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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시낭송회 원고
이구락 대표시 30편
1. 깊고 푸른 길
2. 참꽃
3. 그렁거렁 울다
4. 미친 놈!
5. 소청도 안개 설화
6. 포장술집 또는 어둠
7. 가을 금호강
8. 돌의 시간
9. 황금빛 모서리
10. 허수아비로 서서
...........................
11. 풍경하다
12. 안 보인다
13. 선술집 바라지의 젊은 사장은
14. 수상한 꽃나무
15. 치악산 상원사에서
16. 서풍수마
17. 무월 달빛마을
18. 그 해 가을
19. 서쪽 마을의 불빛
20. 이월의 노래
............................
21. 세월
22. 아버지의 뒷모습
23. 미나리꽝
24. 벌 마시기
25. 빈 마음 하나
26. 혼자 부르는 사랑노래 · 3
27. 무명악사의 기도
28. 가을일기
29. 오월의 편지
30. 四季의 5행시 :
(봄)개심사 청벚꽃 (여름)숨어 있는 절 (가을)가을산 (겨울)달빛경전
1.
깊고 푸른 길
이 구 락
사천만 개펄 속엔 먼 가야시대 토기 묻혀 있다 천 년 동안 곰삭아, 저녁노을에 농익어 토기는 짙은 적갈색이다 수석인들이 고기석古器石이라 부르는, 사천만 종포리 개펄 속의 돌이다
종포리 늙은 어부의 집, 바다가 멀리 물러서고 개밥그릇에 노을 혼자 남아 오래 저물고 있다 개펄에 몸져누운 목선 한 척 바람 속에 늙어가고 세상 모든 길들이 돌아와 잠자리에 드느라 개펄이 오래 소란스럽다
천 년을 이어온 어부의 노동이 느릿느릿 끌고 오는 개펄의 저 깊고 푸른 길은 늘 마음이 캄캄하다 캄캄한 사람의 길이 천 년 동안 돌 속에 제 몸 구겨 넣고 나니, 돌은 이제 더 이상 야윌 데 없어 그저 환한 적막 속에 새 한 마리 풀어 놓는다
2.
참꽃
다복솔 사이
벗어놓은 지게 위
참꽃 한 다발
흰 나비 한 마리
오래 앉았다 가고
그 자리
골짜기 돌아 나오던 뻐꾸기소리
다시 밟고 지나간다
천년 또 여러 천년
봄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일이기에
이 땅의 참꽃은
순이 볼 붉은 짝사랑 빛으로 피어서
꽃망울 깊숙이 멍 자국 짙어졌다
3.
그렁그렁 울다
수도암 봉황루 무념지에 앉아
방문 활짝 열고 한나절 넋 놓고 앉아
가파른 54계단 위 대적광전 지붕이 비에 젖어
슬픔의 색깔로 고요히 낡아가는 걸 본다
지붕위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여름 숲이
아미타경 독송하며 안개 속에서
하얗게 녹아내리는 것도 본다
사시예불 드리러 돌계단 오르는 이
우산 쓴 뒷모습도 낡고 쓸쓸한 배경으로 걸린다
봉황루 추녀 끝 낙숫물소리가
부처님 연화보좌처럼 깔리고
관음전 청동기와 파랗게 살아난다
이 영험한 청정도량에 와 앉아
간절한 기도거리도 없이 와 앉아
깊은 적막의 오래된 먼지 냄새만 맡는다
스님들은 하안거에 들어 묵언수행 중인데
나는 지금 걸려오는 전화 다 받아주고
문자메시지에도 일일이 답을 한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와 앉아야 하거늘
책읽기와 글쓰기를 위해 찾아든 내 짓거리가
이 여름비에 씻겨 말갛게 낡아지기를,
가파른 돌계단 위 하늘에 걸린
저 대적광전 현판만큼 낡아지기를,
무념지에 편안히 앉아 합장하며 빌어본다
낙숫물소리 들으며 풍경이 그러려무나 그려러무나
하고, 그렁그렁 운다
4.
미친 놈!
