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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노병 부대 복귀하다 / 이원우
용운은 마침내 두 손을 들고 만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일요일이나 공휴일마다 해운대를 찾는 일을 그만두기로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말이 쉬워 해운대지, 그의 집은 밀양이라 왕복 세 시간은 좋이 걸린다. 밀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포역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로 환승한다. 도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차라도 한 잔 나누기 마련, 지체하기도 예사다. 그래 어떤 날은 총 예닐곱 시간은 잡아야 했다.
손 소령, 아니 예비역 손흥준 소령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난 5월 6일, 일요일이었다. 용운은 밀양역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임한 친구와 함께, 바람 쐬러 해운대에 간 적이 있었다. 아니 친구의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을 몇 컷 담을 일이 있었다. 초여름 기온을 느낄 날씨였다. 끼룩끼룩, 갈매기들이 떼 지어 날며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한쪽 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새우깡을 끼고 있었는데, 갈매기들이 날쌔게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그럴 낚아채 간다.
이윽고 비가 내렸다. 갈매기들도 비상(飛翔)을 멈추고, 무더기로 관목(灌木) 밑으로 모여들어 몸에 묻은 물기를 털고 앉았다. 가끔씩 햇살이 구름 사이를 뚫고 찬란한 광선을 수면 위로 내리꽂는다. 약간은 음산한 기분이지만, 바야흐로 해운대는 역시 바다와 하늘, 생물체며 인위가 어우러졌다. 대자연의 오케스트라!
둘은 먼저 ‘해운대 엘레지’ 노래비가 있는 곳부터 찾았다. 용운은 행인들의 시선쯤 아랑곳없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하면서 ‘해운대 엘레지’를 한 번 불러봤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집안일을 거들던 생각이 절로 났다. 집성촌이라 거의 일가친척들만 사는 밀양군 단장면 국화전에서 거의 365일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노래를 불렀었지. 그것 말고도 ‘울며 헤진 부산항’, ‘이별의 부산 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등을 목소리에 담았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었던 그 추억들이 파도소리에 휩쓸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노래비 앞에 서니 절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본래 가사는 2절이 ‘안녕히 잘 있거라.’로 끝나는데, 노래비에는 ‘잘 있게나.’로 되어 있으니. 구청에서 뭔가 마무리를 잘 못했다 싶다. 무지의 결과 아닌가? 손인호는 역시 후자(後者)로 부르고 있다.
무슨 비중 있는 예술가이기라도 한 듯, 베레모를 삐딱하게 쓴 용운이, 노래비 앞에서 온갖 포즈로 부산 가요를 메들리로 쏟아내니 야단났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것이다. 게다가 대단한 장비(裝備)가 든 카메라 가방을 맨, 같은 또래의 작가-한눈에 사진작가라는 것쯤 누구나가 짐작할 수 있다-가 열심히 셔터를 눌러댄다.
친구가 주문하는 대로, 용운은 한 시간 남짓 그렇게 곤욕을 치렀다. 어느덧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타고 내려, 눈꺼풀을 파고들었다. 따가웠다.
둘은 목이 말랐던 터라 주차장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노점상 아주머니한테 다가가 주스를 한 잔씩 사 마셨다. 얼음이 동동 떠서 그런지 꽤나 시원했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치는데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두 분이 억수로 애쓰시던데예, 뭘라꼬 그랍니꺼?”
용운의 친구 대답이다.
“이 친구 이번에 음반 아니 씨디를 하나 내는데, 이미 녹음은 다 끝났고 해서 스냅 찍으러 다닙니다. 씨디에 사진이 몇 장 들어가거든요.”
“그래예? 여기 자주 오시는 분은 아닌 것 같은데예. 그라고 할아버지는 무슨 일 하십니꺼? 가수인가예?"
둘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번엔 용운이 대답을 했다.
“옛날엔 저기 AID 아파트 입구에 살았지요. 떠난 지가 20년도 넘었습니다. 김*옥 전 부산 시장도 이웃에 있었구요. 내가 가수는 가숩니다. 하지만 이름난 가수는 아니고, 회갑 기념으로 ‘부산노래’만 한 번 녹음하고 싶어서 1년 넘게 고생했지요.”
“그라문 여기 오신 기념으로 저기 호텔 옆에 한 번 가 보이소. 거기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가 기타를 치고 있는데예. 거리 악사가 대여섯 되지만 할아버지만 일요일 개근인기라예. 누구든지 오케이니까, 할아버지 반주에 맞춰 ‘해운대 엘레지’나 한 번 불러 보이소. 기념이 되겠네예.”
