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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사회와 불교의 수행
권 탄준(금강대 불교․복지학부 교수)
Ⅰ. 머리말
인류는 지금 문명의 전환점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으며 미래를 향해 일대 비약하는 단계에 와 있다. 대망의 21세기에 들어선 현대사회는 종래의 산업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산업사회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변화는 물론 고도로 발달된 첨단과학기술이 주도하는 것이지만, 그 변화의 징후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종교에 이르기까지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기술혁명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대변동으로서 예전에 없던 새로운 문명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의 산업사회의 특징적인 양상은 과학기술과 첨단정보에 의해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전 세계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단일화 되는 그야말로 ‘세계화’의 시대가 되리라고 예상된다는 점이다. 교통과 통신문명의 발달은 이러한 세계화를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점차로 약화되어 가는 추세이며, 경제적인 상황도 무역자유화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세계화’와 ‘정보화’로 대표될 수 있는 새로운 산업사회의 특징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이처럼 급속도로 발전하며 변화하고 있는 새로운 산업사회가 인류의 삶의 방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미래사회의 획기적으로 발달된 과학문명은 인류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생활의 안락함을 선사하기도 하겠지만, 현대의 과학문명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양상을 가지고 유추해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들을 불가피하게 맞이하게 되리라 예상되기 때문에 불안과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빠르게 발달하고 있는 현대 과학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에 의해 피력되어 20세기 말에는 ‘탈현대주의(post modernism)’라고 하는 문명비판 이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과학화, 물질화,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놓고 볼 때 미래사회에서는 그 문명의 위력 때문에 생태계의 파괴, 환경오염, 사회윤리의 부재, 가치관의 혼란 등과 함께 심각한 인간성 부재현상을 야기하여 인간생존의 본질적인 의미를 우려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 예상되고 있다.
미래사회가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면 그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대사회의 변천에 따른 인간생존 양상에 대응하여 다각도로 중생구제 방법을 모색해온 불교에는 실로 수많은 교설과 실천수행법이 존재한다. 이들 수행법 중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불자들에게 받아들여져 왔고 현재에까지도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수행법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획기적인 대변환이 예상되고 있는 미래사회에는 과연 어떠한 수행법이 도입되면 좋을까.
최근 한국 불교계에는 지금까지 등한시해 온 불교 수행론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수행과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뜨거운 논쟁과 담론이 진행되고 있다. 모두가 지금까지의 수행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미래사회에 적합한 수행론 정립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 여러 가지 훌륭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사회에서의 바람직한 불교의 수행’을 주제로 한 본격적인 담론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듯하다. 필자는 이러한 시점에서 그것에 대해 모색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본 논문에서는 그것을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이 논문에서는 먼저 미래사회를 열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과 문제점을 진단하여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사회의 모습을 유추해 보고, 그 특징적인 양상 몇 가지에 대해 고찰해 본 후에 미래사회에서의 수행의 문제를 논해 보고자 한다.
Ⅱ. 현대사회의 모습과 문제점
미래사회에 관한 논의가 전 세계인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본격적으로 담론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71년에 발표된 ‘로마클럽 보고서’ 이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로마클럽 보고서’는 미국의 MIT 공과대학의 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산업들이 어떠한 수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을 연구 의뢰하여 그 결과를 토대로 하여 발표된 내용이었다. MIT 공과대학의 과학자들은 인구의 증가, 식량의 부족, 공업화의 촉진, 지하자원의 고갈, 환경의 오염 등 성장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를 정밀한 방법으로 연구하여 10년 내에 적절한 제동이 걸리지 않고 같은 추세로 성장이 추진되어 간다면 지구는 100년 내에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보고해서 모든 인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실이 있다. 과학문명의 발달과 산업의 성장이 오히려 인류의 종말을 불러 올 수도 있다고 하는 학자들의 지적은 과학과 물질문명 발달 그리고 산업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경종이 되었던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오기까지 미래사회를 전망하는 작업들이 다양하게 진행되어 왔고, 그와 관련된 사회 담론들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무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이들 담론들 중에서 세계적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는 것은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의 ‘지식사회론’과 다니엘 벨(Daniel Bell)의 ‘정보사회론’, 그리고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권력이동』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전망한 ‘미래사회의 힘의 원천은 물리적 힘이나 부(富)에서 정보와 지식으로 옮겨 갈 것’이라고 한 것 등이다.
