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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활동가로 일하고 있던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문을 열고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서너 분의 어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오셨냐"고 여쭈니 자신들을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들의 부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저는 말로만 듣던 '인혁당 재건위' 가족들과 그렇게 처음 만났습니다.
'인혁당 사건', 진실은 무엇이었나
▲ 2009년 4월 9일 오후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인혁당 민주열사 34주기 추모제'에서 한 참가자가 헌화를 마치고 큰 절을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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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은 '인민혁명당'의 준말입니다. 흔히 '1차 인혁당'과 '2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분되는 이 사건은 파란만장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964년 8월 14일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을 적발했다"는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발표로 인혁당 사건은 시작됩니다.
당시 중정은 "북괴의 노선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포섭하려다 적발"되었다며 관련자 41명을 구속하는 한편 16명을 수배 내렸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중정의 발표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국민 몰래 추진하던 굴욕적인 '한일 회담'을 반대하는 시위가 국민적 항거로 발전하던 때였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예상처럼 당시 중정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 역시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의 배후 조종 때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중정의 거창한 발표는 당시 양심적인 서울지검 검사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즉, 중정으로부터 이 사건을 송치받아 수사한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중정의 주장)에게서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 구속기간 만료일인 1964년 9월 5일, 공안부 검사들은 '기소할 만한 가치조차 없다'며 이들을 기소하는 기소장에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당시 신직수 검찰총장은 중정의 압박 속에 끝내 서명을 거부하는 검사를 대신하여 수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당직 검사에게 기소장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조작된 사건을 억지로 맞추다 보니 이후 과정 역시 매끄러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64년 10월 15일 무리하게 기소한 피고인 26명 중 오병철, 서정복 등 14명에 대해 공소를 취소하여 석방하고 나머지 도예종, 박현채 등 13명에 대해서만 지금은 없어진 반공법 단순 위반인 찬양·고무죄로 기소합니다. 거창한 간첩단은 사라지고 사실상 무죄를 받은 것입니다.
즉, 굴욕적인 '한일 회담'을 반대하는 시위가 거세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여 간첩단으로 만들었던 사건이 바로 1차 인혁당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중정의 '물 고문'과 '전기 고문'으로 만들어진 이 사건으로 기소된 13명 중 5명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고, 그 외 나머지 관련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이로써 '거대 간첩단 적발'이라는 중정의 거짓말과 함께 이 사건은 세인들의 기억 속에 사라집니다.
끝내 8명을 죽인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
▲ 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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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라진 인혁당이 다시 세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1974년 4월 3일이었습니다. 이번엔 아예 유신독재 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섰습니다. 그는 유신독재를 반대하기 위해 조직된 대학생들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한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이 사건의 배후 조종 세력이 '인민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곧이어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를 적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완전한' 희생양으로 꾸미지 못했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씨를 비롯하여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씨 등을 이 사건 관련자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75년 4월 8일, 유신독재 하에서의 대법원은 "인혁당을 재건하여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도예종 등 8인에게 사형을 확정, 선고합니다. 그리고 다시 18시간 후인 다음날 새벽 4시. 중정의 참담한 고문으로 탈장 되고 반신불수가 된 여덟 명의 사형수들은 복도로부터 울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푸른 여명이 채 걷히지도 못한 그 새벽에 모두 사형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새벽과 함께 스러지는 별이 되기를 빌었는데/ 미안하오./ 새벽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하는 길/ 미안하오/ 미안하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방송에서 '인혁당 건위 사건' 피해자 이수병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뒤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판화가 이철수 화백은 새벽 별과 함께 처절한 죽음으로 끌려간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남은 가족들의 삶, 또 다른 비극
▲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이들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2007년 1월 23일 오전 무죄를 선고하자 유가족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 오마이뉴스 남소연 |
매년 4월 9일은 그래서 '사법 암흑의 날'입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당시 '국제 법학자 협회'가 인혁당 재건위 관련 8인이 사형 집행된 그날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날 새벽에 자행된 이 야만스러운 사형 집행 소식을 모른 채 서대문 형무소를 찾은 사형수의 부인들에게 이 사실은,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불과 1년 전, 상상도 못했던 남편과 가족의 구속 이후 이들에겐 단 한 번의 교도소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답니다. "공산 독재도 아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럴 수 있냐"며 항의했지만 "수사와 재판중이라서 안 된다"는 그들의 말도 안 되는 횡포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지긋지긋한 거짓말 재판도 모두 끝난 4월 9일, 이제는 면회를 시켜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그곳에서 듣게 된 가족의 사형 소식 앞에 이들이 느낀 처참한 심정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요. 연행 이후 남편에게,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물 한 모금 떠먹여 주지도 못한 채 이렇게 참혹하게 죽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절망을, 스스로는 원망하며 울부짖었던 그 고통을 도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제가 여전히 잊히지 않는 그 어머니의 가슴 아픈 이야기는 남겨진 사형수의 아들, 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습니다.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 아버지를 둔 아이들 에게 역시 '빨갱이'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어느 날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찾던 어머니가 마을을 돌아다니던 때였다고 합니다. 마을 입구의 나무에 아들이 묶여 있고 또 다른 마을 아이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달려가 보니 철없는 마을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빨갱이라서 죽었으니 너도 총살되어야 한다"며 나무에 묶어 놓고 총살시키는 장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빨갱이를 우리 동네에 둘 수 없다"며 나가라는 마을 주민들에게 사정사정하여 겨우 살아가던 그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화도 낼 수 없어 그저 말없이 묶여 있던 줄을 풀고 아들과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무나 서러워서, 너무나 서러워서 아들을 붙잡고 울었다는 그 어머니의 눈물은 이내 제 눈물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러고도 도대체 무엇이 더 부족하단 말입니까.
