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철 꽃들이 길가에 정원에 꽃집에 흥청흥청 피어있다. 봄이면 프리지어, 수선화, 목련을 시작으로 여름이면 수국, 능소화, 배롱나무가 흐드르진다. 가을 국화에서 겨울 동백, 사계절 장미까지 꽃들이 계절마다 마음을 흔든다. 프리지어는 봄날 햇살 같아서 수국은 수시로 변하는 마음을 닮아서 눈길이 간다. 배롱나무는 여름 막바지에 삭여야 할 열정의 끝이 보여 안타깝고 국화꽃은 아픈 동생이 좋아하는 꽃이라 눈시울 붉어진다. 겨울날 창백한 백장미 한 송이는 또 얼마나 고고하고 도도하다.
한때 속을 알 수 없는 겹겹의 장미를 지독히 사랑했다. 시든 잎을 떼내어도 또 다른 한 잎 한 잎이 쉼 없이 소용돌이치는 비밀스러운 경지.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신비감을 지닌 장미는 다양성까지 갖추어 무쌍하게 변신하는 여인을 닮았다. 때와 장소와 상황에 맞추어 얼마든지 크기와 색깔의 변화가 가능한 장미는 현대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때로는 순진한 소녀 같은 얼굴로 가끔은 성숙한 여인의 향기로 때로는 거리의 여자처럼 진한 분향을 풍겨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장미를 연모했던 여자도 나이를 먹나 보다. 그림을 배우는 동생이 어떤 그림을 선물 받고 싶은지 물었다. 좋아하는 꽃이 그득한 그림 한 점 거실 벽에 거는 건 사치스러운 소원이라고 에둘렀다. 들판에 핀 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바람 소리가 들리고 달빛이 흐르고 강물의 뒤척임이, 풀벌레 울음이 귓가에서 소소댄다. 상수리나무 열매가 여물고 복숭아는 달큰한 향기를 뿜고 땅속 뿌리식물에는 대지의 기운이 물오르는 계절과 내가 좋아하는 꽃은 잘 어울린다.
어느 날부터 숨김없이 담백한 꽃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숨 막히게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꽃에서 차츰 멀어졌다. 양귀비꽃이나 코스모스, 무궁화처럼 하늘을 향해 연신 맞춤한 미소를 보내는 꽃들, 그중에서도 제 속 모두 열어 산천 들녘에 무구하게 피어 눈 맞춤하는 꽃은 얼마나 오롯한가. 다섯 장의 꽃받침, 하나의 꽃잎이 다섯 개로 나뉘어 하늘과 대지를 행해 해정한 웃음을 웃는 꽃, 꽃잎은 대개 흰색이나 보라색이지만 단순한 하양이나 보라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희지만도 않은 초란 색이며, 연보라인 듯 청보라가 감돌고, 꽃 잎맥을 들여다보면 진보라 혈맥이 결 고운 무늬로 새겨져 있다. 다섯 개의 수술이 지고 나면 하나의 암술은 다섯 개의 별로 나뉜다. 꽃 속의 별, 별 속의 꽃, 요란하지 않지만 당당해서 아름다운 도라지꽃은 그래서 흔한 듯 귀하다.
늦봄에 안동 고택 만송헌에 갔다. 음악과 춤, 시와 수필, 옛것과 새것이 어우러져 한바탕 문화공연이 열렸다. 뉘엿한 오후의 햇살이 어둠을 끌고 오자, 고택에는 오래된 마룻결을 닮은, 결이 분명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줄기 밤바람에 안부를 나누고 글과 소리, 춤사위를 나누는 곳에서 한 여인이 자분자분 움직였다. 은은한 보랏빛 깨끼치마에 받쳐 입은 연회색 저고리가 조명을 받아 우윳빛으로 빛났다. 들판의 백도라지, 보랏빛 도라지가 고택 마당에 피어있은 듯 고아했다. 전국의 문우들과 소리꾼, 무희들 속에서도 결코, 숨겨지지 않는 기품, 그녀는 그날의 사회자 겸 낭송자였다. 조곤하지만 분명한 발음, 심장의 박동을 조절하는 목소리는 죄중을 감동시켰고 단아한 외양만큼 겸손한 자세는 사람들에게 박수받기 충분했다. 요란하지 않아도 귀함이 느껴져 함부로 꺾지 못하는 꽃, 그 꽃을 닮은 사람과 함께한 시간은 참으로 충만했다.
도라지꽃처럼 속을 환히 열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라도 무장해제 된다. 걸림 없는 생각은 거리낌 없는 삶 때문인지 모른다. 사회생활의 기술도 접대용 언어도 밀고 당기는 피곤함도 잊는다.
곁에 두고 보고픈 사람이 있듯이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꽃이 있다. 무구한 바람을 알았는지 보자기만 한 자투리땅에 도라지 씨를 뿌린지 세 해. 꽃이 벙글었다. 탄생의 종을 켠 듯, 기원의 촛대를 올린 듯, 빈 듯이 꽉 찬 도라지꽃이 환하게도 피었다. 꽃방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아기씨꽃, 활짝 핀 아씨꽃이 여름날 열기 속에 보랏빛으로 한껏 달아올랐다. 무성한 풀과 뒤섞인 줄기 곳곳 화무십일홍을 어쩔 수 없어 색 바랜 꽃잎도 곳곳에 있다.
도라지꽃은 가야 할 때를 안다. 숙명을 다하면 삼베옷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염을 한다. 보랏빛이 점점 바래지며 말라간다. 수의를 입은 듯 몸을 정갈하게 말아 무춤무춤 작아진다. 삶을 저울질 않고 들판이든 도시 한복판 자투리 공간이든 가리지 않고 살았어도 때가 되면 욕심 버리고 미련 없이 생의 습기를 말린다. 바람의 수런거림과 달빛의 흐느낌조차 별일 아니라며 다독대다가 스스로 장만한 옷을 입고 홀연히 떠난다.
지는 모습조차 숙연하다. 시들면 꽃잎들을 흩어버리며 질척이는 꽃들과 달리 고치를 말듯 염을 하듯 스스로 육신을 말리는 생명, 색이 바래며 작아지는 주검, 정작 생의 오욕을 탈색하고 번득이는 욕기(慾氣)를 말려서 돌아가야 할 생명은 인간인데 꽃이 먼저 알고 돌아간다. 뒷모습까지 단아한 도라지꽃을 볼 때마다. 삶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와 인간의 품격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첫댓글 남 선생님의 도라지 꽃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생의 습기를 말린다. 바람의 수런거림과 달빛의 흐느낌조차 별일 아니라며 다독대다가 스스로 장만한 옷을 입고 홀연히 떠난다.*
이 대목에서 이 할미의 눈가에 서글픔이 앞을 흐려 놓더니 입가에는 '그래 그런 거야' 하며 미소가 주름진 입술을 쓰다듬네요. 도라지 꽃을 닮아갈 때 까지 읽고 또 읽을까 합니다.
남 선생님의 승승 장구를 빕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