이 외에도 폴 케네디(Paul Kennedy)의 『21세기 준비』,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등도 사회구조적 변동 과정에 대한 거시적 조망을 토대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다각도로 예측한 탁월한 작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낙관과 비관으로 엇갈리기는 하지만 한결같이 미래사회의 일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인류는 지금 엄청난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오늘의 사회는 이미 산업화의 단계를 지나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 있으며, 최근에는 그 변화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인류가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정착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이 소요되었고, 농경생활 위주의 삶도 천여 년 이상이나 유지되었다. 그리고 산업화의 과정 또한 약 3백 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의 정보화는 불과 20여 년 만에 인간의 생활양식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급격한 변혁은 과학기술에 토대한 정보기술의 혁명에 기인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대신하고, 기술의 발달은 세계를 하나의 마을로 통일시켜 버렸으며, 인터넷은 지상의 국경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밖에도 유전공학의 기술은 이제 게놈 지도를 완성하여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현대 사회의 구체적 특징은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물질의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으로 대표된다. 그렇지만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사회 양상은 결코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종교의 고전적 권위 상실, 전통적 가치 체계의 붕괴, 극심한 경쟁의 노예화와 이기주의, 개인의 고립으로 인한 소외감 팽배, 자아 상실증의 만연 등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현대인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고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첫째, 편협한 개인주의적 경향이다. 경쟁이 심화되고 인간적인 접촉이 줄어들게 되어 이기적 개인주의에 빠지고 종교에서도 개인적 안위만을 추구하는 기복적 행위가 확대된다.
둘째, 정신적 삶의 가치를 등한히 하고 물신주의(物神主義)에 사로잡혀 주체적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지혜를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퇴폐주의적 성향이 증대하여 욕망의 노예로서 살아가게 된다.
셋째, 경제 제일주의적 삶의 태도이다. 정치․과학․학문․예술 등의 사회의 전 분야에서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고 평가하여 보편적 기준으로 삼게 된다.
넷째, 인간을 재화를 생산하는 전문 인력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인간은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사회조직 속의 부품화․상품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고 만다.
다섯째,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욕망을 무분별하게 추구하다 보니 자연을 지배․착취하고 환경을 지나치게 파괴하여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세계는 지금 기상이변과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으로 인하여 인간생존의 근본 환경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문명의 이기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노출하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과학․물질․산업의 성장 등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들에 아무런 대안이 없이 몰두하다 보니 인간이 본연의 위치를 상실하여 오히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현대는 인간 본연의 위치를 잃어버린 자아 상실이란 근원적인 병으로 인해 가치가 뒤바뀌고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환경의 문제를 위시해서 도덕 질서가 붕괴된 문제 등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제반 문제들은 참된 가치관을 상실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생관에 물들어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저버린 근원적인 병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발달해 가고 있는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사회환경과 의식 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키고 가치 체계를 혼란시키는 등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낳게 될 것이라는 점은 현대사회의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Ⅲ. 과학기술문명과 인간성 상실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한계를 모른 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개발된 과학기술은 인류의 물질생활을 놀랍게 향상시켰지만, 그 폐단 도한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인간을 기계의 종으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성을 잃어버린 자아상실의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인간이 기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을 조작하는 세상이 되었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피고용된 인간은 이제 고도로 정밀화된 자동화 사회로부터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립되고 소외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고도의 정보를 간직하고 자기증식하는 사이버네이션(cybernation)의 계획이 완성되는 날이면 사회는 인간의 이상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아갈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과학기술이 자기증식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과학기술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심지어 숭배함으로써 인간상실은 더욱더 확대되어 가고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성상실은 가치갈등과 사회윤리의 파괴를 증폭시켜 부정적 삶의 존재방식을 계속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인간성 상실, 가치갈등, 사회윤리의 부재와 부정적 삶의 존재방식은 서로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여러 분야에 걸쳐 사회적 가치위기가 더욱 증폭되었으며 개인에게는 삶의 방향 상실을 안겨주고 있다.