그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마지막 장면을 무엇으로 장식할까 고민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아주머니가 일러 준 대로 발음을 옮겼다. 용운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그래 그거다. 오늘 일정의 피날레를 그 양반과 장식하는 거다!
과연 할아버지는 거기 있었다. 모자를 깊이 눌러썼지만, 삐어져 나온 짧은 귀밑머리가 은백색이었다. 나이가 들어보였다. 게다가 색안경을 끼었고, 바닷가의 자외선에 그을려 얼굴은 온통 검붉은 색이었다. 노인들이 그의 기타 반주에 맞춰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갈매기 파도 위에 날지 말아요/ 연분홍 저고리에 눈물 젖는데/ 저멀리 수평선에 흰 돛대 하나/ 오늘도 아아아아……
'해조곡(海鳥曲)’이었다. 1939년에 이난영이 불렀었다. 낮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노인들을 보니, 오히려 한가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용운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들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쌍고동 목이 메어 울지 말아요/ 굽도리 선창가에 안개 젖는데/ 저 멀리 가물가물 등댓불 하나/ 오늘도 아아아아 동백꽃만 물에 떠오네
용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타를 연주하는 할아버지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혔다.
“저 노래 한 곡 불러보면 안 될까요?”
노인은 모자를 쓴 채,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좋지요.”
하면서 노래집 파일을 펼쳐 들었다. 굉장히 두꺼웠는데, 그 중에서 고르라는 뜻인 모양이다. 그러면서 용운을 뻔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용운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우뚝 그 자리에 설 수밖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표정도 동시에 굳었다. 그러나 노인들의 채근에 할아버지는 기타에 손이 갔고, 용운은 ‘해운대 엘레지’를 불렀다. 앙코르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그래 ‘항구의 사랑’이며 ‘연락선은 떠난다’ 등도 다시 열창할 수밖에, 잠시 뒤 내가 입을 열었다.
“한데, 선생님을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습니다.”
“워낙 세상은 넓지 않소. 닮은 사람도 많기 마련이오. 난 그저 필부필부(匹夫匹婦)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워낙 많은 노인들이 자천타천으로 한 곡씩 뽑아보고 싶어 줄을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 사람도 많이 다니는 그곳에서 바닷가의 늙은 악사와 뜨내기 가수가 연출하는 ‘해운대 엘레지’라니 참 멋있겠다 싶어,
“선생님, 제가 가끔 와서 뵙고 싶습니다.”
고 하고서는 십만 원짜리 자기앞수표를 한 장 내밀었다. 그는 고개만 약간 숙이고 가로젓는가 싶더니 손을 다시 줄에 얹었다. 거절이었다.
식사 시간도 늦고 해서 친구와 함께 용운은 옛날 살던 동네 밑에 가서, 목 매운탕을 한 그릇씩 시켜 먹고 귀로에 올랐다. 친구는 용운이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까 말을 꺼냈다.
“자네 아까부터 그러고 있네. 그 양반 아는 사람이었어?”
“글쎄, 아주 특별한 인연을 가졌었던 사람 같은데 말일세.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학부모 같기도 하고…….장학사였나?”
용운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그가 누구인지 재생되지 않았다. 종내에는 심한 두통까지 왔다. 밀양역에 내려 친구와 맥주 한 잔을 나누면서도 오직 그 노인 생각뿐이었다.
여덟 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오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걸 아는 터라, 무척이나 용운을 반겨 맞았다. 현인 선생의 동상 앞에서 한 컷을 찍기 위하여 영도다리까지 갔었다 것까지 아내는 알고 있었다. 부산역에 들른 사실도. 도중에 휴대 전화로 연락을 했기 때문이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 찰나였다. 용운은 그 자리에서 석고가 된 양 굳어지고 말았다. 맞은편에 군대 시절 사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는 자신의 모습이 액자에 든 채 걸려 있었다. 1966년 10월 25일. 2*사단장 소장 문중*/공로표창장 619호! 용운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 정훈 참모 손 소령(少領)이다!”
온몸에서 한꺼번에 긴장이 풀려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렇게 몇 시간씩이나 기억과의 싸움 아닌 싸움을 벌었었는데, 집에 와서 겨우 찾았으니까. 거듭 말하지만 그 노인은 손 소령이었다. 40여 년 만에 만난…….
