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바캉스라서 많은 대원들이 빠졌고 또 1부 2부 예배에서 일부 예배 찬양대 지원을 나갔어요. 오늘은 2부로 나왔네요. 일부는 일부 찬양대 전원이 다 이번에 바캉스 누가 왔어요? 여기 대표로 왔습니다. 감사해요. 바캉스 중에도 예배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 찬양대가 열심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일당 100이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고린도 환상을 봤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을 때 주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어요.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말하라. 너를 해할 자가 없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거예요.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
그 음성을 듣자 바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두려움에 어둠의 그림자가 싹 사라진 겁니다. 우리가 힘들 때 주님의 음성, 주님이 내게 오셔서 조용히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이렇게 힘이 됩니다.
바울은 그 후로 1년 6개월 동안 거기 머물게 돼요. 그렇게 힘들었던 곳인데 1년 6개월을 머물게 됩니다.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를 하고 그리고 중요한 일을 한 가지 더 하는데 편지를 씁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씁니다. 이 1년 6개월이 바울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역을 하고 있는 즈음에 총독이 바뀝니다. 갈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 되어 왔습니다. 총독이 바뀌자 잠잠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다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일어나서 바울을 잡아서 청중 앞으로 끌고 가서 고소를 합니다. 12절 13절 말씀이에요.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갈리오라고 하는 사람 이 사람에 대해서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리오의 본명은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 일명 노바투스라고 불러요. 이 노바투스는 세네카의 형제입니다. 세네카가 누구냐? 당시 우리가 독재자 로마의 독재자 그러면 딱 떠오르는 인물 있죠? 두자 네로입니다. 네로 네로의 스승이 세네카에요. 이 세네카의 동생이 바로 오늘 이 가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 시대의 가이오는 상당한 실권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네카는 관용론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책이에요. 나중에 이 책을 16세기의 장 칼뱅이 자기가 인문주의자로 출세하기 위해서 이 관용론 주석을 씁니다. 그리고 출판을 했는데 그 출판이 성공을 못해요. 그게 성공했으면 16세기에 프랑스를 주도하는 인문주의자 학자로 떴을 것입니다. 이게 그 관용론입니다. 이 관용론의 내용은 황제의 덕목,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이 어떤 덕목을 가져야 되느냐 똘레렁스가 있어야 된다. 이게 로마 황제 네로하고는 맞지 않는 얘기죠.
사실 이런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이 간이 붙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이 글입니다. 결국은 이 세네카는 로마 황제를 제거하는 일 축출하는 일을 벌이다가 그 음모에 가담을 했다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이 세네카의 형제가 오늘 가이요인데 가이 이 로바토스는 원래 노바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관 당시에 고관이었던 루키우스 주니우스 갈리오라고 하는 사람 밑에 양자로 들어가게 돼요. 그러면서 이름이 노바투스에서 갈리오로 바뀌게 됩니다.
이 사람은 학문과 그다음에 교양이 아주 깊고 또 성격도 매우 온화한 그런 사람이었어요. 주 51년에 가야 아가야의 총독이 됩니다. 근데 불행하게도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 음모 네로 황제를 축출하려고 하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65년에 자기 형과 함께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화려한 인생이었지만 처참한 인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부임하자마자 유대인들이 일어난 거예요. 평소에 바울에 대해서는 매우 좋지 않게 생각을 했지만 고린도 교회가 확 부흥을 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니까 이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지 못하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이 정권이 바뀌니까 그 틈을 노리고 자신들의 청을 갈리오가 들어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새로운 신임 총독이 볼 때는 그 자가 와서 빨리 그 지역을 장악하는 게 중요한데 이런 민원들이 들어올 때 빨리빨리 처리를 해주고 장악하는 게 좋다. 그러니까 이런 전환기에 그 청을 쉽게 들어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유대인들이 고소를 한 것입니다.
이 갈리오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립니다. 유대인들의 고소를 들어보았습니다. 들어보니까 로마법에 저촉되는 거 없어요. 다 유대인의 말 관습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그 신앙에 관계된 겁니다. 율법에 관계된 거였어요. 그래서 바울의 말을 들어볼 것도 없이 판결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냅니다. 14절에서 16절 말씀이 그 내용이에요.
여러분 로마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있을 거예요. 로마를 상징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법이고 하나는 도로입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이 두 가지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로마인들이 만들어 놓은 그 로마의 도로는 우리가 성지 순례를 가면 곳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가도 있고 곳곳에 있는데 제가 옛날에 갔을 때 그 기억에 의하면 너무 2천년 전에 만들었던 그 로마의 고속도로가 기가 막힌 거예요.