현대의 과학기술문명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여러 가지 병폐로 인한 지적 혼돈과 청정한 정신문명의 파괴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사회는 심리적 좌절의 시대이며 마음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날 소외의식을 느끼면서도 맹목적인 경쟁의식을 갖고 초조해하며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자기반성과 자기억제를 할 줄 모르며 즉흥적으로 행동하여 온갖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인구의 증가, 알콜 중독의 급증, 우울증의 만연, 성격파탄 행위와 기행(奇行)의 확산, 각종 범죄행위의 증가, 온갖 향락문화의 성행 등의 문제가 풍요로운 현대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에서 가장 풍요롭다고 하는 미국에서 노이로제를 비롯한 각종 정신병과 마리화나․코카인․헤로인 등과 같은 마약중독으로 병원이 항상 만원을 이루고 있고, 정신건강 산업이 어디에서나 크게 번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워싱턴의 정신건강에 관한 대통령 자문위원회 보고에 의하면 미국국민의 적어도 4명 중 1명은 어떤 형태로든지 중증(重症) 스트레스 환자라고 발표하고 있으며, 국립정신보건구소의 심리학자는 가족 중에 어떤 증상이든 정신적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는 집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잘 산다고 하는 미국 국민들의 상당수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현대사회가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오늘의 과학기술문명사회는 새 가치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혼돈의 사회이다. 이 혼돈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다.
급격하게 변화해 가는 현대과학문명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지금가지 의지해 온 삶의 기본적인 준거 틀을 상실해 버리고 아직 새 시대의 지주가 될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의존할 명확한 질서의 결여를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좌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처럼 생활구조가 와해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소외도, 인생의 구조의 붕괴도, 인생의 의미상실도, 모든 것은 기존의 사회문화의 쇠퇴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문화에 마비된 사회윤리의 부재 현상,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생태계 파괴․환경오염과 더불어 인간을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시킬지도 모르는 시스템 사회의 정보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20세기가 보여 준 사회양상을 되돌아보면서 사람들은 미래사회에 대하여 낙관과 비관의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낙관은 미래사회에서는 정보․기술․지식이 곧 힘과 부(富)의 원천이 될 것이며, 서둘러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앨빈 토플러 식의 예측이다. 그것에 의하면 가속화되는 세계화와 정보화 속에서 세계는 결국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 인권의 보편화, 보편적인 문화의 공유, 인간 수명의 연장, 생산의 증가, 광신주의의 소멸, 국제사회의 협력과 안정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비관적인 예측은 국가 및 계층간의 빈부 차별 심화, 과학기술문명이 가져 올 인간소외, 초강력 국가와 다국적 기업의 횡포,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 국가간의 수많은 신비주의 종교의 등장 등으로 말미암아 21세기에도 많은 불안과 고통을 피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과 비관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엄청난 범세계적 변화가 지금도 진행 중이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과학기술문명 사회의 추세는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폴 케네디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어렵고도 곤혹스러운 미래사회의 양상에 대해 대처할 길이 전혀 없다고 암울하게 결론지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역량을 응집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Ⅳ. 미래사회의 전망
1. 세계화(globalization)
세계화는 민족․국가의 국경이 점차 무너지면서 전 지구적 범위에서 새로운 관계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세계화는 국경에 의하여 구별되는 민족 ․ 국가와 사회를 인식과 행동양식의 테두리로 해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점에서 분명히 획기적인 새로운 변화임에 틀림이 없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세계화’로 말미암아 국가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의 세계화 시대에는 세계가 단일시장으로 결합되어 가는 속도도 매우 빠르고 그 과정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받은 개인과 국가의 수도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종전의 세계화는 운송비용의 하락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철도, 증기선, 자동차의 발명 덕분에 사람들은 전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은 곳을 더 빨리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세계화는 통신비용의 하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마이크로칩, 위성, 광케이블 그리고 인터넷 등의 덕분이다. 이런 신기술은 세계를 더 단단하고 촘촘하게 엮어주고 있다.
이제 기업들은 생산공정을 비롯해 연구개발, 마케팅 부문 등을 조각조각 분리해 각기 다른 나라에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컴퓨터와 원격 영상회의를 통해 이들이 마치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처럼 통합 운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와 저렴한 비용의 통신의 결합 덕분에 사람들은 이제 전세계를 대상으로 온갖 종류의 서비스를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화의 특징은 이런 기술들 덕분에 전통적인 국가 단위의 정부나 기업들이 저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더 싸게, 더 깊숙이 세계 구석구석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후반 정보혁명이 꽃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활동․통신․여행․판매 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화는 이와 같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갈수록 서로 더 밀접하게 다가서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격 때문에 세계화 시대에는 문화현상 또한 주로 강대국이 문화가 확산되어 동질화되고 있는 경향이 있어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한다고 하는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한류’ 열풍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문화라 할지라도 자유롭게 확산될 수 있다.
