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르크스의 저술을 읽어야 하는 이유? 아마 수십 가지를 댈 수 있을 게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또는 '소외된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등.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독특한 이유를 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우치다 타츠루 전 고베여자학원대학 교수다. 한국에선 <하류지향>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라는 책에서 그는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사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성숙한 어른'을 만들어내는 데 주도권을 휘둘러온 앎이었다"라고 지적한다.
일본에선 대중적인 인문서 저술가로 유명한 그의 관심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관심과 활동의 폭이 워낙 넓어서다. <영화는 죽었다>, <망설임의 윤리학>, <아저씨적인 사고>,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유대문화론>, <일본변경론>, <죽음과 신체>…등. 그의 저서 목록만 봐선 그의 전공을 짐작하기 힘들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그는 합기도 7단이다. 단지 취미 또는 신체 단련 차원에서 무술을 익힌 게 아니다. <무도적사고(武道的思考)>라는 책도 썼다. 무술(그가 쓰는 표현대로라면 무도)를 철학 차원에서 다룬다.
이처럼 폭넓은 관심을 지닌 그에게도 몇 가지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성숙'이다. 마르크스의 저술을 읽는 것도, 합기도 수련을 하는 것도 모두 '성숙한 어른'이 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아이를 '성숙한 어른'이 되게끔 하는 게 바로 교육이다. 그가 교육 문제에 대한 책을 낸 건, 그래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의 저술 가운데 최근 <스승은 있다>가 번역 출간된 데 이어 <교사를 춤추게 하라>까지 출간됐다. '성숙한 어른'을 향한 그의 고민이 잘 녹아 있는 책들이다.
실제로 그는 교수직에서 정년퇴직 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 모델을 실천하고 있다. 고베 시에 있는 자기 집 일층에 '개풍관(凱風館)'이라는 합기도 도장을 열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저 합기도 연습만 하는 도장이 아니다.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는, 일종의 배움의 공동체다.
강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를 지난 17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났다. <프레시안>이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학교폭력'을 말하다" 연속 인터뷰 여덟 번째 순서로 그를 만난 데는 이유가 있다. 폭력이야말로, '성숙'과 '미성숙'을 구분 짓는 선명한 경계라고 봤기 때문이다. 아이가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건, 폭력에서 해방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어적 폭력이건 물리적 폭력이건,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뜻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는 그를 '성숙한 어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칠순을 내다보는 나이에도 '성숙한 어른'을 향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 그는, 그래서 학교폭력과 관련해 빠뜨릴 수 없는 인터뷰 대상자다.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학교는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학교와 사회 사이에는 일종의 장벽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이 우리에겐 만만치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돌아보면, 학교와 사회 사이의 벽은 허물어진 지 오래다. 학교는 사회,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시장이 요구하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게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아이가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는 데는 시장에서 별 쓸모가 없는 것들도 종종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학교는 이런 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칠 여유가 없다. 학교는 원래 이런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변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마찰'이 생긴다. 학교폭력은 그 '마찰'이 드러나는 한 형태라는 게 우치다 타츠루 전 교수의 진단이다.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편집자>
"학교, 권위에서 시장으로"
프레시안 : 한국에선 학교폭력이 뜨거운 쟁점이다. 대체로 '가해 학생을 어떻게 찾아내서 처벌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존의 학교와 교사-학생 관계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도 나오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목소리다. 일본 역시 왕따, 학교폭력 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됐던 걸로 알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 : 일본에선 학교폭력 대신 교내폭력이라는 말을 쓴다. 일본에선 교내폭력이 1980년대부터 쟁점이 됐는데,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거나 칼로 찌르고, 학교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시설물 파괴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이지메(イジメ, 왕따) 형태로 바뀌었다.
과거의 학교는 무척 권위적인 공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장원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마찰이 생긴다. 이런 마찰이 학생들의 폭력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결국 학생들의 폭력 문제는 사회 체제와 떼놓고 볼 수 없다.