닷새마다 장이 서는 반야월 노천시장
허리 굽은 할머니가 땅바닥에 펼쳐놓은 좌판
푸성귀 옆에, 어울리지 않게, 목단꽃 다발, 놓여 있다
서서 물어보기 미안해 쪼그려 앉으니
주름투성이 할머니 얼굴 쳐다보인다
이 꽃 좀 팔았느냐고 물어보니
오늘이 ‘부부의 날’*이라 다 팔고 요것만 남았다는
우물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세가 여든여덟이라는 대답도 간신히 얻어듣고는
할아버지가 계시냐고 또 물으니
좌판의 푸성귀들 가리키며
영감이 올해 아흔인데 텃밭에서 직접 가꾼 거란다
그리고 텃밭 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이 꽃도
이렇게 날짜 맞추어 꺾어왔단다
까맣게 탄 작은 얼굴 갑자기 환해 보여
집에도 한 다발 꽂아두었느냐고 놀리니
입가에 웃음 살짝 머금더니, 미친 놈! 하신다
덩달아 웃으며 유심히 바라보니
아, 얼굴 살짝 붉어지신 듯도 하다
집에 돌아와 오지항아리에 풍성하게 꽂아 놓고
실실 웃으며 아내와 목단꽃 번갈아 바라본다
아무리 봐도 ‘미쳤어요!’ 할 것 같진 않고
얼굴도 살짝 붉어질 것 같지 않았다
목단꽃처럼, 일주일이 붉게 흘러갔다
장날마다 시장에 나가봐도
한 달이 목단꽃처럼, 붉게 흘러가도
할머니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문수보살이었을까
매일 아내의 얼굴 한 번씩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잠시 내 곁에 머무는 문수보살일까 싶어서
* ‘부부의 날’(5월 21일)은 2007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달력에 표시되기 시작한 법정 기념일이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았다.
5.
소청도 안개 설화
서해 오도 막내 섬 소청도엔 나리민박이 있다
일흔이 넘었는데도 아직 뱃일 하는
우람한 체구의 황 씨가 주인이다
4남매 모두 대처로 나가 살고
부인 둘과 오순도순 안개 속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
파도소리 높을 땐 더러 시앗싸움도 생기지만
그 소리는 한 번도 집 밖으로 새나간 적 없다
어진 큰부인의 눈빛은 늘 아득하고
영리한 작은부인의 입술은 늘 봄바람 소리가 난다
그 사이에서 황 씨는 오늘도
바다 건너 강령 고향마을 순이 얼굴이 잠깐 떠오르자
그물 깁던 손길 잠시 멈춘다
그 순간은 워낙 짧고 능청스러워
함께 그물 손질하던 옆집 박노인도 눈치채지 못하고
눈치 빠른 작은부인도 감쪽같이 속는다
열다섯에 건너온 저 바다 위로
자주 안개가 끼지 않았던들 쉬 익히지 못할 버릇이었다
황 씨는 결국 세 명의 부인과 살고 있는 셈이다
안개는 늘 나리민박 주위가 가장 짙고
엉덩이 무거운 황 씨처럼 민적거리며 가장 늦게 걷힌다
세 여인의 너도바람꽃 같은 입김
늘 안개 속에 녹아있는 나리민박, 안개가 걷혀도 늘
대청붓꽃보다 짙은 단내 나는 나리민박
서해 오도 막내 섬 소청도엔 나리민박이 있다
6.
