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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되, 차상(次上)에 인용(引用)하는 바의 문증(文證)·현증(現證)이 수승(殊勝)한데 어찌 신력(神力)의 일문(一文)에 집착(執着)하느뇨. 답(答)하되 이 일문(一文)은 심의(深意)가 있는 고(故)로 특히 훌륭하니라. 묻되, 그 심의(深意)는 어떠하오. 답(答)하노라, 이 문(文)은 석존(釋尊)이 본권속(本眷屬)인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에게 결요(結要)의 오자(五字)의 당체(當體)를 부촉(付囑)한다고 설(說)하신 문(文)이기 때문이니라.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가여래(釋迦如來)는 나의 옛날의 소원(所願)과 같이 지금(只今)은 이미 만족(滿足)하였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을 화도(化導)하여 모두 불도(佛道)에 들어가게 하였노라고 하여 소원(所願)은 이미 만족(滿足)했고, 여래(如來)의 멸후(滅後)·후오백세중(後五百歲中)·광선유포(廣宣流布)의 부촉(付囑)을 설(說)하기 위(爲)해서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을 불러내어 본문(本門)의 당체연화(當體蓮華)를 요(要)를 가지고 부촉(付囑)하신 문(文)이므로 석존출세(釋尊出世)의 본회(本懷)·도량소득(道場所得)의 비법(秘法)·말법(末法)의 우리들이 현당이세(現當二世)를 성취(成就)하는 당체연화(當體蓮華)의 성증(誠證)은 이 문(文)이로다. 고(故)로 말법금시(末法今時)에 있어서 여래(如來)의 사자이외(使者以外)에는 당체연화(當體蓮華)의 증문(證文)을 알고 내놓을 사람은 도시(都是) 있을 수 없느니라. 참으로 비문(秘文)이로다, 참으로 대사(大事)로다, 참으로 존귀(尊貴)하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당체의초(當體義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을 불러내어 본문(本門)의 당체연화(當體蓮華)를 요(要)를 가지고 부촉(付囑)하신 문(文)이므로 석존출세(釋尊出世)의 본회(本懷)·도량소득(道場所得)의 비법(秘法)·말법(末法)의 우리들이 현당이세(現當二世)를 성취(成就)하는 당체연화(當體蓮華)의 성증(誠證)은 이 문(文)이로다. 고(故)로 말법금시(末法今時)에 있어서 여래(如來)의 사자이외(使者以外)에는 당체연화(當體蓮華)의 증문(證文)을 알고 내놓을 사람은 도시(都是) 있을 수 없느니라. 참으로 비문(秘文)이로다, 참으로 대사(大事)로다, 참으로 존귀(尊貴)하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당체의초(當體義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석존은 자신의 멸후(滅後) 이천년이 지나면 말법(末法)이라 하는 아주 싸움이 많고 사상도 혼란한 진흙탕과 같은 시대가 찾아와 석가불법이 민중을 구제하는 효력을 잃게 되는[백법은몰이라고 함] 것을 법화경(法華經) · 대집경(大集經) 등등에 설하고 있습니다.
이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들어가면 아무리 석가불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법화경이라도 이것을 신앙(信仰)하는 것은 오래 전에 썩은 음식을 먹으면 독이 되는 것과 같이 민중이 구제되기는커녕 오히려 유해무익(有害無益)하게 되어 버립니다.
