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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문재인 대통령 중국 국빈 방문에 대한 소회)
이 글이 발제한 질문은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질문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한나라의 정체성이란 자기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만 그 존재성이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유사한 문화와 구별될 수 있을 때 그 독특한 개성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의 국빈으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만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중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정사(正史)에서 우리 한반도가 인식되는 시기는 불후의 고전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2천백 년 전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태사령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 조선 열전 편에서 처음으로 한반도의 역사가 소개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 조선은 중국의 속국(屬國) 내지는 조공국(朝貢國)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 이르러 2천년이 넘는 그런 오욕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국에 대하여 좀 더 우월한 자긍심을 갖는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앞 세대와 우리 세대가 한국동란 이후 치열한 산업전사로서 또한 민주 시민으로서 이루어낸 우리 역사에서 유례없는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 국민 개개인이 갖는 자긍심이 국가의 자긍심으로 확장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서글픔을 느낍니다.
중국은 여전히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 군림하는 패권국가로서 존재하며 복고적인 전통으로 되돌아가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중화(中華)나 모화(慕華)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할 만큼 중국의 옛 영광을 향수(鄕愁)처럼 그리워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엄연히 세계가 인정하는 주권국가이며 이미 작은 나라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외교적 무례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중국의 한국인식이 무례한 데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중국의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인용하여 그들이 느끼는 시대적 감수성과 심정을 토로하는 유난을 떱니다. 사실 동양문화권에서 중국의 통치철학과 수신(修身)의 교양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식(有識)도 정도껏 해야지요. 식자우환(識字憂患)입니다.
특히 우리는 고구려의 역동적인 역사에서 보듯이 한 때 동이족(東夷族)으로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수(隋)와 당(唐)은 막강한 제국이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함으로서 망국의 길에 들어섰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후 고려 말 조선 초에 걸쳐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사대부(士大夫)와 유생(儒生)들이 지배계급이 되어 소중화(小中華)의 나라로 발전해갑니다. 성리학은 송대(宋代)의 주희(朱熹)가 유학의 본질을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찾았으며 주자학이라고도 합니다. 아마 이 때가 중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했던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악(惡)은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야 참다운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지식의 중요함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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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명(明)의 관계가 비교적 순탄했던 것은 조선이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성취가 주변국들
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깊었으며 예악(禮樂)에서도 종주국인 중국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비록 조공국(朝貢國)이지만 함부로 대할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종주국인 명(明)은 학문이 있는 사람을 정사와 부사로 임명해 중국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조선 역시 명(明)의 문신들이 오면 우리의 문신들을 내세워 시문(詩文)을 주고받도록 했습니다. 그 문집이 『황화집(皇華集)』으로 명나라 말기까지 23집이나 발간되었다 합니다. 명(明)의 사신들이 대동강 연광정(練光亭)의 정지상의 시(詩) 송인(送人)을 보고 신운(神韻)이라고 절찬을 했던 일화는 우리의 시문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서는 왕이 등극하면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고명(誥命)과 인(印)을 하사받는 속국이지만 조선은 속국 중에서 특수한 지위를 누렸습니다. 외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상석에 조선의 사신을 앉히고, 황제의 연회에서도 전상(前床)에 배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문약(文弱)으로 흐르면, 주변의 무력국가(武力國家)가 나타나면 참화를 겪게 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나의 역사적 숙명입니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정치지형(政治地形)을 바꾼 조선과 명(明)이 겪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입니다. 우리 조선은 소중화(小中華)의 자부심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하나의 난(亂)으로 폄하하고 있지만 실제는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아시아패권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은 근 백년에 이르는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시대의 혼란을 오다노부나가라는 걸출한 인물이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노부나가는 그 영광을 보지 못하고 암살당합니다. 그 위업을 이어받은 사람은 노부나가의 충복인 도요토미히데요시였습니다. 그 기반은 다이묘(大名)의 힘을 규합한 막강한 부시(武士)정권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그의 정권이 다이묘들에게 베풀어야 할 분봉(分封)이 필요하기도 했고 또 너무 비대해진 다이묘들의 힘응 약화시키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명분이 정명가도(征明假道)였습니다. 명을 치려하니 조선은 길을 좀 빌려주길 바란다는 뜻이지요.
