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 볼 때면 朴正熙 대통령이 생각난다>
어떻게 해서든 가난을 극복하려는 무서운 집념이
절절하게 다가오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高建)
산이 푸르른 계절이 되었다.
푸른 산을 볼 때면 나는 朴正熙 대통령이 생각난다.
朴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산에 나무 심는 일을 매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참 일에 열정을 불태우던 젊은 副理事官 시절, 새마을 擔當官으로 있던 나에게 東大本山에 砂防事業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東大本山은 月城郡 外東面과 蔚州郡 農所面 사이에 있는 큰 산이다.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 상공으로 들어오다 보면 이 산이 제일 먼저 눈에 잡힌다.
지금이야 녹화가 잘되어 푸르르지만 당시에는 헐벗은 민둥산이었다.
이 민둥산이 울창한 일본의 산을 내려다보며
날아온 방문객에게 처음 비치는 한국의 산이라는 사실을, 朴대통령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사업의 設計者 겸 현장감독이 되어야 했다.
현지에 가보니 동대본산은 정말 악산이었다.
몇 년간 사방사업을 했지만 거듭 실패했다고 한다.
비가 오면 흙이 곤죽이 되어 무너져 버리는 특수토질이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방법, 저 방법 생각하다가 부산의 어떤 토목과 교수로부터 자문을 구했더니 一般 砂防方式 (일반 사방방식)으로는 안되고 ‘特殊砂防工法 (특수 사방공사)’을 써야 한다고 했다.
鐵筋(철근)을 넣어 콘크리트 수로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대로 해 보았다. 정말 대성공이었다.
청와대에 결과보고를 했더니 대통령이 주재하는 經濟動向報告會 (경제동향 보고회)에 참석해 그 내용을 직접 보고 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나무가 꽤 자라난 일 년 뒤에는 전국의 시장, 군수를 현장에 모아 녹화교육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실적이 있어서인지 ‘第1次 치산녹화 10년 계획’을 수립하는 막중한 과제가 내게 맡겨졌다.
워낙 농림부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던 내무부가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두어 달 밤낮없이 매달려 계획을 만들었더니 關係長官會議(관계장관 회의)에서 計劃立案者 (계획입안자)가 직접 보고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다.
보고날짜가 잡혔다.
차트사를 붙잡고 보고 전날 밤 한숨 안 자고 일을 했지만 보고시간 10시에 임박해서야 겨우 차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차트를 둘러메고 청와대 회의장에 도착하니 보고시간은 이미 10분이나 지나 있었고 朴대통령을 위시해서 총리, 장관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낭패스럽던 생각을 하면 몇십 년 지난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난다.
당황스러운 속에서도 심호흡을 하고 보고를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녹화 10년 계획의 기본방향으로國民造林(국민조림), 速成造林(속성조림), 經濟造林(경제조림)의 세 원칙을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훔쳐보니 대통령의 눈빛이 빛나며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휴- 하고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준비한 대로 찬찬히 브리핑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보고 중간중간 대통령은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하셨다.
하나같이 산림녹화에 대한 熱情(열정)과 執念(집념) 이 느껴지는 말씀들이었다.
師團長(사단장) 시절의 에피소드도 이야기하셨다.
部隊 巡視(부대 순시) 길에 플라타너스 가지를 지팡이 삼아 꺾어 짚고 다니다가 무심코 거꾸로 꽂아놓고 歸隊(귀대) 하셨던 모양이다.
나중에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다 보니 거꾸로 꽂힌 지팡이에서 싹이 돋았더란다.
나무의 생명력에 감탄을 했다 하시며 파안대소를 하셨다.
그때 웃으시는 대통령 입안에 덧니를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 地方局長(지방국장)으로 승진한 다음에는 대통령을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매달 한 번씩 청와대에서 새마을 國務會議 (국무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유일한 안건인 새마을사업 추진상황을 主務局長 (주무국장)으로서 보고 드리곤 했었다.
모두 합해 21번 보고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대통령이 새마을 사업에 대해 가졌던 열정은 잘 알려진 바이지만, 매 회의마다 그분이 우리 농촌과 국토에 대해 가졌던 뜨거운 애정, 빈곤했던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처절한 심정, 그리고 貧困(빈곤)을 克服(극복)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결연한 집념에 숙연해지곤 했다.
그 뒤 나는 전남지사를 거쳐 行政首席(행정수석)이 되었다.
1979년 1월 3일에서 10월 26일 돌아가시기까지 열 달 동안 바로 옆에서 대통령을 모셨다.
이 시절에는 대통령과 首席秘書官(수석비서관) 들 과의 저녁 회식 자리가 잦았다.
그전에는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찬이 있었는데, 이 시절에는 매주 한 번 이상이 될 정도였다.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외로우셔서 그러셨으리라 짐작한다.
朴大統領은 저녁에 곁들여 飯酒(반주)를 드시곤 했다.
막걸리 아니면 양주였다.
막걸리도 특별한 것이 아니고 고향군에서 만든 일반 막걸리였고, 양주는 시바스 리갈이 고작이었다.
반주를 드시면서 옛이야기도 자주 하셨다.
그러다가 가끔 흥이 나시면 '비탁' 칵테일을 만들어 돌리시곤 했다.
비탁이란 맥주 한 병을 탁주 한 주전자에 섞은 朴大統領 秘藏(비장)의 칵테일이다.
비탁 칵테일을 '調製 (조제)'하시는 대통령에게 옆에 앉았던 내가 “조제는 제가 하지요” 하니까
“어이, 이 사람, 이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당신은 配合比率을 모르지 않나”하시면서 젓갈로 비탁을 휘휘 저으시고는 우리들에게 비탁 칵테일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일제하 대통령이 聞慶 (문경) 국민학교 선생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젊은 선생들이 ‘기린 비루’를 마시고 싶기는 한데 워낙 박봉이라 마음 놓고 마실 형편은 못되었다 한다.
그래서 추렴한 돈으로 비루(맥주) 두어 병을 사 탁주 한 말에 부어 함께 돌려 마시곤 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구미 상모리 에 대농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지주 집에서 모내기를 할 때면 온 동네사람이 모두가 품앗이를 했다 한다.
이때 마을 아이들과 함께 朴대통령도 따라가곤 했었는데 그때 지주 집에서 주던 밥과 반찬 맛이 어른이 되어서도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호박잎에 얹힌 ‘자반고등어’ 한 토막이 그렇게 맛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통령이 마음속에 간직한 가난한 시절에 대한 한과, 어떻게 해서든 가난을 극복하려는 무서운 집념이 상대적으로 안녕하게 성장한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오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뒤로 나도 비탁 칵테일을 몇 번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朴대통령이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살게 된 탓에 내 입맛이 변한 것인지, 배합비율의 비결을 몰라서인지, 아니면 그 둘 다 인지 알 수 없다.
※편집자 주
고건 前 총리가 서울특별시장 재직 시 박정희 前 대통령을 회상하면서 쓴 글임 - 옮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