말할 것도 없이 법화이전(法華以前)에 설해진 방편의 가설이 더욱이 저속한 사종교로서 널리 민중에게 독기를 뿌리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석존은 이 백법은몰(白法隱沒)의 악세말법(惡世末法)의 때만이 석가불법 대신 법화경의 문저(文底)에 숨겨진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불법(大佛法)이 출현해야할 때라고 예언(豫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시대(新時代)의 대불법(大佛法)을 소지(所持)하시는 어본불(御本佛)은 태양이 일체의 어둠을 비추어 가듯이 이 탁악(濁惡)한 세상의 일체불행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 그때 다수의 박해(법난)를 받아 유죄(流罪) · 사죄(死罪) 등에까지 미치게 된다 등등, 상세하게 법화경 속에 예증(豫證)되고 있는 것입니다.이 세상에 힘 있는 올바른 종교(宗敎)란 오직 하나 일련정종(日蓮正宗) 뿐이며 그 이치에 맞는 완벽한 교의(敎義)와 또 이 위대한 불법(佛法)을 믿고, 불행의 숙업(宿業)을 용감하게 타파(打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체험(體驗)만이 의심(疑心)할 수 없는 증거(證據)인 것입니다."더욱더 면려(勉勵)하시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느니라. 모든 사람이 이 경(經)을 믿기 시작할 때는 신심(信心)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중간쯤에는 신심(信心)도 약(弱)하고 승(僧)도 공경(恭敬)하지 않고 공양(供養)도 하지 않으며, 자만(自慢)하여 악견(惡見)을 하니 이는 두려워할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더 신심(信心)을 해 나가시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後悔)하게 되리라. 비유(譬喩)컨대 가마쿠라(鎌倉)에서 교토(京都)까지는 십이일(十二日)의 도정(道程)이니라, 그런데 십일일(十一日)남짓 걸어가서 이제 일일(一日)을 남겨두고 걸음을 멈춘다면 어떻게 수도(首都)의 달을 바라볼 수 있겠느뇨. 어떻게 하든 이 경(經)의 뜻을 아는 승(僧)에게 가까이 하여 더욱더 법(法)의 도리(道理)를 청문(聽聞)해서 신심(信心)의 걸음을 옮길지어다."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플라스마란 원자핵과 전자가 떨어져 자유롭게 움직이는, 고체·액체·기체를 벗어난 물질의 4번째 상태로 우주의 99.9%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직 모름지기 그대 부처가 되고자 생각한다면 만(慢)의 당번(幢幡)을 쓰러뜨리고 분노(忿怒)의 지팡이를 버리고 오로지 일승(一乘)에 귀의(歸依)할지어다. 명문명리(名聞名利)는 금생(今生)의 장식(裝飾)이고 아만편집(我慢偏執)은 후생(後生)의 족가(足枷)이니라, 아아,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할지어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할지어다."
지묘법화문답초(持妙法華問答抄) 가마쿠라에서 34세에 술작니치렌대성인이「대저 지옥과 부처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하고 찾아보면 혹은 지하(地下)라고 하는 경문(經文)도 있고 혹은 서방(西方) 등이라 하는 경(經)도 있느니라. 그러나 자세히 찾아보면 우리들의 오척(五尺)의 몸 안에 있다고 쓰여 있느니라.」(신편어서 p.1551) 라는 말씀과 같이 지옥이라 해도 성불이라고 해도 우리들의 생명의 실감(實感)을 말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은『센니치니부인답서(千日尼夫人答書)』에「사람은 임종(臨終)의 때에 지옥(地獄)에 떨어지는 자는 흑색(黑色)이 되는데다가, 그 몸이 무겁기는 천인지석(千引之石)과 같으니라. 선인(善人)은 가령 칠척(七尺) 팔척(八尺)의 여인(女人)이라도 색(色)이 검은 자일지라도 임종(臨終)에 색(色)이 변하여 백색(白色)으로 되며, 또한 가볍기가 아모(鵝毛)와 같고 부드럽기가 도라면(兜羅綿)과 같으니라.」(신편어서 p.1290)고 말씀하시어 임종시(臨終時)에 사상(死相)이 나쁜 것은 지옥으로 떨어진 증거이며 좋은 것은 성불한 증거라고 단정하시고 있습니다.그러나 불법이 가르치는 이 엄한 사실에 눈을 가려서는 안됩니다.「불법(佛法)을 시험하건대 도리(道理)와 증문(證文)보다 더한 것은 없고, 또 도리(道理) · 증문(證文)보다도 현증(現證) 이상은 없느니라.」(신편어서 p.874)는 니치렌대성인의 말씀과 같이 염불(念佛) · 선(禪) · 진언(眞言)등의 종조(宗祖) · 개조(開祖)라고 불리우는 방법(謗法)의 사람들의 죽음도 모두 타지옥의 현증이 분명하고 비참하기 한이 없는 것으로 아주 보통의 임종은 아니었습니다.