명(明)은 당시 만력제(萬曆帝 재위1572~1620)라는 무능한 황제의 시대였습니다. 아마 히데요시도 명(明)이 쇠락하는 국가라는 정보를 입수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조선에서의 원군요청에 조공을 받는 종주국으로서 외면하는 것은 대국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소위 말하는 항왜원조(抗倭援朝)의 차원에서 은화 780만냥 이상의 군비와 수백만 섬에 달하는 군량을 조선에 지원했습니다. 그것이 명(明)이 몰락하는 자충수(自充手)가 될 줄은 몰랐을 겁니다.
자고로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군사력은 바로 국력이다」라는 말은 국가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군사력이란 한 국가의 생산력이 뒷받침 되어야 작동될 수 있는 집단입니다. 그 때 당시 관백(關百)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30만 정도였다고 하니 미루어 짐작컨대 당시의 일본인구는 3천만 정도 되지 않을까 추정됩니다.
그와 대비해 율곡 이이(李珥)선생이 십만 대군 양병설을 주장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이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조선인구는 제9대 성종 때 이르러 천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제14대 선조 때는 그 정도의 생산력이 뒷받침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저의 역사지식으로 보건데 옛날의 군사력이란 국가인구의 백분의 일 정도가 가용할 수 있는 적정치로 본다면 일본의 국력은 우리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기 더하여 일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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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이란 신병기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자연 생태계에서도 대칭관계를 이루는 종(種)이 있듯이 국가관계도 하나의 생태계를 이룹니다.
한반도는 대륙방향으로는 중국이 대칭국가였다면 해양 쪽으로는 일본이 늘 대칭국가였습니다. 우리는 대륙 쪽의 명(明)나라가 조선을 보는 시각과 대륙의 정세도 알아야하듯이 해양 쪽의 일본의 정세와 우리를 보는 시각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임진왜란을 분로쿠노 에끼(文祿의 役)라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전쟁으로 보고 있으며, 정유재란을 게이조노 에끼(慶長의 役)라고 하여 조선침략에 초점을 맞춘 문화재와 도공(陶工)들을 약탈하고 납치하는 일명 도자기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적 환경에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출현했다는 것은 가히 기적같은 일이었고 국난을 당한 조선에게는 하나의 신운이라 할 만했습니다. 역사에서 우리가 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일련의 사람들에게는 그 캐릭터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비범한 재능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기력을 가지고 있는데 더해 그 배경에는 어머니의 간절한 모성(母性)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순신은 뛰어난 부하 장수들을 거느릴 수 있는 감별력과 지도력도 있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어머니의 모성(母性) 또한 큰 힘이 되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위인들이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는 것 또한 위인들의 삶이 운명적일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여성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모성(母性)은 인간사회를 작동시키는 큰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위인전은 대개 개인의 비범함과 성리학의 교육이 빚어낸 결과로서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나는 그 캐릭터가 갖는 강력한 자기력과 모성(母性)에서 발화된 힘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가 이런 패권전쟁에 힘을 소모하고 있었다면 15세기 이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과학의 발전으로 서구문명은 근대국가로 발전하며 동아시아에 몇 번의 충격을 주게 됩니다. 15세기 이전에는 진(秦)과 한(漢)으로 대표되는 중국문명과 그리스·로마문명은 문명의 변방을 통하여 촉수(觸手)를 스치는 정도의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서로 독립된 종주국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리되어 있는 문명들의 문화적 성격이나 사회적 구조에 있어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현재까지도 역사적 전망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 두 문명은 각기 자기만이 세계에서 유일한 문명사회이고 그 외의 인류는 야만인이고 천민이고 이단자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중국인에게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구상의 일 구획이 곧 「천하(天下)」였고 그 제왕의 직접 통치하에 있는 지역이 「중국」이었습니다. 이 견해는 두 나라의 군주가 서로 외교적·통상적 관계를 체결할 것을 제안한 대영제국의 조지3세(재위1760~1820)의 서간에 대한 건륭황제(乾隆皇帝재위1735~1796)의 유명한 답서 속에서 자신만만하게 표명되어 있습니다.