포장술집 또는 어둠
포장술집 <두메>에는 해가 지면 연기가 난다 도시의 네온 사이 유언비어처럼 스미는 연기, 살이 타고 연한 뼈가 타고 그대의 눈물까지 타고 남는 것은 우리들의 식욕뿐이다 <두메>의 문 앞에는 새끼줄에 목을 맨 참새떼가 있고, 털 빠진 메추리 산비둘기가 잘 짜여진 조롱 속의 여생을 쪼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일과를 끝내고 초저녁의 어둠과 마주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 뒤를 따라 목을 넘는 잘 요리된 참새의 슬픔, 메추리의 슬픔, 산비둘기의 슬픔, 슬픔은 슬픔끼리 만나 더 큰 슬픔이 되고, 더 큰 슬픔은 우리들의 식욕과 만나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슬픔에 취해 벌건 얼굴을 하고 우리는 마지막 잔에 한 줌의 어둠도 섞어 마신다 어둠 속의 일은 어둠 속에서 더욱 잘 보이나니 마침내 어둠은 한 시대의 깊은 속살까지 꽃피우고, 우리는 차고 단단한 바람 앞에 서서 커다란 슬픔의 뒷모습만 보게 된다
7.
가을 금호강
여름내 노랑어리연꽃 요정처럼 반짝이던
금호강 안심습지 갈대밭 너머
팔공산 검푸른 남쪽 능선이 완강하다
줄지어 날아오른 청둥오리들
강물이 한 번씩 뒤척일 때마다
팔공산 능선에 차례대로 가 꽂힌다
오리들 떠난 빈자리
오석(烏石) 한 점 주워드니
제법 능선이 길게 뻗은 원산경(遠山景)이다
눈높이로 들고 실눈으로 바라보니
멀리 팔공산 능선이 겹쳐 보인다
주봉과 부봉 사이
한 무리 철새들 내려앉아 몸 부빌 만한
역광의 눈부신 갈대밭도 보인다
저녁햇살이 강물 잘게 접어 흘려보내는 동안
돌 한 점 들고 물가에 서서
마음이 저무는 쪽 오래 지켜본다
문득, 시든 이삭물수세미 지키는 가시덤불 속에서
새 새끼 잠 트집하는 소리 들린다
이윽고 팔공산 한 자락 떼어들고
어두워진 길 더듬어 돌아와
책상 위 수반에 길게 눕힌다
새들의 울음소리
밤새도록 소복이 돌 위에 내려앉는다
8.
돌의 시간
돌은 사물이 아니라 시간이다 돌을 길러본 이는 한 겹씩 시간을 벗겨내는 인고의 맛 아느니, 돌에 물주고 돌에 햇빛 쬐이고 돌에 바람 쐬이다 보면 어느 순간 돌은 속살을 드러낸다 켜켜이 가슴에 쌓아온 물소리 바람소리도 토해낸다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두 해가 아니고 일이십년이 아닐 수도 있다 깊은 골짜기 모암에서 떨어져 나와, 수십 억 년 물과 바람에 씻기고 다시 흙 속에 묻혀 군살 털어내고 다시 흙 밖으로 나와 물길 따라 뒹굴며 흐르는 동안, 돌은 누가 불러내 해독해줄 때까지 겹겹의 무늬로 온몸 감싼다 그 무늬 속 나이테 따라가다 보면 억 년 전 불의 제단과 만 년 전 얼음궁전과 천 년 전 먼 우레의 들판이 바람벽처럼 우우우 일어서서 삼년 홍수와 칠년 가뭄까지 불러낸다 오늘 돌 앞에 서서 우러러 경배하는 나의 아침이 아, 천길 물속처럼 고요하다
9.
황금빛 모서리
- 박명薄明의 시 1
붉고 큰 해
낙동강 건너, 가야산 너머
지고 있다
일몰이 아름다운 분지의 도시
동쪽 끝 숲 아래
다시 숲을 이룬 고층 아파트단지
흰 모서리가 서서히 황금빛으로 익어간다
황금빛 모서리 속으로
조금씩, 머뭇거리며, 저녁어스름 스며들고
도시의 모든 모서리가 예각으로 뚜렷해진다
한낮엔 잘 보이지 않던
사물의 옆얼굴, 그러나 잠시뿐이다
사랑과 미움의 경계를 눈치채기 어렵듯
낮과 밤의 경계에서
황금빛 모서리는
잠시 그 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10.