불법(佛法)을 시험하건대 도리(道理)와 증문(證文)보다 더한 것은 없고, 또 도리(道理) · 증문(證文)보다도 현증(現證) 이상은 없느니라.」(신편어서 p.874)는 니치렌대성인의 말씀과 같이 염불(念佛) · 선(禪) · 진언(眞言)등의 종조(宗祖) · 개조(開祖)라고 불리우는 방법(謗法)의 사람들의 죽음도 모두 타지옥의 현증이 분명하고 비참하기 한이 없는 것으로 아주 보통의 임종은 아니었습니다.
세간에서는「죽으면 끝난다」,「죽으면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라고 하며 삼세(三世)에 걸친 생명의 연속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으나 삼세(三世)의 인과(因果)를 분별 못하고 방법을 고치지 못하면 가령 얼마만큼의 재산이나 학문이 있어도 결국은 선조(先祖)의 참된 추선공양(追善供養)도 할 수 없고 자신도 지옥으로 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행이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을 수지하고 이 어본존을 강성하게 신앙해가므로 현당이세(現當二世)에 걸친 최고의 행복을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이제 법화경(法華經)에 내지(來至)하여 실법(實法)을 수여(授與)하고 법화경(法華經) 본문(本門)의 약개근현원(略開近顯遠)에 내지(來至)하여, 화엄(華嚴)부터의 대보살(大菩薩)·이승(二乘)·대범천(大梵天)·제석(帝釋)·일월(日月)·사천(四天)·용왕(龍王) 등(等)은 위(位)가 묘각(妙覺)과 이웃하고, 또 묘각(妙覺)의 위(位)에 들어가느니라. 만약(萬若)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하늘을 향(向)하여 이를 본다면 생신(生身)의 묘각(妙覺)의 부처는 본위(本位)에 있으면서 중생(衆生)을 이익(利益)함이 이것이니라."
법화취요초(法華取要抄) 미노부에서 53세에 술작자행(自行)’과 ‘화타(化他)’ 이 두 가지는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을 실천해 나아가는데 있어서의 가장 기본적 실천입니다.
『삼대비법품승사(三大秘法稟承事)』에「말법에 들어와서 이제 니치렌(日蓮)이 부르는 바의 제목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며」(신편어서 p.1595)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행[(自行): 자기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란 5좌, 3좌의 근행 창제의 실천을 말한다] 화타[(化他): 남을 교화하는 것]’ 란 어본존의 공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나가는 행위 즉 절복이나 불법대화를 말합니다.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행(自行)’과 ‘화타(化他)’를 함께 실천해 나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그 끊임없는 왕복작업 속에 진실한 전진이 있는 것입니다. 차의 양바퀴가 그렇듯이 어느 것이 빠져도 잘 회전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자기의 충실과 향상 그리고 타인에게 동정심이라는 양바퀴를 조화 있게 회전시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가난한 자(者)는 부자(富者)에게 아첨하고 천(賤)한 자(者)는 귀(貴)한 자(者)를 숭앙(崇仰)하며 무세(無勢)는 다세(多勢)에 따르는 이치이므로, 간혹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것 같은 사람들도 세간(世間)을 꺼리고 남을 두려워해서 대부분이 지옥(地獄)에 떨어짐은 딱하고 가엾다. 단(但) 니치렌(日蓮)이 우안(愚眼) 때문인지 또는 숙습(宿習)때문인지 법화경최제일(法華經最第一)·이금당설난신난해(已今當說難信難解)·유아일인능위구호(唯我一人能爲救護)라고 설(說)하여져 있는 글은 여래(如來)의 금언(金言)이며 결코 사언(私言)은 아니로다. 당세(當世)의 사람들은 인사(人師)의 말을 여래(如來)의 금언(金言)이라고 깊이 믿고, 혹은 법화경(法華經)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똑같다고 생각하고, 혹은 뛰어났으며 혹은 열등(劣等)하더라도 기근(機根)에 맞는다고 생각하였느니라. 그런데 여래(如來)의 성교(聖敎)에 수타의(隨他意)와 수자의(隨自意)라 하는 것이 있느니라. 비유컨대 자식의 마음에 어버이가 따름을 수타의(隨他意)라고 하며 어버이의 마음에 자식이 따름을 수자의(隨自意)라고 한다. 제경(諸經)은 수타의(隨他意)이며 부처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마음에 따르신 고(故)로, 법화경(法華經)은 수자의(隨自意)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부처의 마음에 따르게 했다. 제경(諸經)은 불설(佛說)이지만 이를 믿으면 중생(衆生)의 마음이라서 오래도록 부처가 되지 않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은 불설(佛說)이며 불지(佛智)이다. 일자일점(一字一點)이라도 이를 깊이 믿으면 나의 몸이 즉(卽) 부처가 되느니라. 비유하면 백지(白紙)를 먹에다 물들이면 흑(黑)이 되고 옻칠에다 백분(白粉)을 넣으면 희어지는 것과 같다. 독약(毒藥)이 변(變)하여 약(藥)이 되고 중생(衆生)이 변(變)하여 부처가 되는 고(故)로 묘법(妙法)이라 함이라."