『짐의 천조(天朝)에 신임장을 지참하고 귀국과 중국과의 통상을 관장할 귀국인을 파견하겠다는 귀하의 간청에 대하여는, 이러한 요청은 본조(本朝)의 예문과 예법은 귀국의 법식과는 전혀 상이한 것이므로 비록 귀하의 사신이 본조(本朝)의 기본을 습득할 수 있다하여도 귀하가 아국의 관습을 귀하의 이국 국토에 이식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짐은 넓은 천하를 통치함에 있어서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이 있으니, 그것은 완벽한 통치를 유지하고 국가의 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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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행하는 것이다…. 짐은 이방(異邦)의 진기한 물품을 귀중히 여기지 않으며, 또한 귀국의 산물은 짐에게 있어서 전혀 소용이 없다.』
영국의 사절단장은 조지 매카트니 경(卿)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의전에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요청받았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영국 국왕에게 하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손에 입맞춤하는 영국식 의례로 귀결되었습니다.
중국의 황제로서는 조지3세는 철이 없는 야만인의 소공자에 불과했습니다. 제정신이라면 대등한 말투로 천자에게 서신을 보낸다는 염치없는 행동을 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국 국왕의 서신 기초자가 전혀 무의식중에 취한 어법은 건륭제와 그 측근들이 품고 있던 역사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야말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가에 무인(武人)을 겸했던 건륭제는 청(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로서 그가 지배하고 있던 제국은 그 당시 인구가 3억명에 달했으며 현존하고 있던 정치제도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가장 성공하였으며, 가장 혜택을 맣이 주는 국가였습니다.
이 건륭제의 찬란하던 전성기의 모습은 18세기 후반 실학파의 거두였던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44세의 혈기가 넘치는 이 지식인은 조선 성리학의 관성적 사고를 거부하던 게릴라 지식인이었습니다.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갔던 박지원은 휴양지 열하(熱河)에 있던 황제를 뵈러 가면서 경험한 기행문으로, 청(淸)의 신문물을 보았으며 중국을 대하는 외교적 정책도 실용적인 입장에서 조언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건륭제의 80회 생일에 매카트니 경(卿)이 생신축하 사절단으로 열하를 방문했던 겁니다.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을 하고자 했던 매카트니는 건륭제에 의해 추방당하는 강제조처를 당합니다.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지요. 상대를 몰랐던 것은 건륭제와 측근 지식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의 그러한 자긍심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요?
건륭제가 통치하던 오래된 거대 문명국가인 중국, 이 정치의 패물함에는 하나의 지적인 재보가 비장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것은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일체의 양자택일적 해답을 탐구해낸 철학의 여러 학파의 발견물이 비장되어 있었습니다. 공자의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을 위시한 제자백가의 경세학, 그리고 후대의 격물치지의 성리학이 패물함에 있었던 겁니다. 또한 중화(中華)의 자손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문명이 자기 자신만의 힘만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정신적인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하나의 위대한 이국종교(異國宗敎)인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채용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지성과 수완에 못지않게 관대한 도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매혹적인 유산은 북경에 자리하고 있는 「천자(天子)」를 유혹하여 스스로 유일무이한 문명의 대표자로 자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중국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화이(華夷)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 의지하여 위와 같은 답서를 조지3세에게 보낸 건륭이 과연 현명하였던 것인가?