세계화 시대를 규정짓는 세계관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첨단 과학 기술이다. 컴퓨터화, 소형화, 전기통신, 인터넷, 그리고 디지털화 등에서의 기술혁신이 기술을 민주화시켰다. 이것은 기술혁신 덕분에 수십 억의 사람들이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었고, 정보, 뉴스, 지식, 돈, 가족사진, 금융거래, 음악, TV 쇼 프로그램 등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기술의 민주화는 또한 ‘생산의 세계화’를 불러왔다. 즉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생산자가 될 수 있다. 기술의 민주화 덕분에 세계 모든 나라가 생산자가 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의 민주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이 지리적으로 넓게 분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종래 단절된 세계에 살던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의 보고에 자신을 연결시키고 그 지식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세계화는 기술, 금융, 정보 등 3대 민주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모두의 원동력이 되는 힘은 더 나은 삶을 이룩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원초적 본능이다. 그것이 바로 세계화의 추진이 되는 것이다. 사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여러 사회에서 갖가지 소란을 일으키긴 하지만,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은 인류의 생활수준을 사상 유례없이 더 높이, 그리고 더 빨리 높여 주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또한 많은 빈민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렸다. 비록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있기는 하지만, 빈민층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최저수준 역시 꾸준히 향상되고 있다. 다시 말해 상대적 빈곤현상은 많은 나라에서 계속 심화되고 있지만, 절대적 빈곤 역시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세계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결책과 기회 또한 세계화를 통해 창출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화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고 있는 가운데, 세계화의 물결은 전 세계적으로 도도히 넘쳐흘러 어떤 나라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세계는 바야흐로 무한교류와 무한경쟁시대로 돌입하여 상호협력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화로 말미암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의 명암은 국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세계화는 물론 다수의 나라에게 이익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나라를 고르게 잘 살게 한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과 가장 못사는 나라들 사이의 불평등은 세계무역이 증가하는 동안 심화되었는데, 이것은 1999년 출간된 WTO 연구보고서에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못사는 나라와 잘사는 나라의 소득격차가 더 벌여졌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다”라고 밝히고 있는 데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세계화로 말미암아 보편적인 공간으로서 ‘지구적 시장’이 창출되었다고 해서 오랫동안 민족국가인 자기정체성 속에서 살아온 인간이 하루아침에 이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다. 무한경쟁으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갈등의 구조는 이전보다 오히려 더 복잡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흔히 경험해 왔던 민족 국가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한 ‘국제정치’에서도 민족국가는 지금까지 거의 독점적으로 행사해 왔던 자신의 주권이 UN 또는 ‘초국적 기업’, ‘그린피스’(Greenpeace), ‘국제사면기구’(Amnesty International)같은 ‘비정부조직’(NGO)에 의하여 종종 제한 당하기도 한다. 어떻든 ‘세계화’과정이 진척됨에 따라 민족국가인 주권행사가 지역적,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인 여러 행위주체들에 의해서 더욱 제한 받게 될 것이라는 견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2. 지식정보화
지식 사회에서는 지식이 지식 사회의 핵심 자원이 되며, 지식근로자가 노동력 가운데 지배적 집단이 될 것이다. 지식 사회의 세 가지 주요 특성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국경이 없다. 왜냐하면 지식은 어디에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상승 이동이 쉬워진다. 누구나 손쉽게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성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 가능성도 높다. 어떤 사람도 생산 수단, 즉 어떤 직무의 수행에 필요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 가지 특성이 상승 작용하여 지식 사회를 고도의 경쟁 사회로 만들테데, 그 점은 조직에도, 그리고 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보기술은, 비록 다음 사회의 많은 새로운 특성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이미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보 기술은 거의 즉각적으로 지식이 퍼져나갈 수 있도록 해 주고,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지식 정보사회는 바로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창출되고 있는 사회이다. 그 기술적 견인차는 컴퓨터와 통신이 결합된 정보통신기술이다. 정보통신기술의 혁신적 진전으로 여러 사회 구성요소를 종합적이며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네트워크가 가능해져 사회 전반에 급격히 정보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것이 더욱 심화되어 앞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곳에서라도 모든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잇고, 원거리의 상대방과 쌍방향 통신을 나누며 정보 취득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큼 다가오고 있는 정보사회가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정보혁명’이라는 단어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실로 대단하다. 정보사회로 인한 인간의 달라질 생활 모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새로운 노동 형태가 등장한다. 재가근무가 가능해져 생활환경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또한 고령자나 신체장애자, 여성근로자들이 일하기도 편리해질 것이다. 도한 주부의 취업 기회도 넓어진다. 둘째, 홈 쇼핑과 홈 뱅킹이 보편화될 것이다 셋째, 복지와 행정서비스가 활성화될 것이다. 넷째, 풍요로운 여가 생활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정보화의 진전으로 보다 합리적으로 단축되면, 선택적으로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정보사회에서는 풍부한 여가 시간을 보다 창조적이며 보람있는 자기 실현의 기회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레크레이션과 레저 분야가 크게 활성화될 것이다.
