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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예술가》 봄호에 실린 계간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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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한 시적 아날로지
이영숙(시인ㆍ문학평론가)
1.
폭풍에 대한 시가 풀잎처럼 고요하고 풀잎에 대한 시가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 폭풍과 풀잎의 궁극이 더 잘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다. 폭풍을 폭풍의 언어로 쓰거나 풀잎을 풀잎의 언어로 쓴 시가 기시감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봄의 사물을 언어화한 시가 정작 봄을 보여주는 데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폭풍과 풀잎 사이를 운동하는 상상력의 대담한 진폭이 봄과 봄 사이에서 자주 위축되는 것은 일테면 시의 언어가 철학이나 신학의 언어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과 신학의 대등한 층위로서의 문학의 언어라고 하지 않고 시의 언어라고 말하는 것은 문학 장르의 하나인 소설 역시 산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시의 언어는 소설을 포함한 철학과 신학의 산문적 속성, 그러니까 ‘A=A’나 ‘A=A1’, ‘A=A2’와는 아예 다른 종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 ‘A=not A’, 혹은 ‘A=not An’이라고 말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봄을 봄의 사물로 드러내는 것은 시보다는 산문적 태도에 가깝다. ‘B’와 ‘C’라는 보조관념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면서까지 시가 ‘A=B’, ‘A=C’라는 식으로 원관념을 은폐하는 것과는 달리 산문은 줄곧 인간이라는 원관념을 바꾸지 못한 채 인간에 복무해왔다. 그러나 산문이 시적 태도에 가까워질 때가 있는데,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자연을 원관념으로 삼기 시작할 때가 그것으로, 일테면 비건vegan에 대해 말하는 산문이 시적인 이유다. 비건은 착취 받는 모든 동물과 그 동물이 제공하는 모든 제품―벌꿀과 우유, 달걀, 오리털, 가죽제품 등―을 거부함으로써 동물의 입장에 서는 시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시적 진실은 삼라만상에 편만하나, 산문적 진실은 올곧게 인간을 향한다. 문학ㆍ철학ㆍ신학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고통에 대해서는 어떨까.
돌이켜보면 현 인류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시대가 아닌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휴머니즘의 격렬한 파동이 지나고 과학이 경이적으로 발전한 현대에서조차 역병, 전쟁, 가난과 소외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고통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간 실존의 보편적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의 의미에 대한 통찰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론―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이 철학과 신학의 주된 관심사였다면, 그것은 문학 장르에서 주로 세계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귀착된다. 세계의 재현, 곧 ‘세계에 구속됨으로써 세계에 참여하는 것’(사르트르)이 소설적 태도라면 세계의 초월, 곧 ‘본래적 경험으로서의 아날로지적 창조’(옥타비오 파스)가 시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날로지적 창조란 랑그와 파롤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이며, ‘B’와 ‘C’의 유추ㆍ유비를 통해 ‘A’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의성同義性과 이의성異義性을 오가며 언어의 다의성이 풍부하던 말의 원초적 상태를 현대적으로 복원하는 것을 말한다. 산문이 세계의 고통을 증언한다면, 시는 세계의 고통 그 자체가 된다.
2.
초당 300프레임, 가깝게 배열된 인물들의 영상이 느린 속도로 재생된다.*비통에 잠긴 표정과 무언의 몸짓이 곤충의 날갯짓만큼이나 복잡하다. 당혹과 분노, 연민, 두려움과 슬픔…고통의 감정들이 발산되고 수렴된다. 물리적 시간이 확장된다.
그들의 면전에―심리적 시간 속에― 어떤 불행의 현장이 펼쳐져 있는가.
대책 없이 들이닥치는 참사들, 어둠의 편에서 행해지는 무신경한 폭력들, 기생식물처럼 뿌리내리는 병마들, 치명적 도약을 감행하는 사람들
전시장 가득 빠르게 교차하는 비명과 신음의 이미지 사이, 관람자들이 유령처럼 떠다니고 아이의 명랑한 허밍이 낭하를 울리는 고무공처럼 현실적 공간에 공명한다. 가슴속 천근의 추가 불안한 진자운동을 한다.