그것은 이후 전개된 영국에 의한 강제교역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가를 보면 치욕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직관은 「이방(異邦)」의 진기한 영국제품을 교역하는 것을 경고하였습니다만 영국 상인이 「본조(本朝)」의 신민(臣民)에게 제공해준 매우 진기한 물품의 하나가 아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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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계의 중심은 중화(中華)이고 변방 국가는 오랑캐라는 화이개념(華夷槪念)은 구한(舊韓) 말의 우리 한반도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메이지유신 이후 나타난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의 몰락이었습니다. 우리가 화이(華夷)개념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개화(開化)와 척사(斥邪)의 상극의 도정을 걷고 있었다면 일본 메이지(明治)의 개혁세력은 전통적인 화이(華夷)개념에서 벗어나 개방을 통해 근대서구문명이 성취한 과학지식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함으로서 세계열강의 대열에 합류 합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그 시대의 세계국가가 주변국에게 외교와 교역의 관계를 맺으려 하면 약소국의 대응방법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 걸 보게 됩니다. 하나는 개방을 통하여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제도적·문화적 선진문물을 배워 그들과 공존하려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꿩이나 타조처럼 천적이 오면 머리를 땅에 파묻는다는 방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로마문명이 밀물처럼 밀려오던 시기에 유대민족이 대응했던 방식에 따라 전자는 헤롯주의(헤롯 왕당파)라 하며 후자는 젤롯주의(열심당파)라 합니다. 열심당원들은 재래식 방법으로 자기들의 종교적·문화적 전통을 지키고자 치열한 싸움을 전개합니다. 예수를 로마군에게 넘긴 유다는 사실 열심당원 이었습니다. 결국 열심당원은 최후의 성전(聖戰)을 사해의 마사다 언덕에서 벌이지만 로마군에 의해 전멸함으로써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 유랑민족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일컫습니다. 근대에 와서 서구문명의 충격에 헤롯주의로 성공한 국가는 메이지유신의 일본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튜르크의 터키 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지혜의 시작은 유익한 충격을 받는 데 있습니다.
화이트헤드 교수의 적절한 말이 생각납니다. “훌륭한 교사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자이다.” 15세기의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 계몽시대로 접어들면서 발아(發芽)한 근대 서구문명은 비 서구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이슬람의 역사가인 알 가바르티가 서구문명의 충격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선입견 없이 내 이웃이 내가 기독교인인 것을 존중해주듯이 우리는 우리 이웃이 이슬람교도인 것을 똑같이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거기에도 많은 현자(賢者)들이 살았으니까요. 알 가바르티가 경험한 정의(正義)는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국빈방문 중에 일어난 우리 측 청와대출입기자가 폭행당한 것과 너무나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전통적인 가치척도는 예언자 예수의 가치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예언자 예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동방정교를 세운 그리스인이 다신교와 우상숭배로 변질되어 갔던 루움의 기독교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일한 참된 신(神)」의 게시에 대한 그러한 부끄러운 배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순수한 종교를 구한 것은 최후의 사자(使者)인 마호메트였습니다.
한 쪽에는 기독교 다신론자들, 또 한 쪽에는 힌두교적인 다신론자들 사이에서 다시금 일신교의 광명이 비쳐왔습니다. 이슬람교의 존속이야말로 세계의 희망이 달려 있었습니다. 신심 깊었던 역사학자 알 가바르티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척도는 그가 1798년(이슬람 기원1213년)의 사건에 대하여 기록한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리하여 이 해도 끝나게 되었다. 이 해에 일어난 미증유의 사건 중에서 가장 불길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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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메카 히쟈즈의 여러 성도(聖道)로 가는 순례가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카 바를 덮을 성스러운 직물도 보내지 않았고 염낭(스라)도 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종류는 당대에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고, 바누 오스만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참으로」여러 사건이란 오로지 신(神)의 뜻에 의하여 정해지는 법이다.』
순례라는 이슬람의 제도는 물론 그 자체로서는 단지 하나의 외면적인 엄격한 종교적 관례에 불과하지만 상징으로서는 그것은 모든 이슬람교도를 하나로 결합하는 동포정신을 의미합니다. 그런고로 순례가 쇠퇴하면 이슬람의 세계가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전래되어 온 종교에 축적된 정신적 보물을 소중히 여기는 알 가바르티는 이 위험에 대하여 민감하였습니다.