우리가 파리에도 보면 그 샹젤리제 거리를 그냥 일반 아스팔트를 깔지 않고 지금도 그 돌을 묻어가지고 돌로 만든 도로가 있잖아요. 거기에 7월 14일날 탱크가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견고한데 로마인들이 만들어 놓은 그 도로는 이거보다 훨씬 더 튼튼하고 훨씬 더 위험이 있어요. 그냥 작은 돌을 묻어놓은 게 아니고 어마어마하게 큰 돌을 몇 개씩 쫙 다 깔아놓는데 그게 자기들이 통치하는 지역까지 로마에서부터 이어집니다.
이렇게 도로 하면 로마를 생각하면 돼 또 하나는 법이죠. 로마는 법이 발달했어요. 그 2천년 전에도 이 재판을 할 때 판사가 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잖아요. 판사가 있고 원고가 있고 피고인이 있어요. 그러면 원고가 판사에게 이 고발장을 내놓고 얘기를 하면 고소를 하면 피고도 자기를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법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만 해도 그런 형식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원님 재판을 했어요. 원님 재판 아시죠? 조선시대 원님 재판 데려다 놓고 내 죄를 네가 알렸다 이실 직고 할 때까지 두들겨 패라. 이게 이제 원님 재판이에요. 매우 쳐라 죽도록 맞다 보면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소한 사람과 원님 마음대로 죄를 만들어내는 그런 재판인데 얼마나 당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고 했어요.
근데 이 로마는 그 당시에 벌써 이런 법이 발달이 되고 재판 제도가 발달이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이 유대인들이 고소를 하니까 바울이 그러면 나도 이제 나도 유대인이지만 로마인이기 때문에 나도 이제 변론을 하겠다고 딱 일어서는데 갈리오가 막아섭니다. 그리고는 됐다고 듣지 않아도 되겠다고 하고는 이제 유대인들을 밀어내고 고소를 기각시킨 거예요.
이렇게 이제 끝나게 됩니다. 이 갈리오라고 하는 사람은 굉장히 현명하고 그리고 정치적 감각이 있고 이 통치자로서 어떤 감각이 있는 거예요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게 만약에 로마 법과 관련된 거면 반드시 해결해야 되지만 유대인들 자기들 종교와 관습에 관한 것이면 내가 괜히 끼어들어가지고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이렇게 판단을 하고 쑥 빠진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듣지도 않고 내어쫓는 겁니다.
이게 현명한 거죠. 우리 말의 주책 또는 주책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자기가 낄 필요가 없는데 자꾸 끼어드는 사람들을 우리가 이 주책 맞다 주책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이 갈리오는 주책이 주책 맞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지혜 그걸 우리 말로는 현대어로는 낄낄빠빠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지혜가 사실 필요해요. 막 여기저기 그냥 막 다 간섭하고 끼어들었다가 복잡하게 되면 안 됩니다. 이 갈리오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현명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이제 재판을 이렇게 끝냈는데 이 재판이 왜 의미가 있고, 제가 이 갈리오의 이 재판을 왜 길게 설명하냐면 이 재판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의미,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앞으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리오가 이 재판을 이렇게 결정을 내림으로 사도바울이 앞으로 로마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된 거예요.
물론 유대인들이 계속 박해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박해를 하지만 만약에 이때 사도바울에게 불리한 결론이 내려졌다면 가는 곳마다 사도바울은 이 판례 때문에 가시밭길입니다. 로마 영역에서는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갈리오가 이런 현명한 판단을 내림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그 걸림돌을 제거해 준 것입니다. 최악의 순간이죠. 자칫하면 앞으로 가시발길이 열릴 텐데 이 한 번의 판단으로 이 판결로 좋은 길이 열린 거예요.
그러니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선을 볼 수가 있어요. 최악의 순간은 최선의 순간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어요.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억울하게 팔려갔어요? 모든 요셉의 모든 미래가 노예로 팔려가면서 이제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요셉이 노예로 팔린 그 사건을 통해서 요셉도 총리가 되는 길을 여시고 그 가족을 구원하고 또 이집트를 구원하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최악의 순간을 최선의 순간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정말 어려울 때가 있어요. 살다 보면 이래가지고 내 앞에 앞길에 희망이 있을까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다 하는 그 최악의 순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마디마디마다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 크리스찬은 이 말씀을 묵상해야 돼요. 선을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어려운 순간을 방향을 틀으셔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주장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제 화가 난 유대인들 이 유대인들이 그다음에 한 짓이 뭐냐 하면 회당장 쑤스데네를 잡으러 갑니다. 무법 천지입니다. 광란의 현장입니다. 여러분 종교인들이 해까닥하면 정말 무서워요. 이 자기 내면에 확신이 있잖아요. 이거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 신을 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움직이기 때문에 이 광적인 신앙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무서운 일을 저지르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지금 이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회당장 소스데 내로 가서 그를 끄집어내서 구타를 하게 됩니다.
