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쟁삼매(無諍三昧)>
‘무쟁(無諍)’이란 유쟁(有諍)의 반대말이다. 무쟁(無諍)에서 말하는 다툼은 말로 하는
언쟁(言爭)을 가리킨다. 쟁심(諍心)이란 상대방의 잘못된 허물을 찾아내어 말싸움에서 이기고자
하는 것을 말하므로, 무쟁(無諍)이란 불필요한 논쟁이 없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쟁(有諍)은 한 변(一邊)을 취한다. 한 변을 취하면 다른 한 변(二邊)과 대립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며,
차별돼 옳고 그름을 따진다. 일변을 고집해 한쪽 세력에 따라서 이것만이 옳고 다른 것을 그르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다툼이 있는 법들은
육체적 괴로움이고(苦),
정신적 번민이며(煩),
번뇌의 뜨거움이고(熱),
근심걱정(憂慽) 삿된 행(邪行)이다.
무쟁(無諍)의 ‘쟁(諍)’은 ‘간할 쟁(諍)’ 자이다.
‘간하는 말이나 글’이라는 뜻의
‘쟁(諍)’은 서로의 의견이 같지 아니할 때 말이나 글로 다투는 일[논쟁(論諍)]을 말한다.
‘다투다, 싸우다, 잡아 뜯다. 결론을 내다, 소송하다, 따져 말하다.’의 뜻을 가진
‘다툴 쟁(爭)’ 자와는 확연히 그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쟁은 탐착(貪着)에 기반을 둔 논쟁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사유(思惟)에 의한 건전한 논의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논쟁으로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삼업(三業)으로 인한 번뇌를 일으키지 말자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쟁(無諍)은
양변을 떠난(離二邊) 중도(中道)를 지향한다.
이 법은 융합하고,
소통하고,
수용하며,
평등한 법으로 높고 낮음과,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에 치우치지 않는다.
한쪽 세력에 따라
이것만이 옳고 다른 것을 그르다고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다툼 없는 법은 눈이 생기고(成眼),
지혜가 생겨(成智),
자재하게 선정을 이루고(自在成定),
지혜로 나아가고(趣智),
깨달음으로 나아가고(趣覺),
열반으로 나아간다(趣於涅槃).
이 법은 육체적 괴로움도 없고(無苦),
정신적 번민도 없고(無煩),
번뇌의 더움도 없고(無熱),
근심걱정도 없는(無憂慽)
바른 행(正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툼 없음(無諍)의 공덕을 닦아야 한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공개적인 날카로운 말이 거짓이고 부정확하며,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 결코 그것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진실이고 올바르고 유익하더라도 그것을 말해야 할 때를 잘 알아서 말해야 한다.」 ― 맛지마니까야 MN139 <다투지 않음에 대한 경>
무쟁은 삼매의 힘으로 중생을 보호해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과
법성(法性)에 그대로 따름으로써 어김도 없고 다툼도 없다는 뜻이다.
무쟁삼매란 마음이 편안해 아무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쟁(諍)은 ‘다툰다’는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남과 다툼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갈등이 없음을 뜻하고, 나아가서는 미혹이 없는 것이다.
경전을 펼치거나 참선 혹은 법회를 할 때 마음에 온갖 번뇌와 잡념이 가득하면 그것은 유쟁삼매(有諍三昧)이고,
번뇌가 없는 마음, 갈등이 없는 하나로 통일된 마음이 무쟁삼매이다. 그렇다면 유쟁삼매는 삼매랄 것도 없겠고,
무쟁삼매가 돼야 할 것이다.
무쟁삼매란 공(空)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소멸돼버린 순수한 상태이다.
삼매(三昧)란 하나의 대상에만 마음을 집중시켜 일심불란한 경지를 가리키는 불교교리이다.
순수한 집중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로 불교 수행의 이상적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 곧 삼매의 상태이다.