허수아비로 서서
어제는 하루 종일 비 내려
강원도 산골마을마다 물 넘친다
막무가내로 달려 나가는 물가에 앉아
물길 따라가는 내 마음 가만히 들여다본다
달려가는 물길 끝
문득, 네가 잠든 도시가 있음을 느낀다
지금 너와 나 사이
전화선 같은 먼 물의 길이 환해진다
밤새도록 물소리에 귀 씻으니
마음까지 씻겨 텅 비어 버렸다
봉창이 희뿌옇게 밝아질 때쯤 되니
마음은 이제 더 씻겨질 게 없는지
한없이 고요한 적막강산을 이룬다
바람 한 줄기 지나가는 모습 선연하고
물안개 피어오르는 소리 들려온다
내 마음 모두 너에게 보내고
환한 적막강산 속에 허수아비로 나는 서 있다
잘 가거라, 내 그리움
너에게로 가서
너의 그리움이 되어라
11.
풍경하다
목이 마르듯 눈이 말라
다시 길 나서면
강아지 두 마리 장난치며 앞장선다
새끼는 환한 햇살 아래 어미 뒤를 따라가고
강둑엔 물오른 수양버들이
선 채로 강물에 긴 머리채 감고 있다
이따금 바람이 다가와 천천히 흔들어 말려주고
봄볕이 다시 한 번 보송보송 말려주고 있다
다시 먼 길 나서며 주위를 둘러본다
어쩌면 늘 되풀이되는 풍경風景이지만
세상에는 어제와 똑같은 풍경은 다시 없다
풍경이 이마에 풍경風磬을 달고 앞장서면
나는 늘 풍경諷經하는 구도자가 될 수밖에 없다
더 유심히 바라보고 싶은 안욕眼慾이
내 마음에 풍경을 달게 하고,
길 위에서 영원히 잠들기 위해
결국 기차를 타게 한다
기차는 기적 대신 풍경 소리 울리며
천천히 산모롱이 돌아나가며 선잠을 깨운다
인간의 마을 기웃거리며
강을 건너, 광야를 지나
먼 은하계까지 날아오르는
나의 기차는 자주 길 위에서 잠들고
다시 오래 꿈꾸며 풍경할 것이다
12.
안 보인다
안 보인다
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는 말이 아니라
안이 보인다
는 말이다, 라고 이태수 시인은 말하고,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라고 박정대 시인이 중얼거렸는데,
언어란 얼마나 감질난 유희인지
시는 얼마나 감질난 것을 감질나지 않게 말해야 하는지
말만으로는 말이 잘 안 되지
나팔꽃 줄기처럼
분위기가 잡히면 저절로 뻗어 나가 꽃을 피우는 언어
13.
선술집 바라지의 젊은 사장은
- 방천연가 4
방천시장 갈매기골목 안 선술집 <바라지>의 젊은 사장은 꼭 내 작업실 문 앞에 와 전화를 건다 집안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그의 목소리는 조심성이 없다 그런데도 목소리가 참 착하다 아가씨에게 수작 거는 내용인데도 밉지가 않다 이따금 터뜨리는 웃음도, 비 갠 아침 나뭇잎에 맺혔던 물방울이 떨어지며 햇살을 사방으로 흩뿌리듯, 순간적이며 폭발적이다 눈부시기까지 하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낮 시간에 꽃꽂이강사가 되기도 한다 다분히 실험적인 그의 작품은 꽃보다 마른 가지가 더 많고, 게 중에는 위태롭게 뻗어 나와 내 작업실을 기웃거리는 놈도 꼭 한두 개 있다 유심히 보면 가장 긴 가지 끝에는 그의 웃음이 늘 몇 방울 맺혀 있다가 내 눈에 들키면 까르르 폭발한다 그걸 난 바르르 떨고 있다고, 사정하는 수컷 같다고 우겨보기도 한다 그럴 때는 김광석이 길을 건너와 젖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다 집 앞에 흩어져있는 웃음을 쓸어 담아주고 간다
14.