그 이야기를 하려면 세월을 그만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용운은 교사 시절, 기관지확장증(氣管支擴張症)으로 인해 2년 늦게 군에 입대를 해야만 했다. 훈련소를 거쳐 부관 학교에서 다시 인사행정병 특기를 받고, 배치된 곳이 경기도에 있는 보병 제2*사단 부관참모부 인사 행정과 상벌계였다. 모필병, 다시 말해 사단장 표창장을 붓으로 쓰는 게 임무였다.
어느 날, 부관참모의 심부름으로 정훈참모부에 들렀는데, 그와 동년배인 병장 하나가 그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런데 정훈 참모는 마침 자리에 없었다. 돌아서 나오다가 맞은편에 있는 큰 사진 한 장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국민이 주는 **의 상’이라는 제하(題下)에, 머리를 아주 깎은,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단 젊은 장교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상을 받고 있었다. 수여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박 대통령이었다. 영부인도 그 옆에 서 있었고. 입대하기 전, 그 상이 어떤 상이라는 걸 K신문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수상자가 군인이라니 그저 어리둥절할 수밖에. 그런데 대통령이 왜 대신 수여를 할까? 김 병장은 용운의 눈치를 채고, 그만큼 비중이 크다는 뜻이라고 설명을 했다. 그 상은 정말 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기의 전부를 내던진 사람에게 주는 대상(大賞) 중의 대상인데, 몇 개 분야 안 된다고도 했다. 손 소령은(당시는 대위였다) ‘봉사 부문’. 범인(凡人)으로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금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그의 공적은 부대에서 한참 떨어진, 한센 병 집단촌 촌에서 음성이긴 하지만 환자들과 숙식을 같이하고 그들을 오랫동안 극진히 돌보아 온 것이란다. 그게 특별히 참작이 되어 이 부대에서만 10년 넘게 근무하고 있었다나? 참 잊을 뻔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라서 항상 머리를 짧게 깎는다는 설명도 있었다.
잠시 후에 정훈참모가 돌아왔다. 거수경례를 올렸더니, 뭐 그럴 거 있느냐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세상에, 일등병을 대위가 그렇게 점잖게 대하다니 싶어 용운은 황송스러웠다. 얼핏 형님 같은 생각이 들었고말고. 용운은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부관 참모가 주는 메모지를 그에게 전했다. 김 병장이 따라 나오면서 한 마디 건네었다. 그도 교사로 지내다가 온 사람이라, 용운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이 일병님, 저분이 점심 식사를 어떻게 하시는지 압니까?”
내가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리자,
“아마 오늘도 생쌀이나 국수 삶은 걸 그대로 잡수셨을 겁니다.”
“아니 국수를 그대로 잡수신다니, 멸치 국물로 없이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현역 소령이지만, 스님이시니까요.”
장교 식당에 가면, 자연히 스님의 입장으로서 못 먹을 반찬투성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다. 뭐 호주머니에 생쌀을 항상 넣고 다니기도 한다나?
그러면서 김 병장은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우편물을 가리켰다.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부관참모 김 중령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고 하자. 워낙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군인의 신분으로 전무후무할 상을 받고 보니, 그의 팬(?)이 전국에 엄청나다는 설명이었다.
용운은 미지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착각에 빠질 만큼 어안이 벙벙했다. 김 병장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제주도에서까지 직접 사람이 찾아와서 그를 만나고 간다고도 했다. 갖가지 물품들이 답지하고 후원금도 상당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 병장은 손 소령의 기사가 실린 주간지 등을 들어 보이기도 했고.
며칠 뒤 손 대위한테서 전화가 왔다. 업무가 끝나고 틈이 있을 때 자기에게 놀러 와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 일병, 밀양에서 교편을 잡다가 입대했다면서요? 나는 해운대가 참 좋아요. 밀양과 해운대는 가깝지요.”
용운은 몰둘 바를 몰라 했고말고. 군에 입대한 지 겨우 몇 달밖에 안 된 신참에게 대위는 장군만큼이나 높아 보이는 계급이다. 그런데 그 대위가, 더더구나 그렇게 큰상을 받은 전국적인 저명인사가 그야말로 파격적인 후의를 베풀다니…….용운이 잠시 머뭇거리고 입을 못 열자 손 대위는 눈치를 챘는지
“괜찮아요. 부관참모님하고는 얘기가 잘 되어 있어요. 어차피 정훈부와 이 일병의 업무는 상당히 관련이 있어요. 가만 있자, 부관참모님 말씀에 의하면 올해 스물세 살이라니, 나하고 열세 살 차인데요. 그저 형 아우처럼 지냅시다. ”
마침내 용운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수화기를 내렸다. 그런 뒤 실제 그는 정훈부 옆에 있는 부대 이발관에 가서 머리를 깎고 나서, 잠시 손 소령과 김 일병을 만나 환담을 나누곤 하였다. 누가 면회를 오느냐, 애인은 있느냐, 이런 질문을 걱정스레 던지는 그가 점점 형님으로 보이기도 했다. 난생 처음으로 그가 다기로 달여 주는 녹차(綠茶)라는 용운이는 처음 마셔 보았다.