니이케전어소식(新池殿御消息)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1. 세간법(世間法)과 불법(佛法)
우리들은 매일 다양한 환경 속에서 각자 생활을 해나가고 있으며, 이러한 우리들의 생활(세간법)과 신앙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니치렌대성인님은『제경과 법화경과 난이의 사(諸經과 法華經과 難易의 事)』에「불법(佛法)은 체(體)와 같고, 세간(世間)은 그림자와 같도다. 체(體) 구부러지면 그림자 기우느니라.」(신편어서 p.146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어문(御文)은 불법이 모든 것의 본체이며, 우리들이 생활하는 사회는 그것에 따라 나타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잘못된 종교를 믿으면 그에 따라 생활도 빗나간다고 교시하신 것입니다.2. 신심(信心)을 근본으로
원래 생활이란 우리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활동을 말하며, 신앙이란 우리들의 미혹한 생명을 깨달음의 경계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근행(勤行) · 창제(唱題), 절복(折伏)을 실천해 나가면 먼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이 바뀝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이 바뀌게 되면 그 생활 · 환경도 바꿀 수 있습니다.
즉 대성인의 불법에서 생활과 신심의 본연의 모습은「사관(仕官)을 법화경(法華經)이라고 생각하시라.『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違背)하지 않느니라』란 이것이니라.」(신편어서 p.1220)고 말씀하신 것처럼, 올바르게 평소의 생활이 바로 신심을 실천하는 장이라고 이해하고 매일매일 신심을 근본으로 하는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3. 현재를 소중하게 살아가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三世)를 아우르는 생명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삼세(三世)의 생명에 대해 대성인께서는『심지관경(心地觀經)』의「과거(過去)의 인(因)을 알려고 하면, 그 현재(現在)의 과(果)를 보라. 미래(未來)의 과(果)를 알려고 하면, 그 현재(現在)의 인(因)을 보라.」(신편어서 p.571)는 경문을 인용하시어,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는 현재의 결과가 된다는 것을 교시하셨습니다.4. 물과 같은 신심을 지속
대성인께서는 신심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 있느니라. 혹(或)은 불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느니라. 혹(或)은 물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느니라. 청문(聽聞)할 때는 타오르듯 생각하여도, 멀어져 버리면 버리는 마음 있느니라. 물과 같이 라고 함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믿는 것이니라.」(신편어서 p.1206)고 물과 불의 두 가지 예를 드시며, 물과 같은 신심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예를 비교하자면 먼저 ’불의 신심’이란 활활 타는 불길과 같이 한 때는 강성하게 노력하지만, 얼마 안가 꺼져버리는 ‘쉽게 뜨거워지고, 금방 식어버리는’ 신심자세를 말합니다. 이에 반해 ‘물의 신심’이란 맑은 물이 도도히 흐르는 것처럼 때로는 우여곡절이 있을지라도 결코 흐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지속’의 신심자세를 말합니다."마음(心)의 전체가 신체(身體)로 됨이니라. 결코 각각을 별개로는 생각하지 말지어다. 비유컨대 이는 물의 전체가 차가워져서 대소(大小)의 얼음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따라서 지옥(地獄)의 몸(身)이라 하여 동연맹화(洞然猛火) 속의 맹렬한 불꽃으로 됨도, 내지(乃至) 불계(佛界)의 몸(體)이라 해서 색상장엄(色相莊嚴)의 몸(體)으로 됨도 오직 이 일심(一心)의 소작(所作)이니라. 이것에 의해 악(惡)을 일으키면 삼악(三惡)의 몸(身)을 느끼고,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면 불(佛) 보살(菩薩)의 몸(身)을 느끼느니라."