그러나 정보사회가 이처럼 희망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것만은 아니다. 정보는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숨겨지거나 변조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통신의 수단과 기술은 독점되기 쉽다. 정보사회에서는 이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 우려가 있다. 점점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정보의 증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창조적 사고를 결여하게 됨으로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로 나타날 수가 있다. 사생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가 유출되거나 의도적으로 악용되면 개인의 권리와 프라이버시의 보호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3. 미래사회와 새로운 종교
앞으로 세계화와 정보화가 심화되어 사회의 변화가 가속화되면 우리의 정신 또한 이에 호응해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천 년(millennium)이 도래하는 21세기는 미래학적 관점에서 전망할 때, 물질적,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측면에서는 가치관의 혼란과 그로 인한 ‘영혼의 위기’(신념의 위기)를 강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한 예측은 ‘세계화’ 추세와 맞물려 나타난 온 기성종교에 대한 각종 대체종교의 홍수 현상을 통해서도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이러한 대체종교의 홍수 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the New Age Movement)이라고 하는 신흥종교운동이다. 이 운동은 1960년대 중반에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출현하였는데, 미국사회의 정신적 위기감이 고조된 1980년대 중반에 미국사회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억압적인 정통적 교의(creeds)라든지 믿음(신앙)에 대한 동조를 강조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즉, 이 운동의 주된 목표는 특정 종교공동체 속의 신도 자격을 규정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세계에 대한 체계적 관점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그 대신 이 운동의 주 관심사는 한 인간의 경험을 설명하고 미래의 변혁을 쉽게 만들어 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이 뉴에이지 운동은 ‘믿음’(신앙)을 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보면서 이것보다 ‘경험’을 더 중시한다. 그래서 믿음은 그것이 기능적이고 도움이 되는 한에 있어서만 지속된다.
기성 종교에 대한 각종 ‘대체종교’의 홍수 속에 최근에 가장 주목되는 이 ‘뉴 에이지 무브먼트’는 치병(治病), 환생(還生), 명상, 요가, 신비적 환경주의 및 그 어느 것이라도 자아를 변형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 등을 포함한다. 이 뉴에이지 운동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전의 낡은 ‘자아’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포함한다. 이런 맥락에서 뉴에이지 운동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자아 변혁을 위하여 병, 상처, 마음 따위를 ‘종합적으로 치유하는 것’을 상당히 강조하면서도, 이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인권’ 특히 여성을 지지하고, 때로는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도 진정한 보살핌이 요구된다고 인식한다.
이와 같이 뉴에이지 운동의 믿음과 수행체계의 근거와 기초가 기성종교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단 뉴에이지 운동의 주류가 동양의 철학과 종교 특히, 불교를 수용하여 미국적 가치와 혼합시킨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 주목할 것은 이 운동의 주요 추종자들이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들 중 가장 풍요롭고 잘 교육받았으며 성공적인 백인 중산층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숫자 또한 불교문화권의 아시아계 이민자를 제외한 통계로서, 1997년을 기준으로 미국내에서만 7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이 운동에 참가하는 인구가 점점 붐을 이루고 있으며, 2003년의 한 통계에 따르면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경우 불교인구가 카톨릭 인구를 앞질렀다고 보고되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서구인들의 종교 성향을 보면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특정 종교의 색채를 별로 내지 않는다고 하는 점이다. 불교만 하더라도 서구인들에게는 전통적 의미의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요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불교를 추종하는 이들은 ‘붓다의 가르침’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붓다라든지, 승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살펴보면, 심지어 매일 참선하고 계를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조차도 ‘신심’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소위 ‘과학적’, ‘이성적’ 불교도(?)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수천 개에 달하는 미국의 ‘선 센터(Zen Center)'나 ’ 비파사나 명상센터(Vipassana Meditation Center)' 중에는, 아예 간판이나 선전문구에 ‘종교로서의 불교와는 상관이 없다.’는 문구를 넣고 있는 센터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과연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이것은 바로 건강과 마음의 평온 등을 위해서 불교의 명상수행을 하기는 해도 반드시 불교도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위 스스로를 ‘불교적 기독교인(Buddhist Christian)'이라든지, 불교적 천주교인(Buddhist Catholic)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참석하되, 방법론적으로는 참선 등의 불교적 수행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근본적으로는 미국인들의 실용주의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불교는 승려가 없는 재가 중심의 단체가 많고, 혹은 불교적인 신심은 없이 참선만 하는 ‘선 센터’가 많은 것이다. 