한 번은 돌아오는 일요일, 외출할 계획이 있느냐고 김 소령이 물었다. 용운은 물론 없다고 대답할밖에. 대신 입고 있는 작업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때가 많이 끼어 있었다.
“이거 해결해야 합니다. 좋은 곳이 있지요.”
“그래요? 그것 참 잘 되었네. 나도 그새 게으름을 좀 피웠거든. 이 일병을 따라 나서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용운이 마다할 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래서 육군 소령과 일등병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기상천외의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 그런 허술했는지 모르지만, 통신 중대 옆을 지나면 철조망에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한 구멍이 하나 있었다. 손 소령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그걸 지나다니는 민간인이 가끔 있어서 그들을 위한 배려였으리라. 보초는 없었다.
용운이야 뭐 여름 내내 거기서 십 리쯤 올라가, 대략 해치운 세탁물들을 반석 위에 얹어 놓고 말리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그리고 혼자서 당시 유행하던 ‘뜨거운 안녕’이나 ‘허무한 마음’ 따위를 불렀다. 그러나 이번은 혼자가 아니고 소령과 함께이니 어찌 가관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어쨌거나 약속한 날 그들은 정훈참모실에서 만났다. 그리고 예의 그 ‘개구멍’을 빠져 나가 한참이나 냇물을 따라 올라갔다. 군데군데 북한에서 보낸 전단지가 흩뿌려져 있었다. 이윽고 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속옷이며 작업복 따위를 물에 담그고선 돌멩이로 두들기는가 하면, 손으로 비벼 땟물을 빼냈다. 용운이 도맡으려 해도 손 대위는 손사래를 쳤다. 지금 생각해 봐도 용운은 절로 나온다. 둘은 벌거벗고 서서 서로 마주보며 파안대소하기도 했다. 9월 중순이라 주위는 온통 진초록이었다. 스님의 고*를 훔쳐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계속 웃음이 터지려는데, 손 대위가 한 마디 했다.
"이 일병, 중위 시절에 말입니다. 오늘처럼 목욕을 하고 있는데, 머리를 짧게 깎고 있으니 뒷모습을 보고 초등학생인 줄 알았던 모양이지요. 여대생인 듯한 처녀 둘이서 20미터쯤 위에서 스타킹을 씻고 있다가 그만 한 짝을 놓쳐 버렸지요. 그 중 하나가 ‘학생 그 스타킹 잡아 줄래?’ 하기에 내가 벌떡 일어섰더니 그 둘이 기절초풍을 하더라구요. 농담? 이 일병이 판단하구려.”
갖고 간 빵으로 둘은 점심을 때웠다. 복숭아 통조림도 있었는데, 아뿔싸 따개가 없다. 그러자 손 대위는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더니, 통조림 밑바닥을 자꾸 바위에 문지르는 게 아닌가? 이윽고 튀어 나온 가장자리는 거의 닳고 뚜껑을 손가락으로 젖혀 빼니 내용물을 송두리째 먹을 수 있었다. 손 대위의 지혜 아니 경험에 용운은 탄복할밖에. 둘이서 흘러간 옛 노래를 산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수도 없이 불렀음은 물어보나마나.
어쨌든 그 뒤로도 여러 번 둘은 ‘희한한 장교와 사병’ 노릇을 했다. 아참, 어떤 땐 손 대위가 기타를 갖고 오기도 했다. ‘영등포의 밤’, ‘고향 무정’ 등 그 시절에 유행하던 노래를 원도한도 없이 뽑아 올렸다. 그래서일까? 용운은 자기처럼 군대 생활을 멋지게 한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다음 해였던가? 본격적으로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용운은 사단장에게 올릴 징계 서류를 요약하여 별지에 작성하다가 깜짝 놀란다. 손 대위가 자기의 지프로 미제(美製) 다이얼 비누를 수십 상자 옮기다가 헌병에게 적발되었다는 거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이얼은 꽤나 귀한 거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건 범죄일 수 있었다. 한데 큰상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평양사범 대학을 중퇴했다는-그게 사실인지 아리송하다만-사람 좋은 선임하사(상사)는, 용운과 손 대위와의 사이를 아는지라
"걱정 없을 거야. 무슨 사정이 있겠지.”