(총재일념초(總在一念抄) 신편어서 112쪽)본불님이신 니치렌대성인의 대자대비한 빛은 어본존을 수지하여 신(信)·행(行)·학(學)에 면려하는 사람 전부에게 찬란하게 내려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덕의 꽃은 각자나 각 가정에 만발하게 피고 있는 것입니다. 공덕이 나타나는 형태를 가리키는 ‘현익(顯益)’과 ‘명익(冥益)’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불법에서 설하는 공덕 또는 이익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함께 우리들의 생활상에 어떤 플러스의 요인이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이 공덕과 이익이 나타나는 모습에 현익(顯益)과 명익(冥益)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현(顯)이란 ‘명백하다’, ‘명확하게’라는 의미이고, 명(冥)이란 ‘깊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익(顯益)이란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이익을 말하며, 명익(冥益)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서의 이익을 말합니다. 또 현익과 명익을 시간의 흐름위에서 포착할 경우, 현익은 즉시로 나타나는 이익, 명익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 이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법이 지향하는 목적은 말할 나위도 없이 성불(成佛)입니다. 성불(成佛)을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바른 불법의 가르침은 모두 성불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에서 설하는 일체의 가르침은 구극의 목표인 성불과의 관련 속에서 포착함으로서만이 그 근본 뜻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익(顯益)이란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이익을 말하며, 명익(冥益)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서의 이익을 말합니다. 또 현익과 명익을 시간의 흐름위에서 포착할 경우, 현익은 즉시로 나타나는 이익, 명익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 이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법이 지향하는 목적은 말할 나위도 없이 성불(成佛)입니다. 성불(成佛)을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바른 불법의 가르침은 모두 성불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에서 설하는 일체의 가르침은 구극의 목표인 성불과의 관련 속에서 포착함으로서만이 그 근본 뜻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현익(顯益)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명익과 비교할 경우, 현익은 명익보다도 작은 공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치렌대성인은 현익과 명익에 대해 기원과의 관계에서「현기현응(顯祈顯應), 현기명응(顯析冥應), 명기명응(冥析冥應), 명기현응(冥析顯應)」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첫 번째의「현기현응」의 현기란 명확한 기원을 말하는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기원을 뜻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특히 강한 기원으로 어본존께 기원해 나가면 현응, 즉 현익이 나타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의「현기명응」은 강하게 소원을 걸어 기원한 경우에 그 결론이나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긴 안목으로 볼 때 결과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의「명기명응」은 특히 이렇다 할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으나 나날이 담담하게 창제하고 광포를 생각하는 기원을 계속해 나아갔을 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나무들이 1년 2년 이렇게 세월이 거듭되면 이윽고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커다란 명익을 얻는 경우를 말합니다.
네 번째의「명기현응」은 아주 급한 기원은 없더라도 매년매년 신심을 지속해 나아가면 유사시에 엄연히 수호를 받는 경우를 말합니다.