이들은 또한 한 가지 전통종교 의례나 수행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임의로 제작해서 실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점이 바로 다른 나라에는 없는 미국적인 불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미국불교는 새로운 형태로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사회진화 과정 가운데서 종교의 자연스러운 퇴거를 예언해 왔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에 현대산업사회의 과학문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재등장한 사실은 근대성 때문에 종교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사람들에게는 실로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사회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사회적 기능을 통해 종교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종교 운동들을 사회적 혼란에 대한 반응으로 간주한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신종교 운동은 한 사회가 외부로부터 가해져 오는 위협에 대응해 적절히 기능하지 못해서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하게 될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갈등에 대한 생각이 표현되고 투사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현대 사회처럼 소용돌이치고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극단적인 것들을 찾기 쉽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종교운동도 시대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문화는 항상 그 시대 사회의 영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현대 과학문명 사회가 사람들에게 진정한 만족이나 행복을 주지 못하고 인간소외 내지는 자아상실감에 빠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뉴에이지 운동은 삶의 공허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불교와 같은 동양종교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 그것을 개인주의적이고도 현실적인 성향의 대중적인 미국적 가치들과 조화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불교 수행의 현 주소
과학 문명으로 말미암아서 야기된 인간성 상실 등과 같은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수행 방법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종교는 각기 나름대로의 교리가 있다. 그리고 그 교리에 따라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 수행법이 있다. 따라서 실천 수행이 없다면 종교 교리는 한낱 공허한 희론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에는 5계․십선(十善)과 같은 계법․지관(止觀)․참선․염불․예배․송주․독경․육화경(六和敬)․37조도품의 원시 불교 수행법과 사섭법(四攝法), 6바라밀 실천 등과 같은 수많은 대승보살행법이 있다. 이들은 제각기 특색 있는 성격과 방법으로써 인간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며,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참된 인격을 갖추게 해주어 주변 사회와 더불어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그러한 실천수행법들은 일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존재를 신앙한다거나, 불교인이라고 하는 특정 종교인에게만 해당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올바른 삶을 확립할 수 있는 기본 질서이자 실천덕목들이다.
현재 불교계와 그 주변에는 수많은 수행법이 난립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유행처럼 이러 저런 수행법을 따라 몰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한국의 불교종단 내에서는 이들의 욕구를 해소할 만한 체계적인 수행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이미 ‘불교 수행범의 대중화’는 한국불교계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올라 있다.그래서 간화선과 위빠사나, 간화선과 제3수행법 등을 주제로 한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필자는 미래사회의 불교의 수행을 논하기에 앞서 이러한 점에 대한 설명은 먼저 현재 한국 불교계의 수행과 관련된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해 보기로 하겠다.
1. 수행에 대한 의식 결여
불교 교리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을 실천 수행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려 하지 않는다. 진정한 인간 형성을 위한 수행의 의의와 필요성에 대해서 무지하다. 수행은 성직자나 도 닦는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2. 유심(唯心)사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
유심사상을 관념론으로 파악하여 구체적인 실천 행위를 중시하지 않는다.
3. 사회 구원을 위한 수행에 대한 의식 결여
참선․염불․진언 독송․예배 등 주로 개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수행이 이루어진다.
4. 모호한 성불론
일체 중생의 성불을 강조하면서도 아승지겁을 닦아야 성불한다고 하여 수행 의욕을 저하시킨다.
5. 지계(持戒)생활에 대한 의식 결여
평소 생활에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스려 잘못 길들여진 생활방식을 바꾸고 훌륭한 생활 습관을 길들이려 하지 않는다.
6. 생활과 수행의 불일치
계․정․혜가 전일화(全一化)된 수행이 아니라, 수행이 따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이다.