아니나다르랴. 그 사건은 견책까지도 가지 않고 묻혀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물품을 입수했는지 기록은 없었다. 다만 자기가 부양하고 있는 나환자들에게 주려고 미군 장교한테서 얻었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손 대위에 대한 용운의 관심은 더 깊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게 호기심으로 변하여, 어느 날 그는 손 대위를 조른다. 일요일 정착촌을 한 번 방문하고 싶다고. 어느덧 그는 병장으로 진급해 있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손 대위가 운전하는 지프차에 동승해 가는데, 처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공연한 짓을 했는가 싶어 후회스럽기도 하였고……. 부대에서 40분쯤 차를 이용했을까? 30호쯤 되는 조그마한 동네가 하나 나타났다. 조금 더 들어가서 공터에 차를 세우곤 20분을 걸었다.
그러자 냇가에 10여 호쯤 되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입구에서 중년 남자가 마중을 나오는데 아! 손가락이 열 개 전부 없는 게 아닌가? 용운은 손 대위를 따라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한센 병이 그렇게 쉽사리 옮지 않고 더구나 상대는 음성이라 손톱 끝만큼도 염려 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용운은 멈칫거렸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얼굴을 내미는데, 거의 다 60세를 넘긴 얼굴이었다.
용운은 적이 불안하였다. 토안(免眼), 토끼눈처럼 핏발이 선 눈하며 뭉툭한 손으로 그들은 둘을 반겼다. 손 대위가 나지막이 용운에게 일렀다.
“괜찮아요. 약을 복용한 지 오래고 다 나았기 때문에 전염 따윈 한갓 기우에 지나지 않아. 결핵 환자도 일정 기간 약을 먹으면 음성으로 변하지 않아요? 식구들과 같이 생활한다고 누가 결핵 환자가 되나요? 육영수 여사를 보아요. 그분은 서슴없이 그들을 껴안지 않던가?”
손 대위는 편안한 얼굴로 용운에게 말했다. 잘못된 선입견으로는 혹시 양성 환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할지 모르지만, 거의 백퍼센트 음성이라 완치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만 편견이 심해서 임시로 거주할 뿐 언젠가는 사회로 복귀하는 게 그들의 꿈이란다. 자신의 임무도 그거라 했고.
손 대위의 숙소는 똑 같은 움막이었다. 거기서 그는 독신으로 살고 있었다. 아니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단 표현이 맞겠다. 그런데 적국 각지에서 답지해 온 선물들로 그의 집 안팎은 산더미가 되어 있었다. 주로 생필품이지만, 책이나 신문 등 읽을거리도 있었고. 그제야 손 대위가 왜 용운의 성의(誠意), 즉 PX에서 빵이나 과자 등을 좀 사갈 까 물었을 때 한사코 마다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 10분쯤 한 바퀴 삥 둘러보았다. 냇가에서 머릴 감는 할머니도 있었다. 인사를 하니 무척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워낙 외관이 그러니 상대에 대한 배려도 몸에 배었으리라. 물론 환자 같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손 대위의 방에 들어 앉아 있으려니, 삶은 달걀을 담은 그릇은 누가 들고 들어왔다.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깨끗하게 차려 입었고, 얼굴도 상한 데가 없었다. 아니 아주머니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맛 한 번 보세요. 진짜 토종닭이 나은 거예요. 산의 풀씨나 벌레를 먹고 자라지요.”
용운은 아주머니가 달걀껍질을 까서 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손 대위는 씽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미심장한 것 같아 오히려 묘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아주머니는 나갔다.
“다들 착한 사람들이지요. 물론 정부에서 조금 지원해 주고 국민들의 관심도 많지만, 이들은 외로움을 참기 힘들어합니다.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여기 같이 기거할 생각이오. 그들은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소. 말하자면 젊은 아버지지.”
다른 사람들은 갖은 반찬에다 기름진 쌀밥을 먹는데, 손 대위는 국수를 맹물에 말아 먹었다. 주민들은 거의 불교신자지만, 영양이 부족하면 안 되니까 그들만은 잘 먹어야 한다고 부연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한 번 따라해 보자! 오기가 생겨 용운도 손 대위가 권하는 대로 맨 국수를 후루룩 삼켜보니 먹을 만했다.