애도 의식儀式에 참여한 사람들이 관람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빌 비올라, <의식Observance), 플라스마 모니터, 고화질 비디오
―허정애,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서 어떻게 격정의 감정을 읽어내는가」(《예술가》 2020년 겨울호)
예술이 콘텍스트로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수직으로는 전통에서 현대로 이어지면서 현대적 관점에서 전통을 수용하거나 재해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수평으로는 리좀rhizome적으로 당대와 자유롭게 접속하고 확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인 <네 명의 사도들>(목판에 유채, 1526)의 형식과 분위기를 차용한 빌 비올라의 <의식>(2002)이 수직적 콘텍스트라면, <의식>과 이 시는 수평적 콘텍스트다. <네 명의 사도들>은 두 개의 프레임에 요한과 베드로, 마가와 바울의 전신이 그려져 있는데 각각 215.5×76cm, 214.5×76cm의 긴 세로축과 좁은 가로축을 갖고 있다. 얼굴 표정과 손에 들고 있는 상징물로 인해 사도들의 성격과 역할 등이 절제된 형식으로 드러난 이 그림에서 빌 비올라는 두 명이 동시에 서기에도 비좁은 프레임과 고도로 ‘압축된 깊이’를 빌어와 영화촬영기법으로 <의식>을 제작했다.
“느린 속도로 재생”되는 <의식>의 특이점은 등장인물들인 “그들의 면전에” “어떤 불행의 현장이 펼쳐져 있는”지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그들이 어떤 참상의 결과로 추정되는 “애도 의식에 참여”했다는 예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9ㆍ11테러에서 받은 충격과 슬픔이라는 원래적 의도를 포함해 관객은 “대책 없이 들이닥치는 참사들, 어둠의 편에서 행해지는 무신경한 폭력들, 기생식물처럼 뿌리내리는 병마들”과 같은 일반적ㆍ주관적ㆍ개인적 고통의 목록들을 그에 대입하게 된다. 슬로우 모션으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18명의 등장인물이 차례로 눈을 맞추는 대상이 바로 관객 자신이기 때문으로, 문득 ‘나’는 그들의 애도 대상으로 치환된다.
이 시는 중계방송처럼 담담하게 <의식>을 재배치함으로써 두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 원본을 환기하여 세계와 ‘나’들이 가진 각기 다른 종류와 질량의 고통(“가슴속 천근의 추가 불안한 진자운동을 한다”)을 공유하게 만드는 것이 그 첫째요, 그럼에도 “관람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극진한 위로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그 둘째다. 애도 대상에 대한 빙의를 통해 고통과 위로는 우리에게 날것으로서의 원초적 감각이 된다.
3
베란다에 걸려있는 빨래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생은 잠시 초라해졌다가 다시 화색이 돌기도 한다
경멸할 것은 없다. 어차피 다 노래니까
나는 이 위험한 계보를 알고 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약기운에 지친 환자처럼 얌전해지는 밤을 알고 있다
서리 낀 창밖은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선 답을 하지 않는다.
질문 속에 답이 있거나 혹은 답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시의 동쪽에는 노숙인들이 낮 시간을 보낸
긴 의자들과 고장 난 그네가 있다
나중에 봄이 되었을 때
의자와 그네에는 새로운 색이 칠해져 있을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 거리가 파헤쳐지면
사람들은 비로소 도시를 이해한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끔 새들이 태어났다.
도시는 자꾸만 바람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나는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구타처럼 느껴진다
(나도 한 거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도시의 거주민들은 비가 언제까지 내릴까 하면서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리에는 장례식이 있었다
―허연, 「가여운 거리」(《시로 여는 세상》 2020년 겨울호)
생즉고生卽苦라는 오래된 전언이 진리로써 회자되는 것은 고통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라는 의미다. 행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 목표에 도달한다 해도 그곳에 안착하는 사람이 있을까. 더 나은 고지를 설정하고 다시 허리띠를 조이고 신발끈을 고쳐 매지 않을까. 한 세트로 묶여가는 생로병사에서 ‘생’만을 뽑아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욕망의 끝은 가없고, 시대는 작용과 반작용으로 길항하며 끊임없이 부침한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강자 논리의 시스템이 작동하여 약자 길들이기가 진행되고, 진실은 두꺼운 외피에 둘려 깊은 곳에 은폐된다. 기쁨은 잠시, 고통은 오래. 태생적으로 생의 비의를 감지한 사람들의 다수가 사상가거나 종교인, 그리고 시인이 된다. 전자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시인은 은폐된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먼저, 이 시의 외연을 살펴보자. “도시”에서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새들”조차도 “가끔”씩만 태어나도록. “생”에 “화색이 돌” 거라는 환상이 “경멸”받아 마땅한 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차피”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약기운에 지친 환자처럼 얌전해지는” 전철을 밟을 것이고, 바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나 “도시의 거주민들”은 “이 위험한 계보”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질문 속에 답이 있”으므로 “답을 하지 않”고, “답이 두렵기 때문”에 서로 질문도 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도시”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해 배정된 예산을 다 쓰기 위해 “겨울이 오기 전” “거리”를 “파헤”치면서 “거주민”들을 소외시키고, “봄이 되었을 때” “노숙인들이 낮 시간을 보낸/ 긴 의자들과 고장 난 그네”에 “새로운 색”을 칠하는 것으로 “노숙인”들을 소외시키는 바로 그때이다. “도시”는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경계하고, “나는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구타처럼 느껴”지는 이곳의 어떤 “거리”도 “사랑할 수” 없으며, “도시의 거주민”들은 한껏 길들어 “거리에”서 “장례식이 있었”던 일에는 무심한 채 고작 “비가 언제까지 내릴까 하면서/ 자꾸만 하늘”이나 올려다본다.