수상한 꽃나무
- 방천연가 9
떨어지는 저 꽃잎 따라가면
오십천 가 산비탈 숨 가쁜 복사꽃이 나올까
떨어지는 저 꽃잎 따라가면
선암사 각황전 돌담길에 핀 홍매화가 나올까
떨어지는 저 꽃잎 따라가면
보은 19번 국도변의 환한 살구꽃이 나올까
일제 때 정미소였던 녹슨 양철집 옆
전봇대 대신 서 있는 키 큰 꽃나무 한 그루
정태경 화가의 그림이다
그림 속의 수상한 꽃나무다
방천시장 낡은 골목이 녹빛으로 저물고
수상한 꽃나무는 각혈하듯 자꾸 꽃잎만 게워내고 있다
양철집 이층 창문에 불이 켜지자
초저녁 봄밤이 새싹 빛으로 꽃피고
수상한 꽃나무는 이층 방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하는지
붉은 꽃잎 수음하듯 울컥울컥 온 골목에 흥건하다
사람들은 꽃비 속을 찌푸린 얼굴로 지나가고
누군가의 붉은 마음이 함께 바닥에 깔린다
15.
치악산 상원사에서
주지스님에게 짐짓 대들어본다
당연히 나보다는 더 정확할 것이라는 믿음은 있지만
어깃장 놓는 건달처럼 자꾸 떼를 쓰고 싶어진다
- 스님, 저 나무 이름이 전나무 아니에요?
- 제주도에 있어야 할 구상나무가 어찌 이곳까지 올라왔어요?
- 추사의 세한도 같은 정신을 느끼려면 어디쯤에서 보는 게 좋을까요?
스님은 빙그레 웃기만 하다가
보름달밤에 다시 찾아오란다
보은報恩의 종각*과 돌올한 저 구상나무와 허공에 뜬 달
같이 보고난 뒤
삼배로 예를 갖추고 나면
저 까마득한 나뭇가지에 걸 마음 하나 보여주겠단다
* 종각 속에는 치악산雉岳山의 유래가 된, 꿩의 보은설화로 유명한 범종이 있다.
16.
서풍수마
운남성 여강의 수허고성 주파가酒吧街 한가운데
적토마 갈기 빛 간판을 단 카페, 서풍수마西風瘦馬*가 있다
가을바람처럼 쓸쓸하고 가을 말처럼 야윈 서체로
칠채운남七彩雲南**을 지키고 있는 카페
서풍수마 앞에 나와 앉아 모닝커피 마시면
수로에 반짝이는 아침 햇살이
목덜미에 어른어른 물비늘 끼얹어도
옥룡설산 흰 이마 환하게 눈부시다
미간 찌푸리며 지그시 눈 감으면
온 마을이 돌길이라서
옆 골목 지나가는 이른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음악처럼 귓가에 찰랑거리는
물소리 속에 잘 녹아든다
설산의 만년설 녹아내려 고성의 수로를 채우고
삼안정三眼井*** 물 깃는 처녀의 희고 긴 손가락이
세상에서 가장 정갈한 아침을 연다
* 원나라 시인 마치원馬致遠의 ‘천정사天淨沙’에 나오는 시구.
** 운남성의 슬로건. 운남을 일컫던 옛말 ‘채운남현 채운남현(채색구름이 남쪽에 보인다)에서 옴.
***삼안정三眼井은 운남 고성의 나시족 수로 문화를 대표하는 샘터로, 일수삼용一水三用(식수, 채소씻기, 생활용수)하는 자연친화적인 생활 전통임.
17.
무월 달빛마을
누구든지 무월 마을 돌담길 걷다 보면 대낮인데도 돌담 사이 푸른 달빛이 도둑고양이처럼 숨어있을 것 같아 자꾸 무릎 굽혀 돌 틈을 살펴보게 된다
제주 애월 바다가 긴 수평선 끌고 남해 바다 건너와 담양 금산에서 동쪽 망월봉 머리 위로 비스듬히 척 걸쳐놓은 달빛 한 장, 그런 달밤에는 애월(涯月)과 무월(撫月)의 마음이 너무 달라 자주 눈감고 달빛소리 듣는다
달 어루만지는 손길 훔쳐보며 옥수수 잎들이 뒤꿈치 들고 숨 가빠지면, 분지의 들판도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수런거리고, 달빛은 고여 넘치다 개울로 내려가 마을 밖으로 몰래 빠져나간다 달빛이 알을 슬어놓은 듯 미처 따라가지 못한 윤슬이 오래 개울가에 남아 반짝인다
무월, 하고 중얼거리면 달빛이 빚어내는 탱탱한 화음이 과즙처럼 입안에 퍼지고, 푸른 달의 정령이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보인다 방문객들은 하룻밤이라도 무월 마을 사람이 되고 싶어 오래 돌담길 긴 골목 서성거린다
18.