"'등수 매기기' 골몰하는 교육, 전체 학력은 떨어져"
프레시안 : 한국과 일본 모두 '교실 붕괴' 현상이 문제가 됐다. 교사들을 만나면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게 없다. 잠만 잔다. 의욕이나 동기부여가 안 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교실 안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하던 아이들이 교실 밖에서는 친구들에게 거친 폭력을 휘두른다. 교사들은 이런 현상이 당황스럽다. 결국 교사들 역시 무기력에 빠지는 악순환이 된다.
우치다 타츠루 : 학교에서 문제가 생기면 '학교가 어떻게 바뀌었나'를 생각하기 이전에 '학교를 둘러싼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나'를 살펴봐야 한다. 사회가 학교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것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학교 시스템은 사회가 요구한 것이다. 100명의 학생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시민적인 성숙을 이루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학교에 공공성이나 시민적인 성숙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레벨이 높은 사람을 길러 내려 골몰하는 게 오늘날의 학교다. 1번부터 100등까지 등급을 매긴다. 1등 한 아이에게는 최대한 모든 자원을 나눠주고, 100등 한 아이에게는 벌은 준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교육에서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100명 모두가 성숙하기를 바라던 때와 100명을 등급별로 나누는 지금은 학교에서 추구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학교가 학생들을 경쟁으로 몰아넣거나 등급을 매기는 행위와 같은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본다. 아이들을 경쟁에 몰아넣은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결국은 학력 저하다.
한정된 자원 내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온다. 이는 총체적인 흔들림이다. 학생 전체의 지적인 성취가 목적이 아니다. 자기 학력이 높은 것과 다른 사람의 학력이 낮은 것은 동일한 것이다. 자기 학력을 높이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학력을 내리는 것은 전체의 일이다. 결국 혼자 학력을 높이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학력을 어떻게 떨어뜨릴까에 관심을 갖는다.
"극단적인 경쟁, 다른 아이의 학업 의욕 망쳐야 유리해진다"
다른 아이들의 학업 의욕을 망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수업을 방해하는 것이다. 잡담을 해서 교사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것을 막고,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에게 자꾸 말을 건다.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재미없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이런 행위는 모든 아이들의 학습 의욕을 손상시킨다. 중·고등학생 나이에는 지적 의욕이 왕성하다. '세계 경제가 어떻게 되는지,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되는 건지, EU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지식을 높이는 게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중·고등학생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이야기하지 않으니, 이와 관련된 공부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시험 점수와 관련 없는 음악, 게임, 만화 등에 대한 것뿐이다.
"진지한 이야기를 꺼리는 아이들…'성숙'의 기회, 잃어버려"
프레시안 : 우치다 씨는 과거 저술에서 요즘 아이들이 모든 걸 교환가치로만 파악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시험 점수와 관계 없는 이야기만 한다는 지적도 이와 관계가 있어보인다. 아이들이 시험 점수로 교환할 수 있는 지식은 서로 나누지 않고, 아껴둔다는 말로 들린다. 이렇게 되면, 결국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깃거리는 아주 가벼운 것들에 국한될 수 밖에 없다.
우치다 타츠루 : 아이들이 지적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단계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이게 아이들 세계에서 중요한 변화라고 본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식으로 구조화 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아이들의 욕구다. 이런 욕구를 채워가는 과정이 '성숙'이다. 그리고 이런 성숙을 지원하는 게 학교의 역할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역할이 거꾸로 돼 있다. 아이들에게 등급을 매기는 게 학교의 역할이 돼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지적 활동을 방해하는데 골몰한다. 자기 학력을 높이는 것보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지적인 대화를 기피하고 서로의 다리를 잡아당기기만 한다. 일본 아이들의 학력 저하는 그 결과다.
'이지메'와 '희생양 만들기'의 차이…"집단 전체의 생명력을 떨어뜨린다"
프레시안 : 지나친 경쟁이 학력의 '하향평준화'를 낳는다는 말로 들린다.
우치다 타츠루 : 이지메 현상이 가장 극단적인 경우다. 다른 아이들의 지적 활동뿐 아니라 생명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집단 전체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것, 극단적인 하향 평준화다.
