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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 자리에 걸어놓은 조선 괘불
왜 이런 그림들이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에 전성기를 이뤘을까요. 우선 임진왜란(1592~1598) 이후 조선의 불교가 다시 크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은 원래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해 숭상하고 불교는 억압한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나라였지만, 임진왜란 때 승병이 국난 극복을 위해 활약한 결과 불교 규제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또 전란 중 허망한 죽음을 많이 본 백성이 죽음 뒤의 희망을 말하는 불교에 많이 끌렸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같은 대형 불교 건물이 세워지게 됐고, 불교 미술은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됐습니다.
도시가 아니라 깊은 산속에 지은 불교 사찰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규모 야외 법회를 자주 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는 '영산재', 육지와 물에서 죽은 모든 중생을 위로하는 '수륙재', 생전에 지은 업보를 미리 닦는다는 '예수재' 같은 것이 대표적인 법회죠. 많은 사람이 절 건물 안에 다 들어갈 수 없어서 절 마당에 불단(부처를 모셔 놓은 단)을 차리는데 이를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때 내건 부처님 그림이 괘불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괘불은 고려나 조선 전기에도 없었고 중국·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 후기의 독특한 불화입니다. 신원사 괘불은 1664년(현종 5년)에, 수덕사 괘불은 1673년(현종 14년)에 제작됐습니다. 두 작품 다 화승(승려 화가)인 응열·학전·석능 등이 제작에 참여했고, 오랜 수행 끝에 부처가 됐다는 노사나불을 가운데 뒀습니다. 이후 상주 북장사 괘불(1688년) 등도 그려졌습니다. 1700년대 이후의 작품으론 부안 내소사와 영주 부석사 괘불 등이 있죠.
지금 괘불 90여 점이 전국의 절에 잘 남아 있는데, 너무 크고 무거워서 도둑이 훔쳐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절마다 고이 보관하던 것이라 사람들이 보기 어려웠지만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 2·3층을 뚫은 공간을 마련해 2006년부터 돌아가며 하나씩 빌려 전시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10월 13일까지 진천 영수사 괘불을 전시하고 있죠.
불교가 백성 속으로 들어갔던 것
조선 후기 괘불은 가장 실력이 뛰어난 화승들이 가장 비싼 미술 재료를 마음껏 사용해 그린, 화려한 명작이라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그림의 내용은 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습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고려 불화가 귀족적이고 서정적이라면 조선 후기 불화는 대중적이고 서사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불교는 민중의 지지를 받는 '대중 불교'의 성격을 띤다고 평가됩니다. '(귀족이 아니라) 백성 속으로 들어가자'는 신라 원효대사의 뜻이 실현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당시의 민초들이 멀리 있는 절까지 찾아가 법회에 참석했던 것은 정치적 권위에 따른 압력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신앙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비춤·바라춤 같은 불교 무용과 함께 펼쳐진 거대하고 '힙한' 괘불은 대단한 볼거리였을 것이고, 그 자체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는 동시에 더욱 신앙심을 깊게 했을 것입니다. 그 재미는 오늘날 '뉴진스님'의 디제잉과 통하는 그야말로 '야단법석'이 아니었을까요.
따지고 보면 부처님은 지나친 욕심과 음란함을 늘 경계했지만 '재미있는 걸 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조계종의 최고 어른인 종정 성파 스님은 최근 인터뷰에서 "사바(괴로움이 많은 인간 세계)에 흙이 없으면 금이 존재할 수 없다"며 "그(뉴진)를 보고 불교 믿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문득 수덕사나 신원사 괘불 앞에서 '뉴진'의 디제잉 공연이 이뤄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