7. 기복 신앙 차원의 수행
개인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기만 하고, 진정한 자아실현이나 사회구원 차원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8. 체계적인 수행 교육의 부재
불교에는 체계적인 수행법이 많지만, 이것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불교계에는 수행의 의의와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인하여 체계적인 수행 교육도 없고 그 실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인이 많다고는 하나 합리적인 교리에 호감을 가지거나 단순히 정감을 가지는 정도의 신자가 많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정법대로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늘날 불교인들이 수행을 한다고 해도 대부분 기복신앙 차원, 신비한 힘을 얻기 위한 차원, 심신관리 차원이거나 또는 출가자 위주의 견성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의 성격 또한 개인을 위한 것이었지 사회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국불교에서 수행이라고 하면 불성(佛性)을 개발하는 면을 도외시하고 중생성(衆生性)을 끊고 억제하는 쪽으로만 인식해온 것은 매우 큰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폐단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사회성의 결여는 바로 이러한 문제점과 결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타종교에 비해 사회적인 영향력이 떨어지고 본연의 임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의 힘은 그 종교의 교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실천력에서 나오는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미래 사회로의 비젼을 제시해 준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수행론으로서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Ⅵ. 미래 사회에서의 불교 수행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이지만 그 전반적인 수행의 성격은 소승불교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리와 수행이 괴리되어 겉돌고 있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 본연의 수행법의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하여 현실사회 속에서 정법을 구현하여 미래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스려서 억제해야 하는 성향이 있고 더욱 키워서 자라나게 해야 하는 성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중생성(衆生性)과 불성(佛性)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에는 자연히 두 가지 성격의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수행은 우선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므로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다스리고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수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계생활이나 지관(止觀)의 실수 또는 좌선 등과 같은 자신이 실천해야 할 수행 규칙을 세워서 그것을 일상 생활 속에서 규칙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참된 자아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해 나아갈 수 있는 불교 수행법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대승보살행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일을 대승불교에서 영원불변의 진실〔法〕을 자신이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음은 진실로 주목할 만한 가르침이다. 불교에서는 어디까지나 궁극적인 가치와 자신을 일체화(一體化)하여 스스로 그 가치를 구현함으로써만이 인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의 본질은 불법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다. 보살은 불타의 교설에 의해 존재의 진실〔法〕에 한없이 눈을 떠가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진실의 세계 [法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보살행이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진실에 대한 종교적 자각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학문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법의 해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을 영원한 진실과 일치시키면서 살아가는 진실한 인간 생존의 모습이다. 진리를 객관적인 원리로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개념일 뿐,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것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해한 진리와 자기 자신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개념적으로 이해해서는 진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 속으로 들어가서 몸소 진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고 진리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 속으로 몸소 들어갈 때에 그 장소는 어떤 곳이든 간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삼업(三業)의 연속적인 활동이며, 그 삼업(三業)에 정법(正法)이 구체적인 인격(人格)으로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인간은 본래가 사회적인 존재로서 사회 속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불교 수행법으로서 대승보살행법을 제시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 생존의 현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확립해 주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중생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어서 본질적으로 부처와 같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미(迷)한 범부에게 절대적인 가치가 있음을 천명하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중생이라고 하는 현실에서 출발해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종교적 실천의 근거와 원동력을 중생 자신의 속에서 찾아낸 가르침이다. 인간 내면의 진실한 생명 [佛性]의 진정한 자각은 자신의 본질이 부처임을 굳게 믿고 부처로서의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타평등의 보살행으로서 나타난다. 보살행으로서 구현하지 않는 한 불성이 있다고 해도 없는 것과 다름없다.
일체중생이 처음부터 본질적인 깨달음을 갖추고 있고, 이 참된 본성의 실질적인 현실화는 보살의 수행에 의해 성숙되었을 때에 드러난다. 화엄경에서도 “여래성(如來性)이 보살행이요, 보살행이 여래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이란 본질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불성이 그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음의 세계는 언제나 보살의 수행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참생명 [佛性]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부처의 모습이기도 하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은 미망(迷妄)의 생존을 그치게 하고 본연(本然)의 모습인 여래의 모습을 되찾도록 하는 새로운 여래출현의 도(道)인 것이다.
보살은 항상 청정한 자비의 원(願)을 세워서 항상 부처님을 공양하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현실 생활 속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 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배우려 하고, 부처님의 훌륭한 교법을 중생에게 가르치려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악업을 버리도록 하려 하고,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의지처가 되어 주고자 한다.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과 연기의 도리에 대한 바른 파악이나 이해를 통해서 지혜가 얻어짐과 동시에 중생에 대한 자비와 구제가 실현된다. 수행이 향상되는 만큼 보살의 지혜도 증장되어 가고 대비심에 바탕을 둔 중생의 교화구제 활동도 깊어 간다. 이것은 보살행의 성격이 진리를 추상적으로 파악하여 다만 관념적 내관(內觀)에 그치거나 한 개인의 공덕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님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현실 세계에 미혹하여 집착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비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안심입명(安心立命)만을 도모하려 하지도 않는 것이다.