일본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지메 현상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었던 '희생양 만들기'와 다르다. 한 명을 따돌려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희생양 만들기'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때는 희생양에게 '낙인'이 찍혔다. 언어나 외모가 다른 게 종종 낙인이 됐다. 혹은 신분을 나눠서 낙인을 찍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발생하는 이지메에는 낙인이 없다. 누구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게 과거와 다른, 요즘 아이들의 이지메가 지닌 특징이다. 아이들이 원자화 돼 뿔뿔이 흩어져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경쟁하는 사회의 특징이다. 내가 앞서지 못할 바엔 집단 전체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게 낫다는 식이다.
"경쟁으로 실력향상?…스포츠 경기에서나 통하는 이야기"
프레시안 : 한국과 일본 모두 경쟁의 효과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정부의 교육 정책 기조 역시 '아이들을 경쟁시켜야 학력이 높아진다'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우치다 타츠루 :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단기적인 목표가 뚜렷할 때는 경쟁이 효과가 있다. 예컨대 목표가 6개월이나 1년 뒤라면, 효과가 있다. 그러나 20년, 30년 동안 경쟁에 내몬다면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과잉 경쟁은 삶의 의욕을 꺾어서 오히려 효과를 떨어뜨린다. 아이들을 경쟁시켜서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건, 금메달을 목표로 하는 스포츠 경기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그나마도 목표가 4년 뒤다. 그보다 긴 시간 뒤의 목표를 향해 경쟁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학교의 역할은 사회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
내가 학교를 사회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그래서다.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고,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흐름으로부터 학교는 보호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정상적인 교육이 가능하다.
학교의 유래 자체가 원래 그랬다. 부모의 학대, 또는 무리한 노동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게 학교가 생겨난 목적 가운데 하나다. 학교가 없었다면, 무리한 아동 노동은 지금도 여전할 게다. 학교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달라야 한다.
학교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지적인 성숙, 감정적 성숙이다. 문제는 사회의 가치관이 학교에 너무 깊이 침투한 탓에 학교가 시장이 돼 버렸다는 점이다. 학교의 원래 역할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능력'도 필수적"
등급을 매기는 것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등급을 매기려면 척도가 되는 것 외에는 조건이 같아야 한다. 그리고 점수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척도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단지 숫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장돼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유지되려면,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에서 이런 능력을 키울 수는 없다. 아이들은 심지어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지금처럼 경쟁하면, 우리는 무너질 수 있다"
프레시안 : 일본에서도 몇 해 전부터 핀란드 교육이 화제가 됐다. 한국도 그렇다. 핀란드는 경쟁보다 협동을 중시하는 교육 방식을 택했는데, 상당히 성공적이다.
우치다 타츠루 : 핀란드 교육이 협동의 가치에 일찍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핀란드가 인구 430만 명의 작은 나라이기 때문일 게다. 게다가 핀란드는 러시아 등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렇다 보니, 핀란드 국민들은 경쟁으로 힘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국민 모두의 능력을 끌어올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찮아 보이는 사람조차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작은 나라의 지혜다.
일본처럼 인구가 많고 큰 나라는 생존에 대한 절박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래서 경쟁 위주의 교육이 지닌 위험에 대해서도 경각심이 약하다. 그러나 일본 역시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 사회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 평화롭지 않다, 지금처럼 경쟁을 격화시키면 우리는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학교를 비판할수록 학교는 나빠졌다…시민 스스로 대안 찾아야"
프레시안 :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일본은 안전하고 안정된 사회'라는 믿음이 깨지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위기의식이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치다 타츠루 : 그렇다. 그동안 일본에는 '정부가 모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정부가 모든 것을 다 해 준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정치가나 관료는 전부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문제가 생기면 그들이 어떻게 해주겠지'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태 이후 시민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정치인과 관료에게 '이것 좀 치워 달라'고 요구해도 전혀 실행되지 않았다. 시민 스스로 주워야 했다.