우리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그래서 어머니들이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찾아온 것은 "이제라도 우리 남편들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호소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98년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후 김대중 정부 하에서 이제 지난날 억울하게 조작된 이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사형된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나서 달라는 호소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저 역시 그 어머니들의 말씀에 깊이 동감했습니다. 유신 독재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고문과 조작으로 일그러진 이 사건의 진실을 바로 잡는 것은 민주정부라면 당연히 해야할 '의무'라고 저 역시 생각했습니다.
곧바로 지난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치사사건을 폭로한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신부님에게 인혁당 유가족의 하소연을 말씀드리자 신부님은 기꺼이 "인혁당 사건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아 주셨습니다.
이같은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노력으로 처음 시작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싸움은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그 진실이 하나 하나 밝혀지게 됩니다. 가장 먼저 진실을 외친 곳은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였습니다. 지난 2002년 12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임을 조사 결과로 밝힌 것입니다.
이어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역시 과거 자신의 전신이었던 중정이 이 사건을 조작했음을 고백합니다. 진실위는 "유신체제에 대한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당시 박정희 정권이 이들 학생 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조작한 국가 형벌권의 남용"임을 밝히면서 "이처럼 조작한 이유는 당시 권력의 정당성이 없는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리했습니다.
마침내 2006년 12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는 무고하게 사형된 8인의 이름을 하나 하나 호명합니다.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을 선고합니다. 원심을 모두 파기합니다. 피고 각 무죄."
재판장 문용선의 무죄 판결이었습니다.
인혁당 희생자 8인을 또 죽이지 마라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자료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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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아버지 박정희가 죽인 인혁당 재건위 사형수들을 상대로 그 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다시 한 번 조롱하고 부관참시하는 언행을 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인내하기 어려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 같은 사람이 이럴진대,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그 가족들에게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새로운 고통일 것 입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사회자 손석희씨의 질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라며 "앞으로의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답을 제가 한 적이 있다"고 답한 것입니다.
물론 5·16 군사 쿠데타와 유신 독재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역사적 평가에 맡기자는 황당한 평소 그의 지론에 비춰보면 사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그의 주장 역시 새삼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정치적 의미인 5·16 군사 쿠데타나 유신 독재와 달리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살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억울하게 목숨을 빼긴 이들의 숨결이 아직 남아있는 사건입니다. 이 불쌍하고 억울한 사건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박근혜 후보가 가한 발언들은, 그래서 더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럽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오랜 세월 고통스럽게 살아온 그들의 생살 위에 '굵은 소금을 문지른 고통'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요.
적어도 지금 보여주고 있는 언행만 보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그 아버지 박정희씨에게 틀림없는 '효녀'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가 흘리는 피눈물을 외면하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할 일입니다.
이제 선택은 박근혜 후보의 몫입니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후 유신독재를 한 아버지의 대를 이은 또 다른 형태의 '독재자 이미지'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 대에서 이뤄진 악행에 대해 용서를 빌고 스스로 말하는 '국민 대통합'을 이룬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인가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오만 불손하고 편리한대로 해석하는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 행보한다면 그 끝이 어디에 닿을지 모를 바보는 없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각성과 반성을 거듭, 촉구합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인혁당 희생자를 추모하며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