활기도 생명력도 거세된 것 같은 이 “도시”의 시공간은 과연 어디인가. 어쩌면 역사에 기록된 과거의 낯익은 풍경일 수도 있고, 속속들이 현재일 수도 있으며,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양상의 미래일 수도 있다. 혹은 이들의 공집합인 어느 지점, 곧 보편적인 삶의 현장일 수도 있다. “위험한 계보”, 곧 도시가 숨기고 있는 발톱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시적 화자가 원하는 것은 고작 “한 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쪽방촌 거주민, 고시원 거주민이란 호칭에서 보는 것처럼] “거주민”은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원주민과 주거가 불분명한 “노숙인” 사이의 심리적 층위를 가지고 있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붙박이로서의 추억이 서린 곳이 아니라면, “모든 소리들이 구타처럼” “들려오”고 “장례식이” 거행되는 “가여운 거리”는 애초에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시의 내포이기도 한, “(나도 한 거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괄호 속의 속말은 시의 모든 정황이 뒤집힌 상태에 대한 희구가 된다. 랑그와 파롤이 하나였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비명!
4
앞의 시처럼 시적 자아의 고통은 세계와의 불화에서도 오지만, 아래 시처럼 자아와 페르소나의 분리에서도 온다.
아주 천천히 손을 씻는다 크고 따뜻했던 손이 때때로 검정 색이다
피를 흘리고 가끔 붕대를 감고 봄밤 연인의 손을 잡다가 너무 많이 울어본 손이 여러 개로 손을 쪼개고 어느 한 조각에 잠긴다
손을 나라고 할 것인가? 대낮에는 내 손이 아니다 나를 떠난다 나를 이긴다 풋과일처럼 새파랗고 단호하게 다른 손을 잡는다 눈을 감고 있어도 손의 하루는 뻐근했다 손에 잠긴 사실들이 꿈틀거렸다 손은 뭔가를 할퀴고 만지다가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잔을 돌리며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한꺼번에 몇 개의 손이 되려 하는 손에게 왜 피가 나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아, 하얗게 자고 싶어. 얼굴 같은 손이 나에게 말했다
―최문자, 「손」(《열린시학》 2020년 겨울호)
본디 세계에 맞서는 것은 자아이지 페르소나가 아니다. 사회적 인격인 페르소나는 자아가 세계와 타협점을 찾도록 역할수행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손”으로 의인화된 페르소나의 역할은 자아를 위해 거의 맹목이다. “손”이 “나를 떠”나고 “나를 이긴다”고 했지만 “나”를 위해 “풋과일처럼 새파랗고 단호하게 다른 손을 잡”기 위해서다. “나”를 위해 “피를 흘리고 가끔 붕대를 감고” 있을 뿐 아니라 “몇 개의 손이 되려”고까지 한다. “봄밤 연인의 손을 잡다가 너무 많이 울어본 손”이 “나”를 위해 슬픔의 가닥 가닥을 대신 울어주기 위해서다. “나”를 위해 “뭔가를 할퀴고 만지다가 깊은 밤에야 돌아”오는 “손”에게, 그러나 “나”와 “우리는” “아무도” “왜 피가 나느냐고 묻지 않았다”. “손”이 수행하는 잡다한 세상일은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만한 일이지만, “나”는 “나”를 대신한 “손을 나라고 할 것인가?”라며 타자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내가 한 짓이 아니야’라고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페르소나를 분리시키는 나르시시스트의 고통에 다름 아니다.
연민과 혐오 사이에서 “내”가 환기한 것은 원초적 감각이며, 원초적 언어다. 이제는 “때때로 검정 색”이지만 “아아, 하얗게 자고 싶”다고 열망하는 본래의 “크고 따뜻했던 손”이 그것. 자아와 페르소나처럼 이들은 “나”의 부분이며 전체다. 그리하여 시는 ‘검정 색 손’―‘크고 따뜻했던 손’이라는 동의성과, ‘하얀 잠’이라는 이의성을 오가며 고통 이전의 시간대를 언뜻 현시한다. 자아와 페르소나는 배타적 혐오의 관계가 아니라 연민으로 더욱 끌어안음으로써 합체한다.