갈리오는 그때 어떻게 했을까요? 거기도 개입하지 않습니다. 왜 너네 일은 너네끼리 하라 이게 이게 정치 탁월한 정치 감각이 있는 거예요. 괜히 남의 민족의 일에 끼어서 복잡하게 되는 것을 원치를 않았어요.
17절에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수대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소스덴에만 회당장 소수대에만 지금 억울하게 두들겨 맞은 겁니다.
그런데 이 소스데네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거예요. 얼마 전에 바울이 와서 복음을 전할 때 회담장이 변화가 됐어요. 그리스도 보라고 하는 회담장이 있었는데 복음을 듣고 이 사람이 예수를 믿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열받은 이 유대인들이 그 사람을 아웃시키고 그 자리에 소스데네를 데려다 놓은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 들어간 소스데네에는 반드시 해야 될 것이 없고 반드시 해선 안 되는 것이 있어요.
하나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가는 거예요. 그 자리는 그런 자리에요. 회당장이고 유대인의 회당인데다가 전임자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 이 사람을 세워놓은 거예요. 그리고 바울을 해롭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 인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사람이 바울을 유대인을 배신했어요. 이게 성경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전하는 전승이라는 게 있어요. 전승에 의하면 소스데네가 이 일이 터지기 전에 이미 어디서 복음을 들은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움직여서 바울에게로 이미 마음이 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거의 이제 받아들인 것 같아요. 숨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난리가 나니까 고소를 할 상황인데 고소가 어느 날 갑자기 된 건 아닙니다. 갈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유대인들 사이에 움직임이 있었던 거예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그래가지고 이 회담장을 앞세운 거겠죠.
그런데 회당장 소스대네가 지혜를 냈습니다. 고소를 하는데 유대인의 관습과 법에 관한 것만 고소를 한 거예요. 거기다가 한 가지 얹어도 괜찮아요. 세 가지 고소면 거기다가 네 번째 하나 얹어 이건 거짓말이예요.
근데 이것은 걸릴 만한 걸 얹어야 될 거 아니에요 왜 모르겠어요? 그 로마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이니까 이것을 얹으면 요건 꼼짝 없다 그래가지고 로마 황제 비난하는 일을 했다든가 뭔가 정치적인 어떤 죄를 얹어가지고 고소를 하면 될 텐데 소스데네가 종교적인 것만 얹힌 거예요.
유대인들은 왜 그걸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너 때문이라고 이제 소스데네를 의심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달려가서 소스데네를 끄집어내서 두들겨 팬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어요? 소스데네가 커밍아웃으로 간 거예요.
나 크리스찬이야. 나 예수 믿어버리겠어 이렇게 해버린 거예요. 그리고 소스데네는 그때부터 철저한 바울의 후원자가 되었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같이 다니고 나중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바울의 아주 동역자가 돼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에 3년간 머물면서 고린도교의 편지를 씁니다. 고린도교의 편지를 쓸 때 고린도전서 1장 1절에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에는 이렇게 써요. 이때 변화받은 소스데네가 나중에 바울이 에베소로 갔을 때 에베소까지 따라가서 거기서 함께 사역을 하는 동역자가 됐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예요. 이 소스데네의 이름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이름도 잘 지어야 됩니다. 약하다 그러면 맨날 한 약하네. 약한 약쟁이는 아니고 하여튼 약한 놈 뭐 이렇게 하면 애가 자꾸 세뇌가 돼가지고 건드리기만 해도 시험 들고 건드리기만 쓰러지는 약한 애가 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 이름 짓는 것도 참 중요해요. 아마 그런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하여튼 소스데네는 성격이 좀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은 대개 강한 사람은 때릴수록 강해집니다.