이 다사다난했던 해란 어느 해였을까?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때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내려온 해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용한 문장은 참으로 극적인 「서구세계와 이슬람세계간의 전쟁」에 관한 매우 생생한 통찰에 넘친 설명을 장식하는 알 가바르티가 취주하는 일대 종주곡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에 돌연 25척의 외국 선박이 출현하였을 때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한 알 가바르티의 기록은 우리의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나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구로후네(黑船)가 일본의 요코스카항에 나타났을 때와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외국인들이 무엇 때문에 찾아왔을까하고 거리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한 척의 조그만 배가 들어와서 열 명의 사나이를 상륙시켰다. 이 외국인들은 자기들이 영국인이라고 말하고, 상당한 함대를 인솔하고 알 수 없는 목적지로 떠난 프랑스인들을 막 찾고 있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이들 프랑스인은 이집트인이 침략자들을 격퇴하거나 그들의 상륙을방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집트를 기습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한다고 말하였다. …외국인들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이 거리를 방어하고 연안을 순항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 배로 바다를 지키면 족할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물과 식량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는 대금을 지불할 생각이다」 그러나 시(市)의 인사들은 영국인과 관계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나라는 술탄(이슬람 교주)의 것이고, 프랑스인이나 어떤 다른 외국인도 이 땅에 대하여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를 떠나기 바란다.」 이러한 말을 듣고 영국의 사자(使者)들은 배에 돌아가 알렉산드리아 밖 어떤 다른 땅에서 양식을 구하려고 떠나버렸다. 신(神)이 그의 뜻에서 이미 작정한 일을 이룩하려고」』
이것을 읽어감에 따라서 우리는 이 근세의 「프랑스인을 통한 신(神)의 사업」이 알 아자르 대학의 이 민감한 박사를 통하여 곧 자기 자신을 재교육하는 일을 시작하게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이로를 점령한 후 프랑스인이 처음으로 한 일 중의 하나는 거기에서 과학전람회를 개최하고 여러 가지 실연을 하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알 가바르티도 이 때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프랑스인은 분명히 우리들 이슬람교도들을 어린이 취급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숭이 재주로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다고 보며, 이런 하찮은 재주야말로 프랑스인들이 실제 어린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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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다음에 사실 실연하는 프랑스인의 과학의 업적에 대하여 경탄하였다고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점령 직후에 프랑스인이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므로 일어나게 된 폭동으로 프랑스인이 입게 된 손해 중에서 그들이 가장 아쉽게 생각하였다고 보는 것은 아자르 대학의 석학의 저택에서 파괴된 과학기구였다는 것을 가바르티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과학에 대한 알 가바르티의 관심도 프랑스인의 정의에 대하여 그가 받은 감명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강제로 가택침입을 하였다는 이유로 기소된 프랑스 병(兵)은 나폴레옹의 직접명령에 따라 처형되는 것을 보고 그들의 공정한 정의를 보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프랑스 점령군 사령관이 된 끌레베르 장군이 한 이슬람교 광신자에 의해 암살되자, 그 살해자는 철저하게 공정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재판을 알 가바르티는 말할 수 없이 감탄할 정도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솔직한 그는 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슬람교도들은 그러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의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재판의 절차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그 기록을 보존하고 싶다고 열렬히 희망하여, 프랑스인 군사재판관의 흠많은 아라비아어로 된 문서를 한자 한자 복사한 기록을 자기 이야기 속에 담았습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프랑스어 제 1과를 이 이집트 이슬람교도 학자인 알 가바르티가 얼마나 신중하게 또한 얼마나 쉽사리 배웠는가를 볼 때에 우리들은 또한 서구화에 노력을 경주한 메이지 유신(維新)의 개혁가와 오스만 터키의 위대한 정치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튜르크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박정희의 근대화도 여기 못지않은 눈물이 담겨져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히 알 가바르티의 감동과 대비되는 건륭황제의 측근 지식인들이 느끼던
무딘 지성과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무딘 지성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존재함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시에 수행했던 기자가 중국 경호원들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폭행당한 것을 중국의 지도자와 지식인 그리고 중국 언론에게 중국의 정의(正義)는 어떤 것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문명을 찬란하게 했던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근본문제를 탐색했던 지성과 정의는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곧 잘 외교적 수사를 중국의 고사성어로 인용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외교의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인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굴기(屈起)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苗白描論)으로 시작하여 강택민의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거쳐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까지 줄기차게 중국몽(夢)을 실천해왔습니다. 나는 그것이 패권국가가 아닌 정의에 기반한 품격 있는 국가이기를 바랍니다.
그런 도덕적 수준이 없다면 우리는 굳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중국의 지성들에게 중국의 보고(寶庫)인 고사성어만 말하지 말고 알 가바르티를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의 모호한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우리의 길을 가야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건강한 자유시민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주는 우리의 정체성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017년12월31일 저녁 김정율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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