학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본 역시 학교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다. 그런데 학교에 대해 비판하면 할수록, 학교는 나빠졌다. 결국 '우리 스스로 배움의 장을 만들자'라고 나서는 시민들이 생겨났다. 경쟁을 통해서는 기를 수 없는 능력, 예컨대 더불어 살아가는 힘, 점수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능력 등을 키워주는 학교 본연의 목적이 되살아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합기도의 목적, '하나의 몸' 만들기"
프레시안 : 직접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역시 작은 배움의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학교가 몸과 머리, 마음을 균형있게 키우지 못한다. 머리만 강조한다'라는 비판을 받는다. 합기도 도장에서 생겨난 '배움의 공동체'에 눈길이 가는 건 그래서다. 도장 이야기가 궁금하다.
우치다 타츠루 : 자식을 합기도 도장에 보내는 부모들은 흔히 '남에게 이기는 법'을 배우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합기도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하나의 몸'을 만드는 게 목적이다. 예컨대 상대방 팔을 잡았을 때 적이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몸이 하나 생겼다고 본다. 머리가 두 개 있고, 팔다리가 네 개인 새로운 몸이 생긴 것이다. 새로운 구조물이 돼 전체적인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어떻게 같이 움직일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게 합기도다.
무도(武道)의 기본은 발의 포지션을 정하는 것이다. 어디다 발을 놓을 것인지를 안다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도장에 처음 온 사람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 일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 위치에 서야 할지 알게 된다. 결국 도장 전체의 밸런스(balance, 균형)가 자연스럽게 좋아진다.
사람들이 몇 명이 모였느냐에 따라 수련하기 전, 어느 정도 간격으로 앉아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안다. 도장이라는 공간에서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를 아는 건 고도의 사회적 능력이다. 얼마나 힘이 센지와는 다른 차원이다.
"청소 강조하는 이유, 바닥이 깨끗해야 신체 감수성 높아져"
합기도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다. 도장에 오자마자 청소하고, 끝나면 또 청소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무조건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더러운 도장과 깨끗한 도장에서의 수련은 전혀 다르다. 합기도는 맨발로 수련하는데, 도장이 더러우면 발이 어떻게 되겠는가. 발바닥을 쫙 펴지 못하고 웅크리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다. 몸의 감수성도 달라진다. 도장이 깨끗하면 몸을 펼치게 돼 신체 감수성의 감도 또한 올라간다.
결국 깨끗한 도장이 유연한 활동을 만든다. 합기도장이 해야 하는 일은 평소 생활에 갇혀 있는 몸을 여는 것이다. 신체 감수성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 몸과 마음을 함께 키우는 교육이란, 청소처럼 사소해보이는 일까지 아우르는 것이라고 본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라는 책에서 그는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사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성숙한 어른'을 만들어내는 데 주도권을 휘둘러온 앎이었다"라고 지적한다.
일본에선 대중적인 인문서 저술가로 유명한 그의 관심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관심과 활동의 폭이 워낙 넓어서다. <영화는 죽었다>, <망설임의 윤리학>, <아저씨적인 사고>,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유대문화론>, <일본변경론>, <죽음과 신체>…등. 그의 저서 목록만 봐선 그의 전공을 짐작하기 힘들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그는 합기도 7단이다. 단지 취미 또는 신체 단련 차원에서 무술을 익힌 게 아니다. <무도적사고(武道的思考)>라는 책도 썼다. 무술(그가 쓰는 표현대로라면 무도)를 철학 차원에서 다룬다.
이처럼 폭넓은 관심을 지닌 그에게도 몇 가지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성숙'이다. 마르크스의 저술을 읽는 것도, 합기도 수련을 하는 것도 모두 '성숙한 어른'이 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아이를 '성숙한 어른'이 되게끔 하는 게 바로 교육이다. 그가 교육 문제에 대한 책을 낸 건, 그래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의 저술 가운데 최근 <스승은 있다>가 번역 출간된 데 이어 <교사를 춤추게 하라>까지 출간됐다. '성숙한 어른'을 향한 그의 고민이 잘 녹아 있는 책들이다.
실제로 그는 교수직에서 정년퇴직 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 모델을 실천하고 있다. 고베 시에 있는 자기 집 일층에 '개풍관(凱風館)'이라는 합기도 도장을 열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저 합기도 연습만 하는 도장이 아니다.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는, 일종의 배움의 공동체다.