5
하물며, 자연과 인간은 유비 관계다. 형상과 현상을 공유한다. 자연을 모방한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연은 재해석된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을 복원하는 것과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등가가 된다.
기생일까 공생일까 시나브로 서로의 목을 조이고, 상생이라 여기며 몰락하는
모호한 관계, 당신과 나의 삶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기생이 없었다면 로맨스 없는 사회가 됐을 거라고
사원의 살을 파고드는 나무처럼 기세등등한 당신이 너스레를 떨었다
불면 속으로 깊이 빠져들 때,
마을 어귀 숱이 무성한 회화나무를 꿈꿨다
그늘에 평상을 키우고 이야기꽃을 부채질하는
꿈틀거리는 모든 것들의 쉼터를 꿈꿨다
앞새가 악수를 청하고 파랑새 붉은 입술로 속삭이는 내일
나이테를 살찌우고 아름드리 뿌리를 내리는,
공생을 생각했다
스펑나무 사이로 보이는 돋을새김 압사라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기생을 생각했다 당신과 나를 생각했다
―이보경, 「타프롬 사원과 스펑나무」(《예술가》 2020년 겨울호)
여기 두 삶이 있다. 자연과 문명이 얽히고설킨 사원과, 이상과 현실이 얽히고설킨 인간의 삶이 그것이다. 기생과 공생과 상생을 경계 짓기 어려운 지점에서 이 시는 출발한다.
캄보디아의 “타프롬 사원”이 유명한 것은 아마도 “스펑나무” 때문일 것이다. 마치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어졌거나, 지붕 위에서 싹이 튼 채로 사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는 듯한 기이하고 거대한 스펑나무의 규모는 압도적이다. 스펑나무 뿌리로 인해 붕괴된 사원의 잔해는 이들의 관계가 공생이나 상생이 아님을 말해주지만, 그나마 낡아가면서 겨우 남아 있는 사원을 지탱해주는 뿌리의 존재는 이들의 관계가 공생이나 상생처럼 보이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서로 이익과 폐해를 주고받는다는 의미에서 기생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함께 몰락해간다는 의미에서 공동운명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당신”과 “나”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에서 “스펑나무”는 “당신”에 유비되고 “사원”은 “나”에 유비되는데, ‘당신―나’의 관계가 ‘스펑나무―사원’의 관계를 유추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통에 관한 아날로지적 상상력은 작동한다.
‘당신―나’의 관계에서 한편에는 “기생이 없었다면 로맨스 없는 사회가 됐을 거라고” “너스레” 떠는 “당신”이 있고, 한편에는 “불면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나”가 있다. “나”는 “마을 어귀 숱이 무성한 회화나무”와 그 “그늘에 평상을 키우고 이야기꽃을 부채질하는” 살아있는 것들의 “쉼터”를 꿈꾼다. “앞새[남풍]”가 불어와 “회화나무”의 “나이테를 살찌우고 아름드리 뿌리를 내리는” “공생”의 “내일”을 꿈꾸는 것이므로, “기생”을 말하는 “당신”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시는 1200년 전에 건축되면서 조각된 무희들(“돋을새김 압사라”)의 미소(“입꼬리를 올리고”)와 현재의 “스펑나무”를 현재적으로 동일시하고, 또한 “나”와 “압사라”를 겹쳐 놓음으로써 ‘나의 미소를 “압사라”의 미소와 동일시한다. “회화나무”와 “스펑나무”는 시간의 두께 안에서 ‘나무’로서 같은 의미(동의성)를 지니고, 동시에 기생과 공생과 상생이라는 다른 층위(이의성)를 넘나들면서 “당신―나”의 관계는 기생과 공생과 상생이라는 개념의 경계를 지운 곳에 오롯이 자리잡는다.
6
나의 병은 주치의의 주특기, 삼십 년째 이 원인 모를 난치병을
연구했고 당연히 국내 유일한 권위자로 성장했다.
그에게 나는 오늘 혼이 났다.
먹어서는 안 될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남몰래 복용했기에
그의 예단대로 통증은 격심했고
불면은 깨진 유리처럼 저항력을 손상시켰다.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리며,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는 극단의 처방을
거두시기를 앙망하느라
내 눈자위가 떨잠처럼 으달달 떨렸다.
차트를 갈겨쓰는
창백한 흰 가운의 그는
환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법이 없다.