어쨌든 어본존을 수지하고 나날이 끓임 없는 근행 · 창제와 묘법의 홍통에 면려하는 우리들의 생활에는 현(顯)으로 혹은 명(冥)으로 위대한 불법의 힘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하여 더욱 더 신(信)·행(行)·학(學)을 실천합시다.네 번째의「명기현응」은 아주 급한 기원은 없더라도 매년매년 신심을 지속해 나아가면 유사시에 엄연히 수호를 받는 경우를 말합니다.
어쨌든 어본존을 수지하고 나날이 끓임 없는 근행 · 창제와 묘법의 홍통에 면려하는 우리들의 생활에는 현(顯)으로 혹은 명(冥)으로 위대한 불법의 힘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하여 더욱 더 신(信)·행(行)·학(學)을 실천합시다.제경(諸經)은 수타의(隨他意)이며 부처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마음에 따르신 고(故)로, 법화경(法華經)은 수자의(隨自意)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부처의 마음에 따르게 했다. 제경(諸經)은 불설(佛說)이지만 이를 믿으면 중생(衆生)의 마음이라서 오래도록 부처가 되지 않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은 불설(佛說)이며 불지(佛智)이다. 일자일점(一字一點)이라도 이를 깊이 믿으면 나의 몸이 즉(卽) 부처가 되느니라. 비유하면 백지(白紙)를 먹에다 물들이면 흑(黑)이 되고 옻칠에다 백분(白粉)을 넣으면 희어지는 것과 같다. 독약(毒藥)이 변(變)하여 약(藥)이 되고 중생(衆生)이 변(變)하여 부처가 되는 고(故)로 묘법(妙法)이라 함이라.""다만 오로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혼(魂)이 나의 몸에 대신하여 들어오신 것이리라. 내가 생각해도 기쁨은 몸에 넘치도다. 법화경(法華經)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하는 대사(大事)의 법문(法門)은 이것이니라. 경(經)에 가로되 소위제법(所謂諸法) 여시상(如是相)이라 함은 무슨 일이뇨. 십여시(十如是)의 처음에 상여시(相如是)가 제일(第一)의 대사(大事)이므로 부처는 세상(世上)에 나오셨느니라. 지인(智人)은 기(起)를 알고 사(蛇)는 스스로가 사(蛇)를 안다고 함은 이것이니라. 중류(衆流)가 모여 대해(大海)가 되었고 미진(微塵)이 모여 수미산(須彌山)이 됐느니라. 니치렌(日蓮)이 법화경(法華經)을 믿기 시작(始作)한 것은 일본국(日本國)에는 일제(一渧)·일미진(一微塵)과 같음이라. 법화경(法華經)을 이인(二人)·삼인(三人)·십인(十人)·백천만억인(百千萬億人)이 불러 전(傳)해 간다면 묘각(妙覺)의 수미산(須彌山)으로도 되고 대열반(大涅槃)의 대해(大海)로도 될 것이로다. 부처가 되는 길은 이것 이외에 또 구(求)하는 일 없을지니라."
