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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2월의 마지막 주말 아침입니다~
아래 글은
학전 소극장, 김민기 님, 백기완 선생님 등 전인권 님 관련 검색하다가 다시 보게 된 기사에요
이 기사를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도 몇번은 본 기사지만 또 읽어보게 되었어요~)
예술가는 예술가를 알아본다고 할까요
전인권 님과 위화 작가의 이야기 읽어보세요~
경향신문
그의 노래는 단테의 '신곡' 같았죠 뭔가에 미친,예민한 소년 같았는데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씨(62)가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동숭동 학전블루소극장. 지난달 27일 밤, '한국 록의 전설'로 불리는 '들국화'의 전인권씨(59)가 '그것만이 내 세상' '사랑한 후에' '행진' 등 자신의 대표곡들을 때론 포효하듯, 때론 감미롭게 열창했다.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중국 제3세대 작가의 대표주자인 위화(余華·53)는 뜨거운 갈채로 화답했다. 그는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 인생 > 의 원작소설 < 살아간다는 것 > (1992)으로 주목받았고, < 허삼관매혈기 > (1996)로 각국에서 '위화 신드롬'을 일으켰다. 가장 최근엔 < 제7일 > 을 펴냈다.
이날 공연은 사전 홍보도, 티켓 판매도 없었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소장 백원담)가 개소 10주년을 맞아 전씨와 위화, 이 두 한·중 문화예술인의 '특별한 인연과 동행'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시인 김정환·소설가 공지영씨 등 두 사람의 오랜 지인과 백원담 소장의 아버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용산참사 유가족 이충연씨 등의 모습도 보였다.
전씨와 위화가 친구가 된 지 13년. 얼핏 잘 어울려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의 우정이 궁금했다. 공연 이튿날인 지난달 28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전씨와 위화를 만났다. 상대방의 모국어를 구사할 줄 몰라 두 사람 간 직접 대화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시종 달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두 사람은 언어를 넘어선 특별한 문법으로 교감하는 듯했다. 이심전심이었다. 전날 입은 고동색 재킷 차림으로 나타난 위화는 말할 때 '흠흠…' 하는 습관이 있었다.
-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2000년 6월 성공회대 중어중국어과 초청으로 '한·중 작가 5인담'에 참석하기 위해 보름 일정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만났습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김정환 시인과 백원담 소장이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록페스티벌에 저를 데려갔죠. 전인권씨는 마지막에 등장했고, 그의 노래에는 마치 맹수들이 날뛰는 것과 같은 한국의 격정이, 그리고 부드러움이 동시에 녹아 있었습니다. 가사는 알 수 없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죠. 단테의 < 신곡 > 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절망으로 점철된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의 희망을 본 것 같은…. 전 단숨에 매료됐습니다."(위화)
"공연이 끝난 후 김정환 시인과 대기실로 찾아왔더라고요. 위화의 첫인상요? 음… 뭔가 미쳐서 하는 사람 같았고 아주 예민한 소년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중년처럼 보이네요(웃음)."(전인권)
첫 방문 당시 위화는 청년시절 TV와 신문을 통해 갖게 된 한국에 대한 첫인상(광주항쟁과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운명을 정치가의 손아귀로부터 되찾아온 인민)의 자취를 찾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발전과 바쁜 한국인들의 모습 속에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전씨의 노래 그리고 김민기씨의 뮤지컬 < 지하철 1호선 > 을 만나면서 그는 찾아헤매던 것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그에겐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체험이었다. 위화는 "당시 신촌의 음반가게에 달려가 들국화와 전인권씨의 앨범을 있는 대로 다 샀다"며 "집에 10여장의 전인권씨 음반을 소장 중"이라고 말했다.
그날 김 시인과 위화 일행은 '섬'이라는 이름의 신촌 부근 술집에서 1차를 한 후 새벽녘 택시를 불러 미사리로 내달렸다. 뒤늦게 나타난 전씨가 "미사리로 노래하러 가야 하니, 따라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위화는 음악에, 술에, 우정에 취했다. 귀국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늦은 밤에 이들과 만나서 통음하다 아침이 되면 헤어졌다. 위화는 "친구들은 돌아가 잠을 잤겠지만 나는 그때도 호텔에 돌아와 글을 썼다"고 회상했다.