강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를 지난 17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났다. <프레시안>이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학교폭력'을 말하다" 연속 인터뷰 여덟 번째 순서로 그를 만난 데는 이유가 있다. 폭력이야말로, '성숙'과 '미성숙'을 구분 짓는 선명한 경계라고 봤기 때문이다. 아이가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건, 폭력에서 해방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어적 폭력이건 물리적 폭력이건,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뜻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는 그를 '성숙한 어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칠순을 내다보는 나이에도 '성숙한 어른'을 향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 그는, 그래서 학교폭력과 관련해 빠뜨릴 수 없는 인터뷰 대상자다.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학교는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학교와 사회 사이에는 일종의 장벽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이 우리에겐 만만치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돌아보면, 학교와 사회 사이의 벽은 허물어진 지 오래다. 학교는 사회,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시장이 요구하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게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아이가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는 데는 시장에서 별 쓸모가 없는 것들도 종종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학교는 이런 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칠 여유가 없다. 학교는 원래 이런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변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마찰'이 생긴다. 학교폭력은 그 '마찰'이 드러나는 한 형태라는 게 우치다 타츠루 전 교수의 진단이다.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편집자>
▲ 우치다 타츠루.ⓒ프레시안(이명선) |
"학교, 권위에서 시장으로"
프레시안 : 한국에선 학교폭력이 뜨거운 쟁점이다. 대체로 '가해 학생을 어떻게 찾아내서 처벌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존의 학교와 교사-학생 관계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도 나오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목소리다. 일본 역시 왕따, 학교폭력 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됐던 걸로 알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 : 일본에선 학교폭력 대신 교내폭력이라는 말을 쓴다. 일본에선 교내폭력이 1980년대부터 쟁점이 됐는데,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거나 칼로 찌르고, 학교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시설물 파괴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이지메(イジメ, 왕따) 형태로 바뀌었다.
과거의 학교는 무척 권위적인 공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장원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마찰이 생긴다. 이런 마찰이 학생들의 폭력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결국 학생들의 폭력 문제는 사회 체제와 떼놓고 볼 수 없다.
"'등수 매기기' 골몰하는 교육, 전체 학력은 떨어져"
프레시안 : 한국과 일본 모두 '교실 붕괴' 현상이 문제가 됐다. 교사들을 만나면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게 없다. 잠만 잔다. 의욕이나 동기부여가 안 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교실 안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하던 아이들이 교실 밖에서는 친구들에게 거친 폭력을 휘두른다. 교사들은 이런 현상이 당황스럽다. 결국 교사들 역시 무기력에 빠지는 악순환이 된다.
우치다 타츠루 : 학교에서 문제가 생기면 '학교가 어떻게 바뀌었나'를 생각하기 이전에 '학교를 둘러싼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나'를 살펴봐야 한다. 사회가 학교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것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학교 시스템은 사회가 요구한 것이다. 100명의 학생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시민적인 성숙을 이루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학교에 공공성이나 시민적인 성숙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레벨이 높은 사람을 길러 내려 골몰하는 게 오늘날의 학교다. 1번부터 100등까지 등급을 매긴다. 1등 한 아이에게는 최대한 모든 자원을 나눠주고, 100등 한 아이에게는 벌은 준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교육에서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100명 모두가 성숙하기를 바라던 때와 100명을 등급별로 나누는 지금은 학교에서 추구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학교가 학생들을 경쟁으로 몰아넣거나 등급을 매기는 행위와 같은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본다. 아이들을 경쟁에 몰아넣은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결국은 학력 저하다.
한정된 자원 내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온다. 이는 총체적인 흔들림이다. 학생 전체의 지적인 성취가 목적이 아니다. 자기 학력이 높은 것과 다른 사람의 학력이 낮은 것은 동일한 것이다. 자기 학력을 높이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학력을 내리는 것은 전체의 일이다. 결국 혼자 학력을 높이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학력을 어떻게 떨어뜨릴까에 관심을 갖는다.