선시초(撰時抄)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어강(御講)이란 어보은어강(御報恩御講)을 줄여서 말하는 것으로 총본산에서는 고래(古來)로 니치렌대성인님 · 닛코상인(日興上人)님 · 니치모쿠상인(日目上人)님의 명일(命日)인 매월 7일, 13일, 15일에 보은어강을 봉수(奉修)합니다.1. 어강(御講)이란
어강(御講)이란 어보은어강(御報恩御講)을 줄여서 말하는 것으로 총본산에서는 고래(古來)로 니치렌대성인님 · 닛코상인(日興上人)님 · 니치모쿠상인(日目上人)님의 명일(命日)인 매월 7일, 13일, 15일에 보은어강을 봉수(奉修)합니다.대성인님께서는 『사은초(四恩抄)』에 「불법(佛法)을 익히는 몸으로는 반드시 사은(四恩)에 보답해야 하니라.」(신편어서 p.267) 고 말씀하시어, 불법을 신앙하는 사람은 먼저 첫 번째로 지은보은(知恩報恩)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 어강(御講)에 참예(參詣)합시다
우리들은 바깥일과 가정일,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잡다한 일에 쫓겨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어강에 갈 시간이 없다’는 등의 이유를 붙여 어강(御講)에 참예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를 달고 참예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뭔가 사원에 참예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럴 때는 이것이 바로 마의 작용이라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시간을 잘 조절해서 어강에 꼭 참예할 수 있도록 합시다.3. 법화(法話)를 청문(聽聞)합시다
어강(御講)에서는 독경·창제 후에 법화(法話)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미혹이 많은 범부입니다. 아무리 존귀한 신앙의 체험이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머리로 불법(佛法)을 판단하게 되어 올바른 불법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항상 법화(法話)를 청문하여 신심의 자세를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대성인님께서 「어떻게 하든 이 경(經)의 마음을 아는 승(僧)에게 가까이 하여, 더욱 더 법(法)의 도리(道理)를 청문(聽聞)해서 신심(信心)의 발길을 옮길지어다.」(신편어서 p.1457)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법화(法話)를 이정표로 해서 신심의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4. 어강참예(御講參詣)의 공덕(功德)
우리들이 본존님에 대한 보은의 행사인 어강에 참예해, 법화를 청문하는 것에는 커다란 공덕이 있습니다.
석가세존은 고령의 신도가 먼 곳에서 만나러 왔을 때, 「그대가 밟고 걸어온 국토를 갈아서 티끌로 만들어, 그 티끌 하나에 일겁(一劫)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지은 죄가 소멸할 것이다. 또 그 티끌 수만큼 다시 태어나 몇 번이나 부처님을 만나실 것이다.」라고, 실로 무량무변한 공덕이 있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법화경에는 팔십억겁(八十億劫)이라는 긴 시간동안 무량한 재보(財寶)를 부처님께 공양하는 공덕보다도 법화경을 설하는 승려를 공양하고 아주 잠깐이라도 법화경의 법문(法門)을 청문하는 공덕이 실로 크다고 설해져 있습니다.5. 법통상속(法統相續)을 기원하자
‘아이의 신심을 보면, 부모의 신심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부모의 신심 모습을 보고 신심의 자세를 배웁니다.대성인님께서는 「곳간의 재(財)보다도 몸의 재(財) 뛰어나도다. 몸의 재(財)보다 마음의 재(財) 제일(第一)이니라.」(신편어서 p.1173)고 말씀하시어, 곳간의 재물이나 몸의 보배보다도 마음의 보물이 제일 값진 보물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보물인 신심의 재보를 쌓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화락(和樂)의 가정을 만들기 위해 우선 자신이 ‘가정의 태양’이 되어 자비롭고 따스한 빛으로 모든 사람을 감싸 안아야 하며, 부모와 자식, 부부라는 가족의 유대가 삼세(三世)에 걸친 숙연(宿緣)이라는 점을 알고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혹은 재가(在家)이든 출가(出家)이든 법화경(法華經)을 갖고 설(說)하는 자(者)를 일언(一言)이라도 헐뜯는 일이 있으면 그 죄(罪)가 많기를 석가불(釋迦佛)을 일겁(一劫)동안 직접(直接) 헐뜯는 죄(罪)보다도 더하다고 쓰여 있느니라.
혹(或)은 「약실(若實) 약부실(若不實)」이라고도 설해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를 생각 하건대 어떠한 경우라도 법화경(法華經)을 가진 자(者)를 서로 헐뜯지 말지어다.
그 까닭은 법화경(法華經)을 가진 자(者)는 반드시 모두 부처이며, 부처를 헐뜯는다면 죄(罪)를 받는 것이니라.