그 해 가을
노을에 젖은 고로쇠나무 지나
사람들은 바람 속을 굳은 얼굴로 지나갔다
이웃이 집을 짓고 겨울채비를 하고
더러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동안
나는 가을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갔다
까닭 없이 몸이 아파왔다
열이 내리면 횃불 같기도 하고 사랑 같기도 한
가을앓이, 행간 사이로
부질없는 송신의 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잠시 반짝이던, 때 묻은 희망의 새벽 지나
야윈 햇살 아래 내려서니
고로쇠나무는 잎을 모두 버리고
좀 더 나이든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문 앞에 나와 석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시 행간 사이 자욱한 노을이 지고
오리무중의 수상한 잠 속으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19.
서쪽 마을의 불빛
1
아침마다 지워지는
서쪽 마을로 가는 작은 길 하나
밤이 되면 다시 낮아지는
달이 뜨면 더욱 낮아지는
서쪽 마을로 가는 작은 길 하나
흐린 불빛 따라 걸어가 보면
걸어간 만큼 다시 멀어지는
멀어지다 한순간 기우뚱 스러지는 불빛
아, 힘없이 타박타박 되돌아와서
뒤돌아보면 불빛은 다시 희미하게 흔들리고
이윽고 눈뜨고 꿈속으로 걸어들면
물빛 지붕들과 나무들 사이
향기로운 구름 서성이고
굴뚝마다 따스한 연기 띄우는
꿈꾸는,
풋풋한,
맨발의 땅
2
가자, 저 멀리 잠깐 비치다가 사라지는 서쪽의 흐린 불빛 향해, 눈물빛 언덕 지나 십 리도 못 가 발병 나는 고개 지나, 가자 어여쁜 서쪽으로, 찌푸린 파도 지나 철쭉 힘있게 모여 핀 바닷가 지나, 이 땅의 흐르는 물 흐르는 바람도 데리고, 가자 가자 서쪽 마을의 작은 불빛 향해, 절망의 발자국마다 꺼지지 않는 불빛이 고일 때까지
20.
이월의 노래
팔공산 순환도로 아스팔트 위
눈길에 미끄러진
타이어에 깔려 죽은 고슴도치
미처 세워보지도 못한, 부드러운, 말라붙은
털 한 줌
짓밟힐수록 더욱 단단히 아스팔트에
껌자국처럼 붙어서
아직도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눈 부릅뜨고 있다
팔공파크호텔 뒤
노송 아래
나쁜 짓 하다 들킨 어린애처럼
잔설이 낭패한 표정으로
숨어 엿보고 있다
21.
세월
이십 년쯤 전이던가
너의 편지 펼치면
단발머리의 웃음소리 까르르 쏟아져 나왔지
십 년쯤 전이던가
너의 전화 받으면
여름숲 물방울 같이 튀어 오르던 목소리 눈부셨지
오 년쯤 전이던가
단발머리의 웃음과 눈부신 목소리 그대로
비로소 처음 만나 마주앉았지
오늘에야 나는 깨닫는다
우리는 이승에서
한번만 만나도록 태어났음을
네가 없는 첫날 아침
너의 마지막 편지를 다 읽지 못하고
나는 그만 눈을 감는다
네가 펼쳐 놓은
아득한 서녘 하늘, 아아
숨 막히는 화엄이 너무 잔인하다
22.