"극단적인 경쟁, 다른 아이의 학업 의욕 망쳐야 유리해진다"
다른 아이들의 학업 의욕을 망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수업을 방해하는 것이다. 잡담을 해서 교사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것을 막고,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에게 자꾸 말을 건다.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재미없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이런 행위는 모든 아이들의 학습 의욕을 손상시킨다. 중·고등학생 나이에는 지적 의욕이 왕성하다. '세계 경제가 어떻게 되는지,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되는 건지, EU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지식을 높이는 게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중·고등학생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이야기하지 않으니, 이와 관련된 공부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시험 점수와 관련 없는 음악, 게임, 만화 등에 대한 것뿐이다.
"진지한 이야기를 꺼리는 아이들…'성숙'의 기회, 잃어버려"
프레시안 : 우치다 씨는 과거 저술에서 요즘 아이들이 모든 걸 교환가치로만 파악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시험 점수와 관계 없는 이야기만 한다는 지적도 이와 관계가 있어보인다. 아이들이 시험 점수로 교환할 수 있는 지식은 서로 나누지 않고, 아껴둔다는 말로 들린다. 이렇게 되면, 결국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깃거리는 아주 가벼운 것들에 국한될 수 밖에 없다.
▲ ⓒ프레시안(이명선) |
그런데 지금은 이런 역할이 거꾸로 돼 있다. 아이들에게 등급을 매기는 게 학교의 역할이 돼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지적 활동을 방해하는데 골몰한다. 자기 학력을 높이는 것보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지적인 대화를 기피하고 서로의 다리를 잡아당기기만 한다. 일본 아이들의 학력 저하는 그 결과다.
'이지메'와 '희생양 만들기'의 차이…"집단 전체의 생명력을 떨어뜨린다"
프레시안 : 지나친 경쟁이 학력의 '하향평준화'를 낳는다는 말로 들린다.
우치다 타츠루 : 이지메 현상이 가장 극단적인 경우다. 다른 아이들의 지적 활동뿐 아니라 생명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집단 전체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것, 극단적인 하향 평준화다.
일본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지메 현상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었던 '희생양 만들기'와 다르다. 한 명을 따돌려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희생양 만들기'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때는 희생양에게 '낙인'이 찍혔다. 언어나 외모가 다른 게 종종 낙인이 됐다. 혹은 신분을 나눠서 낙인을 찍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발생하는 이지메에는 낙인이 없다. 누구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게 과거와 다른, 요즘 아이들의 이지메가 지닌 특징이다. 아이들이 원자화 돼 뿔뿔이 흩어져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경쟁하는 사회의 특징이다. 내가 앞서지 못할 바엔 집단 전체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게 낫다는 식이다.
"경쟁으로 실력향상?…스포츠 경기에서나 통하는 이야기"
프레시안 : 한국과 일본 모두 경쟁의 효과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정부의 교육 정책 기조 역시 '아이들을 경쟁시켜야 학력이 높아진다'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우치다 타츠루 :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단기적인 목표가 뚜렷할 때는 경쟁이 효과가 있다. 예컨대 목표가 6개월이나 1년 뒤라면, 효과가 있다. 그러나 20년, 30년 동안 경쟁에 내몬다면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과잉 경쟁은 삶의 의욕을 꺾어서 오히려 효과를 떨어뜨린다. 아이들을 경쟁시켜서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건, 금메달을 목표로 하는 스포츠 경기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그나마도 목표가 4년 뒤다. 그보다 긴 시간 뒤의 목표를 향해 경쟁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학교의 역할은 사회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
내가 학교를 사회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그래서다.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고,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흐름으로부터 학교는 보호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정상적인 교육이 가능하다.
학교의 유래 자체가 원래 그랬다. 부모의 학대, 또는 무리한 노동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게 학교가 생겨난 목적 가운데 하나다. 학교가 없었다면, 무리한 아동 노동은 지금도 여전할 게다. 학교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달라야 한다.