- 위 작가는 소설가이지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아요. 두 사람이 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요.
"전문가는 아니에요. 특히 쇼스타코비치를 좋아하지만 클래식, 대중음악을 가리지는 않습니다. 클래식은 시간의 검증을 받기 때문에 살아남은 작품은 양질일 수밖에 없어요. 반면 당대 음악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재하고 있죠. 미국 오리건대학에서 유학 중인 아들도 저의 영향으로 고전음악과 예술영화를 좋아합니다. 제가 아들 휴대폰에 좋아하는 곡들을 넣어주곤 합니다. 갈수록 공통의 취미와 관심사가 많아지면서 부자관계도 좋아졌어요."(위)
- 그러고보니, 전인권씨의 아들도 음악공부를 하고 있지 않나요.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있어요.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어 하죠. 그런데 우리 아들은요, 노래도 1절만 하고는 다 했다고 해요. 책을 읽거나 예술영화를 보는 일도 없고요(웃음). 걱정이에요."(전)
- 위 작가가 < 지하철 1호선 > 과 들국화의 중국 공연을 직접 추진했다가 2001년 < 지하철 1호선 > 만 공연된 것으로 아는데요.
"중국 정부는 외국의 록그룹은 반정부적 음악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허가가 나지 않을 걸로 판단해 초청단체 측이 아예 신청도 안 했어요. 록은 안되고 뮤지컬, 연극은 괜찮다고 생각하죠. 몇 년 후 정부는 영국의 록밴드 롤링스톤스 중국 공연을 난관 끝에 허가해줬는데 사스 때문에 그들이 안 왔어요. 사스가 물러간 후 다시 그들이 오겠다고 했을 땐 또 정부가 못 오게 했지요. 중국은 지금 유튜브도 차단해서 한국에서 보내준 전인권씨의 유튜브 공연 영상도 볼 수 없었어요."(위)
- 2000년 이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나요.
"그건 아니고요. 2003년 3집 솔로앨범 화보 촬영차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가는 길에 위화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위화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가이드가 공중전화로 위화임을 확인하고 저를 바꿔줬죠. 그런데 반갑기는 무지 반가운데 서로 말이 통해야죠. 제가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했더니 '노 잉글리시'라고 해요. 그리고 그냥 침묵이었죠. 한참을 그렇게 서로 수화기만 들고 있다가 제가 먼저 전화를 끊었죠. 으흐흐흐."(전)
"저는 한국에 올 때마다 전인권씨를 만나고 싶었어요. 하지만 한번도 성사되지 못했죠. 두번째 방한했을 때 김 시인에게 전인권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마약 혐의로) 감옥에 있어서 안된다'고 해요. 그래서 그 다음에 한국에 왔을 때 '이제 감옥에서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응. 나오긴 했는데 지금 필리핀에 계시다'라고 하더라고요(웃음)."(위)
위화가 전씨의 얼굴을 다시 본 것은 2007년 중국 언론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전씨가 필리핀에서 귀국하다가 필로폰 투약 혐의로 인천공항에서 체포됐다는 기사가 중국 신문에도 실린 것이다.
"보도를 접한 순간, '아, 이 친구 끝났구나!' 했어요. 그의 노래를 생음악으로 다시는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몹시 안타까웠어요. 이후 수년간 그의 소식을 통 들을 수 없었죠."(위)
그런데 '기적'이 발생했다. 최근 백원담 소장이 그에게 e메일을 보냈고 거기에 "전인권이 돌아왔다!"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백 소장은 "전씨의 노래를 들으러 오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시 답신을 날렸다. "당연하지."
전씨 역시 위화가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 먼 길을 온다는 얘기에 선뜻 그를 위해 공연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공연 프로그램도 13년 전 만남에서 위화가 좋아하던 곡으로 짰다. 지난 9월27일 공연은 그렇게 성사된 것이다.
