나님을 뵐 것이다(23-29)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원수를 갚아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마음에 원망과 분노를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화살로 원수들을 흩으시고 번개를 번쩍이셔서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다고 말할 날이 우리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판단하실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맡기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범죄의 자리에서 돌이키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3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23-29)
23절은 ‘미-이텐’으로 시작하며 ‘불가능한 가정이나 소망’을 의미하는데, 자신의 말이 기록되어 책에 쓰이기를 바라는 욥의 소원은 결국 성취되어 우리가 그의 외침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극심한 고난에 처한 이가 회복의 희망을 계속 품고 있기란 힘듭니다. 그런데 욥은 계속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분(고알리)이 살아계심을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나는 안다’). 자신의 온 살가죽이 다 벗겨지더라도 맨살로라도 그분을 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7절의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른 것 아닌 바로 내 눈으로 그분을 볼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낫습니다(27). 우리는 그의 소원이 실현되는 장엄한 장면을 함께 목도하게 됩니다.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떠올라야 합니다. 그들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자이시며 최종 심판자라는 사실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을 본받아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