학교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지적인 성숙, 감정적 성숙이다. 문제는 사회의 가치관이 학교에 너무 깊이 침투한 탓에 학교가 시장이 돼 버렸다는 점이다. 학교의 원래 역할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능력'도 필수적"
등급을 매기는 것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등급을 매기려면 척도가 되는 것 외에는 조건이 같아야 한다. 그리고 점수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척도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단지 숫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장돼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유지되려면,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에서 이런 능력을 키울 수는 없다. 아이들은 심지어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지금처럼 경쟁하면, 우리는 무너질 수 있다"
프레시안 : 일본에서도 몇 해 전부터 핀란드 교육이 화제가 됐다. 한국도 그렇다. 핀란드는 경쟁보다 협동을 중시하는 교육 방식을 택했는데, 상당히 성공적이다.
▲ 우치다 타츠루. ⓒ프레시안(이명선) |
일본처럼 인구가 많고 큰 나라는 생존에 대한 절박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래서 경쟁 위주의 교육이 지닌 위험에 대해서도 경각심이 약하다. 그러나 일본 역시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 사회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 평화롭지 않다, 지금처럼 경쟁을 격화시키면 우리는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학교를 비판할수록 학교는 나빠졌다…시민 스스로 대안 찾아야"
프레시안 :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일본은 안전하고 안정된 사회'라는 믿음이 깨지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위기의식이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치다 타츠루 : 그렇다. 그동안 일본에는 '정부가 모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정부가 모든 것을 다 해 준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정치가나 관료는 전부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문제가 생기면 그들이 어떻게 해주겠지'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태 이후 시민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정치인과 관료에게 '이것 좀 치워 달라'고 요구해도 전혀 실행되지 않았다. 시민 스스로 주워야 했다.
학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본 역시 학교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다. 그런데 학교에 대해 비판하면 할수록, 학교는 나빠졌다. 결국 '우리 스스로 배움의 장을 만들자'라고 나서는 시민들이 생겨났다. 경쟁을 통해서는 기를 수 없는 능력, 예컨대 더불어 살아가는 힘, 점수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능력 등을 키워주는 학교 본연의 목적이 되살아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 우치다 타츠루. ⓒ프레시안(이명선) |
"합기도의 목적, '하나의 몸' 만들기"
프레시안 : 직접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역시 작은 배움의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학교가 몸과 머리, 마음을 균형있게 키우지 못한다. 머리만 강조한다'라는 비판을 받는다. 합기도 도장에서 생겨난 '배움의 공동체'에 눈길이 가는 건 그래서다. 도장 이야기가 궁금하다.
우치다 타츠루 : 자식을 합기도 도장에 보내는 부모들은 흔히 '남에게 이기는 법'을 배우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합기도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하나의 몸'을 만드는 게 목적이다. 예컨대 상대방 팔을 잡았을 때 적이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몸이 하나 생겼다고 본다. 머리가 두 개 있고, 팔다리가 네 개인 새로운 몸이 생긴 것이다. 새로운 구조물이 돼 전체적인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어떻게 같이 움직일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게 합기도다.
무도(武道)의 기본은 발의 포지션을 정하는 것이다. 어디다 발을 놓을 것인지를 안다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도장에 처음 온 사람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 일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 위치에 서야 할지 알게 된다. 결국 도장 전체의 밸런스(balance, 균형)가 자연스럽게 좋아진다.
사람들이 몇 명이 모였느냐에 따라 수련하기 전, 어느 정도 간격으로 앉아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안다. 도장이라는 공간에서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를 아는 건 고도의 사회적 능력이다. 얼마나 힘이 센지와는 다른 차원이다.
"청소 강조하는 이유, 바닥이 깨끗해야 신체 감수성 높아져"
합기도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다. 도장에 오자마자 청소하고, 끝나면 또 청소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무조건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더러운 도장과 깨끗한 도장에서의 수련은 전혀 다르다. 합기도는 맨발로 수련하는데, 도장이 더러우면 발이 어떻게 되겠는가. 발바닥을 쫙 펴지 못하고 웅크리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다. 몸의 감수성도 달라진다. 도장이 깨끗하면 몸을 펼치게 돼 신체 감수성의 감도 또한 올라간다.
결국 깨끗한 도장이 유연한 활동을 만든다. 합기도장이 해야 하는 일은 평소 생활에 갇혀 있는 몸을 여는 것이다. 신체 감수성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 몸과 마음을 함께 키우는 교육이란, 청소처럼 사소해보이는 일까지 아우르는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