나는 소독된 햇빛이 비치는 책상 위
모형 범선을 보고 있었다.
펜을 멈추지 않은 채 그는 말했다.
제 의료 인생은 선원들과 함께한
험난한 항해와도 같았죠. 닻을 내리기 전까지
무엇보다 선원들과 싸워야 합니다.
휘날리는 필기가 끝나고 마침내 새 처방이 나왔다.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합니다.
그건 좀 어려워요, 직업이나 식사 무엇 하나
규칙적이긴 힘든데다 고독한 처지예요.
더구나 시는 읽을 줄 몰라요.
건강을 돌보라는
간단한 충고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군,
그는 깨진 유리처럼 인상을 쓰고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다.
간호사가 황급히 물잔과 알약을 대령하자
약을 털어 삼키는 동안
시커멓게 반달 진 그의 눈 밑이 엿보였다.
자가면역질환은 우리 몸이 자신의 세포를 적으로
오인하고 스스로를 공격하여 생기는 통증이지요.
나는 내 환자들을 내 몸처럼 여겨요. 그런데 왜!
처음으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으달달 떨며
폭죽처럼 실핏줄이 터졌다.
선생님, 통증이 심하신가요?
그는 두 손을 모아쥐고 간절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복용하셨나요?
그는 그건 이미 십 년 전 일이라고 못박았다.
나는,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한다고 처방했다.
그는 직업상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나는 내 말을 믿지 않는 환자는 진찰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고,
나는 간호사에게 외쳤다.
다음 환자!
그는 흰 가운에 청진기를 건 채 훌쩍이며 문을 열고 나갔다.
간호사는 그가 예약된 마지막 환자였다고 말했다.
―이윤설, 「예약된 마지막 환자」(《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가장 고통스러운 생체 감각은 질병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난치병”과 “자가면역질환”이라는 병명 자체도 생소하지 않다. 이 시는 그 기저질환 위에 얹혀 발생한 날카로운 통증을 구체화해서 독자 역시 “으달달 떨”게 만들고 있다.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이었겠지만, 금지된 약물(“사슴뿔 고아 짠 용”)을 “남몰래 복용”한 후, 시적 화자가 겪는 일련의 사태는 크게 두 가지다. “틍증은 격심했고/ 불면은 깨진 유리처럼 저항력을 손상시”킨 신체적 고통이 그 하나요, 이 병에 관한 한 “국내 유일한 권위자”가 내린 “극단의 처방”(“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에 대한 심리적 공포가 또 하나다. 그러나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리며” “극단의 처방을/ 거두시기를 앙망하”는 장면은 신체적 고통보다 심리적 공포가 더 극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사가 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은 환자를 포기한다는 말이며, 고통 속에 방치한 채 그 생명을 죽음에 순순히 내어주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극단의 처방”을 내린 것은 실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역으로 화자가 겪고 있는 병의 위중함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도 이 시가 재미있는 것은 같은 상황을 의사와 환자가 바꿔 연기하는 역할극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의 처방”이 “새 처방”으로 바뀌면서 2연까지의 리얼리티는 3연에서 환상의 외피를 쓰면서 시적 국면으로 전환된다.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합니다.” 이 “새 처방”은 “난치병”과 “자가면역질환”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완치된 뒤에 듣고 싶은 화자의 내면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극단의 처방”에 대비해보아도 그 무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건 좀 어려워요./ 직업이나 식사 무엇 하나/ 규칙적이긴 힘든데다 고독한 처지예요./ 더구나 시는 읽을 줄 몰라요.” 화자는 가볍게 거부한다.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리”던 태도에서 이렇게 달라졌다.
산문과는 달리 시에서의 고통이 비극은 아니어서 시적 상황이 서사적 맥락으로 가지는 않는다. 시에서의 고통은 불행이 아니어서 시적 상황은 때로 유머를 머금기까지 한다. “간호사”가 “그가 예약된 마지막 환자였다”고 말하는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처럼, 화자는 이윤설 시인 자신이고, “마지막 환자” 역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가면역질환 판정 후 1년여 만인 2020년 10월 10일에 세상을 떴고, 이 시는 그녀의 유고작이 되었다.
7.
시와 산문은 우위를 가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제 몫의 역할이 각각 주어져 있을 뿐이다. 시적 언어와 산문적 언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놓일 자리는 구별되어 있다. 시가 고통을 다루는 방식과 산문이 고통을 다루는 방식을 부분부분 비교한 것은 상대적으로 시적 아날로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원초의 감각, 원초의 리듬, 원초의 언어 등은 시를 쓸 때마다 다녀와야 할 성지聖地가 아닌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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