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실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즉 나는 언제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성당은 무서운 곳이었다.
9살쯤이었을까?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십리가 넘는 길이었다.
산길로 들길로 오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동네 여일곱명의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걸어서 간다.
아침에 갈 때는 늦을 까봐 쉬는 시간없이 가는데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한번 쯤 쉬어서 간다.
지금 지도를 놓고 더듬으니
노안면 금암동 성당이었던가보다.
성당 마당에 책보따리를 놓고 아이들은 논에 있는 물밤을 주워서 까 먹는다고
물없는 논으로 갔다.
난 아버지의 말씀을 참 잘 따라던듯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먹고 하지 마라"
그래서 물밤 같은 것을 주워 먹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럼 니가 지켜!"
나에게 책보따리를 맡기고 아이들이 논으로 가고 나자 난 혼자 남았다.
종이 있었던 듯 종을 보기 위해 가다가 보니 예배실이었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문을 살곰히 열고 들여다보다가 난 까무러칠 뻔 했다.
저 앞에 사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문을 닫고 튀었는지 그냥 나왔는지는 모르는데 할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책보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 이후 난 성당 같은 곳은 가지 않았다.
사람이 갈 곳이 아니었다.
후일담이긴 하지만 2년 전 금암동 성당을 찾아갔다.
사람은 십자가에 지금도 매달려 있었다.
나를 놀라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 사람이 예수였다는 것은 진즉에 알게 되었고 브라질 여행 당시 그 분의 발 아래 인사도 드렸기에,
하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마음에 깃든 무서움? 두려움, 오해를 풀기 위해서기도 했다.
"그 때는 놀라서 미안해요. 인사도 없이 튀쳐나가서."
쳐다보고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60년만의 인사였다.
어제는 성당을 찾아 갔다.
목포에 계시는 분이 부탁을 하였다.
당신을 지금 살고 있는 곳 가까운 곳에 성당을 한번 같이 가 주라고
망설였다.
그래도 될까?
자녀분들이 있는데 나에게 부탁을 한다고 선뜻 '가십시다' 할 수가 없었다.
종교문제는 집안 나름 작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성당을 모시고 간다고 하더라도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도 문제였다. 다음에 '너 때문에'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름 내가 먼저 가자는 말을 안 하면 가자고 안 하시겠지.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쯤은 뵙고 와야지. 가서 만나면 어떤 핑계를 댈까? 생각까지 하고 날자를 잡았다.
좋아하시는 머위잎 쌈밥을 만들고 식혜를 만들고 드릴 수 있는 것은 조금씩 다 해서 준비해 갔다. 동행이 있어 다행이었다.
거의 도착을 해서 전화를 드렸다.
"진짜 오긴 왔네. 하이고 고마워"
손을 잡고 어찌나 반가워 하시는지, 늦게 오게 되어 민망할 수준이었다.
차로 모시고 나와서 갓바위 바닷가에 차를 멈추고 싸간 머위잎 쌈밥으로 차에서 먹었다.
같이 간 동행은 목 수술을 해서 먹지도, 말하지도 못한단다.
식당에 안 가기를 참 다행이었다.
나는 내가 싸간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바닷가에서 머위잎쌈밥과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나니 바람이 좀 잠잠해졌다.
찻집에 가야 한다고 해서 만나면 잘 가는 찻집으로 갔다. 단팥죽과 쑥꿀레, 생강차와 대추차로 식후를 즐기고 나니 두시가 되었다.
어떤 의향이 있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닌데 지인 이야기를 하셨다.
그 지인과 성당에 같이 가자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다리가 다쳐서 못가게 되었단다.
하!
"선생님 성당에 오늘 가실까요?"
"진짜?"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래도 되겠어?"
"선생님 공자님이 나이 칠십에는 종심소욕불유구라고 했으니 가십시다"
그리고 난 미리 검색을 해 두었던 옥암동 성당을 찾아 갔다. 자녀들과의 종교문제는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인연이었을까?
신부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신부님께 그간의 연유와 오게된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 하셨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의아하겠지만 전에 많이 힘들어 하실 때 다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성당으로 안내를 해 드리고 집에 모셔다 드리고 오는데 마음이 편안해서일까?
하긴 전날 이유도 없이 잠을 3시간도 안 잔 것 같았다. 잠을 못자서일 것이다.
운전을 하는데 졸음이 와서 맞지 않은 리듬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소리를 질렀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을 하였다.
막 침대 위에 누우니 전화가 왔다.
"탱큐 쏘우마취"
정말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행복을 전했다.
큰 어른으로 사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이제는 성모마리아님의 품에서 마음이 행복하시길 손 모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