아버지의 뒷모습
민들레 피어난 봄길
저만큼 앞서서 산을 내려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훤칠한 키에 늘 보기 좋았던
일흔이 넘어도 정정하시던, 아버지의 걸음걸이
아, 오늘은 완연한 노인의 모습이다
어깨가 조금 처지고 보폭도 좁아져
조심조심 내려가시는 저 뒷모습
어찌할꺼나, 아버지
당신의 길 끝을 향해 저토록 조심스레 걸어가신다
낡은 잿빛 중절모 위로
건너산으로 이어지는 황토빛 길 하나 내려와 앉아
아지랑이 피워 올리며 손짓하는
이 봄날에
23.
미나리꽝
밤마다별이기를달이기를바라며
아홉남매낳아놓고
달도별도아닌낭자골언덕받이흙이되신할머니
댕기머리일렁이던개암나무그늘떠나
꽃가마길풀섶속두어점눈물방울심은후
아궁이에청솔가지지피면서도눈물없었다던할머니
한세상분홍가슴꽃비로적시며미나리꽝가꾸다
산수국그늘같은눈빛으로임종밝히시며
매화봉내려오는바람앞에환하시던할머니
맑게가꾼봄미나리연한줄기씹으니
사변때한줌재로돌아온막내아들안고도매화봉만바라보셨다는
눈물냄새눈물냄새눈물없었다던할머니의눈물냄새
24.
벌 마시기
청보리밭 바람결만 탐스럽던 오월 스무하루 묘시, 경인생 범띠로 태어났다 아침 햇살 눈부셔 잠도 없이 밤낮 울고 우니 칠七 안에 할아버진 삼신할미께 빌었다 감꽃 노오랗게 깔린 뜨락,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소여물 마시며 빌었다 밖에서 어떤 벌 받을 일 하셨는지 몰라도 도포까지 입고 꿇어앉아 소여물 마시며 빌었다 ― 아, 서른이 넘고 아이를 길러보니 여물처럼 풋풋했다던 할아버지 눈빛 보인다 ― 정화수 하얀 사기그릇 속 물기 많은 봄하늘 내려와 앉았을 때, 할아버지 무성한 은빛 수염 어느 쪽으로 날렸을까 할아버지 투명한 욕망 그윽이 피어나는 그 오월 아침 한때, 무명 도포자락 스치던 바람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25.
빈 마음 하나
자정이 넘으면 나의 더듬이는
숨죽인 먼지까지도 감지한다
먼 곳에서 잠든 그대 숨결도 수신한다
자정이 넘으면 나의 더듬이는 또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작은 노래 하나 내보낸다
자정이 넘으면 그러나 나의 더듬이는
빈틈없이 다가서는 어둠과 어둠 뒤에 멈칫 돌아눕는
비어서 쓸쓸한 마음 하나
낭패한 표정으로 끌어안는다
나의 더듬이 끝에서 비로소 불 밝히는, 그대
아, 비어서 빛나는
마음 하나
26.
혼자 부르는 사랑노래 ․ 3
누가 파도를 앉아서 노래하느냐
동해에서 서해에서 다시 남해에서
흰 이마 나부끼며 달려오는
한때는 눈부신 노래였던 파도,
달 없는 한밤중이면 한반도는
온몸 옴츠리며, 아무도 모르게 파도에 밀리며
충청북도 제천쯤에서
여린 속살에 잔주름 하나를 긋는다
정말 아무도 아무도 모르게
한밤내 다친 속살 은밀히 씻고
내 사랑은 강을 열어 파도를 돌려보낸다
아침이면 바다는 튼튼한 기쁨으로 출렁이리니
누가 파도를 앉아서 노래하느냐
27.