이윽고 손 대위가 잠시 틈을 내자며 기타를 들고 문을 열었다. 어느 새 마당에는 서른 명 남짓의 환자 아니 주민이 모여 있었다. 손 대위가 용운더러 그들이 좋아할 만한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용운은 마이크 앞에만 서면 신이 나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한센 병에 대한 편견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없었다. 애창곡들을 선보일 수밖에. ‘꿈에 본 내 고향’, ‘나그네 설움’ ,‘타향살이’, ‘해운대 엘레지’ 등이었는데, 그들은 거의 열광하였다. 특히 ‘해운대 엘레지’에선 앙코르가 계속 터져 나왔다. 2절은 더욱 가슴을 처연하게 만들었다. 울던 물새는 어디로 가고 조각달도 기울고/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은 깊어 해운대……
누가 간이 무대로 뛰어 올라왔다. 역시 손가락이 없었다. 섬뜩했지만 어디라고 내색을 한단 말인가? 아니 오히려 용운이도 신이 나서 그의 손을 쥐어 보였다. 어느 새 땀이 등을 타고 내렸다. 네 시쯤에 그곳에서의 일과(?)가 끝났다.
부대로 돌아오려는데, 손 대위가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산천 구경도 할 겸 기어코 사양하였고. 두어 시간쯤 걸려 부대에 도착하였다. 외출증을 끊었으니 위병소는 그대로 통과. 고참 병장에게 후임들이 경례를 부쳤다.
그 뒤로도 둘은 자주 만났다. 어떤 때는 동두천까지 버스를 타고 나갔다. 다방에 들러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벤베누티와 벌이는 세계 미들급 타이틀 매치를 텔레비전 중계로 보기도 하였고. 둘은 손에 땀을 쥐고 응원했음은 물론이다. 손 대위는 그야말로 참모이기 전에 스님이었음은 물어보나마나. 지나가다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지폐를 한두 장 건네주었고. 식당에 가서도 라면 따위를 시켜 먹었는데, 용운은 달걀을 넣는 대신 손 대위는 그것까지 마다하였다. 지갑은 너덜너덜했고, 야전 점퍼는 낡을 대로 낡았었다. 소위 임관 때 입었었던 거란다.
손 대위와 그런 세월을 보내고 난 뒤 용운이는 하사로 임용되었고, 29개월 보름 만에 제대를 하게 된다. 인사를 하러 갔더니 무척이나 섭섭해 하였다. 봉투를 하나 용운이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하는 말이다.
“이 하사와 나는 억겁의 인연이 있었지요. 지나가다 옷 한 번 스쳐도 5백 생의 인연이라는데, 우리가 형제처럼 지낸 세월이 얼마요? 부디 성공하오.”
용운은 군대생활을 그렇게 마치고 돌아와서 이틀 만에 모교에 복직하게 된다. 그 뒤로도 손 대위와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음은 물론이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편지 한 장을 받았는데, 손 대위가 월남에 가게 되었다는 연락이었다. 물론 손 대위가 용운에게 전화까지 걸어서 더 상세히 알았지만l 했지만, K신문이나 다른 방송에서도 이 거물(?)의 동태에 대해 다투어 보도하였다. 손 대위의 마지막 목소리가 오랫동안 용운의 가슴을 후볐다.
“세상 사람들은 자비를 베풀지 못해요. 정착촌이 철수를 하게 되었어요. 밑 동네 주민들이 결사반대이에요. 주민들은 뿔뿔이 헤어지고…….정부에서도 대책을 세워 준다고 하지만 믿질 못하겠고. 난들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월남 종군밖에.”
세월은 모든 걸 삼킨다. 한 해 두 해 흐르는 동안 용운도 자연히 손 대위를 잊게 된다. 월남까지 편지를 보내는 것도 무리지만, 그에게서 답장을 바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판단도 섰다. 손 대위가 돌보던 한센 병 환자들은 다른 곳으로 철수했다는 소식도 면사무소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용운은 눈을 감은 채 지난날을 되새겨 보았다. 교사 생활보다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3년이 다시 지났다. 용운은 손 대위에게 그토록 큰상을 안겨 준 K신문을 읽다가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다. 아니 둔기로 머리를 된통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손 대위가 세상을 경악시킬 만한 일을 벌인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본다.