<금강경>은 무쟁삼매(無諍三昧)를,
<법화경>은 법화삼매(法華三昧)와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를,
<능엄경>은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를,
<화엄경>은 화엄삼매와 해인삼매(海印三昧)를,
<반야경>은 108 가지 삼매를,
<열반경>은 25 삼매를 각각 주장하고 있다.
무쟁삼매(無諍三昧)란, 일체(一切)를 다투거나 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경지를 말한다.
다툼이 없는 이러한 실천의 최고 경지인 무쟁삼매를 깨달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선정(禪定)은 참선을 통해 마음의 내면을 닦아 삼매경에 이르는 것으로 삼매는 선정을
이루기 위한 전 단계이다.
선정은 불교 수행의 핵심으로
삼매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무쟁삼매(無諍三昧)란,
공(空)의 이치에 머물기에 다른 것과 다툼(諍)이 없는(無) 삼매(三昧)를 일컫는데,
무쟁삼매의 특징은,
항상 중생을 관찰하되 마음이 번뇌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여러 가지로 연민하는 마음을 내어 그것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핵심은 갈등과 논쟁을 해소하는 ‘무쟁(無諍)’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또한 〈금강경〉은 개인적인 열반을 강조하는 경전이 아니라 중생 구제의 큰 서원을 세우고
부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서원하며 깨달음을 향해서 함께 가는 보살행에 대해 설하는 경전이다.」 ― 이중표
수보리 존자는 바로 무쟁삼매를 얻은 것으로 으뜸가는 존재였다.
<대지도론>에 따르면, 무쟁삼매란 늘 중생을 관찰하되 마음에 번민이 없으며, 연민에 의거해 행동하는 것으로서,
보살이라면 이처럼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고 이웃과 모든 생명체를 연민심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공(空)을 깨닫기로 최고일뿐더러, 모든 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에 연민이 가득 차 있되 제 마음에는
번민이 없는 경지로 으뜸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기 2551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법전(法傳) 스님은 법어에서 “
대립과 투쟁 속에 무쟁삼매를 이룬 이는 화해(和解)를 빚어내어 상생(相生)의 길을 열 것이며,
탐욕 속에 들어 있는 이타(利他)의 덕성을 깨달은 이는 평화와 안락을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라 하셨다.
다툼이 없는 삼매, 갈등이 없는 삼매, 그런 것이다. 삼매라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갈등이 없고 누구와도 옳고 그르고,
높고 낮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상대를 향해서는 물론,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조그마한 갈등,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수행을 어지간히 한 사람은 가능하다.
그러나 안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속으로는 온갖 상을 내면서도 겉으로는 점잖은 척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 현실인데, 그런 수준이 아니고, 마음속에서부터 한 점 어떤 갈등도 없는 그런 사람을
이욕 아라한(離欲阿羅漢)이라 한다.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란 말이다.
부처님 제자 수보리가 성취한 무쟁삼매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계로서,
옳은 생각이나 잘못된 생각을 막론하고 모든 사념 확산이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어느 누구도 보리의 씨앗으로 콩을 거두리라고 기대하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범속한 사람들은 악의 씨앗으로 선의 열매를 수확하리라고 기대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불자의 목표가 되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중심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야 될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관념이란 잘못된 사견(邪見), 어리석음,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執着),
존재하려는 집착 등 윤회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가는 ‘네 가지 폭류(暴流)’를 말한다.
이와 같은 폭류에서 벗어나 무위법(無爲法)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남’을 미워하거나 질투하고 다툴 일이 없을 것이고,
남보다 더 가지려 하거나 남보다 더 지위가 올라가려고 아귀다툼을 벌일 까닭이 없으며,
자연히 마음이 훤칠하게 트여 자유롭고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다툼을 뜻하는 ‘쟁(諍)’의 원인은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 대한 집착에 있는 것이다. 무쟁삼매(無諍三昧)에 이르는 첩경은 욕심을 버리고,
그것은 나에 대한 집착을 끊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욕 아라한(離欲阿羅漢), 곧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이다.
욕심을 떠난다는 것은 집착과 애탐을 버려서 마음에 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의심하지 말라」는 글이다.