강한 사람은요. 위기 상황에 처하면 그 강한 본성이 나와요. 그래서 두들길수록 강해지는 거예요. 괴롭힐수록 강해지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매를 들자 비겁해서 숨은 것이 아니라 아예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공개를 하고 완전히 사역자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이게 소스데네의 역사예요. 예수쟁이가 돼버렸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사람 중에 두 성향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박해와 고난이 오면 좌절하고 물러나서 숨어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 믿다가 누가 무슨 말 한마디만 하면 그냥 건드리기만 해도 푹 쓰러지는 사람 있어요. 누가 말도 안 했는데 쳐다만 봐도 쓰러지는 사람 있어요. 그래가지고 맨날 시험 들고 막 힘들다고 하고 못하겠다고 죽고 싶다고 그러고 그런 사람 있어요. 그게 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강한 사람이 있어요. 강한 사람은 평소에는 이게 온화한 것 같고 하다가 어려움이 오면 그 강한 성품이 나와 막 더 그 어려움을 막 즐기면서 전투력이 막 생기면서 두들겨 맞으면 맷집이 막 생기면서 대개 이런 사람이 큰일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한 교회인데 이런 사람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좀 강한 사람도 있어야 돼요.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한번 이렇게 제 과거를 돌아봤어요. 제가 이제 이렇게 보기에는 온화하고 솔레롱스가 있고 인자하고 부드럽고 그래 보이지 않습니까? 시험 들려고 하네. 이 반응이 영 그러네요. 절대로 그런 일로 시험 들지 않습니다.
근데 제가 저를 이렇게 돌아보니까 약간 그 기질이 있어요. 이 제 속에 그래서 누가 괴롭히면 갑자기 살아나 가만히 놔두면 좀 게을러지다가 누가 막 괴롭히기 시작하면 살아나더라고 잠들어 있던 전투력이 막 생기고 막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뭘 못하게 막아설수록 더 해야 되겠다는 집념이 생깁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할 때 여기 와가지고 한 6년 있다가 교회를 개척했는데 물론 하나님 앞에 많이 고민하면서 기도를 했죠.
하나님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가 계속 남아 있어 남아 사역을 해야 됩니까? 앞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게 뭡니까?
오랫동안 기도를 한 것. 그래서 받은 응답과 더불어 또 기질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때쯤에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대외적으로도 그렇고 제가 여기서 사역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이 우리 교단적으로 국내외적으로 나같이 이름 없는 사람을 막아서는 일들이 많았어요. 총회에도 협조를 안 하고 뭐 어떤 소식을 들으면 나를 수리남으로 막 보낸다는 얘기예요. 수리남도 어딘지 몰라. 수리남이 베트남 옆에 있는 나라인가 그랬더니 남미에 있더라고 남미에 한 번도 들어본 바 없는 나라로 보낸다고 하고 이제 막 그런 상황들이 오니까 이게 그러면 파리에서 사역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막아서는 걸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굳어지는 거예요. 그럴수록 그 전투력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배경에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이 잘못되면 오기가 돼요. 그러나 좋은 방향으로 선회하면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 종교 개혁자들 가운데 기온부리소네라는 사람이 있어요. 15,000 20년이 프랑스 종교개혁의 원년인 그때 그 종교개혁을 이끌던 사람 중에 하나가 기원 브리소네 생제르망 데프레의 수도원장이었는데 이분이 나중에 모우라고 하는 지역에 주교로 가면서 거기에 모 그룹이 형성이 돼요. 그리고 거기서 최초의 개신교회가 세워집니다. 지금도 그 교회가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역사는 기운 불리 손해를 종교개혁에 반열해서 아웃시킵니다. 그 위대한 일을 했는데 왜 아웃됐느냐 이 사람이 마음이 좀 약해요. 그래서 자기가 그래도 그 당시에 목숨을 걸고 굉장한 일을 추진을 해가지고 그 수도원장의 권위를 가지고 이 프랑스 교회의 그 갱신을 이루어 나갔는데 나중에 그 모그룹이 자라나고 거기서 교회가 막 자라나니까 프랑스 당국과 카톨릭 리그에서 협박을 합니다. 처벌하겠다 죽이겠다 이러니까 겁을 먹고 자기 입장을 철회를 해버린 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좀 약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그 좋은 일을 하고도 종교 역사의 종교 개혁자의 반열에 들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위그노라고 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300년 동안 박해를 받았어요. 그런데 이 프랑스인들의 그 기질 같기도 하고, 그 300년 박해 동안 시간이 갈수록 그 박해가 더 했습니다. 루이 14세 때 극에 달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갈수록 두들겨 맞을수록 불타지만 소멸되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들은 끝까지 승리해서 우리의 개혁 신앙을 물려주고 세계 역사를 바꾸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의 일하다가 또 인생 살다 보면 어려움도 당합니다. 그때 뒤로 물러서면 아무것도 안 돼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어려운 순간이 기회의 순간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약해지지 말고 소스데네처럼 더 용감하게 주님께 헌신하면 위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 밀어주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 사랑하는 파리선한교회 성도 여러분 소스데네 같은 이런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