월남전에서의 군무를 마친 손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나서 귀국하였으나, 다시 원래의 2* 사단에 복귀하지 못한다. 자기가 돌보던 한센 병 환자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보니, 명분이 서지 않았으리라. 그래 최전방 부대의 정훈 참모로 가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정훈 요원들을 트럭에 싣고서 선임탑승을 한 채 모처에 위문을 간다. 그런데 운전 병사의 잘못으로 차가 전복되어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 많은 장병들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손 소령도 예외일 수 없었다. 척추에 금이 가서, 군 당국으로부터 현역 부적격자로 판정받고 만다.
여기까지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한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 다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가 너무나 큰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예비역 소령. 군복을 벗었다 뿐이지, 그는 여전히 스님이었다. 평생을 부대 안에서 보내던 그가 세상 물정을 알리 만무, 따라서 궁핍한 생활을 면하기 힘들었을 수밖에. 한데 그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어 저지른 범행이 실로 독자들 아니 그를 알고 있는 많은 국민의 공분을 사게 했다. 그가 어느 절에 불을 지르고는 금품을 강탈한 것. 그것까지 차라리 약과라 하자.
놀랍게도 말이다. 그동안 그는 결혼을 하여 가장(家長)이 되어 있었다. 아이도 낳고. 어쨌든 당연히 그는 징역형을 언도 받고, 차디찬 교도소에 들어갔고말고.
용운은 절망하였다. 한센 병 환자들과 같이 기거하면서, 육식 따위는 입에도 대지 않으며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하던 손 소령이 아니던가? 같이 벌거숭이가 되어 목욕하고 세탁하고, 천형이라는 한센 병 환자들에게 용운과 함께 기타 반주와 노래를 선물하던…….2*사단 통신 중대 위 계곡의 진초록 수풀들도 오버랩 되었다. 떠벌이길 좋아하는 용운이다. 그동안 그와의 인연을 자랑하며 얼마나 우쭐댔던가?
용운은 스님 아니 예비역 육군 소령을 한 번 면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문(自問)해 봤다. 결심도 했다. 하지만 그가 과문해서 그런지 어느 교도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육군 본부 부관감실로 전화를 했는데, 대위라는 초급 장교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런 양반을 찾아서 무엇 하느냐며…….그러던 용운이도 결혼을 하고, 양산시로 옮겨 제법 규모가 큰 학교에서 합창 지도-이수인 작곡의 4부 합창 ‘인당수’, 정말 기가 막히는 곡이다.-를 하는 등 오직 교사 생활에 몰두하였고.
몇 달이 지났다.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교무실에서 낡은 K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용운은 다시 한 번 소스라쳐 놀랐다. 분명히 어느 절의 대웅전 앞에 선, 손 소령 아닌 손 스님의 모습이 거기 사진으로 나타나 있는 게 아닌가! 용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그의 참회를 너그러이 받아 주셨는지 모르지만, 그는 가사장삼(袈裟長衫) 차림으로 손에 염주를 들고 서 있었다. 세속적으로 봐도 그의 얼굴엔 온갖 풍상이 스쳐간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온화했다.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그가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로부터 흐른 세월이 30년이 가깝다. 그런데 그와 조우(遭遇)한 것이다, 그것도 해운대에서. 그와 함께 군대에서 불렀었던 ‘해운대 엘레지’, 그 옛 추억을 가슴에 품고 해운대에서 다시 불꽃을 튀긴 인연을 어떻게 표현하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손 소령은 다 부서지고 거의 너덜너덜한 줄을 쓰다듬어가며 기타를 연주했다. 고물로 버려도 누가 주워가지 않을 기타였지만, 그 위엔 ‘해운대 엘레지’의 무게가 실려져 있었다. 다만 손 소령은 용운을 단번에 아는데, 용운은 반대로 그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게 뭐 대순가? 다음 주일에 그를 만나러 가면 될 거 아냐!
용운은 일주일을 꼬박 기다렸다가, 밀양에서 해운대행 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손 소령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 다음 주일(主日)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다음도…….마침내 여섯 달 동안 그 놀음을 하다가, 달력 빨간 숫자에 동그라미를 그려나가던 일도 끝내 멈추고 말았다.
다시 십년이 유속(流速)처럼 흘렀다. 손 소령 아니 빈처(貧處) 스님으로 추정되는 분의 입적 소식을, 예의 그 K 신문이 보도하고 있었다. K 신문은 그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발장>의 자베르 형사처럼! 차라리 기진한 맹수를 쫓는 하이에나였다고나 하자. 기장군의 어느 암자에서 가부좌 자세로 숨을 거둔 스님 앞에, 부처님이 앉아 웃고 계셨다. 전 재산 5백 만 원이 든 통장에 메모를 하나 끼워 넣었는데, 가난한 음성 한센 병 환자를 위해 써달라는 유서 비슷한 거였다나?