「대저 지극한 도는 논쟁을 해서 높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큰 소리를 쳐서 외도를 꺾는 것도 아니다.
불조가 면면이 서로 이어오는 것조차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설혹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교화하는 법도에 따른 삼승(三乘)과 오성(五性)과 인천인과(人天因果)의 가르침(敎化)에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교 돈교는 또한 그런 것이 아니다. 선재동자도 남김없이 법을 구하고 선지식을 찾는 일을 마치지는 못했다.」
※삼승(三乘)---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오성(五性)---
➀범부성(凡夫性),
➁2승(二乘, 성문승, 연각승),
➂보상승,
➃외도성(外道性),
➄부정승(不定乘, 범부라 할 수도 없고, 2승이라 할 수도 없고, 보살승이라 할 수도 없는 사람을 말함)
지극한 도에 눈을 뜬 사람들은 가슴을 치고 옆구리를 치면서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하면서
으스대지 않는다. 목이 터져라 외치지도 않는다.
설사 과거에 불불 조조가 면면히 이어온 사실이 있다 해도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방편으로 부득이하여 펼쳐놓은 교화의식이다.
그래서 크게 눈을 뜨고도 종적을 감추고 숨어 사는 사람들을 가장 훌륭한 도인으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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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쟁(無諍)의 분석경(Araṇavibhanga Sutta, M139)>
본경은 세존께서 분쟁의 법과 무쟁의 법을 알아서 무쟁의 도를 닦으라고 설하신 경이다.
먼저 일곱 가지 주제를 요약으로 말씀하시고 이를 하나하나 설명하신 뒤에 결론을 내리시는 방법으로 전개된다.
참고로 수행승들이 일으키는 사쟁(四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언쟁(言諍) : 교리에 대한 논쟁
② 멱쟁(覓諍) : 수행승이 저지르는 죄를 추궁하는 논쟁
③ 범쟁(犯諍) : 수행승이 저지른 죄가 어떤 죄에 해당하는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그에 대해 일으키는 논쟁
④ 사쟁(事諍) : 다른 수행승이 행한 참회, 형벌, 의결 등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
여기서 무쟁사상(無諍思想)이 나오게 된 시대적이 배경은 살펴보자.
많은 대중이 모이는 집단은 그 단체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조건 증 하나가 화합이다. 2500여년 전 부처님 당시에 지금보다
훨씬 공고했던 계급의 벽을 갑자기 허물고 브라만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수행집단에 최하층민까지 제한 없이 받아들인
상황이었기에 당시 승가에 필요했던 대중화합은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분명 넘어서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대중들을 잘 섭수해서 이끌고 계심(戒心)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미 승단의 중추가 된 아라한의 가장 큰 덕목으로 번뇌나 일으키는 논쟁[諍]을 삼가[無]한 채 대중들을 잘 이끌며 지낼[住] 수 있는 능력을 으뜸으로 본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元曉) 대사가 주창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의 근본원리도 인간 세상의
화(和)와 쟁(諍)이라는 양면성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화쟁은 화와 쟁을 정(正)과 반(反)에 두고 그 사이에서 타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합(合)이 아니라,
정(正)과 반(反)이 대립할 때 오히려 정(正)과 반(反)이 가지고 있는
근원을 꿰뚫어 봐서 이 둘이 불이(不二)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쟁(諍)도 화(和)로 동화시켜 나간다.
천차만별의 현상적인 쟁(諍)의 상태도 그 근원에서 보면
하나로 화하는 상태에 있을 뿐임을 체득한 원효 대사는 이 원리로 불이의 화쟁론을 전개시켰다.
예를 들어,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그 파도와 바닷물이 따로 둘이 아닌 것처럼,
중생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그렇지 못한 무명(無明)이 따로 둘이 아닌 것이다.
이 화쟁사상 또한 시대적 배경으로는
신라를 거처 통일신라시대로 오면서
상류층의 불교를 민간으로 넓히는 과정에서
그리고 교종과 선종을 공존시키는 상황에서
대승불교를 연착륙시키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