두 사람은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담배를 좋아하고 저마다의 이유로 술을 끊었다. 위화는 "통풍 때문"이라고 했고, 전씨는 "술의 유혹을 끊지 못하면 마약도 끊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비장한 각오에서다. 각자의 무기인 음악과 문학으로써 사회적 약자들을 위로하고 보듬는 것도 닮았다. 위화는 그동안의 작품에서 문화대혁명을 견뎌낸 중국 인민의 삶과 중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특유의 해학과 풍자로 담아냈다. 최신작 < 제7일 > 에도 중국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은 유머러스한 표현 속에 오롯이 살아 있다. 고속 경제성장 이면에서 묻힐 땅도, 유골함도 없어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헤매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를 고발한다. 애인에게 짝퉁 아이폰4S를 생일선물로 받고 상심한 나머지 투신자살한 여성, 산아제한 정책에 따라 강제 유산된 후 의료쓰레기로 불리며 강물에 버려진 스물아홉구의 영아 시신 이야기도 들어 있다. 전씨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제주 강정마을을 위한 콘서트 등에 참여했다.
- 사회적 약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제 노래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면 즐겁고 보람된 일이잖아요."(전)
"1975년 남부지방의 한 병원에서 '발치사(이 뽑는 사람)'로 일할 당시 가난한 중국 노동자들의 고통을 저의 고통으로 의식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았죠. 중국의 고통은 곧 저의 고통입니다."(위)
- 전작 < 형제 > 에 이어 < 제7일 > 도 평가가 극단으로 엇갈리고 있는데요.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논쟁이 불거졌다는 것은 작품이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위대한 작품은 태어날 때 논쟁을 일으키지 않나요. 이 작품에 등장한 에피소드들은 중국 사회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들이에요. 저는 독자들을 믿어요. 작년에 < 살아간다는 것 > 이 출간 20주년을 맞았는데 대륙에서만 작년 한 해 41만권이 팔렸고 올해도 40만부 이상 팔릴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게 뭘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현재 중국의 많은 인민들이 제 소설에 나타난 중국민들의 비애를 자기 이야기로 공감하는 것입니다."(위)
- 동시대를 살아가는 문화예술인으로서 소명은 어떤 것일까요.
"록의 기본정신은 사랑과 평화와 자유예요. 거기에서 모든 가사가 나오죠. 가사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비트(박자)도 중요하고요. 거기에 모든 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전)
"문화대혁명 시기에 유일한 구호는 '문화예술은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저는 그것에 반대했어요. 문학은 문학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생각했죠. 한데 오늘날 중국이 격변을 겪고보니 정치가 문학에 끼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됐습니다. 제 작품에 정치적 요소가 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대 정치는 정부의 일방적 하달인 반면 제 작품 속의 정치는 제가 사회를 보는 관점입니다."(위)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미 어두워진 밖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다같이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운영하는 홍대 부근 카페로 이동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공지영씨가 위화를 위해 칵테일을 제조했다. 보드카에 토마토주스를 섞어 레몬즙으로 마무리한 것이었다. 위화는 "반가운 벗들과의 재회인 만큼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금주 결심을 깨겠다"며 공씨가 건네주는 칵테일을 여러 차례 맛있게 받아마셨다. 전씨는 보드카를 빼고 마셨다. 눈치 빠른 종업원이 전씨의 노래를 틀었다. 전씨는 "어, 다른 음악 틀어주면 안돼요?"라며 새삼 소년처럼 수줍어했다. 위화에게 13년 전과 비교해 오늘의 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13년 전 한국은 이해하기 쉬웠는데 오늘날의 한국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13년 전 중국에 돌아가 '한국의 눈'이라는 제목의 한국방문기를 썼는데, 지금 와서 보니 한국의 눈이 선글라스를 쓰셨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2000년 첫 만남에서와 달리 선글라스가 트레이드마크가 된 친구, 전인권씨를 가리킨 말이다. 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과 농담 속에 카페의 밤이 서서히 기울어갔다.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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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news.v.daum.net/v/20131009211006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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