행자 비슷한, 말이 어눌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스님이 평소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더란다. 철저한 채식으로 일관했고, 자비를 베풀 줄 아는 분이었으니, 시주며 불전함에 든 돈은 전부 가난한 이웃, 특히 음성 한센 병 환자 들을 위해 썼더라는 것. 그리고 덧붙이는 말. 스님은 오래 전, 일요일이면 평상복 차림으로 해운대로 나갔다고 했다. 그러곤 목돈이라도 생겼을 땐, 가끔씩 암자를 비웠는데, 경기도 어디에 간다며 떠났다가 사나흘 뒤에 돌아오기도 했다는 것.
다시 세월은 흐르는 물보다 빨리, 세찬 바람처럼 시공(時空)에서 속도를 냈다. 지난 2012년이다. 서울 근교에 올라와 살게 된 용운은, 그해 군인 주일(主日)에, 그가 근무했었던 2*사단 사령부 앞의 불무리 성당을 찾게 된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고 싶었던 곳, 2*사단 방문의 서막이었다.
반세기 전엔 허허벌판이었었는데, 거기 성당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참, 용운은 04년도에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음을 밝혀야 이야기가 진행되겠다. 거듭 들먹이지만 상전벽해(桑田碧海)란 헛말이 아니었다. 떡하니 자리 잡은 성당도 성당이지만, 도로도 새로 나고, 길가에 가게며 식당이 즐비했다. 용운은 병사들에게 사 줄 햄버거 값을 주임신부에게 내밀었다.
미사가 끝나고 대대장 ‧ 군수 참모, 주임 신부(대위)와 함께 후문을 통해, 사령부 안에 들어가게 된다. 아, 바뀐 것이 있어도 그대로인 것 또한 많다. 절(寺刹)도, 교회도(50년 전에도 있었지만 위치가 바뀜) 있었다. 다만 통신 중대 옆의 ‘역사적’인 개구멍은 흔적도 없다, 정훈참모부와 부관참모부는 옛 위치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사단장실은 위치를 바꿨고, 영창은 벽돌로 단장(?)했다. 뭔가가 북받쳐 오르고, 반세기 동안의 회억이 가슴 속에서 용솟음친다. 용운은 대대장의 지프 안에서 느닷없이 ‘해운대 엘레지’를 불렀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했고말고.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다가오는 12월 16일. 12*기보대대에서 장병들을 위한 안보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대대장 김화* 중령으로부터. 당일 사위가 모는 승용차를 타고 두 시간 걸려 부대에 도착했다.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고사성어 풀이하면서 120분을 채웠다. 당일 ‘해운대 엘레지’도 불렀지만, 기나긴 사연은 얘기하지 않았음은 물어보나마나.
다음해엔 2박 3일 동안 일정을 잡아 7* 여단 본부와 3개 대대에서 안보 강연을 했다. 부대 숙소에서 묵으면서까지 하는 강행군이었다. 밤에 혼자 나와 노래방에 들어가 ‘해운대 엘레지’ 외, 빈처 스님과의 옛 추억을 되살리는 노래도 불렀다.
여단 본부와 12* 기갑대대 ‧ 12* 기갑대대 ‧ 5*전차 대대를 지프차로 이동했지만, 군 복무 시절, 워낙 출입도 없었던 터라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되었다. 부대도 개편되어 있었고. 운전 병사와 홍보 장교 중위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66년 그 시절이 너무나 까마득했다. 사단장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사령부 간부들과 식사도 했다. ‘국제 시장’도 식탁 위에 올렸다. 정훈 참모 김*언 소령과는 두서너 번 시간을 내 환담했다. 14년 12월 31일, 점심 식사 후 둘이서 은밀히 주고받은 말이다.
“역대 참모님 중에, 스님 한 분이 계셨지요?”
“아, 손 대위님 말씀이군요. 워낙 오랜 세월이라 그분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러겠지. 50년에서 여섯 달 모자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사단장과 부사단장, 참모장, 그리고 여단장을 제외한 어느 장병도 그때에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참, 1년 만에 부관참모부는 없어지고 인사참모처에 통합되었단다. 모든 건 변한다.
생각나는 말이 있다. 자비(慈悲)! 가톨릭이나 불교에서 그야말로 흔히 쓰는……. 평소 그걸 실천하지 못하는 게 용운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