무명악사의 기도
하느님, 썩은 물 흐르는 신천을 돌아
한일로 거쳐 한밤중 동성로로 들어서시는 하느님,
불 켜진 환락의 창 헤아려 수첩에 적고 계시는
하느님, 불 끄고 깨어 앉은 내 노래는 왜 스쳐 가시나요
술꾼에게 주는 내 노래는 끝났지만
변두리에 두고 온, 넝마처럼 뒹구는
내 새끼들의 작은 꿈 넘보는, 연탄가스나 전자오락실
이웃의 저질 비디오, 왜 그들에겐 호통 한번
안 치시고 그냥 지나가시나요
불 꺼진 술집에 앉아 밤마다 전기 나간 기타를 닦지만
사실과 진실을 늘 다르게 보려는
못된 내 시력은 왜 나무라지 않으시나요
하느님 하느님, 편집광적인 나의 하느님,
나도 전산기로 통계나 내며 살게 해 주세요
우리 김 사장처럼 장사꾼들 틈에 끼여
돈도 좀 벌게 해 주세요, 오입을 하고도
아내에게 떳떳할 수 있고, 아내의 곗돈 정도
슬쩍 떼먹을 수 있는
강심장이게 해 주세요, 하느님
제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수 없어요
도와주세요, 하느님
남의 노래 부르다 머리 희어지면
팁 없이도 신명나는 나의 노래를 부르게 해 주세요
당신이 부르시기 전, 단 한번만이라도
눈부신 햇살 아래
나의 꿈을 노래 부르게 해 주세요
네, 하느님
28.
가을 일기
햇살은 낮은 목소리로, 바람은 따뜻한 걸음으로 하오의 언덕 넘어왔다 먼 데 사람 생각나는 초가을, 잘 익어가는 잡목숲 속 조그만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 키큰상수리나무사이생각에잠긴새털구름바라보고파이프를두번이나청소하고앉은채바지단추 열고오줌도한번길게누고오래숨멈추고싸리나무가들국화에게수작거는소리엿듣기도하고가까이서들리는새소리에화들짝정신들기도하고성냥개비끝다듬어아무도모르게그리운이름아카시아잎뒷면에가만히써두기도하고 ― 이윽고 새소리 그치고 날빛 흐려 저문 산 마주보며 내려왔다 내려오며 두 번을 돌멩이에 걸려 휘청거렸고, 다섯 번을 뒤돌아보았다 마을로 가는 굽은 길 끝엔 흐린 별빛 두어 점 풀잎 위에 앉아 있었다
29.
오월의 편지
등나무 그늘에 앉아
보랏빛 오월 따 놓고
긴 하품하고 있을 당신에게
바람은 작약밭에 들고 가장자리 당신이 가꾼
모란 붉은 잎 함께 흔들리니
지금쯤 당신은 초록빛 잉크로 편지를 쓸 테지
마침표 없는 편지
문득 봄 강물 뒤척이는 소리
아, 그리운 당신
30.
<사계四季의 5행시>
(봄)
개심사 청벚꽃
개심사 돌계단 옆 능수벚나무
초파일 기다려 꽃 피우려다
요실금처럼 아랫도리에 찔끔 흘려버린, 연둣빛 첫 청벚꽃 몇 점
어쩔거나
이 봄날 숨 막히는, 저 아찔한 화두!
(여름)
숨어있는 절
여름 한낮, 한껏 부풀어 오른 팔공산 능선 타다
숨어있는 절 한 채 내려다보여,
하안거夏安居 든 자태 하도 이뻐 보여,
다가가 어깨 툭 쳐 말 걸어보고 싶어, 취한 듯 홀린 듯
오래 된 경전經典 같은 숲길 더듬어 내려갔다
(가을)
가을산
계곡물은 덤불 속 참새 새끼들과 해종일 종알종알 다툰다
물가에서 귀 멍멍해진 붉나무
엉겁결에 우듬지의 잎들 모두 내려놓는다
지나가던 흰 구름 내려와 슬쩍 붉나무 이마 짚어보고는
괜찮다는 듯 산을 넘어가 버린다
(겨울)
달빛 경전
겨울산이 울면 눈이 내린다
겨울산에 눈 내리면 밤이 길다
긴 겨울밤 눈에 갇혀 산사山寺는 열반에 들고
풍경風磬 홀로 얼지 않고 밤새도록 염불 왼다
달빛이 눈 위에다 그걸 받아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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