Ⅶ. 맺는 말
세계화 시대 또는 정보화 시대라고 불안한 미래사회를 앞에 두고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성 상실, 즉 자아 정체성의 상실이다. 이것은 자기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존귀함이나 참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자연히 자신의 삶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온갖 비틀어진 삶의 양상들이 이른바 중생세간이라고 하는 인간사회인 것이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러한 허망한 생존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존재의 존귀함과 참된 가치를 바르게 인식하여 스스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대승보살행이다. 보살행이야말로 자신과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수행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살행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삶을 깨우쳐 준다 그리하여 주변 환경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물들어 맹목적으로 탐욕을 부리고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자아를 확립하여 자기 자신을 참되게 지키고 실현해 나아갈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보살행은 또한 현재의 불교 수행에서 기복신앙 차원, 신비체험 차원, 개인 혼자만을 구원하고자 하는 소승적 차원 등의 수행 성격을 탈피하여 현실 세계 속에서 인간이 처한 그 시간과 그 장소에서 바로 깨달음을 실현하여 자비를 실천하는 부처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실현은 어디까지나 중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사바세계가 그대로 불도(佛道)를 실현하는 도량(道場)이어야 한다. 불법이 생활 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은 연꽃이 높은 산 위의 깨끗한 곳에서 자라지 않고 평지의 더러운 곳에서 자란다고 하는 것이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행법은 고학력 시대에 각종 사회 교육과 다양한 정보 매체를 통해 수준 높은 지식을 갖춘 합리적인 사람들에게 종교를 초월하여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미래 사회에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더욱 절실하게 될 것이다. 환경은 중생이 몸을 담고 살아가는 생존의 터전인 기세간(器世間)이다. 생존의 터전을 잘 지켜 나아가는 것도 정토 건설과 관계되는 일이므로 환경오염 방지와 생태계 보존 등과 관련된 활동을 조직적으로 또한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실제적으로 많은 중생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제도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개선하거나 타개해 나아가는 일도 대중화 사회에서 불교의 정법 구현과 직결되는 중요한 일이다. 민주주의 체제의 대중화 사회에는 민중들의 단결된 힘이 커다란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일을 수행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단결하여 조직적으로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만큼 이를 위한 다양한 기구를 조직하여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이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실천될 수 있을 때, 불교는 미래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도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고, 시대적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진실을 실천하여 참 생명을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불교 수행이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제어
미래사회 Coming socity, 인간소외 Human neglect, 자아상실 The loss of self, 인간성 함양 Human cultivation, 수행 Practice(caryā), 깨달음 Enlightenment, 보살행 Actions of the bodhisattvas.
A Study on Buddhistic Training
in the Coming Society
Kwon, Tan-jun
Owing to the technology development, human beings will be able to lead more affluent and convenience lives in the coming society. But on the other hand, it is easy to expect that the technology produces various side effects such as egoism, individualism, neglecting each other, self-effacement and so on by rapidly changing the social environment and the way of thinking and confusing the value system.
Then how can we deal with these problems in the coming society? All buddhistic training from Early Buddhism to Mahāyāna Buddhism teach the universal truth that makes all the human beings live a enlightened life out of the suffering in the different and specific character and methods. However, the most effective way to solve these problems in the buddhistic training is probably Mahāyāna-bodhisattva path. Mahāyāna Buddhism emphasizes that establishing the true ego and realizing the real value of life is practicing the eternal truth by oneself.
This shows that the ultimate aim of the ways of enlightening beings is the religious consciousness and practice of the truth. The final aim of this is to live sincerely in a correspondence between oneself and the eternal truth, not to analyze it scientifically or philosophically. As one practices more and more, not only one's wisdom(prajñā) is reinforced but also the relief of mankind based on compassion becomes more active and effective.
As I mentioned above, it is the ways of enlightening beings that leads one who lives blindly in greed and pursues pleasures under the influence of individualism as well as feels alienated from the environment to be true and realize oneself by establishing the truth ego.
Thus, when the Buddha's instruction is interpreted in a new way in our lives, Buddhism can find a clue to solve various problems in the coming society and finally do a role of the times that the society dema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