이렇게 알고서 부르는 제목(題目)의 공덕(功德)은 석존(釋尊)의 공덕(功德)과 동등(同等)하니라."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 1383쪽 미노부에서 55세에 술작"법화경(法華經)에 이르러 사미삼교(四味三敎)의 방편(方便)인 권교(權敎)·소승(小乘)·종종(種種)의 초화(草華)를 버리고 유일(唯一)한 묘법연화(妙法蓮華)를 설(說)하여 三의 화초(華草)를 열어 하나의 묘법연화(妙法蓮華)를 나타낼 때 사미(四味)·삼교(三敎)의 권인(權人)에게 초주(初住)의 연화(蓮華)를 수여(授與)하고부터 비로소 개근현원(開近顯遠)의 연화(蓮華)에 이르러 이주(二住)·삼주(三住) 내지(乃至) 십주(十住)·등각(等覺)·묘각(妙覺)의 극과(極果)의 연화(蓮華)를 득(得)하니라. (중략)
묻되, 차상(次上)에 인용(引用)하는 바의 문증(文證)·현증(現證)이 수승(殊勝)한데 어찌 신력(神力)의 일문(一文)에 집착(執着)하느뇨. 답(答)하되 이 일문(一文)은 심의(深意)가 있는 고(故)로 특히 훌륭하니라. 묻되, 그 심의(深意)는 어떠하오. 답(答)하노라, 이 문(文)은 석존(釋尊)이 본권속(本眷屬)인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에게 결요(結要)의 오자(五字)의 당체(當體)를 부촉(付囑)한다고 설(說)하신 문(文)이기 때문이니라.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가여래(釋迦如來)는 나의 옛날의 소원(所願)과 같이 지금(只今)은 이미 만족(滿足)하였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을 화도(化導)하여 모두 불도(佛道)에 들어가게 하였노라고 하여 소원(所願)은 이미 만족(滿足)했고, 여래(如來)의 멸후(滅後)·후오백세중(後五百歲中)·광선유포(廣宣流布)의 부촉(付囑)을 설(說)하기 위(爲)해서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을 불러내어 본문(本門)의 당체연화(當體蓮華)를 요(要)를 가지고 부촉(付囑)하신 문(文)이므로 석존출세(釋尊出世)의 본회(本懷)·도량소득(道場所得)의 비법(秘法)·말법(末法)의 우리들이 현당이세(現當二世)를 성취(成就)하는 당체연화(當體蓮華)의 성증(誠證)은 이 문(文)이로다. 고(故)로 말법금시(末法今時)에 있어서 여래(如來)의 사자이외(使者以外)에는 당체연화(當體蓮華)의 증문(證文)을 알고 내놓을 사람은 도시(都是) 있을 수 없느니라. 참으로 비문(秘文)이로다, 참으로 대사(大事)로다, 참으로 존귀(尊貴)하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당체의초(當體義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가여래(釋迦如來)는 나의 옛날의 소원(所願)과 같이 지금(只今)은 이미 만족(滿足)하였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을 화도(化導)하여 모두 불도(佛道)에 들어가게 하였노라고 하여 소원(所願)은 이미 만족(滿足)했고, 여래(如來)의 멸후(滅後)·후오백세중(後五百歲中)·광선유포(廣宣流布)의 부촉(付囑)을 설(說)하기 위(爲)해서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을 불러내어 본문(本門)의 당체연화(當體蓮華)를 요(要)를 가지고 부촉(付囑)하신 문(文)이므로 석존출세(釋尊出世)의 본회(本懷)·도량소득(道場所得)의 비법(秘法)·말법(末法)의 우리들이 현당이세(現當二世)를 성취(成就)하는 당체연화(當體蓮華)의 성증(誠證)은 이 문(文)이로다. 고(故)로 말법금시(末法今時)에 있어서 여래(如來)의 사자이외(使者以外)에는 당체연화(當體蓮華)의 증문(證文)을 알고 내놓을 사람은 도시(都是) 있을 수 없느니라. 참으로 비문(秘文)이로다, 참으로 대사(大事)로다, 참으로 존귀(尊貴)하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당체의초(當體義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